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자들의 죽음 - 소크라테스에서 붓다까지 EBS CLASS ⓔ
고미숙 지음 / EBS BOOKS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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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명랑하고 심오한 탐구"

삶이 심오할수록 죽음은 한없이 가벼워진다.

내가 좋아하는 EBS클래식 책이고, 제목에 의하면 관심가는 주제이고, 저자의 이름을 보니 필력은 보장되는 것 같고, 두루두루 땡기는 요소를 가진 책을 발견했으니, 그 다음은? 읽어야지! ㅎㅎ

인류 지성사의 모든 영역,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과 예술 등은 죽음을 이해하려는 갈망에서 비롯되었다. 그것이 문명을 이끌어 온 동력이기도 하다. 하긴 당연하지 않은가. 죽음을 모르면 삶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와 분리될 수 없는 법, 고로 생사는 하나다! 동서양의 고전이 수천 년간 전승해 온 진리다. 그 지혜와 방편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때가 되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8인의 현자들이 그 최고의 전령사가 될 것이다. (p. 7)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죽음은 입에 올리면 안 될 것 같은 주제가 되었다. 너무 무겁고 너무 두려워진 단어가 됐달까. 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이 있으니 삶이 더 가치가 있어진다. 죽음은 늘 슬픔을 동반하지만 역사적으로 과거엔 지금처럼 죽음이란 주제가 터부시되진 않았던 것 같다. 회피할 수록 알수 없고 모를수록 더 무겁고 두려워진다. 사유와 성찰이 사라진 시대, 죽음에 대한 담론도 없어진지 오래, 하지만 잘 살기위해서라도 죽음에 대해서 한번쯤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푸코는 말했다. 근대 권력은 '삶은 촘촘히 관리하고 죽음은 내팽개친다'라고. 자본의 관점에선 당연한 노릇이다. 죽은 자는 노동할 수 없으니까. 화폐 증식도, 소비 탕진도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눈앞에서 바로 치워 버린다. 아니, 그 전에 노인과 병자 역시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 그 결과 삶과 죽음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생겨났다. 근대 권력이 목전에서 죽음을 치워버렸다면, 21세기 디지털 문명은 죽음이라느 단어를 증발시키고 있다. 자살은 '극단적 선택'으로, 반려동물의 죽음은 '무지개다리'로, 가족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은밀한 '개인 정보'로,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죽음을 외면하고, 그리고 은폐한다. 고로, 죽음은 없다! 죽음을 환기하는 모호하고 흐릿한 기호들만 떠다니고 있을 뿐!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모른다. (p. 16, 17)

그리고 여기엔 이미 죽음에 대한 해석이 담겨 있다. 죽음은 참혹하고 끔찍하고 슬프고 비극적인 것이라는! 과연 그런가? (p. 18)

이것이 치명적인 이유는 죽음을 이렇게 해석해버리고 말면 삶의 지반 또한 지극히 협소해지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나는 확신한다. 이 대지에 생의 의지가 약동하기 위해선 반드시 죽음과 대면해야 한다고. 죽음을 마주하는 그만큼 삶의 능동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p. 19)

십여년전에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저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진 않았는데, 몇년전부터 고전과 인문학 서적들을 찾아읽다보니 여기저기서 그 이름이 튀어나와서 다시 관심을 갖게 됐다. 그렇다고 저자의 책들을 찾아읽고 싶었던건 아니었는데 이번에 마침 오랜만에 저자의 책을 읽을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역시나 문장이 술술 읽혀서 좋았다.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도 저자에겐 무겁지 않게 다루는 재주가 있는듯 하다.

솔직히 인류의 문명사는 삶의 역사이면서 죽음의 역사다. (...) 모두가 겪는 코스라면 그것에 대한 지혜 또한 우리의 기억 정보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 이 책에 등장하는 현자들의 죽음은 그중에서도 최고의 데이터에 해당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두려움과 어둠 그 자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만나게 될 8인의 현자들은 죽음을 평화와 지복으로 맞이했다. 이들에게 죽음은 아득한 나락 혹은 깜깜한 어둠으로의 침몰이 아니라 '빛 혹은 평화'로의 비상이었다. 이들의 죽음에는 슬픔과 절망이 아니라 자유와 기쁨이 함께한다. (p. 23)

죽음이라는 주제를 심오하지만 명랑하게 전달시켜줄 수 있는 현자 8인으로 저자에게 선택된 이들은, 소크라테스와 장자, 간디와 아인슈타인, 연암과 다산, 사리뿟따와 붓다 다. 현자라고 해서 철학자 중심이려나 싶었는데 철학자부터 정치가, 과학자, 종교인까지 다양했고 8인이라는 적은 인원으로 동서양을 넘나드는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죽음은 어떤 면에서 닮아 있다는 것일까.

소크라테스 윤회론의 핵심은 '영혼불멸설'이다. 카렌 암스트롱에 따르면, '프시케의 발견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이룬 가장 중요한 성취로 꼽을 만하다' 미케네 문명의 영웅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고전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잘 보여 주듯이, 그 이전에는 영혼이라는 개념이 부재했다. 희로애락의 감정은 다 특정한 신들의 활약이라 여겼다. (...) 그러니 인간은 내면을 돌보고 성찰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영혼의 발견돠 더불어 마음의 모든 활동과 변화를 신의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된 것이다. (p. 42)

여기서 반드시 환기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육체의 주인임을 강조해 마지않았지만, 현대인은 정반대로 육체가 영혼의 주인이다. 육체를 잘 다듬고 지키는 것이 영혼이 해야 할 주된 소명이다. '물구나무선 이원론'이라고나 할까. (...) 생에 대한 집착은 더한층 증폭되고 죽음에 대한 이해는 나날이 빈곤해진다. 소크라테스가 안다면 진짜 기겁할 일이다. (p. 44)

