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칵 뒤집힌 현대 미술 - 세상을 뒤흔든 가장 혁신적인 예술 작품들
수지 호지 지음, 이지원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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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뒤흔든 가장 혁신적인 예술 작품들

영국왕립미술협회 회원이면서 미술사학자라는 수지 호지의 책들 중 <디테일로 보는 서양미술> 과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 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마로니에 북스에서 나온 미술책의 특장점인 크고 선명한 도판에 저자의 깔끔하고 명료한 서술까지, 미술에 대해 비전문가인 나같은 독자가 읽기에 참 좋은 책들이었다. 그러니 미술 중에서도 내가 가장 난감하게 느끼는 현대 미술에 대해 시대순으로 정리해주는 저자의 이 책이 반갑게 다가왔다.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사물을 보여주는 미술 작품은 어딘지 모르게 편안하다. 묘사된 대상이 사실적으로 보일 때, 우리는 작가가 기술적으로 숙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미술은 변했고, 현재 생산되는 많은 작품은 우리가 알아볼 만한 것들과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 (중략) 미술은 언제 그리고 왜 변했을까? (중략) 이런 모든 문제를 탐구하고자 이 책은 미술계를 강타하고 미술사의 경로를 바꾼 1850년대 이후 생산된 혁신적인 작품들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p. 6)-서론 中-

저자는 1850년대 이후 미술계에 혁신적인 변화들이 시작되었다고 명확한 시점을 제시한다. 마음에 든다.

두루뭉술해보일 수 있는 예술작품들에 대하여 이렇게 깔끔하게 연대정리며 사건들을 정리해주는 책은 나처럼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들이 읽기에 참 좋다. 저자는 '미술은 언제나 그것이 속한 사회의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흔히 작가는 의도적으로든 아니든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작품에 반영하고, 대개는 사소한 방식으로라도 독창적이기를 추구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p. 7)' 라고 말한다. 따라서 예술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역사적 변화들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저자가 연대순으로 시대적 주요 사건들의 연표와 함께 미술사조까지 정리해주는 이 책은 그야말로 깔끔 그 자체다.

저자는 1850년대 이후의 시기를 5챕터로 구분한다.

전통의 타파 : 1850~1909 → 전쟁의 참상 : 1910 ~ 1926 → 갈등과 퇴조 : 1927 ~ 1955 → 상업주의의 저항 : 1956 ~ 1989 → 프레임 너머로 : 1990 ~ 현재

시대적 구분만 봐도 단순히 10년이나 50년단위로 그냥 뭉퉁그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특징을 잡아서 구분했기 때문에 이 5시대 구분만 알아도 현대미술의 개력적 흐름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각 챕터의 시작에는 늘 그 시대 예술에 대한 개요 설명이 있다. 그리고 시대적 사건들에 대한 간단한 연표가 있고 미술사에 획을 그은 작품들 하나하나 그림과 함께 설명하는 사이사이 미술사조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진다. 그렇게 200여 페이지의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이 책을 읽고 나면 현대 미술의 혁신적 작품들은 어느정도는 훑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술책이 이렇게 명료할 수도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전통의 타파에는 튜브형 물감의 발명이 핵심 사건이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 휴대용 이젤의 발명까지 함께 묶어 이 두가지 발명품이 동시대에 등장했기 때문에 전통을 잇는 것이 아닌 혁신이 시작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튜브형 물감에 대해서는 미술책 좀 몇 권 읽다보면 상식처럼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간단하고 짧은 서술 속에 휴대용 이젤의 중요성까지 부각시키는 것을 보면서 역시 전문가의 책이구나 싶었다.

미술용품의 발달도 미술에 혁신을 가져왔겠지만 세계대전만큼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은 없었다. 전쟁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예술작품들이 본격적으로 전시장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21세기가 도래했을 때, 미술가들은 전보다 더 개별적으로 작업했고 미술운동은 더 명확히 정의하기 어려워졌다. 따라서 앞으로의 미술은 어쩌면 계속 '현대 미술'이라고밖에는 부를 수 없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개략적으로 현대미술을 훑어나가게 해주는 것도 좋지만 미술책의 좋은 점은 뭐니뭐니해도 그림에 대한 설명일 것이다. 현대미술에 대한 책은 다양하다. 저자의 책만해도 현대미술을 다룬 책이 이 한권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대미술을 다룬 책이라 해도 책마다 포인트가 다르다. 예를 들어, 저자의 <디테일로 보는 현대미술> 이라는 책은 제목처럼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디테일'한 분석이 돋보였다면 이 현대미술 책은 미술사적 분석이 돋보이는 책이다. 현대미술로 오기까지 혁신의 선구자였던 작품들에 대해 왜 그 작품이 '혁신적'인지 설명함으로써 현대미술의 흐름을 깨닫게 해준다.

도판을 크게 배치한 미술책들은 코팅된 종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림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는 점에선 좋지만 사실 빛이 반사되어서 눈이 아플 때도 종종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독특하게 두툼한 종이질감의 책이었다. 처음엔 좀 낯설고 아쉽기도 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빛이 반사되지 않는 종이이면서도 큰 도판을 효과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 느껴져서 이또한 좋았다.

