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해링 베이식 아트 2.0
알렉산드라 콜로사 지음, 김율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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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예술가이자 활동가 키스 해링(1958~1990)

KEITH HARING 이라는 작가 이름은 생소했다. 하지만 단순한 구성의 표지그림부터 왠지 친숙했다. 어디선가 언젠가 본듯한 그림체...

마로니에 출판사에서 나오는 베이식 아트 시리즈는 작가 한 명에 집중하여 삶과 예술을 안내한다. 무엇보다 선명한 도판의 그림들을 큰 크기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림도 보고 예술가도 소개받을 수 있는데 그 그림이 마음에 든다면? 책을 펼쳐볼 수밖에. ㅎㅎ

"해링의 예술에 익숙해지는' 단계는 간단했다. 그것은 해링의 작품 중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해링은 주변에서 본 것들을 모사하고 통합했으며, 당대의 민감한 쟁점에 대한 확고한 직관으로 미국 사화를 관찰했다. 왜냐하면 해링은 생산자인 동시에, 특정 세대 특정 생활방식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P. 7)

1958년에 태어나 서른 남짓한 짧은 생을 살다간 이 예술가가 이렇게 한 권의 책에 담겨 지금도 읽힌다는 것은 그가 그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남긴 것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자유가 넘쳐나고 다양한 표현방식이 움트던 70~80년대의 분위기를 그대로 투영한 듯안 그의 단순한 디자인의 그림과 메세지는 지금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책을 펼쳐 몇몇 그림을 보자마자 어느 팬시 점에선가 어느 티셔츠에선가 본듯한 그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1980년 겨울에 해링은 다시 거리로 나섰다. 그는 전통적인 미술 기관으로부터는 이렇다 할 동기부여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술 활동을 위해 다시 한번 도시 환경을 선택했다. 해링은 마커팬만을 이용해 광고 포스터를 바꾸기 시작했고, 낙서화가들과 같은 방식으로 그의 고유한 태그를 작품에 남겼다. 이 태그들은 화가의 서명을 연상시키는 약어를 표방함으로써 작가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P. 20)

해링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단순화된 아기와 개의 그림을 보면 아하~! 하게 될 것이다.

진정성은 해링 작품의 기본적 특징이다. 뚜렷하고 쉽게 이해되는 형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개인적인 것에서부터 일반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삶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담고 있다. 의도적인 단색 배경의 사용, 연속성을 지닌 빠르고 유연한 선,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단순한 이야기 등은 즉각적인 효과와 함께 작품의 고유한 특성이 된다. 이런 이유들로 해링 작품의 형상들은 하나의 도상이 되었다. (P. 35)

해링의 그림은 보자마자 왠지 친숙한 뭔지 알것 같은 단순함이 특징이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책의 뒤로 갈수록 단순함이 반복되어 복잡해진 그림들을 보다 보면 그리고 그 단순한 그림들을 통해 작가가 표현한 메시지를 생각해보면 그의 예술세계가 결코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면 복잡해보이는 그림조차 단순하게 느껴지게하는 해링의 그림은 '모든 사람을 위한 미술이 바로 내 작업의 지향점이다. (P. 42)' 라는 작가의 마인드를 보여주는 듯했다. 키스 해링은 미술이 소수의 사람들만 즐기는 엘리트적인 활동이 아니라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작업했다. 그랬기에 키스 해링은 자신의 작품을 상품화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 결과 우리는 여전히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달리 그의 작품을 다양한 상품으로 소비하며 살수 있게 된 것이다.

해링의 작품에서보이는 밝음 뒤에는 위험이 숨어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작품이 무어보다도 명랑하고 활기차며 낙천적인 주제와 연관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실제로 해링의 주제는 명랑하고 활기차며 낙천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정반대의 것이다. 근심과 고통 없는 자유와 분명히 드러난 유쾌함은 무자비한 현실과 결합되곤 했다. 많은 작품이 폭력, 위협, 죽음, 성에 대한 중압감과 관련되었다. (P. 57)

해링의 작품은 당대의 사회부조리를 표현하는데도 거침이 없었다. 게다가 동성애자였던 그가 생애말년에 에이즈에 걸리면서 내적 갈등은 더욱 어두운 주제에 집중되었던 것도 같다. 그래서인지 캔버스를 싫어해서 비닐 방수포라던가 광고판이라던가 여하튼 캔버스가 아닌 것에 주로 그림을 그리던 그가 생애 후반에 캔버스에 작품을 남기고 좀더 회화적인 됐다는 점은 의미심장해보였다.

여하튼 해링의 작품은 활동 초기부터 대중적 인기를 얻었기에 서른 남짓의 짧은 생애를 살았음에도 그의 '생전에 해링은 자신의 이름으로 된 재단을 설립했으며, (중략) 어린이 자선을 위한 특별 후원과 에이즈와 싸우기 위한 조직'을 만들 수 있었다. '재단의 예술적인 목표는 더 많은 대중에게 키스 해링, 예술가, 한 남자를 널리 알리기 위한 전시회와 다른 기획들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P. 87)' 덕분에 여전히 우리는 그의 작품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사망하기 얼마 전, 그는 자신의 전기 작가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당신은 절망할 수 없습니다. 절망한다면 그것은 포기이고, 당신은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병과 함께 사는 것은 인생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시각을 제공합니다. 나는 삶을 감사하기 위헌 어떠한 죽음의 위협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삶에 감사해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항상 당신이 삶을 충만하게, 그리고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완전하게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당신을 향해 오고 있는 미래를 맞이할 것입니다" (P. 90)

키스 해링이 전기 작가에게 말한 것인지 자기 자신에게 말한 것인지 주체가 불분명한 저 문장은 여하튼간에 키스 해링이 죽기전까지 삶에 대한 긍정성을 유지했다는 점을 보여주는 듯 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어두운 주제를 표현하면서도 첫인상은 귀엽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키스 해링의 작품들을 온전히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왠지 어렵지 않게 다가오는 그의 그림들은 인상적이었고 우연히 마주치게 될때마다 반가울 것 같다.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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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백석 외 지음 / 북카라반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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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가슴에 평생 간직하고픈 시들을 필사할 수 있는 시집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는 백석,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고 노래한 박인환, “시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머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는 김영랑,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이라는 윤동주 등

우리가 사랑하는 시인들의 주옥같은 시 83편에 대한 필사의 향연을 제공

-출판사의 책 소개글 中-

백석, 박인환, 김영랑, 김소월, 정지용, 한용운, 윤동주

요즘 교과서에서도 이 시인들의 시를 배우는 지 모르겠지만, 시집을 읽어본 적 없던 내게 교과서에서나마 만났던 이 시인들의 시가 나는 무척 좋았더랬다. 그래서 몇몇 시집을 읽어본 적도 있는데 오히려 교과서 밖 현대시들은 내게 더 난해하게 다가와서 여전히 내게 가장 어려운 문학 분야는 '시' 이다.

