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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개자식에게
비르지니 데팡트 지음, 김미정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평점 :
비르지니 데팡트라는 작가를 머리에 깊이 각인시켜준 이 놀랍고 고마운 소설은 근래 읽은 최고의 책이었다.
등장인물 세 명의 진솔한 고백들이 편지 형식으로 가득히 쌓여, 프랑스 현대 사회와 문화를 풍성하게 그려준다. 뿐만 아니라 코로나와 그 이후를 사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기까지 하니, 동시대의 문화를 비교해 볼 수 있는 가치를 담고 있는 책이다.
오스카라는 작가가 파리에서 우연히 한시절 최고의 배우였던 레베카를 보고, 살이 올랐으며 옷차림에 피부까지 엉망인 그녀를 비난하는 글을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이 글을 우연히 읽은 레베카가 '친애하는 개자식에게'라고 시작하는 답글을 올리면서 둘 사이의 소통이 시작된다. 레베카는 '당신 아이들이 트럭에 깔렸는데 손도 쓰지 못한 채 무력하게 고통받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기를, 눈알이 튀어나오는 장면과 고통에 찬 비명이 매일 저녁 당신을 찾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는 신랄한 저주를 서슴없이 날린다.
다소 충격적인 레베카의 답글을 보며, 오스카는 사실 어린 시절 누나의 친구였던 레베카를 잘 알고 있고 너무나 좋아하는 그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런 글을 올렸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레베카는 차갑게 응수하며 단지 그의 누나, 코린에 대해서만 좋은 추억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오스카는 출판사 편집자인 조에 카타나가 미투 사건으로 고발하여 세간의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던 참이었다. 마침 레베카와 조에가 서로 연결되는 바람에 오스카도 (계속 이어지는 메일을 통해) 자신이 한 행동의 잘못을 객관적으로 깨닫게 된다.
이 책의 보석같은 부분은, 바로 레베카와 오스카가 서로 사적이고 내밀한 비밀까지 진솔하게 고백하면서 서서히 마음을 여는 것이다. 둘은 편지를 통해 티격태격하는 동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나누는 사이가 되며, 어느 새 서로 의지하고, 지지하고, 조언하고, 믿어주는 끈끈한 '친구'가 된다. 그리고 서로의 덕분으로 자신의 생각과과 자신의 인생을 바꾸며 새롭게 태어나는 값진 경험을 한다.
한때 모든 이들의 우상이었던 레베카. 그녀는 그동안 어떤 책에서도 만나지 못했던 가장 매력적이고 애정이 가는 인물이었다. 이 책을 읽게 되는 많은 독자들은 레베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진실하고 치열하게 사랑하고 살아내는 하나의 방법을 배우게 된다. 그녀의 솔직함과 열정적 태도와 삶을 대하는 진지한 자세는 오스카가 아닌 그 누구에게라도 따뜻한 위로와 힘이 되어줄 것이다.
실제로 잘 나가는 남성 작가인 오스카를 미투 사건으로 고발한 조에 카타나가 코로나에 걸리고 정신 병원에 입원했을 때, 먹을 것을 아파트까지 가져다주며 진실된 위로를 한 사람은 레베카였다. 레베카는 이미 마음의 친구가 된 오스카에게 돈을 뜯어내라고 조에를 충동하기까지 한다. 또한 오스카가 내밀한 고백을 이어가며 딸과의 불편한 관계, 레즈비언인 누나에 대한 연민, 자신 역시 한 남자를 사랑했던 회한을 이야기할 때, 진심을 다해 다정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를 다독이고 변화시킨다.
그리하여 사십 대 후반의 작가 오스카는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나며, 과거 행동의 잘못을 깨닫고 조에에게 사과한다. 이 모든 게 레베카와 주고받은 메일의 힘이었으니, 이토록 날것 냄새 나는, 어떤 가식도 없는 진솔함으로 사람을 대하는 그녀를 어떻게 사랑하고 존경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레베카는 세계 어디서든 예외없이이 적용되는 영화감독의 편견, 나이든 중년 여성의 슬픔을 촬영하고 싶어하는 심술궂은 권력에 시원하게 맞서 대항하며 거절한다.
"내가 이미 보여준 것과 다른 면모를 필름에 담으려는 사람들 말이에요. 적절한 다른 사람을 찾아보거나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세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아닌 다른 걸 시키려고 찾아오지 마세요."(164p)
서신의 형식을 통해 레베카가 온몸으로 보여주는 페미니즘 정신은 위대하다. 스크린에 뚱뚱한 여자, 늙은 여자, 똑똑한 여자가 금지되어 있다고 영화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하는 그녀는 어떤 교수보다도 날카로운 지혜를 전달한다. 여성의 용도는 욕망 혹은 강압의 대상이 되는 것이고 흑인의 용도는 가사 일을 하거나 춤을 추는 것이며 뚱뚱한 사람의 용도는사람을 웃기고 혁명가의 용도는 처단당하는 것, 가난한 사람의 용도는 배곯아 동정받다가 친절한 부자에게 구원받는 것이라며(235p) 우리 사회 곳곳에 심어진 힘의 관계와 부조리를 폭로하는 그녀. 레베카의 사상과 가치관을 남녀 불문하고 모두가 배웠으면 한다. 진정한 의미의 평등이란 바로 이런 비판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이 책을 널리 지인 모두에게 홍보하고 싶은 이유다.
오스카와 레베카는 NA모임이라는 약 중단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을 적극적으로 치유하는 지혜로운 현대인이다.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줌 모임으로 열리기도 하는 그 모임에, 오스카와 레베카는 둘 다 잘 알려진 작가이자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실하게 참여하며 연대감을 키우고 자신을 극복하는 힘을 키운다.
이 책은 오스카와 레베카의 입을 통해, 외로운 이들이 자신의 아픔을 치유해가며 결코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한다. 사랑에는 차별이 없으며, 인간에게 권력이란 모래알보다도 헛된 것임을 알려준다. 페미니즘은 어느 것도 구분하지 않고 나누지 않는 보편적 인권임을 가르친다
"나는 페미니즘의 집 모퉁이를 찾으러 가 보겠습니다. 그곳에서는 타인의 말이 뒤집히고 균열이 생기고 악습과 충돌이 일어날 때까지 듣는 법을 배우기를 갈망합니다. 나는 다른 이들의 존재를 받아들이려고 합니니다. 그들이 어떤 상태에 있든 말이죠. 나의 경력을 위해 그들의 약점을 이용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 그렇게 만난 이웃에게 전폭적인 애정을 줄 생각이에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도 다정히 입 맞출 생각입니다. 그게 바로 나의 페미니즘이 될 테니까요."(396P)
이 책의 마지막, 비행기 안에서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앗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오스카에게 건네는 레베카의 편지는 깊은 감동과 울림을 준다. 자신의 껍질을 벗고 새롭게 탄생하는 충만한 경험. 적이라고 생각했던 누군가에게 한없이 애정과 친밀감을 느끼게 되는 기적. 어떠한 가식도 없이 진짜의 자신을 만들어 가는 기록.
이 기적과도 같은 벅찬 감동을 모든 이에게 전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