현대미술이 어렵고 왜 봐도 알수 없는 작품들을 만드는지 이해가 안되지만 궁금하고 관심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왜 현대 미술이 발칵 뒤집힐 수 밖에 없었는지 알게 되면서 현대미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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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똑똑해지는 경제 속 비하인드 스토리 - 인류사에서 뒷이야기만큼 흥미로운 것은 없다! EBS 알똑비 시리즈 3
EBS 오디오 콘텐츠팀 지음 / EBS BOOKS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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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에서 뒷이야기만큼 흥미로운 것은 없다

<알면 똑똑해지는 비하인드 스토리> 일명 알똑비 시리즈는 EBS북스에서 나오는 스낵형 지식콘텐츠를 담고 있는 책이다.'인류사에서 뒷이야기만큼 흥미로운 것은 없다' 라는 수식어구 처럼 평범한 상식 속에 숨어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려줌으로써 지적 호기심과 재미를 동시에 충족시켜는 일종의 잡학서라고도 할 수 있다.

알똑비시리즈 중에서 이번 책은 '경제' 분야이다. 경제 중에서도 학문적 깊이 필요 없이 읽을 수 있는 상식 선에서 다룰 만한 이야기들은 아무래도 우리에게 익숙한 회사나 상품에 대한 뒷이야기들일 것이다. 따라서 기발한 창업의 비밀 - 색다른 경영의 비결 - 아주 특별한 광고의 효과 - 기업을 일으킨 인물들의 특이점 - 망해버린 제품 이야기 라는 챕터들만 봐도 이 책의 내용이 얼추 짐작은 갈 것같다.

전체 50개의 에피소드는 알려진 것도 있고 생소한 것도 있지만 스낵형 지식콘텐츠 답게 통통 튀는 발랄함으로 스윽 읽히는 이야기들이다.

지금은 너무나 성공한 기업들로 보이는 넷플릭스 나 인스타그램, 에어앤비 등이 이런저런 실패 끝에 이루어낸 성공이라는 뻔할 수도 있는 성공신화도 새롭게 읽히고 기네스 맥주의 기네스 가문이 기네스북의 그 기네스 였다는 것이나 다이소의 출발점인 100엔샵이 자포자기순간에 귀찮아서 내뱉은 말한마디에서 시작됐다는 등의 조금은 웃긴 에피소드들도 새롭게 읽힌다.

스타벅스의 사이렌오더 개발자가 한국인이었다거나 디즈니랜드의 직원이라면 파트타임 직원이든 임원이든 입사 후 반드시 디즈니대학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거나 타이레놀 독극물 사건 대처가 보여준 반전 등은 색다른 경영법으로 눈길을 끌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관심이 갔던 내용은 '편집자 없는 출판사 인키트' 였다.

나도 무척 좋아하는 슬로건인 'Just Do it' 이 사형수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거나 산타클로스의 이미지가 코카콜라 광고에서 출발했다는 등의 에피스도들은 광고의 위력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는데 앱솔루트 라는 독주의 광고가 그토록 일관적이면서도 동시에 변화무쌍했다는 점은 처음 알게 되기도 했다.

명품인줄로만 알았던 루이비통이나 프라다의 가방이 창업주의 관점에서 보면 무척 실용적인 출발이었다는 점이 신선하기도 했고 탐스 신발이나 XO노트북의 실패이야기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처럼 때로는 절실함에 공감하고 창의력에 놀라며 역발상에 감탄하고 수없는 실패를 딛고 일어선 끈기에 응원을 보내며 아무리 유명하고 잘 나갔다한들 실패하고 만 상품들의 이유를 깨닫고 나면 어느새 책한권을 호로록 다 읽었다는 사실에 작은 웃음이 난다.

또한 경제라고 하면 그닥 관심이 생기지 않지만 이렇게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고나면 사회속 경제가 한층 가깝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성공이든 실패든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싶어서 왠지모를 위안을 좀 얻게 되기도 한다.

팝콘 먹으며 코미디 영화를 볼때 낄낄거리듯 책을 보며 실실거리면서 잡지 보듯 술술 넘어가는 이 책을 읽고 나면 지식인듯 아닌듯 경제도 좀 알게 되고 자기계발인듯 아닌듯 에너지도 좀 얻게 될 것이니 가볍고 쉬우면서 재미있는 지식정보책(이라 쓰고 알쓸신잡 또는 지대넓얕 이라 읽는 책)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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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자들 3 - 사회 발견자들 3
대니얼 J. 부어스틴 지음, 이경희 옮김 / EBS BOOKS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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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끝이 없는 이야기다. 세상 전체는 여전히 아메리카와 같다.

인간 지식의 지도 위에 지금까지 쓰인 가장 기대되는 말은

'미지의 영역 terra incognita' 이다.

나는 여전히 공교육의 힘을 믿고 EBS의 질을 믿는다. 그래서인지 개인적으로 EBS BOOKS에서 나오는 책들이 좋다. 더구나 깔끔한 표지와 과장된 추천문구 하나 없는 것까지 딱 내스타일이다. 기대감에 부푼 마음으로 가볍게 시작한 책이었는데 생각보다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한자한자 빼놓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고 한문장한문장 그냥 넘길 수 없는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발견을 한 이들의 시간에는 비할바 못되는 어려움이었기에 그저 감사하고 감탄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읽어나갔다.