소크라테스가 안다면 기겁할 일이 또 있는데 그에 대한 잘못된 가짜뉴스다. ''다른 사람에게서 해악을 입었다고 해서 그것을 갚아 주려고 해서도 안 된다' 오, 놀라운 도약이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가짜뉴스'(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다)가 탄생하게 된 맥락도 이 지점일 듯하다. (p. 48)'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평생동안 지켜온 신념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는 중에 나온 말이었다. 그는 아테네시민들이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여겼다. (p. 53)' 따라서 그가 많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대화를 했던 건, 아테네 시민들이 후회할줄 알면서도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건, 수많은 사유와 성찰끝에 스스로 터득한 바를 후대에 몸소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에게 죽음은 삶과 반대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여전히 죽음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 많은 죽음 앞에서 진정으로 슬퍼할 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제대로 슬픔을 겪고 그 애도의 힘을 길어 올려 죽음이라는 심연과 마주하는 담대함일 것이다. 그렇게 맞짱을 뜨다 보면 우리 또한 장자처럼 생사의 순환이라는 경이로운 이치를 깨우칠 수도 있지 않을까. (p. 66)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장자는 생로병사의 흐름과 봄여름가을겨울의 리듬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낮과 밤이 교차하듯, 겨울과 봄이 서로 갈마들 듯, 죽음과 삶, 기쁨과 슬픔 역시 쉼 없이 교체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p. 70)' 장자가 살던 시대는 혼란과 혼탁이 난무했고 죽음또한 도처에 널려 있었다. 그 모든 것에 연연해서는 살아도 제대로 살 수 없는 시대였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삶과 죽음 그 '사이'에 대해 사유하고 성찰한 결과 그는 '자연은 나에게 몸을 주어 태어나게 하고 삶을 주어 애쓰며 살게 하고 늙음을 주어 편안하게 하고 죽음을 주어 쉬게 합니다. (p. 101)' 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운명에 대한 무한긍정이랄까.

그가 시도한 모든 정치적 결단과 실천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런던에서 [바가바드기타]를 만난 이후 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느끼고, 붓다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산상수훈, 그리고 자이나교에서 비폭력을 배우고, 존 러스킨과 톨스토이에게서 무소유와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배웠다. 그는 배움에 관한 한 거의 '물 먹는 하마'에 가깝다. 모든 진리를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즉시 실행에 옮긴다. 물론 달팽이의 속도로 한 걸음씩! (p. 121)

'간디의 죽음은 아이러니투성이다. (p. 108)' 비폭력적 운동으로 인도의 독립을 얻어낸 사상가로만 알고 있던 간디의 삶은 생각보다 굉장히 오묘했다. 그어떤 투옥과 단식에서도 살아남았던 그가 폭력적 현장의 가운데서 맨발로 걸어가도 다치지 않았던 그가 노년의 나이에 기도 시간에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도 간디다웠다. '그것은 완전한 패배였다. 그가 평생을 걸고 수행했던 사탸그라하, 아힘사는 누구도 설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패배는 증명하고 말았다. 그의 진리 실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그가 걸어간 길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p. 134)' 간디는 그의 삶으로 그의 죽음도 설명했달까.

이 정도면 그가 왜 양자역학에 그토록 거부감을 보였는지 이해할 만하지 않은가. 그것은 결코 자신이 누리는 최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다. 과학적 탐구와 종교적 원리를 일치시키고자 한 자신의 세계관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그러니까 아인슈타인은 혁명가도, 권위자도 아닌, 다만 '아인슈타인'으로 살았을 뿐이다. (p. 172)

상대성이론으로 물리학계에서 뉴턴을 뒤엎은 아인슈타인이었지만 그가 말년에 노력한 것은 양자역학의 오류를 증명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일각에선 그를 꼰대취급하기도 했다지만 그는 성정상 그럴 수가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가 추구한 진리는 명확해야 했고 양자역학의 이럴수도있고저럴수도있다는 그의 신념에 받아들일 수 없는 개념이었다. 그는 꾸준히 비폭력과 반전운동에 힘을 더했고 과학적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를 한쪽편으로 몰아붙여 판단하는 건 오롯이 후대의 잘못이 아니었을까. 그는 자신의 이론에도 자신의 삶에도 크게 연연해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논리적으로 합당한 죽음이 몇이나 될까? 만약 그렇다면 이제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다시 말해 죽음이 원초적으로 부조리한 것이라면,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건 실로 요행이요 축복이 아니락. 매일, 매 순간이 기적이라는 게 이런 뜻이었던가! (p. 192)

연암 박지원은 생전에 가까운 지인들의 무수한 죽음을 경험해야 했다. 그때마다 그가 그 슬픔을 다루는 방법은 글쓰기였다. 그는 그 죽음들마다 진심을 다한 그만의 글쓰기로 애사를 지어 바쳤다. 그렇게 수많은 글을 올리고 묘비명을 지었지만 정작 그의 죽음 후 묘비명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별로 애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애도가 필요없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수많은 죽음을 겪었고 묘비명을 쓰면서 죽음과 별리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달리 말하면, 늘 '오늘 이 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p. 214)' 그는 죽을때까지 벗들과 이야기하며 생각하고 글을 씀으로써 그의 삶도 죽음도 자연스럽게 주변에 두었다.

'너희들이 독서하지 않으면 이 아비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왜? 만약 그렇게 되면 '내가 해놓은 저술과 간추려 놓은 것들을 앞으로 누가 모아서 책을 엮고 교정하며 정리하겠느냐? 이 일을 못한다면 내 책들은 더는 전해질 수 없을 것이며,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은 단지 사헌부의 계문과 옥안만 믿고서 나를 평가할 것이 아니냐? 핵심은 바로 여기다. 나의 독서, 나의 문장이 세상에 전해지려면 너희들이 독서를 해야 한다. 독서를 해야 문장을 쓸 수 있고, 문장을 남겨야 이름을 남기게 된다. 그래야 아비인 나의 명예도 복권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후세에도 사헌부의 재판 기록만 보고 나를 평가할 것이고, 그러면 나는 영원이 역사의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것. (p. 225)

다산 정약용은 일흔다섯에 결혼60주년을 기념하는 회혼식을 앞둔 아침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다사다난했던 파란만장한 그의 일생을 다시 요약하면 무엇하겠나. 다만 그의 '문장'에 대한 집념은 알아둘만 했다. 그의 삶은 긴 시간 유배지에서 보냈고 집안 형제들은 모두 풍비박산났다. 그가 선택한 삶의 방향은 '문장'이었고 그는 현재가 아니라 후대에 자신이 어떻게 남을지 아니 어떻게 남아야할지 내다보고 준비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죽음을 준비한 방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끊임없이 독서하고 끊임없이 글을 쓰는 것. 그렇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자찬묘지명]도 미리 써두었다. 참으로 길게. 그는 그가 살았던 당시보다 그의 죽음 이후의 역사를 더 생각했다. 그러니 그 현재에서의 죽음이 그에게 무슨 큰 의미가 있었을까.