예전 시를 읽으면 그 사용하는 구어들 때문인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옛 시절의 향취가 느껴지는 듯 했다. 김소월의 시가 영어로 번역되면 그 참맛을 전달하지 못하리라 그래서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없는 것이리라 생각하며 한글 특유의 운율에 새삼 혼자 경탄하기도 했다.

모던하고 깔끔한 편집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예전엔 시화집이라고 시와 그림을 함께 볼 수 있는 책이나 엽서, 전시회들이 있었다. 그런 시화집들에 시와 함께 있는 배경 그림들은 종종 편지지가 되어 나오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요새도 편지지를 파는지 모르겠다. 이메일과 메신저가 자연스러워진 시대에 예쁜 엽서와 편지지가 오히려 낯설어졌을 수도...

이 책은 그런 옛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책이었다.

한편엔 시가 한편엔 예쁜 편지지 같은 여백이 조금은 촌스럽다 싶은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예전 시화집과 편지지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아련한 반가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나는 글씨가 영 못난이라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예쁜 글씨를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에 필사 혹은 자신만의 감상을 적었을 때 이 책이 더이상 시집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고유한 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혹은 지인에게 선물용으로도 괜찮은 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덧 아침저녁 서늘해져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겨오기 시작한 요즘

이 책으로 소박하게 시인의 기분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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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4
허먼 멜빌 지음, 레이먼드 비숍 그림,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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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 진리만을 강요하던 폭력의 시대에 맞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문학의 효시가 된 불후의 고전

내게 <모비 딕>이라는 작품은 고전이라거나 불후의 명작이라거나 하는 식의 인식은 없었다. 유명한 책이었고 <필경사 바틀비>에 홀딱 반한 후 관심이 생긴 허먼 멜빌의 역작이기에 읽어보고 싶었던 정도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이종인 님의 원전 번역판이 나왔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고전 번역분야에서 믿고 보는 이종인 님의 번역인데다 직접 길고 긴 [해제]를 쓴 이 벽돌책을 설레는 마음으로 펼쳤다.

이런저런 거창한 수식어구가 붙는 작품인 만큼 사전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나서 읽고 싶었기에 [해제]를 먼저 읽고 시작했다. 어릴 적 동화버전으로 읽었던 모비딕은 내 머릿속에서 보물섬과 노인과 바다와 심지어 해저2만리가 뒤섞인 혼종이었음을 알았다. 결국 나는 모비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번역자가 풀어주는 '거대한 소설'에 대한 '거대한 주제'가 생소하고도 무겁게 다가왔다.

[<모비 딕>, 거대한 주제를 다루는 거대한 소설]이라는 제목의 [해제]를 통해 작가의 생애와 작품 배경을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작품 속에 깃든 고전들과 상징적 표현들에 대해 역자가 다각도로 분석해 놓은 부분이 흥미로웠다. 거대한 책을 읽을 땐 사전정보가 작품의 이해에 필수라고 생각한다. 나는 문장 하나하나 분석해놓은 평론들은 안 읽지만, 작가의 생애와 작품 배경에 대한 설명은 먼저 읽기를 선호하는 편이다. 이 책은 읽기 전 [해제]를 먼저 읽기를 권하고 싶다. 그냥 지나친 문장들이 사실 상당히 의미심장한 문구였음을 뒤늦게 알고 후회하기 전에 말이다.

이 작품은 독특하게도 고래에 대한 '어원'과 이전 책들에서의 '발췌록'을 작품에 앞서 실어놓고 있는데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작품 내내 시종일관 유지되며 작품의 서술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소설적 내용 보다는 고래와 포경선에 대한 다큐적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작품을 읽으며 '20세기에 도래할 모더니즘을 예고'했다는 그리고 '기존에 없던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형식으로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효시이자 상징주의 문학의 대표작'이 되었다는 이 소설의 의미에 대해 계속 생각해보게 되는데, 특히나 작품 속에서 성경과 셰익스피어의 체취를 맡고 그리스신화와 플라톤의 향기를 맡을때마다 더욱 곱씹게 되는 이 작품의 가치는 독자마다 상당히 다르게 느껴질 것 같다.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다오. (p. 37)

역자의 해설에 의하면 이 작품의 이 첫 문장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문장이라고 한다. 또한 이 문장과 호응하는 듯한 마지막 문장인 " 또 다른 고아인 나를 발견한 것이다. (p. 691) " 와 (그냥 고래도 아니고 다른 고래도 아닌)흰고래, 이렇게 3가지의 상징성에 대해 이해하면 이 작품을 거의 다 이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주 인용되는 성경적 인물들과 세익스피어식 대사는 배경지식이 있다면 더 바로 이해할 수 있었을 텐데 그쪽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역자의 주석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일은 처음에는 꽤 힘들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중략) 타르 단지에 손을 담가야 하는 일반 선원이 되기 전까지 시골 학교에서 덩치 큰 학생들도 벌벌 떠는 호랑이 선생 노릇을 했던 사람이라면 자존심이 이만저만 상하는 게 아닐 것이다. 장담하건대, 선생에서 선원으로 전업하는 것은 엄청난 변화다. 씩 웃으며 이런 일을 견뎌내려면 세네카와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을 한 사발 진하게 달여 마셔야 한다. 하지만 이런 고통도 시간이 흐르면 점차 무뎌진다. (p. 40)

이 작품에는 작가의 자전적 요소가 은근히 많이 들어가 있다. [해제]뒤의 [허먼 멜빌 연보]에서 이미 읽고 온 것처럼 허먼 멜빌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기울자 학교를 중퇴하고 임시 교사로 일하다가 포경선에 취직했다. 고작 그의 나이 21세(1840년) 때였다. 3년 정도의 이 경험은 작가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의 첫 소설의 배경이 되기도 했으며 30세에 집필한 그의 역작 <모비 딕>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모비 딕>에 대한 혹평으로 작가적 삶을 거의 접어야 했고 살아 생전에는 제대로 된 인정을 거의 받지 못하다가 사후(1891년)에 1920년대가 되어서야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여하튼, 자신을 이슈메일이라 불러달라고 한 작품 속 화자는 젊은 청년이고 상선만 타다가 포경선을 타기 위해 포경업으로 유명한 섬 낸터킷에 왔다.

