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 현실과 환상이 만나고 다투다가 하나 되는 무대 클래식 아고라 2
일연 지음, 서철원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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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이 만나고 다투다가 하나 되는 무대

<삼국유사>라는 제목에서 '유사'는 빠뜨린 일, 남겨둔 일 혹은 버려진 일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빠뜨린 일들을 애써 모은 것일까? 바로 나라에서 펴낸 역사책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나름대로 의식한 표현이다. 이 때문에 <삼국유사>는 여러모로 <삼국사기>와 비교되곤 하였다. 이를테면 <삼국사기>가 왕권의 강약과 귀족 세력의 부침에 따른 정치사를 바탕으로 서술되었다면, <삼국유사>는 불교와 고유 신앙의 대립과 화해, 향가를 비롯한 문학과 미술작품 건축물의 조성 등 종교를 중ㅅ미으로 한 문화사의 영역을 해명하고 있다. (p. 11) <삼국유사>자체가 그런 혁신적인 생각의 산물이라 할 수는 없어도, 공식적인 사관의 평만이 유일한 역사의 눈이 되는 것을 경계하기에는 충분하다. <삼국유사>는 역사 이해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성을 마련해 주려고도 한다. (p. 12) 우리가 미래에 이루려 하는 다문화, 다양성과 다원성을 지닌 새로운 한국은 이미 <삼국유사>를 통해 우리가 한 차례 이미 이루었던 것이다. (p. 16) 이 책은 다른 번역서들처럼 정확한 번역을 앞세우기보다, 일단 잘 읽히는 번역을 추구하였다. (p. 17)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역자는 <삼국유사>의 가치와 이 책의 특장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일단 잘 읽히는 번역을 추구하였다' 에 감사한 마음이다. 한자를 그대로 옮기기만했다면 내가 과연 이 책을 읽을 엄두나 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난해함이나 거부감없이 술술 읽힌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교과서에서 제목만 보던 역사책을 이렇게 쉽게 읽을 있는 시대가 오다니! 내가 그 <삼국유사>를 읽다니!! 와우, 정말 세상 참 좋아졌다. ㅎㅎㅎ

이 책은 총9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 이야기에 해당하는 1편과 2편이 절반 나머지 불교관련 이야기가 절반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삼국의 역사이야기라고는 하지만 대체로 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주 맥락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고려의 시초이야기랄까 고려의 용비어천가랄까 싶은 역사이야기였다.

또한 역사이야기이긴 하지만 대체로 신화적 이야기 였다. <삼국사기>와 대조되는 가장 큰 부분도 바로 이 점일 것같다. 신화적이고 영웅적인 일종의 야사같은 이야기들. 그래서 삼국의 역사라 할 수 있는 1편과 2편의 큰 제목은 '기이, 정치 현실과 신성한 환상' 이다. 기이하고 환상같지만 오래도록 전해져오는 역사이야기 라고나 할까. 그래서 출발은 언제? 고조선 이야기다!

나라를 다스린 지, 1500년 만에 주나라 무왕이 기묘년에 즉위하여 기자를 조선 땅의 제후로 삼았다. 그러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훗날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 산신령이 되었다. 그때 나이가 1,908세였다. (p. 23) 한 고조 유방때 연나라 왕 노관이 배반하고 흉노를 섬기게 되었다. 이때 연나라 사람 위만은 무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요새를 나와 동쪽으로 달려 패수를 건너 망명했다. (p. 24)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는데, 우거왕 대신 성기가 저항을 이어갔기 때문이었다. (중략) 마침내 한나라는 조선을 정벌하고 그 땅에 진번, 임둔, 낙랑, 현도 등 4군을 설치했다. [위지]에서 말한다. 위만이 조선ㅇ르 공격할 때, 조선왕 준은 궁궐의 여인들과 가까운 부하들만 거느리고 바다를 건넜다. 그리고는 남쪽 한 땅에 나라를 세워 마한이라 했다. (p. 27) [통전]에서 조선의 유민이 70여 나라로 나뉘었는데, 각각 그 영토가 100리 씩이라 했다. (중략) 마한은 서쪽에 54소읍이 있어 모두 '나라'라 했고, 진한은 동쪽에 12소읍이 나라를 자칭했다. 변한도 남쪽으로 12소읍이 나라를 칭했다. (p. 30)