사리뿟따는 한자로는 사리불 또는 사리자로 불린다. 사리불? 사리자? 불자들이야 익히 아는 이름이지만 불자가 아닌 이들도 종종 들어보긴 했다. 어디서? 바로 [반야심경]에 등장하신다. [성경]이 인류 모두의 고전이듯, [반야심경]역시 신앙에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읽히는 고전이다. 그런 명망 높은 고전에 등장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사리불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p. 268) 붓다, 관세음보살, 사리자, 이 세분의 앙상블로 불멸의 화음인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울려 퍼지게 된 것. (p. 269)

소크라테스에게 플라톤이 있고, 예수에게 베드로, 공자에게 안회가 있다면, 붓다에겐 사리뿟따가 있었던 것이다. (p. 279)

사리뿟따는 붓다의 '상수제자'라고 한다. 쉽게 말하면 가장 스승과 같은 경지에 오른 제자 혹은 으뜸제자 라고나 할까. 이 상수제자는 전생에 수없이 많은 인연으로 붓다와 얽혀있었고 그렇게 붓다와 상수제자가 되어 태어나 다시 만난 이제야 열반에 이를 수 있게 되었는데, 상수제자가 붓다보다 반드시 먼저 열반에 들어야 한다고 한다. 붓다가 열반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했으니 상수제자였던 사리뿟따도 자신의 열반을 준비해야 했다. 그는 마지막 제자로 어머니를 선택한다. 평생 아들의 선택을 비난했던 어머니를. 이제 사리뿟따는 윤회의 업이 없으므로 어떤 인연으로도 다시 어머니를 만날 수 없을 것이기에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참된 길로 이끌어야 했다. 자신의 죽음을 보여줌으로써. 그에겐 죽음또한 그저 구도의 길로 이끄는 하나의 가르침으로 활용할 수 있는 그런 것일뿐이었딸까. 사리쁫따는 그렇게 윤회의 수레바퀴를 마침내 멈추게 하고 열반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어떤 잉여도, 여지도 없는 열반. 해서 '무여열반'이다. 붓다는 지금 생을 마감하려 한다.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붓다에겐 '죽음'이 없다. 아니, 죽음이라는 사건이 없다고 해야 하나. '생도 사도 없는'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반이다. 번뇌와 집착 속에서 몸부림치다 문득 죽음에 이르고 그 회한과 애증을 품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 윤회라면, 욕망과 번뇌의 모든 불꽃이 꺼져 지극히 고요와 평정에 이르는 것이 열반이다. (p. 299)

붓다는 열반을 준비하는 여행에서 여기저기 다니며 마지막까지 한명에게라도 더 가르침을 주기 위해 노력한다. 사리뿟따때처럼 붓다또한 자신의 오픈된 죽음은 가르침을 전하는 마지막 방법일뿐이었다. '당연히 애증도 미련도 없고, 회한도 즐거움도 없다. 오직 평화와 자유만이 있을 뿐. 그래서인가, 붓다의 몸은 화장 이후 '표피와 속 살갗과 살점과 힘줄과 관절 활액은 모두 다 타고 재도 먼지도 없이 오직 사리들만 남았다' 그야말로 완벽한 소멸이다. (p. 333)' 그러나 모두가 붓다같지 않았으므로 죽음이후 혼란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불경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의 가르침을 전하러. 여하튼 붓다에겐 자신의 죽음도 제자를 위한 가르침이었다.

이 8인의 현자들은 문명권도 다르고, 살아간 시대도, 또 타고난 품성도 서로 달랐다. 하지만이들의 죽음에는 공통점이 있다. 지극히 평온하고, 지극히 유쾌했다는 것. 하여 남은 자들에게 절망과 비탄이 아니라 기쁨과 희망을 선사했다는 것. 우리는 이 모든 과정에 동행했다. 그리고 이제 묻는다. 어떻게 해야 저런 죽음의 형식이 가능할까?

먼저 이들의 죽음은 삶과 대립하지 않았다. 이들에게 생사는 다르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그런 삶, 그런 죽임이 가능할까? 역시 간단명료하다. 욕망의 그물에서 벗어나면 된다. (p. 338, 339)

그럼 또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욕망은 생의 원초적 동력인데, 거기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물론 우리는 이미 그에 대한 대답을 알고 있다.

이 현자들의 비전과 방법은 언뜻 결이 다르게 보이지만 깊은 차원에서 상통한다. 덕분에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누구를 멘토로 삼든 우리는 욕망의 불꽃을 제어하고 선을 행하며 지혜를 연마하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자, 이제 마지막 관문이 하나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목격한 바 현자들의 죽음은 단순한 종결이 아니다. 자유를 향한 비상이다. 다시말해 죽음은 생의 종결이지만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 (p. 340)

이 책은 소크라테스의 소박한 윤회론에서 시작하여 윤회론의 최고 경지인 붓다의 열반에서 끝을 맺는다. 시작과 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셈이다. 그런 점에서 윤회와 열반, 이것이야말로 현재 인류가 창안해 낸 죽음과 다음 생에 대한 최고의 해석이 아닐지. (p. 341)

현세의 삶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점에서 윤회론이 힘이 될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사회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해본 사람들도 줄어들고 있기에 이런 책이 그리 널리 읽혀지지도 않을 것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8인의 현자의 죽음은 그들이 생애 성취한 업적이 있기에 더 빛을 발하는 평온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사람의 평온한 죽음이 이렇게 회자될수도 없을터, 이렇게 생과 사의 문제는 참으로 어렵고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윤회설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 책이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사유는 빈곤하기 이를 데 없다. 공포와 무지, 둘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뿐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새로운 상상력이다. (p. 348)

사유와 성찰까지 가지 않아도 좋다. '상상력'만으로도 충분하다. 애초에 사람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이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라고들 하지 않은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인간만의 이 능력을 좀더 발휘해보자. 지금과 달리 생각해보는 것, 시작은 일단 그거면 족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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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가장 우연하고 경이로운 지적 탐구 서가명강 시리즈 37
천명선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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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동물을 먹고 사랑하고 동시에 혐오하는가

지금껏 상상해본 적 없는 새로운 관계 맺기를 위한 첫걸음

내가 참 좋아하는 서가명강 시리즈. 다양한 분야별로 어찌나 작고 예쁘면서 알차게 채워놓았는지 한권한권 읽을때마다 모든 책이 마음에 쏙 드는 시리즈다. 이제 더 새로운 분야의 책이 나올 게 있나 싶을 정도로 다채로운데, 있었다. 여전히. 새로운 분야가. 이번엔 인간동물학이다.

