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상황에 대해 어떤 분이 ‘1960년대로 돌아가려는 거 아니냐’고 하길래 제가 ‘이건 1960년대가 아니고 1860년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어떻게 하면 노동시간 늘릴까, 어떻게 하면 성평등을 뒤로 돌릴까, 어떻게 하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 3등 시민 만들어서 수입해다가 착취할까? 정말 19세기에나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완전히 병든 사회예요. 이를 바꿔내지 못하면 사회적인 문제도 크겠지만 경제적으로도 점점 더 침체될 수 있어요.

고령화가 문제가 아닙니다.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성을 높이면 젊은이 4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하던 것을 이제 0.5명, 0.2명이 할 수도 있거든요. 꼭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은 아닌 거예요. 물론 출생률이 낮다는 것은 성차별 구조, 복지 부재, 교육 문제 등 병리적인 현상들의 증후군인 것이니 고쳐야 하죠

동이 트기 전에 제일 어둡다고요. 저는 지금 한국이 그런 시기라고 믿고 있어요. 저는 역사의 방향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정부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페미니즘을 억압하지만, 계속 싸워서 바꿔야 된다고 생각해요. 민주화도 그렇게 한 거 아닙니까? 그 시대는 다른 면에서 더 억압이 심하던 시대였잖아요. 그것도 넘겼는데 저는 이 시기도 넘길수 있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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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왜 괴물 부모가 되는가?
교사들이 죽고있다. 비극적인 사건들이 잇따르고 교사들이 거리로 나섰다
무엇이 지금 학교와 교실을 뒤흔들고 있는가?

■ 저녁 늦게 휴대전화로 연락해서
˝선생님, 하루에 칭찬 한 번씩 꼭 해주세요
아이가 오늘 칭찬 못 들었다고 하던데요?˝

■ 받아쓰기에서 틀린 것을 표시했더니 교장실로 찾아가서, ˝아이 마음 다치니 빗금치지 마세요˝

■ 아이가 욕을 해서 지도하자, ˝우리 애가
왜 욕을 했는지 생각해 보셨어요?˝

■ ˝내 아이가 아이돌이 되고 싶어하니 창가 좌석에 앉히지 마세요

■ ˝반에 아이와 맞지 않는 친구가 있는데,
그 애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켜 주세요˝

진상 학부모들의 자기중심적 사고는 상상을 초월한다

허약한 공동체와 각자도생 사회가 부모들을 괴물로 만들었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괴뭏 부모들은 타인들에게는 자기 자녀를 신처럼, 왕자나 공주처럼 대접하도록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자녀들을 거침없이
막 대한다. 이 이중성이 자녀들을 분열시킨다.
괴물 부모가 키운 자녀들은 청소년기에 이르면 큰 혼란에 빠진다. 부모의 양면성을 수용하는데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저항 할 것인가 아니면 동일시 할 것인가?
이런 질문속에서 자녀들은 큰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부모를 괴물로 몰아가서는 안된다
그러나, 누구도 독이 든 사랑으로 학교와 공동체를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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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법칙은 영원성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말한다. 이 우주에는 그 무엇도,
우주 자체도 영원하지 않다. 오래간다고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존재의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각자가 만들어야 한다. 우주에도 자연에도 생명에도 주어진 의미는 없다.
삶은 내가 부여하는 만큼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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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어떤 말들은 여러 해 공을 들여 품고 있어야 비로소 만나고, 친해지고, 내 것이 된다

말은 인간에게서 생각을 발현시키는 도구이자 행동과 변화를 끌어내는 씨앗이다. 말이 갖는 힘은 때때로 우리의 상상을 앞질러 간다

좌우파 상관없이 자주 쓰는 단어 solidarité(솔리다리테: 연대)에서는 공동체적 가치를 중시하는 프랑스 정신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개인주의를 고수하면서도 필요할 때 함께 뭉치는 프랑스적 삶의 태도는 일견 서로 상충하는 듯 하면서도, 개인과 공동체를 모두 존중하는 그들만의 지혜이기도 하다