본 도서의 원서는 1권으로 구성되었으나 한국어판은 3권으로 나누어 출간합니다. (p. 14)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일러두기>에서 알려준 것을 보니 이 책의 원서는 상당한 두께였을 것 같다. 한국어판의 3권을 합하면 천페이지가 족히 넘는 분량이고 저자의 이력을 보니 그동안 펴낸 책들또한 대단해보였다. 저자의 내공에 시작부터 살짝 압도되는 기분이다.

이 책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위대한 발견자들이다. 지금 우리가 서양의 지식 관점에서 바라보는 세계, 즉 시간의 전망, 육지와 바다, 천체와 인체, 식물과 동물, 과거와 현재의 인간 사회와 역사 등은 무수한 콜럼버스 같은 존재들이 우리를 위해 펼쳐 놓은 것이다. 과거의 깊숙한 곳에서 그들은 여전히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그들은 역사의 빛으로 나타나, 인간의 본성만큼 다양한 인물로 등장한다. 새로운 발견은 위대한 발견자들이 우리에게 펼쳐 놓은 새로운 세계들처럼 예측할 수 없는 개개인의 일대기 속 이야기들이 된다. (p. 15) 이 책에는 발견의 필수적인 도구가 된 몇 가지 중요한 발명들, 예컨대 시계, 나침반, 망원경, 현미경, 인쇄기와 주조 활자 등에 관한 이야기만 담았다. 정부의 형성, 전쟁, 제국의 흥망성쇠 등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중략) 문화의 연대기도 싣지 않았다. 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를 인류가 알아야 할 필요성에 중점을 두었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연대순으로 이루어져 있고, 세부적으로는 서로 겹치도록 배열되어 있다. 고대에서 현대로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15부가 각각 연대순으로 앞부분과 겹친다. (p. 16) 이 책은 끝이 없는 이야기다. 세상 전체는 여전히 아메리카와 같다. 인간 지식의 지도 위에 지금까지 쓰인 가장 기대되는 말은 '미지의 영역terra incognita' 이다. (p. 17) -독자에게 전하는 글 中-

이 책은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역사책이라기 보다는 인물열전으로 읽힌다. 수많은 인물들이 나오지만 그렇다고 위인전처럼 읽히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중요했던 발견들에 집중하다 보면 그 발견을 한 인물의 이야기가 나오고 그 인물에게서 영향을 받은 다른 인물들이 나오고 그렇게 하나의 사회 이야기로 한 시대의 이야기로 읽혀지는 책이다. 따라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이 책은 끝이 없는 이야기다. 시간이 흐르고 인류가 존재하는 한 새로운 발견은 계속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술을 만들어 낸 사람은 다재다능한 그리스의 서정시인 케오스의 시모니데스(기원전 550~468?)라고 전해지고 있었다. 그는 시를 지어 최초의 대가를 받은 사람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이런 이야기는 자신의 기억술로도 유명한 키케로의 웅변술에 관한 저서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p. 24)

한 권의 책이 3권으로 나눠졌다는데 3권만 읽고 있는 나로서는 연대기순으로 쓰여진 책을 중간부터 읽게되는 기분이 들면 어쩌나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발견자들>의 1권이나 2권을 읽지않고 3권만 읽는 것임에도 전혀 끊어진 느낌 없이 자연스럽게 읽혔다. 매 주제마다 늘 과거부터 서술되는데 고대부터 거슬러 올라가다가 뒤로 갈수록 그 시대가 현대에 가까워짐으로써 시간이 왔다갔다했다기 보다는 '중첩'된 서술이 어떤 자연스러운 독해를 도와주는지 깨닫게 해주는 책이었다. 고대의 모든 지식은 구전이었다. 그 바탕에는 기억술이 중요했고 기억술은 인쇄술이 확산되면서 쇠퇴해갔다.

인쇄술이 안착되기까지는 언어의 발달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했다. 서양에서 학문적 언어로 자리잡은 것은 라틴어였다. '중세 유럽의 라틴 문화는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트(480?~543?)의 의욕과 열정과 분별력이 없었더라면 거의 번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럽의 기독교 수도 생활의 창시자인 베네딕트는 또한 도서관의 창설자이기도 했다. (p. 42)'

성 베네딕트가 중세에 필사본의 수호성인이었다면 샤를마뉴(742~814)는 속세의 필사본 후원자였다. 매우 유능한 통치자가 또한 기록에도 헌신했다는 사실은 서구 문명의 다행스러운 우연이었다. (p. 48) 샤를마뉴가 촉발시킨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는 라틴 르네상스였다. (p. 49) 샤를마뉴 제국의 다른 기념비가 허물어진 훨씬 후에도 우리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의 페이지에는 잘 만들어진 글씨의 위력이라는 생생한 유물이 남아 있다. 오늘날 로마자라고 부르는 문자는 사실 앨퀸의 알파벳이다. (p. 52)

기억술에서 인쇄술로 바로 넘어갈 것 같던 내용은 중세역사에서 필사본과 알파벳의 생성에 잠시 머문다. 그리고나서 '인쇄'라는 영역으로 넘어가는데 여기서도 바로 구텐베르크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동양과 서양에서 서로 달랐던 인쇄술의 발달과정이 설명되고 이 부분에서는 한반도의 역사도 잠시 등장한다. 다른 영역에서는 몰라도 인쇄 영역에서만큼은 한반도가 선진기술의 역사처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서야 구텐베르크를 등장시킨다. 구텐베르크에 대해서도 그가 단순히 '인쇄'라는 기술적 영역의 선구자로 소개되는 것이 아니라 뚝심있는 예술가로서의 면면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이 책은 기존에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역사적 발견들에 대해서 새로운 발견을 하게 해주는 책이었던 것이다.

