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다의 유까딴 견문록 - 마야문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
디에고 데 란다 지음, 송영복 편역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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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훌륭한 책입니다. 마야문명에 대해 관심있다면 이 책으로 시작해야 하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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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다의 유까딴 견문록 - 마야문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
디에고 데 란다 지음, 송영복 편역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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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초기 시대 유럽의 시각으로 바라본

'마야문명'에 대한 최초의 기록

역사를 좋아해서 이런저런 역사책을 자주 읽는 편이지만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역사서들은 대개 서양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세계사책을 읽더라도 중심은 분명 서양 그 중에서도 유럽사이기 마련이고 그 유럽사와 아주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슬람사조차도 등한시되기 마련인데 그 유럽 열강들이 침략하고 정복했던 지역이라 그 죄를 숨기고 싶은 지역일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 대한 역사는 그야말로 드물고 드물어 희귀하고 희소한 그런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제대로 모르니 멀게만 느껴지고 돌고돌아 풍월로만 접하니 신비하게조차 느껴지는 그런 역사인 마야문명에 대해 국내연구자가 낸 책이 있다니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서양인들이 파괴하고 없애버려서 그들의 역사조차도 침략자의 글줄로밖에 남지 않았기에 더더욱 그 배경과 속뜻을 알아가며 읽어야 할 역사이니만큼 전문가의 세심한 주의와 정확한 정보가 갖추어진 책은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 초기인 16세기에 디에고 데 란다는 에스빠냐 신부 자격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가 마야 원주민들에게 선교 사업을 펼쳤다. 이 책은 그가 마야문명 정복의 역사와 주변의 지리, 원주민들의 문화, 생활, 환경 등을 상세히 다룬 기록이다. 이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중남미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로 꼽힌다. (p. 8) 이 책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이유는 희소성이다. 상대적으로 아즈텍이라고 불리는 메시까와 남아메리카의 잉까문명에는 많은 사료와 기록이 남았다. 반면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식민지 초기 종합적인 1차 사료는 여기에 소개하는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이 유일하다. 그렇기에 마야문명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 책을 가장 먼저 찾게 된다. (p. 9) 마야 원주민을 탄압한 장본인의 책이 고대 마야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란다의 종교적인 강경함과 원주민에 대한 시각이 책의 전반을 통하여 강조와 왜곡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저술 내용을 곧이곧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조 알아두어야 한다. (p. 12) -머리말 중-

<란다의 유까딴 견문록> 은 마야문명을 파괴한 스페인정복자들 중 마야문명 대부분의 자료를 불태우고 수많은 원주민들을 종교재판으로 죽여없앤 란다신부가 남긴 기록이다. 파괴자의 기록을 바탕으로 역추적 해야 하는 마야문명에 대해 파괴자의 주관적 해석을 지워가며 읽어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그러니 더더욱 이 책의 가치가 빛난다 할 것이다.

불행히도 디에고 데 란다가 쓴 원본은 현재까지 남아 있지 않다. 본 한국어 번역본의 저본은 초간본을 읽고 요약하여 복사한 것이다. 이것마저 1616년의 필사본만이 전해지고 있다. 초간본의 제목은 'Relacion de las Cosas de Yucatan'으로 이를 직역하면 '유까딴 문물에 관한 보고서' 혹은 '유까딴 문물에 대한 이야기' 정도가 된다. 한국어본의 저본이자 현재 전해지는 요약본의 제목은 '산 프란씨스꼬 교파 소속의 디에고 데 란다 신부가 쓴 유까딴 문물에 관한 보고서의 발췌본'으로 이 책이 발췌본 혹은 요약본이라는 사실이 제목에 명시되었다. 초간본은 그 중요성으로 인하여 식민지 시대 여러 사료에 언급되었다. 이 책은 (중략) 현재는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불행 중 다행히도 (중략) 최초 저술의 요약 필사본이 (중략) 발견되었고, 1864년 대중에게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중략) 본 한국어본은 1959년 앙헬 마리아 가리바이에 의하여 멕시코에서 출간된 가리바이본을 기초로 번역되었다. (p. 13) -머리말 중-

원본이 있는 과거의 역사책은 그 저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중요하고 원본이 아닌 번역본으로 읽는 만큼 어느 판본을 기초로 했는지도 중요하기 마련이다. 이 책은 머리말부터 신뢰감을 탄탄히 심어주는 책이었다.

사실, 마야문명 이라는 단어가 낯설지까진 않더라도 잉카문명이나 아즈텍문명과 딱딱 구분짓지 못하는 나로서는 마야문명에 대한 첫 책으로 이 책을 만난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머리말에 이어 [이런저런 일러두기] 에서 저자는 이 책의 원본과 번역, 주석 그리고 용어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인다. 이 책에 대한 저자의 노력이 엿보여 한층 더 감사한 마음으로 읽게 되는 책이었다.