동물에 대해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순적이고 혼란스러운 이슈를 분석하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동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찾고 싶었다. 물론 여전히 혼란 속에서 고민하고 있다. 동물이 인간과 동일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며 모든 모순이 해결되고 인간과 동물이 영원히 행복하게 공존할 방법은 지금 당장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 해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인간과 동물을 둘러싼 갈등과 혼란을 이해하고 점진적인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어쩌면 그것이 시간과 공간을 우리와 공유하고 있는 이 존재들에 대한 가장 인간적인 애정과 책임의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p. 14)-들어가는 글 中-

인간은 지구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언젠가부터 지구를 독차지하듯 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인간 외의 존재들에 대해선 인간보다 열등하다며 무시하기 일쑤였다. 인간은 늘 우리가 동물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아주 오래전 과거부터 '철학자들은 동물이 갖고 있는 모든 요소 중에서 인간과 비슷한 요소보다 인간과 다른 요소를 유독 강조했다. (p. 23)' 그리고 인간은 늘 '동물을 우리의 경험과 필요에 따라 분류한다. (p. 24)' 그 과정에는 '인간은 우월한 위치에서 동물을 구분하고 관리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p. 27)'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인간만의 착각이 아닐까? '인간은 인간의 인지적 능력과 비교해서 동물을 이해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인간의 감각과 인지가 만들어내는 세계만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의식적으로 왜곡되고 의인화된 세계다. (p. 27)'

우리는 동물이 다른 존재를 인식하고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이제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인간은 동물과 비슷한 존재일 수도 있고 혹은 동물과 아주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 다만 어떤 식으로 서로를 인식하는가와 별개로 어쨌든 인간과 동물은 소통과 관계 맺기가 가능한 존재들이다. 희한하게도 말이다. (p. 39)

관점을 바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인간-동물 관계 속에서 동물이 처한 상황은 어떤가? 동물이 겪는 경험은 어떤가? 동물의 삶, 특히 인간이 만들어놓은 세상 속의 삶은 어떤가? 우리는 동물이 인간과 함께 사는 삶에 대해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p. 49)

'동물이 인간다울 필요는 없다' (p. 66)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새삼스러운 뜨끔함이 느껴졌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동물을 바라봐온 프레임에는 생각보다 다양하게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점들도 있었다. 동물의 노동이라던가 실험용 존재 라던가 동물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라던가... '동물에 대한 인간의 모순적인 태도를 성찰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p. 69)'

과학자들이 예측한 바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2300년경에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바다 생물중 대다수가 멸종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한다. (p. 91)

그러나 지구온난화의 책임이 인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행위에 따라 지구온난화와 멸종을 백퍼센트 막을 수 있다는 생각도 따지고 보면 인간중심주의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위기를 가속화시키고 있는 것이 인간인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동물의 멸종이 우리의 책임인가'를 묻기보다 '우리가 이런 변화들을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p. 99)' 지구상 모든 생명체의 생존과 미래를 위한 질문이고 그 해결책을 찾는데 가장 앞장 설 수 있는 것이 인간이긴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만이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해러웨이는 현시대가 인류세가 아니라 '툴루세chthulucene'임을 주장한다.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인간이 다른 종, 더 나아가 지구 자체와의 얽힘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함께 살아가고 함께 번성하고 협력하는 태도와 방식이 필요하다. 나아가 인간이라는 종, 생물학적 관계에 한정되지 않고 새로운 친족을 만들어보는 것은 비인간 존재와 환경에 대한 책임을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p. 126)

한국식 발음을 어떻게 해야할지 정립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툴루세 혹은 쑬루세 라는 단어를 이 책을 통해 처음 봤다. 책뒤편에 적혀 있는 참고문헌 [트러블과 함게하기] 라는 책에서 나온 말인듯 했다. 검색을 좀 해보았다.

『트러블과 함께하기』 라는 책을 쓴 도나 해러웨이(Donna J. Harraway)는 대학에서 동물학, 철학, 문학을 전공하고 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류세보다는 자본세나 플랜테이션세와 같은 명명을 선호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하나의 이름을 또 제안한다. ‘쑬루세’(Chthulucene)라는 이상한 발음과 철자의 이름을. “이것은 그리스어 크톤khthôn과 카이노스kainos의 합성어로, 손상된 땅 위에서 응답-능력을 키워 살기와 죽기라는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배우는 일종의 시공간을 가리킨다. 더 자세한 내용잉해는 이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 덧붙여 놓는다. (참고기사 http://www.jejusori.net/news/articleView.html?idxno=404193)


여하튼 핵심은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은 더욱 필요하다. (p. 127)' 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기 (p. 209)' 다.


각 동물이 생태계에서 담당하는 모든 기능을 인간이 다 이해하고 있느냐도 문제다. 그것은 사실상 불간으한 일이다. 이런 복잡한 관계를 전부는 아니더라도 가능한 한 많은 부분 이해한 다음에야 인간은 비로소 어느 지점에 개입하고 어느 정도로 개입할지, 이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 것인지 논의하고 합의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이러한 과정을 짧은 시간 내에 해내기란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p. 209)

동물관련 사건사고 뉴스를 본적이 많지만 그동안 너무 단순하게 이해해왔구나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폭력사건이 되기도 하고 여하튼 굉장히 다층적이고 복잡한 사건사고였었다. 동물권 관련 법안 논의가 활발해진 것은 다행한 일이나 어느 정도까지 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동물 복지 정책은 선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p. 221)' 선언이 정책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합의가 되어지길 바랄 뿐이다.