뒤의 내용들도 계속 비슷한 방식으로 서술된다. 인쇄술이 나왔으니 인쇄물이 설명되어야 할테고 인쇄물은 당연히 책이지만 책을 소개하기 전에 언어의 변천을 소개하고 책의 외형적 발달을 안내한 후 서적이 어떻게 지식을 축적하게 만들었는지 설명한다. 동시에 결코 서적으로 지식을 축적하지 않았던 이슬람 역사도 들춰보고 번역과 사전편찬으로 으로 연결되면서 [지식 공동체의 확대]라는 13부가 마무리된다. 간단하게 보자면 '인쇄'라는 주제인데 그 설명을 함에 있어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역사를 훑게 하는 저자의 서술이 무척 흥미진진했다.

이어지는 14부-과거를 드러내다 와 15부-현재를 조사하다 역시 인류역사 전체를 아우르면서 동시에 간단한 하나의 주제로 집약시킬 수 있는 서술은 한 페이지도 놓칠 수 없이 꼼꼼하게 읽어나가게 만들었다. 중첩되면서도 전혀 반복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고 계속 새롭게 읽혀서 어느 한곳 그냥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14부에서 알수 있는 역사 혹은 역사학의 발달은 다른 학문들의 발달로 자연스레 이어졌고 그렇게 15부에서 다양한 학문의 영역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읽고나면 어느새 현재에 도착해 있었다.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계끼는 내 기억으로, 적어도 50여 년 전 내가 처음으로 피렌체를 방문했을 때와 처음으로 오스발트 슈펭글러와 에드워드 기번의 저서를 읽었을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5년 동안 이 책을 집필해 온 개인적인 시간은 내게 기쁨이었다. (p. 413)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학자라는 저자는 미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그가 냈던 저서들의 목록을 보면 이 책처럼 상당한 깊이가 있는 책이었음이 느껴진다. 이 책은 지금까지 읽었던 역사책들과는 또다른 깊이가 느껴지는 책이었다. 그래서인지 1983년에 나온 책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하게 읽히는 역사 이야기들이었다. 많은 역사책들이 큰 사건들과 소수의 영웅들을 다룬다. 하지만 진정한 역사의 맛은 이 책처럼 그 큰 사건이 있기까지의 발견들과 그 발견들을 발전시켜 나간 잊혀진 다수의 사람들을 아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역사의 새로운 면을 배우게 되는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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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마지막 서점
매들린 마틴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서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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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은 런던의 마지막 서점이

세상에 보내는 희망과 치유의 메시지

책을 좋아하다 보면 서점까지 좋아지고 그러다보면 북카페라던가 북캠프같은 것에도 관심이 생기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책이 있는 공간은 로망어린 공간일뿐, 어렸을 땐 만화방 주인이 꿈이었다가 지금은 서점 주인이 꿈이라해도 꿈은 꿈일 뿐 현실이 되기엔 너무나 멀고먼 것이기에 서점이야기를 책으로 읽는 것으로라도 위안삼고는 한다. 더구나 내가 좋아하는 도시 중 하나인 런던의 그것도 마지막 서점이라니, 어떤 이야기일지 몽글몽글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소설 초반에 '여기에 더해 어깨에 걸친 방독면 상자까지 챙기느라 자세도 엉거주춤했다. 그 무시무시한 물건들은 정부 방침에 따라 혹시 일어날지 모를 가스 공작에 대비해 어디를 가든 챙겨야 했다. (p. 10)' 라는 문장에서 문득 <라스트 세션>이라는 연극이 떠올랐다. 2차세계대전 중 런던에서 프로이트와 루이스가 만났다는 가정에 따른 연극이었는데 그때 젊은 청년이었던 루이스의 허리춤에 방독면 가방이 달려 있었다. 연극을 볼땐 그닥 중요한 소품이라고 생각지 않았었는데 같은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으며 같은 소품을 만나고 보니 깨알재미가 다시 느껴지는 듯 했다. 여하튼 본격적으로 소설에 들어가보자.

시작은 1939년 8월의 영국 런던에서다. 2차대전의 포화가 런던을 덮치기 직전인 이 시기에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런던으로 상경한 두 아가씨가 있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런던의 화려함을 동경하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설레임에 한껏 부푼 마음을 안고 패딩턴역에 내려섰던 두 아가씨 비브와 그레이스.

"6개월 동안 일을 하고 적절한 추천서를 받을 만한 곳이 하나 있기는 해" (p. 24)

"서점이야"

그레이스는 찌르르하게 올라오는 실망감을 애써 감추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책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p. 28)

그레이스 엄마의 절친이었던 웨더포드아주머니집에서 하숙을 하게 된 비브와 그레이스. 비브는 헤롯백화점에 점원으로 바로 취직을 했고 추천서가 없었던 그레이스는 웨더포드아주머니의 소개로 서점직원으로 취직을 한다. 6개월만 일하고 추천서를 받게 되면 바로 비브가 일하는 헤롯으로 옮길 작정이었다. 하지만 런던은 예전의 런던이 아니었고 전쟁은 모든 상황을 변화시켰다.