이 책은 400여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사실 50~100페이지 정도의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52개의 챕터 본문은 두어페이지 남짓으로 A4지로 치면 한장 안팎 정도가 될 듯한 분량이기 때문이다. 본문은 짧지만 주석의 양이 엄청나다. 본문의 반 정도 되는 깨알같은 주석이 본문 페이지 보다 분량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저자가 이 책의 원본에 대한 해석에 있어 왜곡이 되지 않게끔 상당히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세심한 저자의 노력 덕분에, 그동안 나도 모르게 서양인의 시선으로 알고 있던 사실들을 많이 고쳐낼 수 있었다.

식인 풍습에 대한 내용은 16세기 이곳 원주민들을 정복한 서양 사람들에 의하여 부풀려지고 강조되었다. 식인과 인신공양 풍습은 원주민들의 야만성과 잔인성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정복을 합리화하기 위한 논리로 이용되었다. 서양 사람들에 의하여 아먄적 행위이 대명사로 손가락질받던 인신공양은 인간의 피를 신에게 바침으로써 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그들의 독특한 종교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마야의 종교가 만들어낸 하나의 성스러운 의식이며, 실제로 마야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많은 종교가 많건 적건 간에 인명의 희생을 요구해다는 점을 인류의 역사를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간에 인산공양의 전통은 서양 사람들이 원주민들을 야만인으로 몰아가는 가장 큰 구실이 되었고, 큰 의미에서 보면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야만인으로 몰아세우는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마녀를 화형에 처하는 행위나 로마 시대의 죄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행위도 일종의 종교적 인신공양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구체적인 타당성은 일단 접어두고서 종교적인 이유로 인간이 신체를 희생시키는 행위라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일부 사료에서는 마야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구속하기 위하여 인신공양의 횟수나 정도를 부풀려서 원시성과 잔인성을 부각하기도 하였다. (p. 50)

가장 중요한 사료라고 불리는 란다신부의 기록은 곳곳에서 왜곡과 혐오가 넘쳐난다. 따라서 '그 당시 다른 사제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원주민들의 잔인성과 야만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정복과 선교를 정당화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또한 이러한 생각에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말을 사실인 양 혹은 자신이 직접 본 것인 양 무분별하게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p. 55)' 라는 내용과 비슷한 내용의 주석 또한 곳곳에서 읽혀진다. 마야문명에서 인신공양이 없었다고는 할수 없지만 그렇다고 수시로 무분별하고도 흔하게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보기엔 수천년간 이어온 의식에서 인신공양에 희생된 사람보다 스페인 사람들의 정복시절 군인과 선교사들에게 희생된 원주민들의 수가 훨씬 많을 것 같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그 희생또한 인신공양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누가 더 많은 목숨을 종교앞에 바쳤는가를 기준으로 했을때 월등히 서양인들이 앞서고 그러니 누가 더 야만적이고 잔인한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바뀌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지.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공용어는 에스빠냐어다. 그러나 마야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마야문명의 후손들이 사용하는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300여 년간의 식민 지배와 이후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에스빠냐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이곳 국가들에서 마야어를 듣는 일이 드물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원주민 언어를 그대로 쓰는 것은 비단 작은 시골 마을에 살면서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다. 멕시코의 마야 지역과 과테말라, 벨리세의 내륙지역 등지에서는 읍내의 장터와 대도시의 공원에서 만나는 상당수 하층민이 대부분 일상 속에서 그들의 모태어인 마야어를 사용한다. 마야어를 쓰는 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통계치를 구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고, 공식적인 수치에 큰 신뢰를 갖기도 힘들지만 대략 많게는 육백만명에서 적게는 이백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아직도 유럽 침략 이전 마야인들이 사용했던 마야어에서 조금 변화된 형태의 마야어를 사용하고 있다. (p. 73)

남미의 고대 문명들은 죄다 사라졌다고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욱 신비스러운 문명으로 알려져 있는게 아닐까 싶다. 마치 환상의 아틀랜티스섬 처럼. 하지만 남미의 고대문명들은 실존했던 역사였고 그 역사는 사람들이 살아남은 한 끊어졌다고 할 수 없는 거였다. 마야어가 사라진 줄 알았는데 토착어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다니... 결국 역사연구와 언어연구 또한 인기와 비인기 혹은 주류와 비주류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돈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역사와 언어에는 학자들이 굳이 심도있게 연구하지 않아온 게 아닐까. 서양역사와 연결지어진 부분이나 그들 역사에 없던 고대의 시간들에 대한 호기심 약간 이거나 서양역사를 뒷받침하기 위한 자료정도로만 연구해온 것이 아닐까. 그래놓고 사라진 문명이니 야만적 문명이니 폄하해온 것이 아닐까.