내가 고래잡이 항해에 나선 것은 틀림없이 신의 섭리를 따라 아주 오래전에 예정된 원대한 계획의 일부일 것이다. 이 항해는 대규모 공연 사이에 낀 짤막한 막간극이나 일인극과 같다. 이 부분이 전체 공연 안내지에 소개된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적혀 있을 것이다. (p. 41)

치열한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전

이슈메일이란 자의 고래잡이 항해

피비린내 나는 아프가니스탄전쟁

다른 사람들이 고상한 비극에서 감동적인 역할을, 우아한 희극에서 쉽고 간단한 역할을, 익살극에서 쾌할한 역할을 맡을 때, '운명'이라는 무대 감독은 왜 내게 포경선 선원이라는 초라한 역할을 맡겼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 이유를 정확히 말할 수 없어도, 이제 와서 모든 상황을 돌이켜보니 다양하게 변장하고 내게 교묘히 나타난 여러 동기와 원인을 조금은 알 것 같다. 그것들은 예정된 역할을 하도록 나를 밀어붙였고, 또한 기만하여 내가 편견없는 자유의지와 예리한 판단으로 스스로 그런 선택을 했다고 믿게 만들었다. 가장 결정적인 동기는 거대한 고래 자체의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이었다. (p. 42)

책을 보면 저 선전문구?!들이 색과 크기를 달리 하고 있어 더욱 눈에 띄는데, 이또한 이 책 전반을 아우르는 분위기 중의 하나다. 현실비판이 없지 않다는 것.

허먼 멜빌이 이 작품을 쓰던 시기는 미국에 나름 전운이 감도는 시기였다. 흑인노예를 둘러싼 남북전쟁 직전의 상황이었고 따라서 정치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복잡한 시대였다.

무엇보다 허먼 멜빌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랄까 자긍심이 무척 높았던 사람 같다. 신의 섭리에 따라 예정된 계획의 일부로 포경선 선원이 되었고 대통령 선거전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 못지 않게 중요한 고래잡이 항해를 한 '나'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무대위에서 그 어떤 비극이나 희극이나 익살극보다 뛰어난 <모비 딕>을 열연하고 있다. 이 '극'이 뛰어난 이유는, 실제 일어났던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현실'이며 그렇기에 다른 그 어떤 허구보다 더욱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라는 작품이 생각난다. 19세기 중반 사실주의의 대표작으로 19세기 후반 나타난 모더니즘에 영향을 끼쳤다는데 <모비 딕>은 그 모더니즘의 선구작으로 일컬어진다. 사실주의던 모더니즘이던 그에 앞서 있었던 사조들의 그 어떤 '허구성'보다 '현실'을 중요시 하는 사조들이기에 허먼 멜빌의 자긍심은 앞서간 문인의 자신감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모더니즘이 도래하기 이전의 소설들은 철저히 리얼리즘을 내세웠다. 가령 디킨스와 발자크는 전형적인 19세기 리얼리즘 소설가로서 작품 내 인물들에 대해 전지적 관점을 취한다. 다시 말해 세상은 소설가가 그려내는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 따라서 소설가의 자아와 세상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러나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은 소설가가 세상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화자는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고 상상한 것 말고는 알 수 없으며, 그마저도 인식이 불완전할 때가 많다는 입장을 취한다. 다시 말해 자아와 세상은 불일치 하므로 세상보다는 자아의 심리적 리얼리티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더니즘 작가들은 화자의 관점을 중시하면서 내면의 심리를 구체적으로 드라마화하는 데 집중한다. 이것이 모더니즘 운동의 핵심이다. <모비 딕>은 여러 면에서 모더니즘을 예고하는 작품이었다. (p. 702 - 해제 中) ]

<모비 딕>은 1인칭 화자로 서술되면서 화자의 심리 묘사가 중심을 이룬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화자가 그런 심리를 갖게 되는 요소들에 대해 다큐멘터리라고할 정도의 구체적 사실들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그와는 비교되게 인물들의 대사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는 듯한 연극적 어투로 방백처럼 표현된다. <모비 딕>은 정말이지 이런저런 요소들이 새롭고 신선한 묘한 작품인 것이다. 지금도 묘한데 발표 당시에는 얼마나 묘했겠는가.

어쨌든 화자인 '나' 이슈메일은 낸터킷에 가기 전에 '물보라 여관:피터 코핀'에 묵게 되는데 주석에 의하면 '여기서는 사람의 이름으로 쓰였으나 코핀에는 시신을 넣는 관 이라는 뜻도 있다 (p. 45)'고 한다. 이 '관' 은 이 소설의 결말에도 의미심장하게 등장하는데 이처럼 <모비 딕>에서는 앞뒤 대칭적으로 상응하는 상징들이 종종 등장하곤 한다. 그리고 이 여관에 걸린 그림은 이 소설 전체의 줄거리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또한 대칭적 장면으로 읽혀지는 부분이었다.

그래, 이슈메일, 저게 바로 너의 운명일 수도 있어. 하지만 왠지 나는 점점 다시 즐거워졌다. 그래, 배가 부서지면 나는 명예롭게도 불멸의 존재로 진급하는 거야. 그래, 고래잡이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야. 아차 하는 순간에 혼란 속에서 영원의 세계에 던져지니 말이야. 하지만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우리가 삶과 죽음의 문제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 이 땅에서 어른거리는 내 그림자가 실은 내 진짜 본질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적인 것을 보는 방식이란 것이, 굴이 바닷물을 통해 태양을 바라보며 그 두터운 물을 가장 얇은 공기라고 생각하는 방식과 너무나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육신이 더 나은 내 존재의 찌꺼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원한다면 누구든 내 육신을 가져가라. 이건 내가 아니니까. 그러니 낸터킷을 위해 만세 삼창! 부서진 배든, 으스러진 육신이든 올 테면 와라. 제우스라 할지라도 내 영혼은 부술 수 없으니. (p. 76)

이슈메일은 이제 낸터킷에서 포경선을 타고 출항한다. 여관에서 만난 식인종 야만인 퀴케그보다 더 이상한 선장인 에이해브 선장이 이끄는 피쿼드호를 타고 바다로 바다로.