런던은 그들이 예상한 만큼 보석은 아니었다. 스크림 테이프와 두려움이 뒤섞여, 머지않아 일어날 전쟁의 영향 때문인지 생기 넘치던 그레이스도 금세 주눅이 들고 말았다. 그녀의 반짝이던 얼굴은 모래주머니로 만든 벽 뒤로 숨어 버렸고 영혼도 대피소와 참호를 찾는 데 여념이 없었다. (p. 37)

하지만 그레이스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프림로즈 힐 이라는 서점에서의 경험과 서점 주인 에번스 씨와의 인연은 런던이나 전쟁보다 더 그레이스의 삶을 변화시켜 놓게 된다. 특히 서점에서 만난 조지에 의해.

"성함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레이스 베넷이에요"

"저는 조지 앤더슨 입니다. 서점을 어떻게 만들지 기대하고 있을게요" (p. 56)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추천서를 얻을 수만 있다면 서점을 개선하겠다는 당신의 의지에 도움을 주고 싶어요"

"책에 대해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어떻게 광고할지 결정하려구요"

"오, 독자의 마음 속으로 다가가고 싶어 하시는 군요, 아주 훌륭해요"

"독서의 가장 좋은 점이 뭐예요?" (p. 101)

그레이스는 주어진 상황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일단은 좋은 추천서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서점직원이 되고자 했다. 한창 고민중을때 만난 조지는 그레이스에게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선물했고 그레이스는 서점 운영과 책에 대해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그는 그렇게 빨리 소집 명령이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원하고 이틀 만에 그 소식을 듣고 말았다. 조지 앤더슨은 데이트를 취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많은 유감을 표했고, 가게를 개선시키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해했다. (p. 121)

"나 영국 여성 국방군에 지원할까 해" (p. 134)

"저는 제 의무를 다할 거예요, 엄마. 국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고요" (p. 138)

전쟁은 점점더 성큼성큼 가까이오고 있었다. 조지는 공군으로 소집됐고 비브는 여성군에 자원했으며 웨더포드아줌마의 아들인 콜린도 징집됐다. 많은 사람들이 군대에 모여들고 있었고 그들을 떠나보낸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초조속에 런던에 남아 있었다. 그레이스는 비브가 함께 가자는 제안에 고민되기도 했지만 '나는 자네가 서점에서 여태까지 해 준 일에 감사하고 있네. 그래서 여기에서 계속 일할지 여부를 고려해 주었으면 해 (p. 180)' 라는 에번스씨의 제안에 런던에 남기로 마음을 굳힌다. 처음엔 불툭대기만 했던 에번스씨가 붙잡지 않았더라도 서점에 남고 싶은 마음이 이미 커졌던 때였다. 책들을 읽으며 책이 보여주는 세상에 푸욱 빠져있던 때였다. 하지만 전쟁터에 직접 나가지 않았다고 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이 평화롭고 안전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전쟁 중이야, 베넷 양. 자네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고. 그래, 이런 혼돈의 상황에서 카페는 약탈당할 수 있어. 하지만 불에 타 버리지는 않았잖아. 자네가 세상을 구할 수는 없어. 그래도 자네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은 계속해 나가게." (p. 229)

밤이면 밤마다 독일폭격기들이 런던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고 수많은 건물이 불탔다. 때로는 무너진 상점이 약탈되기도 했고 적군국적의 이웃이 공격당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폭탄이 휩쓸고 간 자리는 너무나 참혹했다. 야간공습감시원으로 봉사하면서 그레이스는 험한 장면을 너무나 많이 목격해야 했다. 그때마다 에번스씨는 훌륭한 조언을 해주곤 했다. 그자신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인, 사라져가는 책을 구해오고 지켜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럼 계속 읽어요"

그레이스가 주저했다.

"그러니까... 읽어 달라는 말씀이신가요?"

패링턴 역의 플랫폼에 있던 모든 이들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레이스를 바라보았다. (p. 268)

여느날처럼 공습을 피해 지하철역에 모여있던 때 그레이스는 책을 읽었다. 옆사람이 무엇을 읽고 있냐고 묻기에 대강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뒷내용은 아직 읽지않아서 모르겠다고 말하자 사람들은 그레이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뒤로 공습이 있을 때마다 그레이스는 사람들에게 책을 낭독해주기 시작한다.