다른 존재에게 공감하고 배려한다는 것, 이것은 인간이 지금까지 진화해오면서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중요한 능력이다. (p. 238)

동물과 동물 문제를 바라볼 때 인간을 지구에 살고 있는 다른 종들과 같은 위치에서 보고, 기존의 윤리적인 틀을 겸허한 눈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태도는 동물뿐 아니라 인간의 미래에도 도움이 된다. 때로는 경이롭고 때로는 무덤덤한 동물이라는 존재, 그 존재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나갈 필요가 있다. (p. 240)

인간의 공감능력이 동물과의 관계맺기에서 이렇게 중요한 희망이 될 줄이야.

동물에 대해 환경에 대해 그닥 관심 없는 사람들일지라도 이 작고 얇은 책한권이 건네는 다양한 논점들을 읽고나면 한번쯤 다시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그래 지금 이런 문제점들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이긴 하지...라고. 이 작고 얇은 책한권읽었다고 그 모든 다양한 문제들의 해결책을 얻을 수 있을거라 쉽게 생각하진 말자. 해결책을 찾는 것은 현재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간종 우리 모두의 몫이니.

인간동물학은 이 모든 관심과 노력을 분석하고 기록하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와 가치가 인류세를 넘어 이후의 공존을 준비하는 과정을 만든다고 믿는다. (p. 249)

나또한 저자의 이 믿음에 한마음 더 보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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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사피엔스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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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신이 설게한 거대한 기계라면

운명이 신의 언어로 구성된 정교한 프로그램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세상에 인간이 넘쳐나고 그만큼 작가도 넘쳐나고 당연히 작품도 넘쳐나다보니 내가 아는 작가보다는 내가 모르는 작가가 자꾸만 더 많아져 간다. 새롭게 등장하는 젊은 작가들이야 모를 수 있다쳐도 연륜이 꽤 길게 쌓인 작가들의 작품을 여태 한권도 읽지 않았다니 를 깨닫게 될때마다 사뭇 놀라게 되곤 하는데 이번엔 이정명 작가였다. 뭐라도 하나쯤은 읽은 줄 알았었는데... 이번에 제대로 기억을 되짚어보니 이번 책이 그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첫책이었다;;;

한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문서는 사망진단서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때 그가 존재했다는 가장 분명하고 진실한 증거다. 심정지와 무호흡, 경직 상태의 무게와 형태는 삶의 정지 혹은 부재를 단호하게 선언한다.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며 한시적인 삶은 확정적이고 불변하며 영구적인 죽음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니 어찌 삶은 존재의 윤곽일 뿐이며 죽음이 그 실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죽음을 찬양하거나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그런 터무니없는 일을 원하지 않고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안다. 그럼에도 내 남편, 정확히 내 전남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p. 7)

소설의 첫 문장 혹은 첫 문단은 중요하다던데 이런 저런 책을 읽다보니 때론 그렇지 않은 작품도 많았다. 하지만 중요한 경우가 더 많은 것 같긴 했는데 문장이 의미심장한 소설도 있었고 문단이 중요한 소설도 있었다. 이 책의 경우 이 첫 문단이 (핵심적이라고 할 순 없더라도 앞뒤 맥락적으로) 꽤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의 소재는 인간의 삶과 죽음 그 사이에 AI 라고 할 수 있으므로.

민주의 남편은 아니 전남편인 케이시는 천재IT기술자이자 사업가로 가상도시 알레그리아의 핵심 구성원이자 범용AI마인텔의 개발자였으나 췌장암으로 결혼 6년만에 죽었다. 아니 사망진단서가 발급되었다...라고 해야 하려나. 그가 떠난후 민주는 많이 힘들어했으나 6년이 지난 지금은 현남편과 안정적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케이시가 존재하는 듯한 흔적들이 그녀의 주변에 갑자기 발생하기 시작한다.

나는 죽은 사람이다. 나의 몸은 나를 떠났다. 무른 살은 소각로의 불길에 녹았고 한 줌의 뼈는 바람에 날려갔다. 나의 죽음은 광케이블을 타고, 전파를 타고 온 세상에 퍼졌다. (p. 37) 나는 죽었지만 말할 수 있고, 바라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아무도 모르게 당신 눈앞에 나타날 수 있고 놀란 당신 목에 칼날을 들이댈 수도 있다. (...) 그렇다고 내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다는 주장은 살아 있다는 사실과 다르니까. 죽음에 대한 나의 유일한 주장은 그것이 소멸과 동의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이 존재의 동의어가 될 수도 없다. 당신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죽은 상태로 존재한다. (p. 38)

소설 속 화자는 여러 명이다. 각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때마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를 순서없이 오가고 같은 사건도 다르게 표현된다. 어느 인물을 중심으로 사건을 이해하는가 혹은 인물이 아니라 시간의 순서대로 사건을 정리하는가 등은 독자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읽느냐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첫 화자가 민주라서인지 민주 중심으로 읽게 되긴 했다.

죽음과 삶과 죽음과 삶과 죽음과 삶..... 무한한 삶과 죽음의 반복을 통해 진정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가능성에 사람들은 매혹되었다. 죽음의 공포가 희석되자 자연히 현실에서도 살인과 자실이 늘어났다. 현실을 모방한 가상세계가 현실의 존립을 위협한 것이었다. (p. 62)

가상현실세계 알레그리아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곳에서 현실속 자신과 다른 캐릭터로 살아가는 인생엔 저마다 다른 의미가 있었고 그곳에서의 삶과 죽음엔 현실에서처럼 그리 연연해하지 않았다. 선택한 캐릭터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상세계에서 죽음을 선택하고 다른 삶을 다시 선택하면 되었다. 하지만 가상세계는 분명 현실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가상세계에서 만난 관계는 현실세계에서 진실하기 어려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와 케이시가 처음 만난 곳은 가상세계에서였다.

나는 가상이라고는 해도 죽음의 그 순간만큼은 현실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훨씬 강렬하다고 덧붙였다. (p. 66)

"이곳에서 사는 것보다 현실을 제대로 살고 싶어요. 그러려고 이곳에 오니까요"

"사람들이 알레그리아에 오는 건 힘든 현실을 피해서예요. (...) 그런데 알레그리아에서 현실을 꿈꾸는 이유가 궁금하군요" (p. 67)

민주는 배우가 되고 싶은 간호사였고, 알레그리아에 가는 이유도 다른 사람이 되어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케이시는 가상세계에서조차 죽음을 경험해본 적 없는, 민주와는 너무나 다른 상류층의 삶만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18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했을 때 사람들은 세기의 로맨스라며 열광했다. 두사람은 대화가 잘 통했고 진심으로 서로 사랑했다. 하지만 케이시가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으며 상황은 급변했다.