"거기 돛대 꼭대기! 잘 살펴봐. 너희들 전부! 이 근처에 고래들이 있어! 흰 고래를 보면 폐가 찢어지도록 소리치란 말이야!" (p. 182)

"자네들 중 누구든 이마가 주름지고 아가리가 구부러진 대가리 하얀 고래를 보고하면, 오른쪽 꼬리에 구멍이 세 개 뚫린 하얀 대가리 고래를 보고하면, 자, 이 금화는 바로 그 사람의 것이다!" (p. 218)

출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에이해브 선장은 광기어린 집념을 드러낸다. 흰 고래를 찾아라! 선장의 한 쪽 다리를 앗아간 그 흰 고래를.

'작은 건물이야 공사를 처음 시작한 건축가가 완공할 수 있겠지만, 진정 웅장한 건물은 최후의 마무리를 후대에 맡기는 법이다. 신은 내가 그 어떤 것도 완성하지 못하게 한다. 이 책 전체도 하나의 초고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초고를 위한 초고에 불과하다. 아아, 내게 시간과 체력과 자금과 인내를! (p. 197)'

에이해브 선장은 위대한 흰 고래를 찾고 '나'는 그 위대한 여정을 기록한 후대로서 그 막중한 책임을 다하려 노력중이다. 허먼 멜빌은 <모비 딕>이라는 자신의 작품에 이토록 엄청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며 작정하고 쓴 것인데 그러한 작품이 그토록 혹평을 받았으니 작가로서 받은 상처와 타격이 컸을 것 같긴 하다.

이 모든 아름답고 명예롭고 숭고한 연상에도 불구하고, 흰색의 가장 내밀한 개념 속에는 포착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깃들어 있어 두려운 핏빛보다 더 큰 공포를 우리 영혼에 불러일으킨다. 이렇듯 포착하기 어려운 특성 때문에 흰 색을 좀 더 기분 좋은 연상에서 분리시켜 본질적으로 무시무시한 대상과 결부시켰을 때 그 공포는 배가된다. (p. 253)

우리는 아직 흰색의 마법을 풀지 못했고, 왜 흰색이 우리 영혼에 그토록 강하게 호소력을 갖는지 알지 못한다. 더욱 이상하고 훨씬 더 불길한 점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흰색이 영적인 것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며, 나아가 기독교 신이 쓰고 있는 베일인 동시에 인류에게 가장 소름끼치는 것들을 강화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p. 261)

이 모든 것의 상징이 바로 흰 고래다. 그래도 당신은 이 맹렬한 추격을 의아하게 여기겠는가? (p. 262)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많은 측면은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은 두려움으로 이루어져 있다. (p. 261)' 라며 이슈메일은 '흰 고래'의 의미와 그러한 흰 고래를 쫓을 수밖에 없는 심리에 대해 독자를 설득한다. 또한 고래의 속성과 종류, 포경업의 구체적 작업들을 설명하면서 이 두려운 흰 고래를 '모비 딕'이라는 구체적 존재로 연결시키는데 그렇게해서, 조업을 하며 만나는 배들마다 에이해브 선장의 '흰 고래'를 보았냐고 묻는 광기어린 집착을 포경업의 특성상 그러한 추적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자연스럽게 설득시키려 한다. 흰 고래도 흰 고래를 쫓는 일도 모두 너무나 그럴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일인 것이다. 호메로스의 비극이 그러했듯이 단테의 신곡이 그러했듯이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그러했듯이 어쩔 수 없는 운명의 흐름을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모비 딕>이라는 작품으로.

성문율이든 불문율이든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확실한 규약 (p. 488)

1. 잡힌 고래는 잡은 자의 것이다.

2. 놓친 고래는 먼저 잡은 자가 임자다.

하지만 이 훌륭한 법규는 워낙 간결해서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이 법규를 설명하려면 방대한 주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p. 489)

'잡힌 고래'와 '놓친 고래'에 관한 두 원칙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 사회에 있는 모든 법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p. 491)

작가는 '잡힌 고래'에 대한 비유로 러니아 농노나 공화국 노예, 과부의 마지막 동전 한 닢이 탐욕스러운 지주에게 잡힌 고래라고, 미통한 파산자가 가족이 굶어죽는 것을 막기 위해 돈을 빌리러 왔을 때 고리대금업자 모르드개가 무지막지하게 떼는 선이자가, 대주교가 등골 빠지게 일하는 수십만 노동자들의 얼마 되지 않는 빵과 치즈에서 뜯어낸 10만 파운드가, 영국에게 잉글랜드가 미국에게 텍사스가 '잡힌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묻는다.

마찬가지로, '놓친 고래'는 스페인에게 있어 아메리카가, 러시아 황제에게 있어 폴란드가, 터키에게 있어 그리스가, 영국에게 있어 인도가, 미국에게 있어 멕시코가 '놓친 고래'가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묻는다. 이처럼 '인권이나 세계의 자유도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모든 인간의 생각이나 마음이 '놓친 고래'가 아니면 무엇이겟는가? (p. 492)' 라고 물으니 어찌 '놓친 고래'를 추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모비 딕을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다 드디어,

"고래가 물을 뿜는다! 고래가 물을 뿜는다! 흰 산 같은 혹이다! 모비 딕이다!" (p. 655)

운명의 추격이 시작된다. 이 운명적 장면이 등장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르고 얼마나 많은 설명이 이어졌는지 모른다. 이 벽돌책에서 이 몇 페이지를위해 그토록 길고 긴 설명이 그토록 현실감 넘치는 증명과 증언들이 등장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요약본 책에서라면 대부분 모비 딕에 대한 선장의 집념과 모비 딕을 발견하고 추적하는 소설적 줄거리가 대부분의 내용이겠으나 원전 그대로의 모비 딕에서 사실 이러한 소설적 줄거리는 그리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렇게 버려진 아들 이스마엘로 시작해서 레이철호(라헬=레이철, 아들을 잃은 어미 라헬)에 의해 구조되는 고아로 끝나는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흰 고래'는? ...

확실한 것은 성경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 독자가 읽었을 때 분명 나와는 다른 감상을 얻었으리라는 것이다.

항해모험기이라고 하나 항해모험기로 읽히지 않는 이 소설은 한번 읽는 것으로는 다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이 험난한 여정을 내가 언제 다시 시작할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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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인종, 계급 Philos Feminism 2
앤절라 Y. 데이비스 지음, 황성원 옮김, 정희진 해제 / arte(아르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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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흑인, 퀴어, 공산주의자, 감옥산업복합체 폐지 운동가...