거룩한 자들이 축복을 내리던 거리에는 지옥이 내려왔다. 화염 속에서 숨이 막힐 듯한 연기 기둥이 뿜어져 나왔고 타 버린 책의 낱장들은 잔해가 어지러이 널린 거리 위에 흩어졌는데, 그 모습이 마치 뜯겨 나간 날개에서 떨어진 깃털 같았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대화재로 거리는 빨갛게 번쩍거렸지만 그래도 몇몇 건물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남아 있었다. 건물 주인들이 지붕 위에 화재 감시인을 두고 있던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서점에는 불이 붙기를 기다리는 불쏘시개처럼 마른 책들이 가득했다. (p. 362)

"제발 낭독회를 그만두지 말아주세요. 이곳은 런던에 마지막으로 남은 서점이에요" (p. 432)

전쟁은 갈수록 격화되고 런던은 갈수록 폐허가 되고 있었다. 서점또한 폭탄을 피해갈 수는 없었으며 사람들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폐허속의 서점은 어떻게 될까? 그레이스의 삶은 어떻게 될까? 소중한 사람들은 돌아올 수 있을까? 그 처절한 전쟁과 그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희망에 대한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면 사과 나무 한그루를 심겠다는 말은 공감되지 않을지라도 내일 전쟁이 일어날지라도 책읽기는 멈추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엔 공감하게 될 것이다.

ps. 런던을 배경으로 영국작가가 쓴 소설이라서인지 소설의 곳곳에서 런던에 대한 자부심과 런던시민에 대한 자긍심이 과하게 넘쳐나는 것이 간혹 부담스러울때도 있지만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평소와 다른 공동체 감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으로 넘기며 읽으면 이 책은 런던에 대한 새로운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소설이 될수도 있을 듯 싶다. 여하튼, 런던을 사랑하고 서점을 사랑하고 책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즐겁게 읽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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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자리
고민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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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에서 1로 변모하는 과정은 설레면서 우울하다.

곧 1이 되겠지만 아직은 아니므로 0에 가까운 자신을 체감하게 된다.

첫 출근 날에는 0.0000001쯤 되는 기분이었다."

예전에 천문대에서 진행하는 1박2일 캠프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5월 언젠가였던거 같은데... 망원경을 보며 처음으로 하늘을 가까이 보고 있다는 설레임이 지금도 기억난다. 별자리를 보던때는 당연히 밤인데다 산중턱이었으므로 꽤 쌀쌀했음에도 별자리를 설명하던 강사가 그런 말을 했었다. 별은 추운 계절에 훨씬 잘 보인다고, 여름이 되어갈수록 수증기가 하늘에 많아져서 별이 잘 안 보인다고... 그때 생각했었다. 여름이라는 계절은 강렬한 햇빛때문에도 하늘을 바라보지 못하지만 밤에 별도 잘 못보는 계절이었구나... 이 소설을 읽으며 그때 그 여름의 수증기가 생각났다. 책속의 계절이 여름이기도 했지만, 별을 아무리 찾아도 가리고 감춰버린다는 하늘의 그 여름수증기처럼 이 소설은 뿌연 안개속을 걷고 있는 느낌으로 읽게 되는 소설이라서... 너무나 뿌옇고 뿌옇고 뿌얘서 영이 무엇인지 영의 자리가 어디인지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건지 온통 뿌얘서 아무것도 명확하게 보이질 않았다.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게을렀던 건 아니다. 남들만큼은 노력했다고 믿었는데 부족했던 걸까. 더 노력한다고 달라지기는 할까.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들이 더 하찮아 보였다. 평소와 다른 선택을 하게 되는 건 그런 순간일 것이다. 달라질 거라고 믿거나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거나. 나는 후자였다. (p. 12)

'나'는 얼마전 실직을 했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보냈으나 생각보다 취업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살던 원룸에서 집주인이 나가달라고 해서 급하게 이사를 하느라 연락도 잘 안하는 본가에 손을 벌려야 했다. '넌더리가 났다. (p. 12)' 그래서 한 약국에서 모집하는 전산원 알바 자리 면접에 나갔다. 그어떤 학력이나 이력이나 나이나 성별이나 아무조건도 따지지 않는 단순업무 알바 자리에.

-유령이 또 왔네.

-네?

-유령이라고.

-유, 뭐요?

-몇 번을 말해.

약사가 나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유령이라니까. (p. 19)

-유령이 뭔데요?

-유령이 유령이지 뭐겠어.

-핼러윈에 사탕 받는 유령이요?

-그건 유령으로 분장한 사람이고

-진짜 유령이요?

-그렇다니까.

-제가요?

-원래 유령은 자기가 유령인지 몰라.

-유령은 죽은 사람이잖아요. 저는 살아 있는데요.

-산 사람도 유령이 될 수 있어. (p. 20)

약사는 대뜸 '나'를 유령이라고 한다. '나'는 별다른 의구심을 갖지 않고 그냥 그런가보다 한다. 소설에서 내내 이 '유령'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소설을 다 읽고나서도 이 '유령'이 뭔지 나는 알수 없었다. 취준생 이라던가 백수 라던가 경력단절 이라던가 사회부적응자 라던가 여하튼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아직 젊다면 젊은 30대의 나이에 모아놓은 것이 없거나 혹은 빚에 허덕이며 알바나 소소한 일회성 일자리들로 근근이 살아가는 존재, 그러니까 사회의 중심에서 튕겨나왔으나 그 언저리를 떠돌고 있는 존재를 '유령'이라고 칭한것 같긴 한데 희미한 짐작일뿐이다.