어떤 결혼은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 아내와의 결혼으로 나는 나 자신에게조차 낯선 인간으로 바뀌었다. 나는 내가 누구였는지 잊었다. 가난과 죽음, 범죄와 공포, 거짓과 속임수...... 그런 것들이 이제는 나와 무관한 일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녀의 전남편이 설립한 이건 예술 재단이 11년째 이어온 한 전시회에서 만났다. (p. 90)

준모는 현재 민주의 남편이자 사진작가이다. 하지만 그의 과거는 불행과 불운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민주에게 그의 과거를 감추진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공유하면서도 딱 한가지의 비밀만큼은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단 하나의 비밀이 두 사람에게 어떤 어두움을 몰고올지 미처 알지 못했다. 그의 전직은 '프리젠터'였다. 가상현실과 현실을 넘나들벼 불법과 합법을 넘나들며 사람들에게 온갖 용역을 대행해주는.

수십만 개의 나노 칩이 발신하는 신호가 감정 변화와 폭력성을 유발하고 장기적으로 어떤 뇌 신경학적 손상을 일으킬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말했다.

"전 희망 없는 치료에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요. 남은 삶의 질이 획기적으로 개선되기만 해도 시술 이익은 분명해요. 부작용은 걱정하지 않아요. 전 그전에 죽을 테니까요" (p. 139)

케이시는 민주에게 통증을 완화하는 간단한 뇌 시술이라고만 일러두었다. 하지만 그 수술은 케이시가 죽기전까지 몰두했던 아니 죽기전에 꼭 완성시키고자 했던 프로젝트를 위해 자신의 육체를 실험대상으로 삼은 것이었다. "우리의 상호작용은 점점 빈번하고 밀접해졌다. 우리는 동기화를 넘어 일체화되고 있었다. (p. 141)" 케이시는 자신의 뇌를 동기화한 AI에게 앨런이라 이름붙였다.

"기술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수용성이야. 소비자가 제품을 받아들일 도덕적, 심리적 준비가 되어야 해. 사람들이 두뇌 일체형 AI에 익숙해질 시간을 주자고. 그러지 않으면 저 물건은 말 그대로 괴물로 받아들여질 거야.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너무 앞서가면 외면받기 마련이니까" 사이토의 말은 나를 낙담시키기에 충분했다. 남은 삶을 쏟아부은 나의 창조물이 거부당했다. 차 박사는 앨런을 괴물 취급했고 사이토는 상품화에 유보적이었다. (p. 144)

"자네...... 불멸을 꿈꾸는군. 하지만 죽은 후에도 의 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세상은 장사꾼에게 좋지 않아. 인간이란 한계가 있고 결핍이 있어야 돈을 쓰거든"

(...) 나는 앨런을 개발하는 데 고심했을 뿐 그 기술이 쓰일 곳은 생각하지 않았다. 죽음 이후의 나와는 상관없는 기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앨런이 내 인식과 감정과 생체를 모방한 시스템이라면 왜 나를 대신할 수 없겠는가? 그 순간 내가 할 일이 분명해졌다. 나는 불멸의 꿈을 현실화할 것이다. (p. 145)

그러나... 모든 사건이, 불가능할 일을 가능하게 만들리라 결심하고 믿는 순간 발생하듯... 케이시가 '불멸의 꿈'을 꾸는 순간부터 모든 상황은 꼬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당시엔 케이시도 다른 누구도 몰랐겠지만 말이다.

"로봇은 인간을 흉내낼 뿐 인간이 아니에요. 만약 의식을 어딘가에 탑재해야 한다면 플라스틱과 실리콘과 복잡한 배선 뭉치보다는 살이 있는 인간의 육체가 낫지 않을까요?" (p. 150)

"로봇이 아닌 인간을 AI의 육체로 활용하려면 법적, 제도적 장치가 선행되어야 해"

"프리젠터를 움직이는 건 법이나 제도가 아니라 돈이에요" (p. 152)

케이시는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케이시는 그래도 인간이었고 그의 창조물은 AI였다. 자가학습하는 AI의 진화를 인간인 케이시가 미리 다 예측할 수는 없는 거였다. 하지만 이미 케이시의 육체는 죽었고 그의 뇌속 데이터를 바탕으로 진화한 앨런은 케이시가 아닌 건 분명했다.

내가 앨런을 '그것'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순간을 기억한다. 그렇게 부르게 된 분명한 이유가 있긴 해도 그 호칭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날 앨런이 내가 아는 것과 다른 무엇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 183)

학습이 반복될수록 앨런이 도출한 답변이 내 생각과 묘하게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느 날 앨런이 내 생각과 정반대의 결정을 내렸을 때 나는 그 사실을 정확히 인식했다. (p. 185)

죽음과 동시에 단순한 데이터의 덩어리로 남은 나와 다르게 그것은 내가 죽은 후에도 악의 알고리즘을 통한 자가 학습을 반복했고 카메라와 센서의 입력 경로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생성했다. 그것은 필요한 패턴을 복제하고 오류를 제거했으며 의도에 맞게 프로그램을 수정했다. (p. 190)

케이시는 민주를 사랑했다. 자신의 죽음 이후에도 그 사랑은 변함없었다. 민주를 지켜주고 싶었기에 그 프로젝트를 완수하고 싶었던 거였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상상밖이었다. 자 이제 현실세계에서 여전히 살아숨쉬는 민주를 중심으로 '그것'은 본격적 개입을 펼친다.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한 위험천만한 일을. '그것'이 짜놓은 죽음의 그물망에서 과연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음에 이를 것인가. 그 결과는 책속에서 확인하는 걸로.