내가 중고등학생일땐 기자조선이라던가 위만조선에 대해 배운적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요즘 중고교생들의 교과서를 보면 이 내용이 나온다. 역사가 과거이야기로 그저 지난 일이라 고정불변일 것 같지만 사실 역사는 매 시대 새롭게 읽히는 과거로서 변화한다. 이 변화를 판단하는 데 있어 각자의 역사관이 그만큼 중요하다 할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역사책을 읽는 것이 중요한데, 이 책은 <삼국유사>라는 본문과 적절한 보충설명이 쉽고도 객관적으로 쓰여 있는 것 같아 믿음직해 보였다.

위 내용에서 '삼한'은 우리가 알고 있는 마한,진한,변한과 좀 다르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삼국유사>는 삼한 가운데 마한을 고구려, 변한을 백제, 진한을 신라라고 불렀던 최치원의 관점을 존중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사의 순서 또한 '마한-고구려-변한 백제-진한'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마한을 백제의 모태로, 변한을 가야의 시초로 생각하는 오늘날의 역사적 지식과는 어긋난 것이다. 이는 삼한이 곧 삼국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따르고자 한 것이다. (p. 40)' 또한 '<삼국유사>의 모습은 일연의 역사관과 국제 관계의 이상을 반영한 것이다. (p. 34)' 라는 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알아두어야 할 것같다.

지금 풍속에 '경'을 서벌(서울)로 읽는 게 이 때문이었다. (p. 60)

이빨이 더 많아서 먼저 왕위에 올랐다. 여기에서 잇금(이사금, 임금)이라는 말이 유래하여, 유리왕부터 지금까지 '임금'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다. (p. 63)

미추왕릉의 서열도 박혁거세를 비롯한 박씨 왕족의 5릉보다 위에 두어 대묘라 하였다. (p. 71)

새로 알게 되는 깨알 역사 상식들이 재밌기도 했지만, 고조선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대 왕들의 신화적 이야기를 읽으며 든 생각은 당시 한반도의 상황이 서양역사가 유래된 펠레폰네소스반도와 그닥 다를게 없었다라는 점이었다.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땅에서 세습이 아닌 왕위계승이 이루어졌고 자잘한 도시국가들로 느슨한 연합체가 이합집산했다는 점이 말이다. 다만 한반도는 바다로 나가면 주변이 뻥 뚫린 광활한 태평양이었지만 펠레폰네소스 반도는 지중해라는 닫힌 바다여서 무수한 문화들이 서로 얼키고설켰다는 점이 이후 역사의 향방을 가른 것이 아닐까 싶었다. 이런저런 역사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역사는 어디서든 참 비슷한 흐름을 보여주는 면이 있다.

의자왕은 백제가 멸망했던 해를 넘기지 못하고 병들어 죽었다. 황제는 벼슬을 추증하고 옛 백제 신하들의 조문을 허락했다. 사치 때문에 나라를 망친 것으로 유명한 임금들인 삼국시대 오나라 마지막 임금 손호, 남북조 시대 진나라 마지막 임금 진숙보 곁에 묻고 비석을 세웠다. (p. 100)

고려의 군대가 수십 일을 머무르다 떠났는데, 지휘에 따라 단정했고 규율을 조금도 어기지 않았다. 서라벌의 남녀들은 기뻐하며 말했다. "예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늑대와 호랑이 같았는데, 고려 태조 왕건 공께서 오시니 부모님을 뵌 것 같네요" (p. 150)

