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오백년이라지만 그 긴 세월동안 이어진 왕조는 사실 적통으로만 이어지지 않았다. 아니 적통이 오히려 드물었다. 그렇게 왕들도 살아남기 힘든 왕실에서 왕비는 오죽했겠는가. 역사에서 화려한 왕의 그림자속엔 왕비가 있곤 했다. 왕비는 그림자처럼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존재였다. 사실 여성이라는 자체가 늘 힘든 직업이었음은 어느 시대 역사라도 조금만 펼쳐보면 바로 확인이 될 것이다. 동화속 공주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지 몰라도 구중궁궐 속 왕비는 잠시잠깐도 행복하기 힘들었다.
책은 각각의 주제로 묶여있는 듯 보이지만 대체적으로 연대순이라 좋았다. 안그래도 헤깔리는 왕조의 계보가 순서마저 뒤섞여 있다면 그야말로 잡학적 흥미거리일 뿐 역사로 읽어내기가 힘들기 마련인데 순서대로 차근차근 나열되니 정리해가며 읽기에 좋았다. 이는 자료로서의 가치도 충분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왕이었으나 존재감이 없던 왕, 그런 왕과의 사이에 자식마저 없던 왕비는 역사에서 거의 잊혀졌던 존재가 아니었을까... 게다가 후궁의 소실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지해주었다는(혹은 지지해주어야만 했을) 그런 왕비들을 만날때마다 역사가 주는 씁쓸함이 배가 되곤 했다. 가끔 야심만만한 왕비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항상 끝이 안좋았다.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왕비들에 비해 처음인듯 생소하게 다가오는 왕비들의 이야기에는 더 마음이 쏠리기도 했는데, 조선초기 야심만만한 아우덕에 갑작스레 왕이 된 정종과 40년 가까이 해로했지만 자식이 없던 정안왕후, 남편을 왕으로 만든 최고의 정치적 동지였으나 정작 남편이 왕이 된 후에는 자신은 물론이고 친정 가문까지 철저하게 탄압받다 말년에 존재감없이 살다간 원경왕후, 단종과 사별후 옷감에 물을 들이며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82세의 천수를 누린 정순왕후, 비교적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는 수렴청정을 했던 정희왕후등 조선 초기의 왕비들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그랬다.
책을 읽어나갈수록 왕비들의 삶이 헤깔리는 이유 중 하나는 호칭 때문이었다. 불리는 명칭이 너무 다양했다;;; 예를들어 소혜왕후 한씨는 성종의 어머니인데 인수왕비(=인수대비)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혜경궁 홍씨로 유명한 왕비도 정식 명칭은 헌경왕후 였다. 왕이 바뀌면서 달라지는 신분에 따라 왕비의 존칭도 달라지곤 했으니 헤깔린다 헤깔려;;; 가계도를 정리해서 참고자료로 붙여주셨더라면 참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왕조 관련 책은 가계도가 꼭 있어줘야 하는데 말이다...
가끔 사진 자료가 참고내용이 있곤 했는데, 그중 가장 놀라웠던 내용이 효령대군 이야기였다. 태종과 원경왕후의 둘째아들 효령대군은 동생 충녕이 세자로 책봉되자 불교에 심취했고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까지 큰 사건들을 거치면서 91세까지 장수했다는!! 불교에 귀의도 아니고 심취했기 때문에 자식도 두었고 왕족이니 나름 윤택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의 삶이 몹시 궁금해진다.
중종의 부인인 장경왕후를 간호했던 의녀가 드라마 대장금으로 유명한 장금이었다는 내용도 새삼 흥미로웠다.(드라마를 봤었는데 어느 왕때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더라는;;;) 장경왕후가 출산에 따른 후유증으로 출산 7일만에 승하하면서 의녀였던 장금에 대한 처벌 논의가 많았다는데 중종은 장금의 처벌을 면하게 해주었다는 것을 보며 드라마적 상상의 나래가 잠시 펼쳐지기도 했다.
역사서임에도 아니 역사서라서인지 저자의 견해가 많이 들어간 책은 아니었지만 가끔 발견되는 저자의 견해를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