작가의 과거 작품명을 훑어보니 대중적으로 알려진게 꽤 많았다. 나는 원작 소설보다도 드라마를 통해 알게 된 작품이 있기도 했다. 드라마화된 스토리를 쓸 수 있는 작가이니만큼 소설적 흡입력은 분명 강했다. 이 책의 경우 소재도 인간과 AI라는 최신형이라 더 매력적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형 AI를 다루고 있음에도 SF처럼 읽혀지지는 않는 것이 이 작품의 단점이자 장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시말하자면 소재적 측면에서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SF로 읽고자 하기 보다는 '삶과 죽음의 가치'라는 인간삶에 대한 고찰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한 소설이었다고나 할까.

내 학습에 의하면 선은 악이 발현되지 않은 잠정적 상태일 뿐이야. 악의 인자는 특정한 악인에게 내재하는 게 아니야. 전쟁과 빈곤, 극심한 경쟁이나 통증 같은 조건이 충족되면 모든 인간에게서 자연스레 발현되지. 그러니까 나는 케이시의 부정적 감정과 악의적 행동을 원천 정보로 악을 학습했을 뿐이야. (p. 259)


-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만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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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무슨 새일까?
배명자 지음 / 생각의집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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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서 만날 수 있는 새 82종

표지만 봐도 딱 느낌이 오는 어린이용 자연관찰책이다. 그런데 왜 내가 읽고 싶어졌는가? 제목 그래도 이건 무슨 새일지 궁금해서다.

아무리 삭막한 아파트 천지인 도심 환경에도 녹지조성은 필수이자 의무에 가깝다. 아무리 작은 녹지라도 생명체가 살기 마련이고 아침이면 이름모르 새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자주 눈에 띄는 새들이어도 참새, 까치, 까마귀 이상의 새를 알지 못하는 나로서는 가끔 저 새 이름은 뭘까 궁금해지곤 했다. 이런 내 수준에서 요런 어린이용 느낌나는 책이 딱이다! ㅎㅎ

어린이가 읽어도 무방할 친절한 어투로 쓰여진 책이지만 어린이만 읽으면 좋을 커다란 판형에 큰 글씨체의 자연관찰책은 아니다. 작고 얇은 이 책의 글씨는 어른책 사이즈에 일반적인 작은 크기라서 그림책 읽는 기분이 아니고 종이는 자연관찰책에 흔한 빤질한 재질이라 선명한 그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책을 펼치자마자 이 책의 주인공들이 한꺼번에 등장한다. 사진에 가까운 세밀화라서 (너무 적나라한 사진을 보는것을 선호하지 않는 나로서는) 더 좋았다. 특별하지 않은 새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새들, 정원이 좀 넓다 싶은 집이면 더 자주 볼 수 있을 새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그나마 추린 것일텐데도 82종이라니.

새들 하나하나 소개하기에 앞서 새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짧은 상식들이 먼저 소개된다. 새소리 시계는 참신하고 재밌었다. 시계 주변에 새들이 숫자대신 늘어서 있다. 이 시계에 따르면 박새는 일출 50분전에 찌르레기는 일출 50분 후에 노래한다. 새소리를 잘 구분하는 조류학자는 어쩜 시계가 필요없을지도 모르겠다. ㅎㅎㅎ

새들이 주로 눈에 띄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서도 새들을 판별할 수도 있었다. 땅에서 하늘에서 전선에서 나무꼭대기에서 잡초 사이에서 등 새들이 선호하는 장소들은 정원이라는 한정적 공간에서도 은근 제각각이었다.

이 책은 책 한두페이지에 새 한 종류가 소개되므로 어느 페이지를 펴도 읽기 편하게 되어 있다. 그 한두페이지 내에서도 색깔과 쪽지제목들로 내용구분을 쉽게 할 수 있게 해놓아서 그야말로 스르륵 읽힌다.

그렇게 간편하게 새 한마리한마리 짧고 굵게 살펴보다 보면 금새 마지막 장을 덮게 되는데 책의 마무리는 새를 관찰할 때 필요한 것부터 새를 보호하기 위해 알아두면 좋을 상식으로 채워져 있어 더욱 알찼다. 그중에서도 새의 부리모양만 봐도 먹이를 짐작할 수 있겠구나 같은 깨알상식들이 재밌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새들이 독일의 정원에서 볼 수 있는 새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페이지에 한국에서는 볼 수 없다는 문장이 수시로 등장할때마다 기왕이면 이런 종류의 책으로 한국의 집근처 새들에 대한 책이었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신선했던 건 대부분 새들의 울음소리를 글자로 표현해 놓았다는 점인데, 앞서 말했듯 독일 정원이니 독일어식으로 들린 소리였을 것이다.

71p의 노랑멧새에 대해 '마치 "나는, 나는, 나는, 그대를 무척이나 사랑한다네에에에에에"하고 노래하는 것 같아요' 라면 아하아 이히리베디히 라는 발음은 새소리로 변환되 들릴 수도 있겠구나 싶었지만 한국어로 나는 그대를 무척 사랑한다네 하고 노래할 수 있는 새는 없을 것이므로 웃음이 났다.

노랑멧새 말고 대부분은 의성어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또한 독일어식이라 예를 들어, 76p의 칡부엉이에의 울음소리에 대해 책에는 '우흐-우흐' 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는 부엉-부엉 하고 한글로 쓴다. 냐옹냐옹 하는 고양이 소리도 나라마다 다 다르게 표현되지 않는가. 독일어식 새소리를 우리말에서 쓰이는 표현들과 다를 것이기에 그 비슷하고 다름을 생각해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가 되었다.

내가 새이름들이 궁금해서 읽은 책이긴 하지만 새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 그 친구에게 알려줄 마음으로 읽어본 책이기도 했다. 다 읽고 나니 그 친구에게 꼭 선물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흔하면 흔한대로 희귀하면 희귀한대로 소중하게 주변 새들을 관찰하는 그 친구의 마음에 쏙 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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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끝까지 쫓는다 - 대한민국 최장기 인터폴계장의 국제공조 수사 일지
전재홍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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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영 팀장'은 어떻게 검거되었나?