구대륙의 병원균에 대한 면역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던 원주민들에게 유럽인들과의 접촉은 엄청난 재앙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수치가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어쩔 수 없이 죽었다는 점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용되기도 한다. 유럽인이 최초로 정복한 카리브해의 섬들에는 현재까지 원주민이 남아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쿠바, 자메이카, 아이티, 트리니다드, 토바고 같은 나라들이 바로 여기 해당되는데, 전염병도 원인이었지만, 초기 에스빠냐 정복자들의 살인과 학대, 무차별적인 노동 착취 역시 원인이었다. 전염병이 있기도 전에 상당수 원주민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따라서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인들과 함께 들어온 전염병을 가장 중요한 원주민 사망 원인으로 볼 수 있으나 모든 책임을 전염병으로만 돌리는 해석에는 무리가 있다. 여기에는 유럽인들이 식민지 건설의 잔호감을 다소 완화하려는 기재가 다분하다고도 볼 수 있다. (p. 104)

아메리카 대륙에 살던 원주민 몰살은 유럽인이 방문함으로써 함께 간 병원균들 때문이라고 전염병 때문이라고 알려진 것은 역사적 상식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니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병에 걸려 죽기 전에 군인의 칼에 신부의 종교재판에 농장의 노동 착취에 이미 많은 목숨들이 죽어나가고 있었는데 그 희생들을 전염병으로 면피해왔던 것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란다는 유까딴의 실세를 쥐고 있던 몬떼호뿐만 아니라 그의 일가친척과도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몬떼호를 언급할 때는 항상 긍정적인 부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저술의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p. 111)

16세기가 면죄부가 판을 치고, 종교개혁을 부르짖던 시대였음을 생각해보자. 특히 에스빠냐는 이러한 종교개혁을 거부하고 가톨릭을 끝까지 고집했던 몇 안 되는 유럽국가 가운데 하나였다. 한편 원주민 선교를 우선순위로 둔 가톨릭 사제들은 선교를 거부하거나 비협조적인 원주민들에게 형벌을 가하고 죽이는 등의 처벌이 극히 당연하 처사라는 입장이었다. 실제로 식민지 체제가 안정되면서부터 많은 원주민이 종교재판으로 처형되었다. 란다는 그 책임의 한가운데 있었다. (p. 147)

저자인 란다가 이 글을 쓴 목적이 여러 가지가 있음을 이미 옮긴이의 머리말에서 밝힌 바 있다. 특히 이 부분은 유까딴에 있는 선교사들이 어려운 상황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에스빠냐의 정부와 왕, 기독교 전파를 위하여 일을 잘하고 있다는 것을 에스빠냐의 왕과 고위 관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작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란다는 본인에게 불리한 이야기나 그가 저지른 비인간적인 행위 등을 생략하거나 미화시켜서 이 글을 기록하였다. (p. 155)

이 책의 원제에 '보고서'라는 단어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가?! 역자가 설명해주기도 했지만, 란다는 유까딴에 대한 기록을 순수한 문명관찰서로 남긴 것이 아니었다. 란다의 선교활동에 이어지는 잔혹한 종교재판들로 인해 스페인 본국으로 송환되어 참석해야 할 만큼 내부고발적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 재판에서 본인의 활동에 대한 논리적 증거로 제시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었다. 그리고 란다는 그 재판에서 승리하여 당당히 유까딴으로 되돌아왔다.

란다는 원주민들의 종교와 문화를 가장 극단적으로 탄압한 사람이다. 실제로 그가 여러 지역에서 종교재판을 열어 원주민들을 우상숭배의 죄목으로 죽이고, 원주민 종교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모든 조각품과 그림, 책 등을 불살라버린 사실을 여러 사료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마니와 소뚜따, 과테말라 등에서 집행한 종교재판의 잔혹함은 매우 악명 높다. (p. 338)

나는 성경을 읽은 적이 없어 소돔에 대한 에피소드를 잘 모르지만 선교사들에게 소돔은 최대의 무기인것 같다. '란다는 자신처럼 원주민들을 강경하게 응징하지 않았다면 소돔에 빠지게 되었을 것이라는 그의 신념을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합리화하였다. (중략) 란다가 이 책을 집필한 가장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가 원주민들에 대한 탄압으로 고발을 당하자 이를 소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생각하면 그가 원주민들을 강경하게 처벌한 것을 합리화하려고 이러한 내용의 성격구절을 강조한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p. 288)' 란다는 수완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권력층과 친하게 지내며 자신의 행위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유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선교사들이 다 란다같지는 않았을 텐데... 하필 그때 그시절에 그곳에 란다가 선교사로 가게 된 것이 참 안타깝기 그지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란다의 기록을 통해 그 역사를 알아가야 한다니 더더욱 안타깝기 그지없다... 종교를 중시하더라도 과거역사에 대한 가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란다가 그리스나 로마에서 선교했다면 우상들이라며 자신들 조상의 조각이나 그림, 책들도 모두 불살라버렸을까...

그러니 너, 주님의 사제여, 악마를 섬기는 한심한 제사장들이 하는 짓을 똑똑히 보았느냐, (중략) 만일 네가 여기서 잘못된 점을 발견하였다면 그것을 바로잡아야 하며, 스스로가 지고한 주님의 사제라는 것을 자각하여야 한다. 사제의 의무를 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는 인간보다 더한 천사의 깨끗함으로 청렴하고 신중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p. 363)

잔혹한 란다는 스스로에게 신의 목소리로 당부한다. 그렇게 자신의 삶이 천사의 삶보다 더 훌륭하다며 자부심과 긍지를 뿜뿜 드러낸다. 읽을수록 기가차지만 역자의 상세한 설명덕분에 그나마 객관적으로 이해해가며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책을 내주신 역자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인디오들이 에스빠냐 사람들로부터 모욕과 학대를 받고 괴롭힘당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엄청난 실수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디오들이 서로를 끊임없이 죽이고 노예로 만들며, 악마들에게 인신공양 하는 것은 더욱 모진 모욕과 학대이기 때문이다. (중략)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당신의 몫으로 신에게 청하여 나의 소박한 봉사를 받아 주어 그러한 잘못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또한 그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을 비호하는 것에 그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기억해 주십시오. (p. 424)

끝까지 란다는 너무나 당당했으며 이 책의 집필의도를 관철시켰다.