억압받는 자들을 위한 저항의 아이콘 앤절라 데이비스가 쓴

교차 페미니즘의 고전

Women , Race & Class

1981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단순한 제목의 이 책은 학문적 논리 보단 저자 개인의 삶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그리고 짧은 페미니즘의 역사에서 그 출판년도만으로도) 페미니즘의 고전이라 불릴만 하다. 하지만 40여년 전 미국내에서의 활동을 기반으로 쓰여진 이 책의 내용에 대해 그리고 페미니즘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해 낯선 독자를 위해 국내 페미니즘학문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을 정희진 박사가 책의 서두에 해제를 덧붙였다.

여성은 이렇게 다양하다. (중략) 인종과 계급, 지역처럼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차이나 개인의 성격에 따라 젠더나 '여성성'을 실행하는 방식이 다른 여성들도 있다. 이 중 누구를 여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가부장제 사회에서 규범적 여성('젋고 예쁜 중산층 여성')은 남성이 정한다. 이에 반해 여성주의는 '아줌마, 할머니, 노예 여성, 트랜스 젠더 여성'도 여성이라고 주장하며 여성의 범위를 확장한다. 페미니즘 이론과 운동의 목표는, 개별적인 인간이 아닌 여성을 남성 공동체를 위한 성역할 노동자 집단으로 환원시킨 성차별 체제에 대한 도전이자 여성의 개인화와 인간화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억압받는 존재라는 자각과 함께, 여성이라는 범주를 만들어 낸 권력을 해체하자는 주장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여성의 같음과 다름을 동시에 주장한다. (p. 12) -해제 中-

페미니즘이라고 하면 여성학 혹은 여성을 위한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여성만의 ... 뭐 이런 해석이 일반적인것 같은데 본격적으로 따지고 들자면 이러한 대중적인 해석은 옳지 않을 때가 많다. '성차별이나 인종주의는 지배 세력이 정한 규정이다. (p. 13)' 라는 저자의 말처럼 여성이라는 범주가 누군가에 의해 규제된 범주라면 더구나 그것이 억압에 가깝다면 그 범주를 해체하고 그 범주를 만들어낸 권력을 해체해야 한다는 저자의 설명은 일면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여성인가' 라고 묻는 정희진 박사의 질문에 앤절라 데이비스가 한 답은 당시 사회상을 생각해 봤을 때 이해하기가 훨씬 나았다.

[여성, 인종, 계급]은 미국의 페미니스트 앤절라 이본 데이비스가 1981년에 발표한 여성학 이론의 고전이다. 앤절라 데이비스는 대표적인 흑인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데이비스만큼 평생을 다양한 정체성과 젠더를 넘나드는 광범위한 삶을 산 이도 드물 것이다. 앤절라 데이비스는 흑인, 여성, 레즈비언이자 공산주의자, 저술가, 교수, 감옥 폐지 운동가, 팔레스타인 국제연대 활동가, 미국 공산당 대통령 후보였던 거스 홀과 함께 1980년과 1984년에 부통령 후보에 두 번 출마했다가 낙선한 직업 정치인이자, 한때 FBI가 지명한 10대 수배자이기도 했다. (p. 14)

저자의 다종다양한 이력만큼이나 저자가 주제삼을 것들은 다중적일 수 있겠으나 저자는 '누가 여성으로 간주되며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는 영원한 질문(p. 15)'에 집중하여 이 책을 쓴 것 같다. '페미니즘이 다루는 젠더는 여성과 남성 간의 차이가 아니다.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의 개념을 규정하는 권력을 질문하고 추적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남성과 남성의 차이 그리고 여성과 여성 간의 차이에 의해 구성된다. 뚜렷이 두 개의 성으로 구분되는 '순수한' 남성과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성이기만 한 남성, 여성이기만 한 여성은 없다. 즉 성별만으로 작동하는 문제는 단언컨대, 없다. 동시에 젠더를 고려하지 않은 인종, 계급 개념도 불가능하다. (p. 15)' 는 해제의 설명처럼 여성이지만 여성이면 안되는 '페미니즘은 그 자체로 모순적인 사상이다. (p. 15)' 여성이라는 개념은 생각보다 굉장히 유동적이다. 그래서 '페미니즘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복합적 권력의 성격을 매 순간 고민해야 하는 상황적 지식 (p. 16)' 이라고 해제에서 설명된다. 따라서 저자인 앤절라 데이비스가 말하는 페미니즘을 이해하려면 저자가 살았던 미국사회의 모습을 알아야 하는데, 가장 자유로운 국가로서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미국이 흑인노예의 노동을 바탕으로 자리잡은 가장 인종구속적인 국가라는 것은 (저자인) 흑인여성노동자의 눈으로 따라가다보면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게 된다. 다만 저자는 공산주의자로서의 프레임이 강하다. 그래서 해제에서도 '이 책의 전반적 '정서'가 흑인 페미니스트의 입장이라기보다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 여성주의자의 입장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유다. (p. 26)' 라고 살짝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가장 극명한 공산주의관련 경험을 갖고 있는 나라인 한국에서 그 프레임도 해체하며 읽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리이기에 그렇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요지는 여성이 흑인, 노예, 가난한 사람일 때 여성성의 기준과 페미니즘 이론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보편성의 반대는 특수성이라고 설명되어왔다. 그러나 이는 보편의 기준을 바꾸지 못한 채 특수하고 예외적인 타자만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페미니즘은 기존의 방식을 비판하고 차이를 드러낸다. 남성중심적 보편성이든, 백인 여성 중심의 보편성이든 모든 보편성은 차이를 드러내야만 해체된다. (p. 20) '여자로 태어났으면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아도 페미니스트인가?' 우리는 기존의 '백인 중산층 이성애자 고학력 비장애인 젊은 여성'의 경험에 기반한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한다. 페미니즘 뿐 아니라 중산층의 경험은 모든 지식의 기반이다. 삶이 지나치게 고달픈 이들이나 부자들은 언어를 생산할 여력이나 이유가 없다. 모든 언어, 지식은 중산층의 삶의 경험에 기반한다. 이는 기존의 페미니즘이 모두 틀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기존의 서구 페미니즘을 상대화하고, 내가 선 자리, 로컬에 맞는 지속적인 재해석과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p. 21)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에서 벗어나 이제는 '기존의 서구 페미니즘을 상대화하고, 내가 선 자리, 로컬에 맞는 지속적인 재해석과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시대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한 노력중의 하나로 페미니즘의 고전을 읽을때에도 경전처럼 읽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처럼 고전은 경전이 아니다. (p. 27)' 라는 해제에서의 문장을 되새기며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 '먼저 투쟁한 이들의'역사적 맥락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 공부가 필수적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배운다. 어떻게? 시공간이 다른 로컬에서 나의 위치성을 자각하고 저자의 생각을 상대화, 재의미화 하는 공부여야 한다. (p. 27)' 다행히 이 책으로 하는 '공부'는 일단 가독성 면에서 어렵지 않다.