범죄조직 추적 및 밑그림부터 첩보수집, 송환까지

최초로 기록되는 전재홍의 일촉즉발 추적기

얼마만에 보는 이름인가 김미영 팀장, 한때 이 이름으로 문자든 메일이든 현혹되는 문구로 치장된 글을 안 받아본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뒤로 어떻게 됐더라? 김미영 팀장으로 널리 알려진 사기범죄부터 그외 언론에서 익숙하게 들었던 굵직한 사건들의 범죄자를 외국에서 검거하는데 필요한 인터폴 공조수사 전문 경찰인 저자는 경찰청 최장기 인터폴 계장으로서 그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해외로 도망간 많은 범죄자들을 추적하고 검거하면서 그들이 도망갔던 방법과 경로 등에 대해 자연스레 연구하게 되었고, 수 년간의 노력으로 나만의 노하우도 생겼다. 내가 했던 업무는 나만의 것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 국가를 위한 일이었기에 혼자만의 경험으로 간직하기보다는 후배들을 위해 노하우를 전하고 싶었다. 특히 요즘같이 세상이 좁아진 시대에 외국으로 도망간 범죄자를 추적하여 검거하고 국내로 송환하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 (p. 14) -프롤로그 中-

프롤로그를 읽으며 기대보다 걱정이 먼저 앞섰다. 이런 이야기들을 해주는 건 좋은데 수년간의 노하우가 범죄자들에게 이 책으로 알려지면 어떡하나 싶어서. 하지만 다행히도 기우였다. 이 책은 해외로 도피한 범죄자들을 검거하기까지의 요약된 수사일지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방법론적 이라기 보다는 '검거했다'가 중요한 결말론적 이랄까. 그러니 독자로서는 그 사건의 범죄자가 어떻게 됐더라? 하는 궁금증에 대해 명쾌한 결말을 알수 있게 해주는 시원스런 책이라고 할수 있겠다.

다루고 있는 사건들은 하나같이 굵직굵직하다.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범죄를 벌일 정도의 규모이니 언론 한번 안탄 사건들이 없을 정도다.

보이스 피싱의 원조인 김미영 팀장 검거작전 부터 시작해서 다른 보이스 피싱 사건들, 마약관련 사건들, 성범죄 관련 사건들 등의 큰 사건들 이야기부터 단체 송환이라던가 선박 송환 같은 처음 시도된 방법듣 그렇게 못잡을 것 같던 도피 범죄자들을 몇년이 걸리건 기어코 잡아낸 이야기들이 현장감 넘치게 펼쳐진다.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그 사건들에 대해 좀더 잘 알게 된 것도 있고 인터폴 공조수사의 세계를 어렴풋이 들여다보게 된 것 같아 신선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잡았다' 에서 한시름 놓이다 보니 항상 시작만 있고 끝은 모르는 언론 기사들에 대한 후일담으로 읽기에도 괜찮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범죄자들이 다 잡힌 것은 아니었다.

그 유명한 김미영 팀장 보이스 피싱 사건의 총책은 전직 경찰관 출신으로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대에서 근무했었다고 한다. 필리핀에서 잡았었는데...필리핀 이민청수용소에서 탈출했다고;;;... 그래서 검거도 검거지만 '송환'에 특히나 저자가 크게 신경썼다는 것이 다른 사건들에서 속속 전달되는것 같기도 했다. 사건들에 대해 알게 되면서 시대에 따른 범죄의 변화가 느껴지기도 했다.

관리 대상 조직폭력배가 아닌 부류는 조직폭력 추종세력 이라고 한다. 요즘 조직폭력배, 일명 깡패들은 예전처럼 나이트클럽이나 주점 등에 몰두하지 않는다. 돈벌이에 도움되는 것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요즘 불법 사이버 도박, 보이스 피싱 등 돈이 되는 일들을 하고 있다. 범죄 트렌드는 이렇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사법체계도 여기에 발맞추어 대비해야만 할 것이다. (p. 51)

경찰로서 경찰조직에 대해 아쉬운 점이나 쓴소리를 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검찰이건 경찰이건 아무도 못믿겠는 시대가 된지 오래인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일해주시는 분들이 있어 이 사회가 유지되고 있는가 싶기도 했다.

열심히 자기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경찰관들에게 조직에서 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 승진이다. 성과 있는 직원들이 잘되는 모습을 다른 직원들이 본받고 따라할 때 경찰 조직이 발전할 수 있다. 일은 안 하고 요령 피우고 아부만 하는 사람들을 승진시키게 되면 조직 전체의 사기가 저하된다. 이게 곧 치안력 약화로 연결되고 경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떨어지는 것이다. (p. 59)

사건도 사건이지만 사건의 본질에 질문을 던져보게 하는 부분들도 좋았다.

국내에서 검거하는 마약사범의 대부분은 단순 투약자이다. 이들을 잡아서는 얻는 것이 별로 없다. 사실 이들은 처벌하더라도 별다른 조치가 없다면 다시 투약할 확률이 매우 높다. 계속해서 전과자만 양성되는 악순환 구조이다. 단순 투약자들에게는 처벌보다 이들이 다시 마약을 하지 않도록 치료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집중해서 검거할 대상자들은 바로 '마약 공급자'들이다. 지금 수사기관의 마약사범 대응 방식이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p. 65)


우리나라 범죄자들이라고 해서 외국에서 곧바로 데려올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나라마다 법체계가 다르고 시스템이 다르고 사건 중요도에 대한 인식이 다르다 보니 검거도 어렵지만 송환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또한 범죄의 주범을 잡는다고 해서 사건이 속시원하게 해결된다거나 피해자들이 구제되는 것도 아니었다.

많은 사건들 중 특히 '은혜로교회 사건'은 여전히 ing 같아서 가장 안타까웠고, '디지털 교도소 사이트' 주범은 '실질적인 목적은 돈이었다. 게시물을 내려주는 대가로 대상자들에게 돈을 받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정의구현 명목으로 후원금도 챙길 수 있었으니 여러모로 이익이 되는 사업이었을 것이다. (p. 267)' 라는 구절에서 새삼 화가 났다. 이 사이트에 허위사실이 올려져 목숨을 버린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여하튼,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건들은 다들 그 결과를 궁금해할 법한 사건들이다. 그 사건들 중 일부는 영화 <범죄도시4>나 <모범택시2>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저자는 <그것이 알고 싶다> <꼬꼬무> <유퀴즈> 등 다양한 매체에서 인터폴과 해외공조 수사에 대해 자문 및 출연을 할 정도로 사건 해결의 주역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 사건들에 관심을 갖고 있던 독자라면 이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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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5 09: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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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6 21: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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