하지만 란다도 흘리듯 적어놓았다. 자신들이 오기전에도 유까딴 사람들은 잘 살고 있었노라고.

에스빠냐 사람들이 이 땅을 차지하기 전 원주민들은 (여러)마을에 함께 모여 살았다. 행정이 원활하게 이루어졌고, 땅은 깨끗했으며, 잡목들이 잘 관리되어 있었고, 좋은 나무도 많이 심겨 있었다. (p. 135)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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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공부 - 우리가 평생 풀지 못한 마음의 숙제 EBS CLASS ⓔ
최광현 지음 / EBS BOOKS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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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타인,

가족의 숲을 지나 나를 사랑하는 마음의 여정

"상처는 혼자 자라지 않는다"

아무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한

세상 모든 가족을 위한 마음 수업

최광현 저자의 책을 좋아한다. <가족의 두 얼굴> <가족의 발견> <나는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를 읽었었는데 다른 심리서들처럼 두루뭉술하지 않고 정확한 문제점을 짚어 주면서 동시에 내 잘못이 아니라고 확 내 편을 들어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멀쩡해 보이는 집이라고 해도 세상에 알고 보면 사연 하나 없는 집 없다고 하지 않는가. 행복한 가정이라고 늘 행복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불행한 가족이라고 늘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게 인생이고 삶이지만 간혹 너무 큰 상처를 입었을 때는 도움이 필요하다. 최광현 저자의 책은 그런 도움 중 하나로 무척 유용하다.

놀랍게도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큰 상처는 대부분 가족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얼핏 생각하면 상처는 가족 바깥에서 벌어질 것 같지만 의외로 상처가 처음 태어나는 근원지가 바로 가족인 것입니다. (p. 8) 우리 가족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설령 우리 가족은 완벽하고 아무 문제없다고 한다면 사실 그게 더 염려스럽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끝없는 갈등과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끝없는 문제가 오더라도 그것을 해결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p. 17)

세상에 공부할게 참 많은데... 가족도 공부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것처럼 여겨지는 가족이지만 어차피 나 말고는 모두 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나'와 같을 수는 없다. 내 마음은 '나'만 잘 안다. 아니, 내 마음을 '나'도 잘 몰라서 더 문제인 시대이기도 하다;;;

이 책은 총 3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대해, 부부 사이에 대해, 세대 갈등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이면서도 일상에서 접하는 왠만한 관계갈등 문제를 두루 포함하고 있어서 편안하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읽기 좋은 책이었다.

부모와 자녀사이의 갈등에 대해서는 부모의 성장배경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상처가 유전자보다 강하게 대물림된다고 표현한다. 그 대물림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나에게 부모의 어떤 상처가 이어졌는지 살펴 봐야 한다. 모녀 지간이 친구일 수도 있지만 중독사이가 될 수도 있고 부자 지간이 서먹함을 넘어 위해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 가족관계에서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끝없는 삼각관계를 돌아가면서 괴로워질 수도 있고 그러다 독립하지 못한 관계는 서로에게 상처가 될 뿐이다. 저자는 부모와 갈등관계가 심각해 졌을 때일수록 '나'를 '내'가 지켜줄 것을 강조한다.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관대함이 무엇보다 나에게 필요하다고, 나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족에게 상처받은 모든 사람이 마음을 치유할 수 있는 첫걸음이라고. (p. 126)' 말한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과는 다르다. 그동안 돌보지 못한 '나'를 돌아보는 것이 가족문제에서 벗어나는 첫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일뿐.

부부에 대해 저자는 '나와 가장 닮은 타인' 이라고 표현한다. 부부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 같지만 실상은 여섯 사람이 얼키고 설킨 관계다. 양가의 부모님에게서 각자 어떤 상처를 물려 받았고 양가의 부모님이 서로의 부부지간에 어떤 갈등을 겪고 있는 지에 따라 현재의 '내'옆에 있는 배우자 와의 사이가 크게 달라지곤 한다. 내 옆에 있는 이가 '벽'이 될지 '문'이 될지 또한 '내'가 그 갈등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내가 존중하지 않았는데, 내가 힘들 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줄 사람은 없다. (p. 178)' 라고 저자는 말한다. 역지사지에는 새치기를 하는게 더 좋을 것 같다.