노예 여성들은 여자라는 태생 때문에 온갖 형태의 성적 억압에 취약했다. 남성에게 가장 가혹한 처벌이 태형과 신체 훼손이었다면 여자들은 태형과 신체 훼손에 더해서 강간을 당했다. 사실 강간은 노예 소유주의 경제적 지배력과 노동자로서의 흑인 여성에 대한 감독관의 통제력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특수한 학대는 그러므로 이들의 노동에 대한 가혹한 경제적 착취를 원활하게 했다. 이 착취를 위해 노예 소유주들은 억압을 할 목적이 아니고서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성차별주의적 태도를 버렸다. 흑인 여성들이 인정된 의미에서의 '여자'가 아니었으므로 노예제는 흑인 남성들의 남성우월주의 역시 억눌렀다. (p. 35)

미국사회에서의 페미니즘 발달을 이해하려면 흑인노예로서의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실 미국 사회내의 많은 문제는 흑인노예제에서 시작된다.

흑인노예로서 여성과 남성의 구분은 없었다. 평.등.하게 학대받고 착취당했다. 오히려 여성의 신체적 특징 때문에 흑인여성노예는 더 심한 경험을 감내해야 했다. 이는 흑인노예공동체 사회에서의 남녀 관계가 백인지배층 사회에서의 남녀 관계와 다르게 형성된 배경이기도 했으며, 추후 페미니즘의 발달에 있어서도 흑인여성과 백인여성의 시각에 상당한 간극을 가져오게 했다. 여하튼 미국사회의 가장 큰 변화는 그래서 흑인노예제 폐지에서 시작된다.

나는 쟁기질을 하고 심고 수확해서 헛간에 모아둬요. 어떤 남자도 나보다 잘하지 못해요! 그럼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

나는 남자만큼이나 많이 일하고 많이 먹을 수 있어요. 나한테 주기만 한다면 말이에요. 그리고 똑같이 채찍질도 견딜 수 있죠! 그럼 나는 여자가 아니냐고요?

나는 자식을 열셋 낳았고 걔들이 거의 전부 노예로 팔려가는 걸 봤어요. 내가 어머니로서 비탄으로 울부짖을 때 예수님 말고는 아무도 내 소리를 듣지 못했죠! 그럼 난 여자가 아닌가요? (p. 109)

초기 여성 권익 활동가들은 흑인 여성의 곤경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노예제 반대에 참여하고 있는 백인 여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1851년 여성대회에 흑인 여성으로 유일하게 참석했던 소저너 트루스의 '나는 여자가 아닌가요?' 라는 연설은 지금 읽어도 찡한 울림이 있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와 여성권익향상 운동은 서로 돕다가도 때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눈치를 봐야 했다. 둘다 해결될 수 없다면 하나라도 관철시켜야 하지 않나 라는 조바심에 힘을 합치기보다 서로 견제해야 할 때도 많았다. 이또한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

노예제의 사슬이 끊어지긴 했어도 흑인들은 여전히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고 강도 면에서 노예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종주의자 폭도들의 테러 공격을 상대해야 했다. (중략) 남부에 사는 흑인의 일상에는 여전히 노예제의 악취가 진동했다. (p. 131) 노예제 시기에 그랬듯 농업에 종사했던 흑인 여성들은 온종일 옆에서 함께 일했던 흑인 남성들만큼이나 혹사당했다. 이들은 종종 남북전쟁 이전의 상황을 되풀이하고 싶어 하는 지주들과의 '계약'에 서명을 하라고 강요당했다. 계약 만기일은 형식에 불과할 때가 많았다. 지주들은 노동자가 정해진 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빚을 자신들에게 졌다고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 144)

남북전쟁으로 노예제가 공식 폐지됐어도 남부에서 흑인들의 삶은 획기적으로 달라질 게 없었다. 가진거 없이 해방된 노예들은 여전히 지주들 밑에서 노동을 해야 했고 노동을 하면서도 빚을 져야 했으며 그렇게 지게 된 빚은 늘어나기만 해서 종신계약에 가까운 노동은 노예제에서의 노동과 다를게 없었다. 오히려 혐오범죄에 더 노출되기까지 했다. 중요한건 깨우침과 깨달음이었기에 '교육'이 강조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여성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육을 쟁취하기 위한 미국의 여성 투쟁사는 남북전쟁 이후의 남부에서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이 함께 문맹과의 전투를 진두지휘했을 때 진정한 절정에 도달했다. 이들의 단합과 연대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생산적인 가능성 중 하나를 지키고 공고히 다졌다. (p. 176)

이 희망적인 연대가 오래 지속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권력투쟁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셈법이 통하는 사회가 아니고 인종주의라는 것이 그렇게 단번에 사라질 수 있는 인식이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 '오랫동안 기다려온 여성참정권이 승리를 거둔 뒤에도 남부의 흑인 여성들은 이 새로 성취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도록 폭력적으로 저지당했다. (p. 230' 미국내 페미니즘역사에서 흑인여성의 입장을 조금 더 세밀히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누구보다 많이 억압당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흑인여성으로서의 페미니즘 관점을 세우는데 있어 저자는 공산주의라는 논리를 접하며 큰 깨우침을 얻은 듯 하다. '근 20년간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대변인이었던 사회당은 여성 평등 투쟁을 지지했다. 사실 숱한 세월 동안 여성참정권을 옹호한 정당은 사회당이 유일했다. (p. 234)' 따라서 저자의 공산주의자로서의 논리도 따로 챙겨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흑인 여성 노예의 삶에 대한 일체의 탐구는 노동자로서의 역할에 대한 평가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p. 32)

도덕적이고 인도주의적인 근거로 노예제에 반대하던 가장 급진적인 백인 폐지론자들조차도 급성장중인 북부의 자본주의 역시 억압적인 시스템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p. 114)