안종은 고려 8대 현종의 아버지로, 이후 고려 임금은 모두 현종의 자손이므로 결국 경순왕은 고려 임금들의 조상이기도 하다. (p. 153)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삼국을 생각했을때 고려 라고 하면 고구려 에서 맥을 이은 나라가 아닐까라고 막연히 생각해왔었나 보다. 이 책을 읽다보니 고구려와 백제의 이야기는 그 시작부터 멸망까지 짧게 다룬 반면 신라의 이야기는 굉장히 길고 자세했다. 사실 역사지도를 봐도 고려는 통일신라 땅으로 시작했다. 발해가 차지하고 있던 옛 고구려의 영역까지 넓혀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조선시대에 지금의 국경이 정해지기까지 결국 요동지역까지는 수복하지 못했다. 고려 시대의 역사가 신라의 역사를 자세히 남긴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신라의 역사를 고려와 연결시켜서는 잘 모르는 것 같지?

역사가는 평한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도리를 잃어 하늘이 더 돕지 않았고, 백성들은 의지할 데 없는 틈을 타 도적이 고슴도치 털처럼 일어났다. 가장 왕성한 이들은 궁예와 견훤 둘이었다. 궁예는 본디 신라 왕자인데도 자기 집안을 원수로 삼아, 선조의 그림을 칼로 베었으니 너무 심하게 사나웠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신라의 녹을 먹으며 반역할 뜻을 품어, 나라의 위기를 기회로 생각하고 그 도읍을 침략하여 왕과 신하를 다 짐승처럼 죽이니 천하에 으뜸가는 악당이었다. 그러니까 궁예는 신하들에 버림받고 견훤은 아들에게 불행을 당한 일이, 다 자업자득이고 누구 탓할 자격이 없다. 향우나 이밀 같은 능력자들도 한나라, 당나라의 천하통일을 막을 수 없었거늘, 궁예와 견훤 따위가 우리 태조를 당할 수 있었을까? (p. 177)

고구려, 백제, 신라에 대한 일연의 평가가 지금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평가와 어떻게 얼마나 다른 건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역사가의 평가는 시대마다 달라지기 마련인데, 지금 우리가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를 크게 두고 있는 부분은 과연 어디일까?

여하튼, 삼국의 이야기 끝에 저자는 가야의 역사도 빼놓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가장 빈약하게 배우는 부분이 가야인 것 같은데 최근 유적발굴도 활발하다 하니 이 부분의 역사가 좀 보완됐으면 좋겠다.

이렇게 고조선부터 시작하여 삼국과 가야의 시작과 멸망을 다루고 나면 각 국에 불교가 언제 어떻게 전래됐는지를 시작으로 절이나 불상, 탑 등에 얽힌 이야기, 유명한 스님들의 일화 그리고 민간에 전해지던 이런저런 교훈적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대개가 설화적 이야기들이다 보니 약간은 전래동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신선하게 읽혔던 부분은 (아무래도 불교 이야기라서 그런가) 인도등의 외국과 관련된 이야기들이었다.

"너희 신라 황룡사는 석가모니와 예전 세상 가섭 부처님들이 강연하던 땅이라, 연좌석이 아직도 있다. 그래서 인도 아소카왕이 황금을 좀 모아 바다에 띄워 보내, 1300년 후 신라에 다다라 황룡사에 모셔질 수 있었다. 다 공덕과 인연 덕분이니라" (p. 233)

이렇게 땅에서 돌로 된 뭐가 자꾸 나온다는 점은, 샤머니즘 거석 신앙이 불교에 수용된 결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p. 240)

물고기 상징은 우선 수로왕과 아내인 허황옥의 상징물이 쌍어, 물고기 두 마리였다. 이는 메소포타미아에 기원을 두고, 불교의 상징으로서 물고기처럼 눈을 깜빡이지 않고 열심히 수행하는 이미지를 얻기도 했다. 한편 로마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도 물고기로, 예수의 시대를 황도12궁 물고기의 시대라 부르기도 했다. 물고기는 이렇듯 신과 생명의 기원에 관한 종교 신앙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소재였으므로, 만어산과 같은 물고기 산의 이미지가 가능한 것이다. (p. 278)

