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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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떠오른 생각은 두 가지였다.

가장 중요한 비밀을 숨기고 끝까지 독자들을 궁금하게 만드는 미스터리 대가로서의 저력, 그리고 주인공 소타와 리노가 각각의 인생 문제에 부딪쳤을 때 서로를 만나고, 함께 사건을 풀어가며 고민까지 해결해 가는 해피 엔딩의 종결.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노란 나팔꽃이라는 에도 시대부터의 역사적 소재가 있다.

과학 전문이라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역사물에 한쪽 발을 담그고, 특유의 미스터리 추적 스토리텔링으로 독자들을 끝까지 달리게 하는 이 작품은 거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사건의 전모가 밝혀진다.

독자들은 소타와 리노의 입장에서, 또 하야세 형사의 입장에서 아키야마 슈지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슈지의 정원에서 노롼 꽃을 훔쳐간 이는 누구인지, 나오토의 자살의 비밀은 무엇인지 추리를 하게 된다.

추리물의 미덕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주변의 인물들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게다가 그 결과가 독자의 예상을 보기 좋게 빗나가는 데 있다면, 이 작품은 정통 추리물의 표본이라 할 정도로 결말의 놀라움과 전개의 자연스러움이 훌륭했다.

이 작품에서 미스터리한 인물들로는 소타의 형 가모 요스케, 소타의 첫사랑 상대인 이바 다카미, 슈지의 전 직장동료 히노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밖에도 많은 인물들이 신비로운 노란 꽃을 중심으로 얽혀 있다.

가모 요스케는 경찰청의 높은 신분이면서 왜 노란 꽃의 정보를 따라 비밀리에 움직일까. 의사 집안인 이바 다카미는 왜 중2 시절 소타와의 연락을 끊었으며, 밴드 멤버로 우연히 합류했다가 다시 자취를 감추었을까. 무슨 사연으로 이름을 숨기고 밴드 일원에게 접근한 걸까. 히노는 슈지가 연구하는 꽃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듯하면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수수께끼의 분위기를 흘린다. 식물 연구원인 그는 정말 슈지의 죽음과 무관한 걸까.

촉망받는 뮤지션 나오토의 자살은 노란 꽃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와 밴드들은 어떤 의미로 맺어져 있었으며, 음악을 사랑하는 나오토와 마사야에겐 과연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왕년의 유명 가수이자 나오토 밴드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던 구도 씨의 별장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소설 초반의 충격적인 살인 사건 용의자의 고향이 바로 구도의 별장과 같은 지역, 가쓰우라 시골 마을인 것은 또 무슨 인연일까. 모든 것이 미궁에 빠진 채 독자들을 궁금하게 만든다.

정신착란과 환각 증세를 가져와서 소위 사람을 미치게만드는 노란 꽃의 씨앗이 있다는 설정. 그 설정이 에도 시대부터의 긴 역사를 걸쳐 소타의 할아버지, 다카미의 할아버지에까지 이어진다. 또한 그 후손들인 젊은이들은 진지한 사명감에, 혹은 인생의 질문에 대한 답 찾기에 하루를 보내며 쫓고 쫓기는 스토리를 만들어 나간다.

얼핏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단편적인 사건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지만 결국엔 하나의 중심으로 귀결되는 이 작품은 잘 설계되어 건축되다가 마지막에야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는 견고한 성()이다. 그 모든 떡밥들을 하나의 큰 퍼즐로 완성해가는 솜씨는 오로지 노장의 실력이다.

게다가 올림픽 수영 선수로서 지금은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리노, 그리고 원자력 전공자로서 미래의 쓸모없는 학문을 선택했다는 자조감에 빠져 길을 잃은 소타, 두 남녀는 마지막에 다시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걷기로 다짐을 한다. 사건의 해결 뿐 아니라, 두 주인공 청춘남녀의 진로 찾기마저 행복한 결말로 그려내고 있다. 또한 형사 하야세가 아들의 은인에게 보은하기 위한 목적을 결국 달성한다는 점에서도, 이 작품은 어쩌면 인생에서 잠시 방황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믿고 신념대로 인생을 살아가라는 교훈을 준다고도 볼 수 있겠다.

세상에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위의 대사는 이바 다카미와 소타가 한 번씩 내뱉는 것으로, 인생의 좌표를 찾았을 때 어떤 각오로 삶을 살아갈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의 인생을 빚 갚기의 볼모로 저당 잡힌다는 것은 요즘 젊은 세대 중에서는 극히 드문 일일 것이다.

위의 대사와 연관지어 두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과연 가업을 잇는다라는 전통이 이토록 뿌리 깊은가라는 깨달음. 또 하나는 원자력을 포기하려 하던 소타가 2030년의 원자력 폐로 문제를 걱정하며 방사능 폐지를 위한 신기술을 계속 공부하려는 결심에서- 다음엔 작가가 본격 환경 소설을 써준다면 좋겠다는 기대.

 

 

몽환화. 스스로를 망치는 자멸의 꽃. 환상의 꽃.

단순한 소재인 꽃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채로운 추리의 향연을 감상하며, 미래 세대에 대한 걱정과 희망의 목소리까지 제시한 작가의 깊은 생각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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