세대 갈등에 대해서는 현재의 20대 젊은 층을 이해할 수 있는 말들을 많이 해주고 있다. 각 세대별로 각자의 성장하던 사회적 배경이 달랐다. 지금의 20대는 그 어느때보다 '불안감'을 많이 느끼는 세대라고 한다. 풍요롭게 자란 세대라고 폄하하면 그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다. 세대간의 갈등 또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므로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왜 그토록 불안에 떠는지 그 아픔을 공감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부모와 자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에 도사린 긴장과 갈등을 풀 수 잇는 유일한 해결책은 서로의 세계를 인정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음 세대의 시간이 건네는 목소리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p. 258)' 라고 저자는 말한다. 젊은 세대를 공감하기에 앞서 간섭이 아닌 순수한 호기심을 가져보아야 할 것 같다.

상처받은 사람은 내면의 옷장이 쏟아진 것입니다. 아무리 지난 시간을 잊고 오늘을 살다가도 예기치 않은 상처가 찾아오면 마음 깊이 쌓아놓은 옷장이 갑자기 쓰러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급한 마음에 옷장을 일으키고 흩어진 옷가지를 대충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문을 닫아버립니다. 겉으로 보면 괜찮아 보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옷장 안에 그대로 뒤엉켜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대충 집어넣었던 옷장의 옷들이 떠오릅니다. 다시 문을 열고 하나하나 꺼내 버릴 것은 버리고 갤 것은 개면서 정리하고 싶지만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 중에서 내면에 뒤얽힌 감정의 찌꺼기를 정리하고 문을 닫는 '직면'이 가장 힘든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결국 어지러운 옷장을 외면한 채 또 다른 내일을 살아갑니다. 어린 시절 겪은 상처는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내면에 쏟아진 옷장을 대충 묻어두고 외면하지 말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상처와 마주보아야 합니다. 문을 닫아건 과거의 상처와 만나고 치유하고 회복하는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핵심은 내게 상처를 주었던 가족이나 주변 사람을 용서고 화해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상처받은 '나' 자신을 존중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가해자에게 분노와 원망을 쏟아내는 게 아니라 무기력하게 상처를 떠안을 수밖에 없던 나약한 자기 자신을 보둠어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수치스러워 하지 않고, 따뜻한 손을 내미는 순간 비로소 진정한 화해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p. 263~264)

내 마음의 옷장 상태는 어떤지 가만히 들여다 보자. 왠만큼 혼자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참 다행이다. 하지만 엄두가 안 난다면, 할 수는 있겠는데 버거워서 미루게만 된다면 정리 도우미를 불러보자.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더라도 좀더 자~알 해보고 싶다면 정리 도우미를 가볍게 부르자. 저자의 조언이 기꺼이 도우미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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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아니라 몸이다 -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몸의 지식력
사이먼 로버츠 지음, 조은경 옮김 / 소소의책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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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몸의 지식력

지능이나 지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뇌라던가 생각이라던가 여하튼 유형의 머리속 무형의 어떤 능력을 연결짓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일상에서 때때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 라든가 몸이 기억하고 있다 라는 식의 표현을 하기도 한다. 생각과 몸은 다른 능력인가? 어쩌다 하나의 신체에서 이렇게 따로따로 능력이 구분되었나? 그러다 또 어쩌다 하나의 능력에만 꽂혀서 AI로 까지 이어지게 되었나? 그렇게 인간의 뇌가 AI로 대체될 수 있나? 이 책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얻게 되는 체화된 지식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몸이 지능을 형성하고 보유하는 데 어떻게 중요한지, 오로지 정신에서 지능이 비롯되고 정신 안에만 존재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견해를 철학자, 신경과학자, 인지과학자, 로봇 연구가, 인공지능 전문가 들이 어떤 식으로 발전시키고 구체화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체화된 지식은 신체 그 자체가 지식을 습득, 보유하고 사용할 수 있다는 관점을 견지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가 알게 될 때 몸은 단순히 뇌를 감싸는 도구가 아니라 지성의 근원이라는 생각을 이해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p. 15) -서문 중-

지성이라고 했을때 우리는 대부분 뇌의 능력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뇌 뿐만 아니라 몸도 그러한 능력이 있음을 주장한다. '인공지능AI에 열광하는 요즘의 흐름은 알고리즘을 돌리는 수많은 서버가 인간의 지성을 재현하거나, 심지어 능가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반영하고 있다. (p. 21)'며 지능이 오롯이 뇌에 있다는 생각에 대해 비판을 시사한다. 또한 '이제는 지식 습득에서 몸이 하는 역할을 무시하는 풍조를 멈추고 뇌와 몸이 어떻게 결합되어 우리가 인간의 지능으로 간주하는 것을 만들어내는지 탐색해볼 시간이다. (p. 21)' 라며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몸의 지식에 대해 강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THE POWER OF NOT THINKING '생각하지 않는 것의 힘'이 되었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뇌의 능력을 무시하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동안 뇌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시되어 왔던 몸의 능력에 대해 이제 다시금 집중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말해보는 것이다. AI시대가 될수록 더욱더 몸에, 인간의 신체능력에.