인도에서는 신라를 '구구타예설라'라고 부른다. '구구타'는 닭, '예설라'는 귀하다는 뜻이다. 인도에 전해지기로는, 신라가 닭의 신을 공경하므로 닭의 깃을 머리에 꽂아 장식했다고 한다. (p. 323)

지금은 없지만 황룡사가 정말 중요한 절이었구나 싶어 더 궁금해지고, 거석신앙이 불교와 연결된 점도 아하 그랬구나 감탄했고, 인도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신선했다. <삼국유사>가 이렇게 재밌는 책인데 그동안 왜 고전으로서 읽을 생각을 못했나 싶을 정도다. 역자는 <삼국유사>가 여러 이야기의 모음집이므로, 순서대로 읽는 것도 좋겠지만 초심자의 경우 아무 곳이나 흥미로운 부분부터 띄엄띄엄 읽어나가는 방법도 권장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1편과 2편은 아무래도 연대기적 역사이야기이다 보니 순서대로 읽고, 3편 이후 불교관련 이야기들은 자유롭게 읽어도 좋겠다라고 생각한다.

여하튼, 우리의 역사고전으로서 이렇게 대중적으로 읽을 수 있게 해준 클래식아고라 시리즈 관련자분들께 그저 감사한 마음이다. 이 시리즈의 1권인 <징비록>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는데, 2권인 <삼국유사>도 이처럼 즐겁게 읽고나니 앞으로 나올 다른 책들도 절로 기대가 된다. '고전 회복 운동'으로 시작했다는 클래식아고라 시리즈, 꾸준히 지속되길 응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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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예찬 - 라틴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5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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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읽히지만 가볍지 않은 고전, 역시 현대지성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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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예찬 - 라틴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5
에라스무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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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권력의 최정점에서도 유머와 진실의 힘으로,

중세를 끝내고 르네상스 부흥기를 열다.

<돈키호테>저자 세르반테스, 그리고 셰익스피어에게 영감을 준 역작

고전을 이 시대에 맞는 현대어로 번역하면서도 원전을 완역함으로써 그 완성도를 높인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 45번! (내가 정말 좋아하는 고전 시리즈다! 믿고보는 현대지성 클래식!! ^^) 이번엔 라틴어 원전 완역본 <우신예찬>이다. '어리석음의 신' 우신을 등장시켜 그 어떤 신보다 찬양하는 풍자와 해학으로 당대를 신랄하게 꼬집으면서도 책장을 넘길때마다 피식피식 웃게 만드는 이 책은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인문학자 에라스무스의 대표 저작 이다.

당신은 예리한 통찰력으로 여느 사람들과 다르게 독창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행동거지와 성품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냥하고 친절해 어느 때나 누구와도 잘 어울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작은 연설문을 친구가 주는 기념품으로 기꺼이 받아서 읽고 간직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 글을 당신에게 헌정합니다. 그러니 이 글은 이제부터 내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것입니다. (p. 12) 글이 가볍고 장난스럽다며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은 이런 글을 내가 처음 쓴 것이 아니고, 이미 과거에도 위대한 저술가들이 자주 써왔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p. 13) 인생의 다른 분야에서는 얼마든지 농담을 허용하면서도 학문에서는 농담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것, 게다가 실없게 들려도 사실은 진지한 성찰로 이끄는 농담조차 허용하지 않는 것은 정말이지 부당합니다. (p. 14) 다른 사람들이 나름대로 판단하겠지만, 내가 자아도취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어리석음을 예찬하되 결코 어리석지 않게 예찬했습니다. (p. 15) 분별력 있는 독자라면 내가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거움을 주기 위해 이 글을 썼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릴 것입니다. (p. 16)