10년 전, 이사 온 파리 외곽 동네에서, 집 근처 중학교의 학생과 학부모, 교사가 직접 물감으로 ˝solidarité˝라고 쓴 대형 현수막을 들고 함께 동네를 돌던 모습을 목격했다

놀라운 것은, 그 중학교가 지원금의 예산 규모 축소의 정부의 결정에 반대하며 한 달간 파업 하는 동안, 인근 초등학교와 유치원까지 모두 그 파업에 동참했다는 사실이다. 말 그대로 ‘연대‘의 이름으로

한 달이 지나서 파업은 종결됐다
아이들은 한 달치의 수업을 잃었고, 부모들은 아이를 맡기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달픈 한 달을 보냈지만, 아이들은 어른들을 통해 위로부터의 부당한 결정에 어떻게 맞서는지를 배웠다. 그것은 솔리다리테가 어떻게 발화하고 작동하는지, 그리고 어떤 결과를 얻는지에 대한 산 체험이었다

이 사회 곳곳에서 마주치는 솔리다리테는 허울만 있는 구호가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고 있었다. 구호와 실제 작동하는 가치와 행동이 하나인 것을 목격할 때, 이런 것이 여전히 현대사회에서 가능하다는 걸 확신하는 작은 감격에 휩싸인다

제국주의 시절 뿌려놓은 불화의 씨앗들과, 수많은 이민자들과 함께 다양한 문화가 서로 어우려저 살아가는 프랑스 사회에서 그나마도 이만한 평화를 지탱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가치는 솔리다리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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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열여섯 살 생일을 사흘 앞둔 어느 날, 낮에 아버지와 여동생을 살해하고, 저녁에 같은 학교 친구들을 학살한 케빈.
그 아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이 영화는 말한다

케빈을 소시오패스라고 규정해버리면
이 이야기는 ‘낳고 보니 아들이 소시오패스인‘ 한 불행한 엄마의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공포와 연민의 감정뿐이다. 게다가 그 규정은 사실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이 서사에서는 저주와 극복의 주체가 불안정하게 엉킨다. 낳아보니 자식이 케빈이라는 사실이 에바에게 저주였다고 주장 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태어나보니 엄마가 에바였다는 것은 케빈에게도 불운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에바가 케빈을 극복해야 했던 것처럼 케빈도 에바를 극복해야 했다

첫 번째 장면, 자지러지게 울고 있는 케빈과 어쩔 줄 몰라하는 에바의 모습이 보인다. 이어서 케빈을 유모차에 태운 에바가 거리를 걸어가는데 이때도 케빈은 떠나갈듯 괴성을 지른다. 에바는 케빈이 지르는 괴성을 견디다 못해 공사장 근처에 유모차를 세운다. 케빈의 괴성을 더 큰 소음으로 덮어버리기 위해서다. 케빈이 공사장의 소음에 물리적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위험을 에바는 잊었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바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말을 케빈에게 하고 만다.
˝엄마는 네가 태어나기 전에 더 행복했어.˝

케빈은 불가피하게 하나의 태도를 습득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이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견뎌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받지 못하는 게 당연한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엄마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비참한 아들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엄마에게 지독하게 구는 나쁜 아들이 되는 것이 더 견딜 만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그저 서로를 ‘정상적으로‘ 사랑하는 데 실패한 두 사람의 이야기다. 한 사람은 덜 사랑했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은 너무 사랑했다.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둘은 노력했다. 엄마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는 척했고, 아들은 엄마를 사랑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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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3-09-20 2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책도 저 영화도 좋아해요!! 🥹🥹🥹

나와같다면 2023-09-20 22:06   좋아요 0 | URL
신형철 평론가의 [케빈에 대하여] 해석은 정확하고 밀도 높아요

“이제는 들어야겠어, 왜지?”(I want you to tell me, why?) 에바의 물음에 케빈은 답한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잘 모르겠어.”(I used to think I knew, but now I’m not so sure.)

영화가 끝나고 다시 퍼즐이 맞추어지며 다른 해석이 가능한 영화를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