해를 정면으로 볼 때처럼 이마가 간질간질 했다. 광반사 재채기 증후군이라는 이름을 알기 전까지는 내가 과민하다고 생각했었다. 어떤 증세에 이름이 붙었다는 건 유의미한 통계가 생겼다는 뜻이다. 나 혼자만의 경험이 아니고 드문 일도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혜가 가르쳐준 건 그런 것들이었다. 나는 숨 쉬는 법부터 다시 배운 기분이 들었다. 혜를 만나기 전에는 아마 물고기였을지도 모른다. 이별이 진행되는 지금 도로 물고기가 되어버렸는지도. 할 말이 목구멍 안에 고인 채 빠져나오지 못했다. 재채기를 하기 전에 그만 고개를 숙였다. (p. 57)

'나'와 혜는 이별한 것 같다. 하지만 어떤 관계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약국에는 김약사 말고 '나'보다 먼저 들어온 조가 있다. 조 역시 유령이다. 조 역시 누군가와 이별중인것 같다.

최저 임금으로는 미래를 꿈꾸기 어려웠다. 아직 서른이라고 해도 살아내는 당사자에게는 인생의 끝자락이다. 상상력이 고갈되었는지 막다른 길 너머를 그려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벌써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아직과 벌써 사이에는 넓은 해협이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바다에서 홀로 헤매는 기분이 들 때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달고나 먹을래요?

조는 요즘 매일같이 토토를 했다. (p. 92)

새로운 취향을 만드는 데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조는 노력이 유발하는 피로를 감당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나도 요즘 무거운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지난 몇 해를 훨씬 바쁘게 살았는데 그때보다 더 지치는 기분이었다. 일을 배우느르 그렇다는 핑계도 슬슬 약효가 떨어지고 있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좋을지 생각하는 일조차 피곤했다. 그나마 무엇이라도 되었으니, 유령이기는 하지만, 다행인 걸까. (p. 97)

'나'는 시간이 나면 SNS를 둘러보며 시간을 때운다. 조는 그런 '나'를 보며 자신은 그런 걸 잘 모른다고 유투브나 가끔 본다며 나이들수록 익숙한 것만 찾게 된다고 말한다. 아직과 벌써 사이에는 얼마나 넓은 해협이 있는 걸까, 누군가에게는 해협이 아니라 그저 졸졸졸 흐르는 작은 시냇물 같을 수도 있을까. 상상력이 고갈되고 무엇을 해도 피곤한 상태 일종의 번아웃 상태가 유령인 걸까. 유령이 된 것도 무엇이 되긴 된 것일까. '나'는 유령이 된 것을 즐기고 있는 걸까.

혜를 집에 데려다준 뒤로 단단한 기둥 같았던 사람이 연약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부식된 면이 바스러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자리에 머물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자리를 옮겨 앉는 순간 어긋난 틀을 메우지 못한 채 자꾸 벌어지기만 했다. 관계가 허물어지는 소리는 짧은 알림음과 긴 적요의 반복이었다. 매일 주고받던 메시지가 점차 길을 잃었다. 나는 짐이 되지 않는 기쁨과 짐이 될 수 없는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p. 130)

'나'에게 혜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주기적으로 네일아트를 바꾸고 패셔너블한 차림을 하면서 자신을 가꾸고 영화나 전시회등을 꾸준히 관람함으로써 취향을 가꾸고 정치뉴스와 커뮤니티 활동에 열성적으로 댓을 달거나 모임에 나가는 등 삶의 모든 면에 주도적인 사람으로 늘 '나'에게 깨우침과 깨달음을 주는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날 만취한 혜를 집에 데려다주면서 '나'는 보았다. '현관에 재활용 쓰레기가 아무렇게 쌓여 있었고 주위에 양념이 묻은 플라스틱 그릇이 흩어져 있었다. 바닥에는 벗어놓은 스타킹이 머리카락 뭉치와 뒤엉켜 있었다. 쓰러져 있는 빈 술병에도 먼지가 앉았다. 싱크대에 시퍼렇게 곰팡이가 슨 귤이 보였다. 개수대 거름망에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 차 있었다. 화장대 위에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화장품이 수십 개 늘어서 있었다. 몇 개는 뚜껑을 열어놓아 내용물이 말라붙었다. (중략) 나는 현관으로 돌아가 발에 묻은 먼지 덩어리를 비벼서 떨어뜨리고 신발을 신었다. 문을 닫자 도어록 잠기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p. 129)'

어머니는 아버지와 다투고 나면 꼭 나에게 와서 하소연했다. 한때는 어머니와 같은 나라의 주민이라고 생각했다. 귀담아듣고 연민했으며 언젠가 상황이 나아지리라 믿었다. 몇 년쯤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들은 뒤에야 어머니에게 딸이란 약국에서 구입하기 쉬운 약과 같다는 걸 알았다. 수시로 복용해도 병세의 원인이 다른 데 있었기에 차도는 없었다. 그저 진통제에 불과했던 약의 역할을 거부했더니 어머니의 한탄은 비난응로 바뀌었다. 나는 점차 침묵을 모국어처럼 사용했다. (p. 135)

참 이상스러우면서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세상엔 행복한 가족이 별로 없다는 거다. 소설을 읽으면 크고 작은 문제로 가족은 늘 껄끄러운 관계이고 뉴스를 보면 크고 작은 문제로 가족은 늘 폭력적인 관계다. 그런데 가족이란 단어가 풍기는 느낌은 가족이란 단어에 대해 배울때의 기억은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러고보니 어쩌면 자라는동안은 너무 이상적으로만 배워서 어른이 되어 현실에 내팽개쳐졌을때 그토록 많이들 유령이 되는 것일까...