남북 간의 군사적 경합이 남부의 노예 소유계급을 전복시키는 전쟁이라는 점에서, 이는 기본적으로 북부의 부르주아지, 그러니까 공화당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를 발견한 젊고 열정 가득한 산업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수행된 전쟁이었다. 북부의 자본가들은 국가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경제적 통제력을 손에 넣고자 했다. 그러므로 남부의 노예정치를 상대로 이들이 벌인 투쟁은 흑인 남성이나 여성의 해방을 인간으로서 지지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여성 참정권이 남북 전쟁 이후 공화당의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듯, 이 승리에 도취된 정치인들이 흑인의 천부적인 정치권에 신경을 써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다. 이들이 남부에서 새로 해방된 흑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확대할 필요를 인정했다고 해서 이들이 백인 여성보다 흑인 여성에게 더 호의적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p. 127)

노예제 시기에 흑인 여성을 강간할 수 있는 자격의 근간이 노예 소유주의 경제 권력이었듯, 자본주의사회의 계급 구조 역시 강간을 장려하는 장치를 내장하고 있다. (p. 302)

여성에 대한 전반적인 억압이 자본주의에 없어서는 안 되는 버팀목으로 남는 한, 성차별주의의 폭력적인 얼굴인 강간의 위협은 꾸준히 존재할 것이다. 강간 반대 운동, 그리고 이 운동의 주요 활동들은 독점자본주의의 궁극적 혁파를 염두에 둔 전략적 맥락 안에 자리 잡아야 할 것이다. (p. 304)

오늘날의 흑인 여성들에게, 그리고 모든 노동계급 자매들에게, 가사노동과 육아의 부담이 자신의 어깨에서 사회로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여성해방의 급진적 비밀 중 하나를 담고 있다. 육아와 식사 준비는 사회화되어야 하고 가사노동은 산업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서비스는 노동계급이 충분히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p. 343)

흑인노예는 기본적으로 착취당하는 노동자였고 당시 사회사상 중에서 남녀 평등을 포함한 논리는 공산주의가 유일했다. 그러니 저자가 흑인여성운동가로서 마르크시즘에 경도된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40여년이 흘렀다. 저자와 같은 사회주의자적인 시각은 여러 면에서 한계에 부딪힌다. 그러나 여전히 그러한 시각은 의미있다. 따라서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하여 '내가 선 자리, 로컬에 맞는 지속적인 재해석과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여하튼, 다시 저자의 페미니즘론으로 돌아가서 노예제 폐지와 참정권 획득을 이루고 나서도 여전히 문제화되고 있는 '강간'에 대해 살펴보면,

현대 강간 반대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는 강간 피해자로서의 흑인 여성을 둘러싼 이런 특수한 환경을 진지하게 분석한 페미니스트 이론가가 거의 없었다. 백인 남성에 의해 시스템 차원에서 학대와 멸시를 당하던 흑인 여성들과, 강간 기소라는 인종주의적 조작 때문에 불구가 되고 목숨을 잃는 흑인 남성들을 묶고 있는 역사적인 ㅐ듭은 이제 막 의미 있는 수준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상태였다. 흑인 여성들이 강간에 저항할 때면 그것이 흑인 남성을 상대로 강간 기소를 날조하기 위한 치명적인 인종주의적 무기로 사용될 위험이 거의 동시에 제기된다. (p. 267)

저자는 '흑인 강간범 이라는 해묵은 신화(p. 278)' 가 꾸준히 이용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노예제 폐지 이후 인종주의가 그 꼴을 갖추는 데에 가상의 흑인 강간범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흑인 남성을 가장 빈번한 성폭행범으로 묘사하는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무책임한 주장이다. 나쁘게 말하면 이는 흑인 전체에 대한 공격이다. (p. 291)' 흑인여성들로서는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혼란한 때일수록 기준과 명분은 명확히 세워야 했고 저자는 이러한 점들을 분명하게 분석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 '해묵은 신화'가 미국 사회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도 여전히 투영되고 있는 것 같아서 씁쓸해진다.

출산통제의 진보적인 잠재력은 여전히 반박 불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운동의 역사적 기록을 보면 인종주의와 계급착취에 대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다. (p. 306) 임신중지와 영아살해는 생물학적 출산 과정이 아니라 노예제라는 억압적인 조건이 동기로 작용하는, 극한의 상황이 빚어낸 행동이다. 당연히 이런 여성 대부분은 누군가가 자신의 임신중지를 자유를 향한 디딤돌이라고 추켜세운다면 있는 힘껏 분통을 터뜨릴 것이다. (p. 309) '자발적인 모성' 슬로건에는 진정으로 진보적인 새로운 여성상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비전은 중간계급과 부르주아 여성들이 누리는 생활양식에 견고하게 묶여 있었다. (p. 313)

두 입장차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우생학으로 변질된 출산제한이었다. '나치가 전체 통치 기간 동안 시행한 불임수술의 건수가 미국 정부가 단 한 해 동안 자금을 지원한 불임수술 건수와 거의 똑같을 수도 있다는 게 진짜로 가능하단 말인가? (p. 326)' 가능했다. 그렇다면 그 대상이 누구였을까?!

'노동 속에서 노예 여성은 노예 남성들과 동등했다. 이들은 일터에서 지독한 성평등에 시달렸기 때문에 노예 거주 지역에 있는 집 안에서 '가정주부'인 백인 자매들보다 더 큰 성평등을 누렸다. (p. 341)' 저자가 말하는 '지독한 성평등' 이라는 표현을 보며 '평등'의 의미가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평등이 일반적인 남녀평등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저 문장에서 느껴지는 듯 했다.

저자는 '독점자본주의의 타당성에 의문을 제시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p. 359)' 라고 최종적인 전략을 제시하며 책을 마무리하지만 이 전략은 우리 시대에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 페미니즘에서 새롭게 제시해야 할 전략은 무엇일까? 이 책을 읽으며 생각해봐야할 중요한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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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어진 리더들의 전쟁사 - 고민하는 리더를 위한
존 M. 제닝스 외 지음, 곽지원 옮김 / 레드리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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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기는 어렵지만 욕먹기는 쉽다

당신은 어떤 리더가 되고, 어떤 리더를 따를 것인가

'고민하는 리더를 위한 삐뚤어진 리더들의 전쟁사' 라는 이 책의 원제는 'The Worst Military Leaders in History' 이다.

장교를 가르치는 사관학교에선 당연히 역사속 군장교들에 대해 가르칠 것이다. 미국의 사관학교도 그렇다. 하지만 저자는 수업에서 가르치는 성공 사례 외에 실패 사례들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역사상 최악의 군사 지도자'라는 주제로 쓴 글을 모았다.