참고로, 이 책의 서문은 굉장히 상세한 편인데 책을 다 읽고 나니 [서문]의 내용이 다~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이라기 보다 거의 본문 요약에 가깝다. 그러니 본문을 읽으며 좀 이해가 어려웠다 싶은 사람은 서문을 다시한번 정독하는 것이 이 책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싶다.

17세기 유럽에서 우주와 천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말할 때는 기계론적 사고에 입각한 설명이 압도적이었다. 우주가 작동하고 행성이 이동하는 것을 기계론적 원칙에 따라 설명한 것이다. (p. 34) 이 당시의 해부학적·철학적 사고에 의하면 타고난 몸도 외부의 힘에 지시를 받아서 움직인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는 정신을 관장하는 영혼이 있기 때문에 작동한다. 즉 영혼이 몸에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중략) 데카르트는 인간을 구성하는 두 가지의 '본질'을 구분했다. 먼저 비물질적으로 사고하는 능동적인 영혼 또는 정신이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물질적이고 사고하지 않는 수동적인 몸이 있다. (p. 35) 이 시각에서 데카르트는 과학이 데이터 수집과 분석의 과정이라는 입장을 정립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과학적 방법은 18세기 유럽 사회를 왕성한 과학적·정치적·철학적 담론의 시대로 이끈 계몽주의의 핵심이다. (중략) 이성의 시대는 지식을 취득하는 수단이 정신임을 확실히 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몸을 단순히 가볍게 여기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양하고자 한다. (중략) 데카르트의 정신-몸 이원론이 중요성을 띠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단순히 소수만 이해하는 17세기의 개념에 그치지 않았다.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데에 정신과 몸이 작동하는 각기 다른 역할에 대한 데카르트의 시각은 지속적인 유산을 남겼다. (p. 40) 우리는 뇌를 신성시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p. 41) 빅데이터의 출현과 분석은 경험에 의거해 세상을 바라보기보다는 객관적 시선에 의지하는 과학적 실행의 또다른 사례다. 빅데이터 분석은 정신과 몸을 구분하는 데 근거한 지능공학이다. (p. 53)

과학이 발전해온 방향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관점이었다. 신앙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넘어오고 그렇게 계몽된 인간이 발달시켜온 철학과 과학에 있어서 지금의 AI로 귀결되기까지 데카르트의 철학이 그토록 큰 영향을 끼쳐왔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몸을 천시하고 수동적으로 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시 신앙적 사고관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던 것도 같은데 그러한 시각이 인간의 다른 능력보다도 뇌의 능력에 천착하게 했고 그렇게 다른 그 어떤 인공적 능력보다 AI가 먼저 태동하게 된 것이라니.. 그렇다면 이성의 시대에 접어들었을 때 인간의 다른 능력에 초집중하게 됐었다면 AI가 아닌 다른 4차산업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었겠구나... 신선한대?!

서구의 주류 교육은 사고의 자동화와 뇌를 컴퓨터에 비유하는 개념을 영속화 시키는 정신-몸 이원론에 사로잡혀 있다. 아이들은 시각, 소리, 촉감, 냄새, 그리고 맛과 같은 감각으로 세상을 이해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런 감각은 교육과정이 진행될수록 더욱더 경시되고 있다. 실용적 지식보다 학문이 우월하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서구의 교육체계를 암묵적으로 지배해왔다. (p. 63)

우리네 교육 또한 서구의 교육체계를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므로 정신-몸 이원론에서 우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어렸을 적에야 오감교육이니 뭐니 하지만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체험학습들마저 박물관에 전시관에 이어지게 되고 그러다 입시를 앞두게 되면 체육시간은 고작 일주일에 한 타임뿐이게 된다. 수명은 길어지는데 우리의 몸은 점점 약해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요즘 아이들이 체격은 커졌지만 체력은 나빠졌다고 하지 않나. 그렇게 뇌만 잘 돌아가면 뭐하나? 몸이 안 움직인다면!

데카르트가 남긴 유명한 격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정신을 가장 중요시했다면, 메를로 퐁티는 간결하게, '나에게는 몸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알 수 있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몸은 메를로 퐁티의 인식과 지식 이론에 핵심을 차지한다. 메를로 퐁티는 이전 시대를 지배했던 고차원적 형태의 논리적 지능이 정신에 위치한다는 아이디어를 따라가지 않고 우리의 사고는 몸에 의지하고 몸의 안내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p. 71)

저자는 이성의 시대를 열었던 데카르트에 맞서 메를리 퐁티를 내세우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렇게 총3부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2부와 3부는 그 새로운 관점을 설득시키는 내용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설득은 아주 완벽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신체적 경험'을 몸의 지식으로서 강조하지만 그러한 경험치 또한 데이터로서 뇌에 쌓이기 마련이고 그렇게 뇌의 판단은 여전히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 '경험'을 강조할 수록 그게 결국 '데이터'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경험치보다는 무의식적 신체반응에 대해 좀더 증거들을 탄탄히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의 감각을 중요시하는 내용들을 읽다보니, 로봇과 AI로 점쳐지는 미래에 대해 의외로 인간의 신체적 능력이 더 중요할 수 있겠구나 라는 깨달음을 준 것은 중요한 포인트 였다.