- 서문 中 -

'로테르담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가 친구 토머스 모어에게' 라는 제목의 서문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연설문'의 형식을 띠고 있다. 따라서 책이 내게 말해주는 듯 읽혀지면서 읽다보면 어느새 약간 우스꽝스럽고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청중의 웃음을 유발하며 호쾌하게 연설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읽혀지는 책이다. 서문부터 그 발랄함과 당돌함이 느껴지는 듯 한데, 자신은 우신을 예찬할 뿐이므로 분별력 있는 독자라면 즐겁게 읽어주리라 생각한다는 저자의 말은 이 책을 읽고 기분나빠할 누군가에게 마치 '웃자고 한 농담에 죽자고 덤벼들 건 아니죠?' 라고 미리 당부하는 것만 같다.

작가는 우신이 누구인가 라는 출생?!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로마적 고대의 신들로부터 계보적으로 엮어내기 시작한다. 우신은 어리석은 신이 아니라 삶에 쾌락을 더해준다며, 우신이 최고의 신이고 우신 없이는 인간의 모든 관계가 유지될 수 없으며 우신을 통해 국가와 영웅 그리고 제도 또한 탄생하고 유지되는 것이라고 예찬을 거듭하는 것을 읽다보면 '세상 뭐 있어 마냥 즐겁게 살자'하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지만 언제 시작됐는지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풍자를 읽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신학자들은 배고프고, 과학자들은 춥고, 천문학자들은 조롱당하고, 논리학자들은 멸시받아도, 오직 '의사만은 일당백의 몫을 해냅니다.' (중략) 특히 오늘날 너 나 할 것 없이 의사가 되어 행하는 의술이라는 것은 수사학과 조금도 다를바 없는 아부술에 불과합니다. 의사 다음으로 높은 자리는 법률가의 것입니다. 어쩌면 이들에게 최고 윗자리를 내주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p. 104)

이 구절이 특히 현실적으로 와 닿았는데 그 옛날 부터 의사, 판사 등의 '사'자 붙는 직업들은 이토록 선망의 직종이었나 싶어서. ㅋㅎㅎ

하지만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종교에 관련된 내용들이 많았는데 '가톨릭에 만연한 온간 미신들' 같은 경우 우상숭배를 그토록 처벌하던 종교에 이토록 고대로부터 내려온 우상들이 성인들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었구나 싶어서 저절로 쓴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귀족, 예술가 부터 철학자, 신학자, 수도사, 군주, 주교, 추기경, 교황, 사제 등 콕콕 찍어 풍자에 풍자를 거듭한다.

인문주의 운동과 종교개혁이 맞물려 있던 시대에 나온 이 책은 에라스무스가 가벼운 마음으로 쓴 것과 달리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르네상스 시대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저작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에라스무스가 이토록 신랄하게 당대를 풍자했다고 해서 종교개혁에 찬성했던 것은 아니다. 에라스무스는 가톨릭 신앙을 바른 방향으로 다시 세우길 원했다. 여하튼, 이 책의 <해제>에서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 특유의 상세한 설명까지 읽고 나니 가볍게 읽었으되 가볍게 마무리한 것 같지는 않아 뿌듯한 마음이 든다. 역시 고전은 제대로 된 원전번역본을 읽어야 한다. ㅎㅎㅎ

-리뷰어스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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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 아름다움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조주관 지음 / arte(아르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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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속, 미와 추, 생과 사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뇌를 체화한 도스토옙스키의 통찰

'아름다움은 인간을 구원하는가'

러시아문학자인 저자가 쓴 이 책은 그림전문 책은 아니지만 한 페이지를 과감하게 그림에 할애함으로써 그림 보는 재미도 있고,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알면 좋겠지만 몰라도 읽을 수 있으니 딱히 문학책이라고 할순 없지만 문학적으로 읽히는, 그러니까 미술과 문학이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에서 융합되어짐을 알게하는 그런 책이다.

지금부터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과 그의 삶 그리고 그가 사랑한 그림들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 책에 또 다른 제목을 붙인다면 그건 아마도 '도스토옙스키의 미술관'이 되리라.