이제까지 쌓아온 것들을 전부 무너뜨린 경험이 나에게도 있었다. 숨 쉬는 법을 모르던 물고기는 숨 쉬는 법을 잊은 물고기가 되었다. 바다는 여전히 푸르고 거대했다. 끝났다거나, 실패했다거나, 돌이킬 수 없다는 말보다는 유령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나았다. (p. 146)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숨을 쉰다. 사람은 들숨날숨으로 숨을 쉬고 물고기는 아가미로 숨을 쉰다. 하지만 들숨날숨만 숨을 쉬는 거라고 말할 수 있다면 물고기는 애초에 숨을 쉬는 법을 모르는 거다. 하지만 살아 있고 들숨날숨으로 숨을 쉬지 않아도 살아 있음으로 들숨날숨으로 숨쉬는 법을 잊어도 살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유령이 되었다. 유령은 숨을 쉬지 않는데...'나'는 살아 있는데... 살아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유령이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나았다는 것일까...

아픔에 대한 공감은 고통을 나누어 받는 일이다. 처음에는 감당할 만하지만 점차 가슴에 파랗게 멍이 든다. 나는 진통제를 복용하듯이 덕질을 했다. 아이돌, 배우, 유투버, 캐릭터 상품 등등 좋아하는 감정에 한 발이라도 걸치면 전부 덕질의 계끼가 되었다. 돈이 들기는 했지만, 원래 사원이 있던 시절부터 치료에는 대가가 필요했다. (p. 173)

엄마는 딸이 듣거나말거나 하소연하는 것이 진통제가 되었다면 딸은 덕질에 돈을 쓰는 것이 진통제가 되었다. 하지만 진통제는 먹을수록 내성이 생긴다. 효과가 없어지면 더 쎄게 먹어야 한다. 그렇게 진통제를 늘려나가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그래서 '나'는 유령이 되었다는 것일까...

스물다섯 해보다 지난 다섯 해를 더 치열하게 살았다. 나는 성실하게 하루를 파쇄해갔다. 무언가는 변하고, 무언가는 변하지 않은 채 그렇게 구부러져 0이 되었다. (p. 198)

0이 된 것이 유령이 되었다는 것일까...

조에 비해 내가 겪는 비극은 흔하디흔하고 산개되어 있었다. 하나씩 짚어 말하면 평범한 일상으로 보인다는 점이 비극이었다. 차라리 혜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편했을지 모른다. 나는 달라졌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여다. 서른이라는 섬에 얼마나 지쳐서 도달했던가. 유령이 되는 건 외로움에 대한 저항이 실패하는 과정이었다. (p. 218)

'나'는 몇달만에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달라졌는데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이 그대로' 라는 것을. 그래서 그 모든 그대로인 것들에게로 돌아가기로 했다. 갑자기. 약국을 그만두고 취업을 했으며 덕질을 시작하고 커뮤니티에 공지된 집회에 나갔다. 외로움에 대한 저항에 실패하여 유령이 되기를 이제 거절한 것으로 보이는 '나'의 모습과 '유령이 되는 건 외로움에 대한 저항이 실패하는 과정'이라는 말이 상치되어 이제 어느정도 '유령'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내머릿속은 또다시 뒤죽박죽이 되었다.

강의가 끝나면 뿔뿔이 흩어져 다시 만나지 않겠지만 비슷한 취향을 공유하는 동안은 더없이 가깝게 느껴질 이들이었다. 강의가 끝나면 또 무언가를 배워보고 싶었다. (p. 241)

불분명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나로서는 소설을 읽는 내내 어떻게든 줄거리를 정리해보려고 유령이 무엇인지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며 읽은 소설이었다. 하지만 이름도 직업도 커뮤니티의 활동과 혜와의 관계등 '나'의 삶은 온통 희뿌연 안개에 가려져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결국 0이 무엇인지 유령이 무엇인지 그래서 영의 자리가 어디인지 나는 결국 찾지 못한채 마지막 페이지를 덮어야 했다.

아직 1이 되지 못한 세상의 모든 0에게 바치는 조용한 응원, 고민실 첫 장편소설 『영의 자리』 한국문학의 새로운 발견, 고민실 첫 장편소설! 이라는 책소개와 “세상은 유령이 살기에 더 적합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덤덤하고 세밀하게 일상을 관조하는 유령의 글쓰기 라는 출판사 서평을 통해 이 책은 내가 설명할 수 없는 미학적 소설로 평가될 수도 있겠구나 라고 생각한다. 그렇게보면 그럴수도 있겠구나, 다들 그렇게들 살고 있으니 너무 아등바등하지 말라는 응원의 글이 될수도 있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뿌연 안개속을 걷는 사람들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안개속을 걷는 사람들이 많아요 라고 알려주는 이 소설이 그렇게 유령의 글로 위안을 줄수도 있겠구나 싶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함께 안개속을 걷는 것보다 안개를 걷어낼 뚜렷한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좀더 구체적인 응원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이 더 취향저격인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0과 1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삶에 대한 관조또한 필요하다고도 생각한다. 그 관조의 시선에서 이 소설과 비슷한 관점에서든 다른 관점에서든 0의 자리와 1의 자리에 대해 늘 생각해보게 될 것 같다. 나는 0과 1사이 어디쯤일까... 0.0000001 쯤은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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