가장 심오한 사실은 인간의 체화 작업이 우리가 어떻게 이처럼 의미로 가득한 세상을 만들어내고 이해하는가의 핵심에 자리한다는 것이다. 기계와 인공지능이 세상을 영원히 바꿀 것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인간의 체화 능력이 우리의 지능을 복제하기 힘들게 만든다는 데 위안을 얻어야 한다. 몸을 무시하기보다는 기뻐하고 축하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초능력이니 마음껏 즐기고 기뻐하자. (p. 294)

AI는 인간의 뇌보다 우월하다. 더 빨리 더 정확히 계산하고 판단한다. 하지만 행복이나 만족, 사랑 같은 감정이나 수없는 연습 끝에 머릿속에서 순서를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알아서 수영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춤을 추는 신체화된 능력은 로봇이나 인공지능이 어떻게 따라할 수 없는 분야이다. 그러니 인공적 뇌가 발달할수록 인간은 이러한 감정적 신체적 능력을 가진것만으로도 초능력을 가졌다고 여겨지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몸뚱아리 하나 가진 인간이 우월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것은 아니다. 지능과 지식이 대세인 시대에 뇌의 능력은 가장 우월한 능력임에는 분명하다. 다만 뇌의 능력만이 다가 아니라는 위안을 찾고 아무리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의 뇌말고 인간의 신체를 똑같이 구현해내는 일은 어렵다는 점에서 자존감을 챙겨볼수도 있지 않나 라고 말해보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을 소개하며 '비즈니스 영역에서 거의 20년간 일했지만 나는 여전히 스스로를 인류학자라고 생각한다. (p. 295)' 라고 표현한다. 이 문장에서야 아차차 싶어서 책날개에 있는 저자약력을 다시 읽어 보았다. '선도적인 비즈니스 인류학자' 라... 나도 모르게 '인류학자'에 방점을 찍고 이 책을 읽은 건데 사실 이 책은 저자의 '비즈니스' 경험에 더 영향을 받은 책이었다. 그러니 썩 그럴듯한 저자의 주장에 빠져들다가도 갸웃하게 되고 학문적인가 싶다가도 갸웃하게 되어서 결국 저자의 주장은 하나의 의견으로 참고하게 될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뇌와 몸의 역할에 대한 통념에 맞선 저자의 의견은 꽤 근사했다. 우리는 모두 평범한 인간이지만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평범한 초능력자'가 될 수 있다. 인공지능이 발달할수록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몸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할지도 모르겠다. 머리가 아니라 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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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열쇠 - 역사에서 지워진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
브라이언 무라레스쿠 지음, 박중서 옮김, 한동일 감수 / 흐름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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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지워진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

원제 THE IMMORTALITY KEY : THE SECRET HISTORY OF THE RELIGION WITH NO NAME 는 '불멸의 열쇠: 이름 없는 종교의 비밀 역사' 로 번역된다. 책의 제목이 원제에 충실하다는 점에서부터 마음에 든 책이었다. 700여 페이지가 넘는 벽돌책이었지만 의외로 술술 읽히는 책이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다만, 두괄식 서술에 익숙한 독자라면 아마 나보다 더 쉽게 이해해가며 읽을 것 같은데, 나는 종합적 결론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새록새록 등장하는 자료들을 처음 주제에 매번 연결시켜야 하는 것이 살짝 어려웠다는 점을 미리 말해둔다.

저자의 직업은 변호사이지만 (비록 전문교수는 아니라 할지라도)고전학자이기도 하다. 이 방대하고 엄청난 책은 라틴어,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등의 고대어부터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까지 독해가 가능한 저자였기에 나올 수 있는 책이었다. 이 탁월한 언어적 능력만으로도 왠만한 대학강단의 고전학 교수는 명함도 못내밀 능력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 책의 감수를 맡은 분이 한동일 님이다. 신뢰도 면에서도 만족스러운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독실한 로마가톨릭 가정에서 자랐고 현재의 종교도 가톨릭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책은 가톨릭에 정면으로 맞서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는 한 번도 환각제를 경험한 적이 없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주제는 환각제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저자가 자신의 주관적 요소를 떠나 최대한 객관적으로 무엇보다 학문적으로 탐구한 과정을 이 책이 담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존스홉킨스 연구진이 발표한 [신의 알약]이라는 기사였고, 1954년 올더스 헉슬리가 발표한 <지각의 문>이라는 책은 과거에서의 미래를 알아챌 수 있게 했으며, 1978년에 출간된 <엘레우시스로 가는 길 : 신비제의 비밀을 파헤치다> 라는 책은 직접적인 지도가 되어 주었다. 이 책의 주제를 두괄식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서양문명의 근원이자 세계 최대 종교인 그리스도교의 출발에 고대부터 내려오는 환각제를 통한 비의(秘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교 공인 이후 여성과 약물탄압의 배경에 대해서 차근차근 밝혀내고 있기도 하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나는 역사에서 가장 잘 지켜진 비밀의 바닥까지 한 번에 확실히 도달하기 위해 그리스, 독일,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서양 문명과 그리스도교의 탄생에 환각의 신비가 필수적이었다면 그 증거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햇빛을 거의 못 보는 귀중한 유물들을 지키는 정부 장관, 큐레이터, 기록 보관원 들과 나란히 앉아보았다. 또 우리 선조들의 의례적 약물 사용에 대한 신선한 증거를 발굴해 최첨단 장비로 분석하는 현장 및 실험실의 발굴자, 고고식물학자, 고고화학자 들을 갖가지 질문으로 괴롭혀 보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고전학자, 역사학자, 성서학자 들과 시간을 넘나들며 여행해보았다. 이 조사를 통해 나는 지금으로부터 12년 전만 해도 예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결론에 다다랐다. 그리스와 그리도교 신비제의 핵심에는 환각 성분 맥주와 포도주가 있었다는 증거뿐 아니라 종교 당국이 이를 억압했다는 증거도 있었다. (P. 61)