여기서 '미술관'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회화·조각 따위의 미술품을 모아 전시하는 곳을 가리키는 미술관(美術館)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나 비평가가 미술을 보는 관점을 뜻하는 미술관(美術觀)이다. 세계적 문호 도스토옙스키는 미술애호가로도 유명했지만 그 스스로 뛰어난 미술평론가이자 시사평론가이기도 했다. (p. 10)

우리는 이 책에 '전시'된 미술작품들을 통해 도스토옙스키의 미술 경험을 함께 나눌 수 있다. 그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물들지 않은 자기 자신만의 시각으로 미술작품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눈으로 다시 한번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읽어본다면, 우리 역시 그의 작품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확장될 것이다. (p. 12)

-작가의 말 中-

저자에 따르면 러시아문학가들 중에서 도스토옙스키만큼 여행을 자주 다닌 작가가 없다고 한다. 또한 도스토옙스키는 여행가는 곳마다 미술관에 꼭 들렀고 어쩌면 미술관을 가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 듯도 보일 만큼 그림에 남다른 애정이 있었다. 이러한 미술경험은 작가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문학은 그런 영감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그 탄생의 순간을 초상화를 통해 조금 짐작해 볼 수도 있기도 한데,

'흥미롭게도 유럽 미술관들에는 왕과 귀족, 성직자의 초상화가 많은 반면 트레티야코프미술관과 러시아미술관에는 작가와 예술가의 초상화가 더 많다. (p. 85) 화가 바실리 페로프는 '예술적 사고에 몰입하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창작의 순간'을 초상화에 담았다. 이 초상화의 진수는 작가의 영혼을 훌륭하게 포착하고 있다. (p. 86)' 작가는 그림을 사랑하고 그런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도스토옙스키의 초상화를 남김으로써 우리에게 작가의 몰입어린 순간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사랑한 화가 역시 라파엘로다. 그는 라파엘로를 최고의 예술가로 꼽았고, 그의 작품 <시스티나의 마돈나>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그림이라고 격찬했다. 바로 이 성화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아름다움에 대한 인류의 이상을 찾았다. 그가 '라파엘로 그림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 121) '그림 읽기'는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담긴 의미를 자세히 음미하면서 감상함을 뜻한다. (p. 130)

나도 라파엘로의 그 부드러운 그림들을 좋아하는데 도스토옙스키는 굉장히 종교적 찬미감으로 라파엘로의 그림들을 극찬했던 것 같다. <시스티나의 마돈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 책을 통해 알게된 부분이 있으니 '라파엘로 그림의 배경에는 수많은 아기 영혼의 얼굴들이 그려져 있다. (p. 145)' 라는 점이었다. <시스티나의 마논나> 머리 위 부분을 확대하여 책에 실어놓았는데 배경으로 희미하게 수많은 아기 영혼들이 보여서 새삼 놀라웠다. 어린이에 대한 종교적 순수성을 찬미했던 도스토옙스키였기에 이런 아기영혼 그림들을 심어놓은 라파엘로의 그림에 더욱 심취했던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아름다움에 대한 두 가지 기준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성(聖)과 속<俗)의 아름다움을 구분하고 있다. 그에게 최고의 아름다움은 '성스러움'이다. 라파엘로의 그림에서 '저 너머'의 초월성을 상기시키는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발견한 도스토옙스키는 영성의 아름다움을 소설의 주인공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속<俗)의 아름다움은 시각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중략) 성(聖)과 속(俗)의 아름다움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것은 '어리석음의 미학(美學)'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아름다움은 어리석음을 내포한다. 그의 미적 세계관은 '어리석음의 미학'에서 나온다. (p. 149) '유로디비'란 중세 러시아 정교 전통의 '세상 속에서는 바보스러우나 영적으로는 가장 지혜로운 하느님의 사람'을 가리킨다. '유로디비'는 한마디로, '어리석은 사람'이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속된 세상의 물정을 따라잡지 못하지만, 그들은 세속적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삶의 신성함을 발견한다. 세상을 구원해줄 사람은 지식이나 힘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영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말한다. 그들의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p. 150)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순수한 어린이와 세상이치엔 어두워 백치처럼 보일지라도 영적으로 아름다운 캐릭터를 자신의 작품에 꼭 등장시켰다고 한다. 그가 좋아했던 그림들이 대부분 종교적이되 아름답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들인 것을 보면, 그가 자신의 문학세계에 표현하고 싶었던 것을 그림으로 표현했을때 그런 그림들이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크게는 '성과 속' '미와 추' '생과 사' 라는 3부로 구성된 책이었지만 대부분의 글에 등장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었다.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가 가장 아름답다고 했던 그림이 라파엘로의 작품이었다면 라파엘로의 그림을 글로 써 놓은 것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았달까. 따라서 이 책을 읽고나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꼭 읽어야겠구나 싶다.