'고대 아테네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전쟁사학자들이 뽑은 최악의 리더 top15' 라고 표지에 써있듯이, 전쟁사 라기 보다는 개별 인물사에 가까운 글들이라 시대를 아우르는 역사는 아니고, 또한 미국사관학교에서의 수업을 바탕으로 해서 그런지 미국내 전쟁에서 활약한 장군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미국의 역사가 짧은 편이다보니 전쟁사도 짧기 때문에 대부분 근대 전쟁에서의 미국 장군들이 많이 등장하는 만큼 모르는 인물들이 많았다. 미국사람이 우리의 강감찬 장군이나 이순신 장군을 모르듯이 우리도 그네들의 남북전쟁이나 양차대전에서의 장군들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달까.

학문으로서의 전쟁사가 리더십에 비판적인 평가를 요구하는 만큼, 해당 분야 연구자들이 누가 잘한 지휘관인지 못한 지휘관인지를 따지기 위한 강력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략)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인물 중에는 잘 앙려진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다. 이 모든 글을 관통하는 요소는 등장하는 모든 리더가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가진 단점이 바로 그들의 유산이 되었다. 그 비판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다. (p. 12) 이 책은 편집자들의 요청으로 여러 출처들을 참고해서 '왜 그들이 역사상 최악의 리더인가?' 라는 질문에 논거를 제시했다. 편집자들이 글을 모아 한 권으로 펴냈지만, 사실은 무능한 리더십을 주제로 한 매우 주관적인 평가를 모은 셈이다. (중략) 이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나쁜 지휘관들의 특징을 논의하는 것이다. (중략) 아무리 불편해도, 비판을 외면하는 것은 전쟁터에서의 리더십 연구가 절반짜리 진실만 쫓아다니게 한다. (p. 33) -서론 中-

길고도 상세한 '서론'에서 저자는 이 책의 의도와 인물들에 대해 개략적으로 책의 내용을 요약해준다. 전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중에는 통사가 아닌 개별 인물 한 명에 초점을 두고 연구하는 학자들도 많기에 각자 뽑은 최악의 리더는 다종다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모인 15명의 최악의 장군들을 범죄자, 사기꾼, 멍청이, 정치꾼, 덜렁이 라는 5종류로 구분하고 있지만 사실 이 별칭들이 꼭 들어맞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한 가지 공통점으로 그냥 다 나쁜 놈들 이라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나쁜 놈들은 전쟁에서 나쁜 리더일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그러니 최악의 리더로 뽑혔을 것이고, 그래서 매번 대부분의 글의 마무리는 '역사상 최악의 지휘관이라는 칭호를 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겠다' 라는 식의 문장이 되었던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적백내전 당시 몽골제국을 부활시켜 러시아제국의 부활도 만들려고 했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피의 남작'이라고 불릴 만큼 잔혹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리 장군에게서 위대한 장군이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원주민 학살과 인종차별주의자로 KKK단의 배후가 되기도 했던 네이선 베드퍼드 포러스트 또한 잔혹행위로 악명이 높았다. 미국내 원주민 학살의 대표적 사건 중 하나인 샌드크리크 학살의 주범인 존 M. 치빙턴 또한 무차별적 잔혹행위로 자신의 전적을 쌓으려고 했던 자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을 패전으로 몰고 간 데이비드 비티, 미국 남북 전쟁에서 무능함으로 유명세를 떨쳤다는 기드언 J. 팔로,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잘못된 리더십의 전형을 보여주었다는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안나, 1차대전때 전쟁 준비는 하지도 않고 굴하지 않는 호전성으로 패전을 거듭했다는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2차대전 당시 미 공군에서 수차례 패전했음에도 진급했던 루이스 브레러턴, 미국 남북전쟁당시 전술적으론 유능했으나 그만큼 누구보다 사상자를 많이 냈던 조지 A. 커스터 모두 개인적으론 무능했으나 정치적으론 무능하지 않은 나쁜 리더의 전형이었다.

대부분 근대 전쟁속 장군들이 많았지만 역사 속 장군들도 몇몇 등장하는데,

삼두정치의 한 명이었던 로마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에 대해 '패배가 클수록 리더십이 나쁘고, 승리가 클수록 리더십이 훌륭하다. 이런 식의 해서대로라면 크라수스 또한 무능한 지휘관 반열에 올라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실수일 수 있다. (p. 217)' 라고 최악의 리더이긴 한데 최악의 리더일 수밖에 없었던 여러 사정들이 있었다라는 방향성이 다른 글들과 차별적으로 읽혔다. 크라수스에 대응하듯 이어지는 장군은 고대 그리스의 니키아스 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크라수스와 짝을 맞춘 장군이 니키아스라고 하는데, '니키아스는 고대 최악의 지휘관임이 명백하다. 하지만 역사를 통틀어서도 최악의 지휘관일까? (p. 239)' 라는 질문에 비해 이어지는 내용은 최악의 리더임이 맞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예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을 때 니키아스 때문에 화가 났었는데 다시 읽어도 니키아스라는 장군은 정말이지 너무나 화를 돋우는 사람이다.

알비 십자군 전쟁때의 툴루즈 백작 레몽6세는 시대적 한계가 인물의 한계와 만났을 때 어떻게 나쁜 리더가 되는지 보여주는 듯 했는데, 러일 전쟁에서 노기 마레스케의 군사적 무능함이 일본 군인정신으로 탈바꿈된 것도 비슷한 논리구조로 보였다. 로마제국의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 에 대해서는 로마제국의 전체 맥락없이 한 개인의 리더십을 문제 삼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고,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올슬리 경에 대해서는 '체계적이고 사려 깊은 군인 (p. 340)' 이랬다가 '군사 지도자로서 한계가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p. 341)' 라는 마무리가 최악의 리더라는 주제면에서 설득력을 좀 떨어뜨리는 듯 했다. 그런데 이런 애매한 글을 마지막으로 맺음말이나 결론 혹은 후기 없이 책이 끝났다. 마무리글 없이 책을 끝낼거면, 편집의 순서상 가장 뒤의 글은 확실한 '최악의 리더'로 갈무리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인정받기는 어렵지만 욕먹기는 쉽다. 특히 리더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하지만 역사는 늘 승전과 영웅을 노래하니 어찌보면 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처럼 실패자들을 모은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또한 정치가 복잡해져 갈수록 리더의 자질이 중요해지는 것 같다. 군장군들의 이야기지만 군통수권을 거머쥐고 있는 리더에게로 확장시켜 생각해 볼 수도 있을테니 이 책이 알려주는 최악의 리더십에 대해 이 시대의 리더와 견주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어떤 리더를 따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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