종교가 생겨나기 이전의 시대에도 종교는 있었다. 우리가 이름붙이지 않았다해서 그것이 종교가 아닐 수는 없었다. 저자는 '이름 없는 종교'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이름 없는 종교'에서 지금의 종교들이 탄생했음을 과학적으로 하나하나 밝혀나간다. 저자는 엘레우시스로 향하는 길에서 더 과거의 괴페클리 테페로 올라갔다가 중세의 마녀로 내려오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져온 그 '이름 없는 종교'를 추적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환영과 환각과 기적은 수시로 출몰한다. 하지만 그 환영과 환각과 기적은 굉장히 과학적이었다. 갈래는 크게 두 갈래길이 있었다. 맥주와 포도주. 그리고 그 환각성 맥주와 환각성 포도주를 만든 것은 여성이었다.

여성과 약물.

이 두 가지는 2,000년 동안 교회 입장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그리하여 내가 지금 지하 묘지에서 목격한 것처럼 양쪽 모두 신앙의 기원에서 몰상식하게 지워지고 말았다. (P. 481)

디오니소스와 예수가 그 경험을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려 했지만 그 전통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 위에서는 그리스 관료들이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스 신비주의자는 자신들이 속한 '죽은 자의 도시'에 남아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종교의 원래 여사제들이 당한 것처럼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는 그런 사람들이 전혀 존재한 적 없었던 척할 수 있었다. (P. 510)

이 방대하고 오묘한 책은 탄탄한 추적과정과 과학적 증거들을 담고 있으면서 너무나 새로운 내용들이기에 평소 습관대로 포스트잇을 붙이고 정리하려던 나의 목표는 이뤄질 수 없었다. 포스트잇을 붙인 곳이 너무 많아서 도저히 내용 정리를 할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 그저 이 책을 직접 읽어봐야 한다고 강력하게 추천할 따름이다. 아주아주 간단히 정리하자면 '환각제가 서양 문명을 건립한 계몽으로 가는 지름길인데, 처음에는 엘레우시스 신비제에서 그러했고, 나중에는 디오니소스 신비제에서 그러했다. 또한 초기 그리도교는 이 전통을 고대 그리스인에게서 물려받아 중세와 르네상스의 마녀에게 물려주었다. 바티칸은 그리스도교인에게서 지복직관을 빼앗기 위해 본래 환각성 성만찬을 반복적으로 억압했는데 처음에는 유럽에서 그러했고, 나중에는 가톨릭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를 식민지화하면서 세계 전역에서 그러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전 지구적인 음모론이었다. (P. 583~584)' 라고 할 수 있겠다. 고대의 맥주와 포도주는 지금 우리가 아는 그런 맥주와 포도주가 아니었다. 약초에 대한 지식은 네안데르탈인때도 있었고 오히려 거대종교 탄생이후 사라져온 셈이었다. 환각제가 주는 무아지경은 개개인에게 직접적인 영적 경험을 주었고 거대종교는 자신들의 필요성을 위협하는 이 직관적 방법을 원치 않았다. (내가 직접 신을 경험할 수 있다면 신을 대리하는 종교인들이 과연 필요할까?) 그리스도교는 비의에 힘을 입어 짧은 시간내에 확산될 수 있었으나 자리를 잡자마자 이 '이름 없는 종교'와의 전쟁을 해왔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신비제가 돌아왔다. 존스홉킨스 환각제 연구진의 '실로시빈' 연구를 통해.

농업이 먼저가 아니라 종교가 먼저일 수 있다는 논리를 증명시키는 중인 쾨페클리 테페에서

어떻게 그렇게 짧시간 융성한 문화발달을 이루었는지 신기한 고대그리스의 신전에서

고대 페니키아와 포카이아인들의 발자취가 남은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캄파냐 유적에서

예수가 탄생한 마을과 그가 행한 기적들과 바오로의 편지글이 담긴 성경에서

익숙하다고 여겼던 신화와 유물과 유적에서 채 지워지지 않은 흔적들이 우리에게 비밀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비밀은 놀라웠고 이 책은 그 비밀의 문을 열어젖히는 열쇠를 건네준다.

궁금하다면 어서 이 열쇠를 받아들고 책을 펼쳐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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