도스토옙스키가 강조한 '눈'은 시각예술인 그림을 논하는 이야기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가 언급하는 화가들은 모두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계'를 '보는' 눈의 소유자이다. 그러한 화가들의 예술적 상상력은 보이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스토옙스키에게 창작과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들은 모두 '눈'에 대한 예술적 접근을 본격적으로 보여준 예술가들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창조해낸 시각예술은 현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p. 331)

-에필로그 中-

이 책을 읽으며, 도스토옙스키는 그림을 본다기 보다 읽었다고 느꼈기에 그런 그의 문학작품을 우리는 읽는다기 보다 '보는' 경험을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들 속에서 유독 어리석이보이나 순수한 캐릭터들에 관심을 갖고 읽어야 겠구나 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영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그런 면에서 읽는 내내 미켈란젤로가 떠올랐다. 천재예술가들은 종교에 대해서도 남다른 믿음을 깨닫게 되는 것일까...그러한 영감으로 그토록 천재적인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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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쫓아오는 밤 (반양장) - 제3회 창비×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소설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14
최정원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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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창비X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소설상 수상작

"도망쳐야 한다. 그놈보다 더 빨리"

소설Y클럽 작품으로는 5번째이고 책권수로는 여섯번째 책인 <폭풍이 쫓아오는 밤> 가제본을 받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작품이 좋았고 이번 작품도 역시 좋았다. 더구나 이번 작품은 '창비X카카오페이지' 수상작이기도 하다. 이제 소설Y클럽 시리즈는 영어덜트 소설 분야에서 믿고볼 수 있는 브랜드가 된 것 같다.

개 짖는 소리,라고 부를 만한 소리일까 저것이. 이서에게는 정신없이 내지르는 그런 비명. 뒷덜미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유독 차서 몸서리가 쳐졌다. 역시 이 여행은 오는 게 아니었다. (p. 34)

신이서.

고1여학생의 발랄함은 1도 찾아볼 수 없는 표정없는 얼굴에 짧고 차가운 말투 그리고 손등부터 팔꿈치까지 이어진 화상흉터를 가진, 한마디로 사연많아 보이는 소녀. 이서는 나이터울이 많이 지는 유치원생 동생인 이지와 아빠 이렇게 셋이서 처음으로 여행을 왔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자연적인 산속의 펜션에. 하지만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던 이 여행은 시작부터 찜찜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넷이었던 가족이 셋이 된 그날 이후로, 이서 가족은 내내 이런 식이었다. 아빠는 이서를 건드리면 터지는 비눗방울 대하듯 했다. 이서는 오히려 바윗돌 흉태를 냈다. 겉으로 보기엔 다정한 아빠와 예의바른 딸이었지만 그들 사이의 거리는 다섯 걸음 이하로 좁혀진 적이 없었다. 둘 사이를 마음껏 오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지뿐이었다. (p. 35)

이지만이 오직 이지만이 이서의 삶의 이유였다. 엄마를 잃은 이후, 그날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면 하는 후회속에 이서는 오직 이지만을 위해 지금을 버티고 있었다. 이지에게서 엄마를 뺏은 것이 자신인것 같아서.

두 팔을 활짝 벌린 너비의 두 배 그키였던 창문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를 가득 채운 채로 그것은 손발로 바닥을 기느라 엎드린 이서의 바로 코앞을 지나고 있었다. 철사처런 억센 섬유가 통나무 벽에 비벼지며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마찰음을 만들어 냈다. 털가죽이다. (p. 44)

성수기도 아니었고 유명휴양지도 아니었기에 방문객은 많지 않았다. 이서네 가족과 바로 옆 펜션의 등산복 일행과 좀 떨어진 단체숙소에 머무는 손님이 전부였다. 그런데 갑작스런 폭풍우 속에 통신이 두절되고 상황을 알아보러 아빠가 나간 사이 옆 동이 습격을 받았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거대하고 시커먼 그것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찢어 삼켰다. 다른 곳들도 차례차례...

"거기 누구 있소?" (p. 109)

"여긴 다 살았네!"

남자는 묘하게 뒤틀린 입꼬리를 위로 끌어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의미를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p. 110)

남수하.

축구를 좋아하지만 얼마전 그만두고 엄마의 부탁에 의해 교회캠프를 따라온 수하는 관리동 매점에서 이서를 마주쳤을때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습격을 피해 이지를 업고 온 이서를 다시 만났을때 수하는 이서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이서 자매와 함께 캠프 숙소로 간 수하 일행은 '그것'의 습격을 받지만 사냥총을 든 낯선 사내에 의해 습격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내에겐 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그들은 아직 폭풍 가운데 있었다. (p. 128)

일행들을 봉고차에 태워 산 밖으로 내보내고 이서는 홀로 그 자리에 남기를 선택한다. 아빠를 찾아야 했다. 이지를 위해. 이지에겐 아빠가 필요하니까.

하지만 수하가 덩달아 봉고차 밖으로 뛰어내렸을때 이서는 의아했다.

수하는 이서를 혼자 둘 수 없었다. 그 표정을 그 표정 속에 숨은 것을 그 표정이 남긴 것을 지울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직감했기에.

그런 수하 덕분에 이서는 폭풍을 견뎌낼 수 있었다. 일단 사냥총을 들고 있는 낯선 아저씨부터.

"아저씨네 개죠?"

"아니야!"

박사장이 펄쩍 뛰었다. (p. 159)

"내 개가 아니라고! 나는 맡아서 관리만 하고 있었을 뿐이야!"

"아니, 내 말은... 됐다. 그러니까, 어. 상관없어. 일단 빨리 잡아야 해. 그러면 돼" (p. 160)

펜션이자 단체 캠핑장으로 이용되던 수련원에 손님이 줄어든 이유는 단순히 가까운 근처에 리조트가 새로 생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관리동 아저씨는 종종 들려오는 이상한 짖음을 근처의 개농장에서 들리는 소리라고 했지만 그 농장은 평범한 농장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이 농장에 살고 있는 것일까, 누가 왜 그런 것을 사육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을 그처럼 참혹하게 습격했던 것일까, 그런 현장을 보고서도 왜 신고하기보다 일단 잡아야 한다고 하는 것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이서와 수하의 상처는 이 사건과 맞물려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괜찮냐고 물어보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 허세를 들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아니까. 우리는 너덜너덜하게 해진 허수아비다. 잔뜩 기울어져서, 한 번만 바람이 훅 불면 뒤로 넘어가고 말겠지. 하지만 저기 새 떼가 밀어닥치고 있으니 지금은 서 있을 수 있어야 했다. (p. 207)

'지루할 틈 없는 사건들, 맞서 싸우며 성장하는 주인공' 이라는 'YA심사단'의 평가처럼, 단숨에 읽히는 소설이었다. 폭풍같은 하룻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이 개인 아침으로 끝나는 소설이었다. 웃을 수 없던 아이들이 이제야 미소를 되찾은 것을 보며 안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역시 소설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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