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옷장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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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데뷔작이기도 한 [빈 옷장]은 스무 살의 자신이 받은 불법 낙태 수술에서 시작한다.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아서 낙태 준비 체조를 한다. 그 더러운 자식은 잘 웃었다. 그 쓸모없는 부르주아.. 내 몸을 만진다. 시작되는 순간을 상상한다. 아니 에르노 작품은 남자의 자리, 진정한 장소, 빈 옷장, 세월을 읽고 있는 중인데 진정한 장소는 에세이고 세 작품은 소설이다. 공통점은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나 거짓 없는 글쓰기에 있다. 글을 읽는 독자는 작가와 가까이 있는 느낌이 들어 좋다.

 

부모님의 카페 겸 식료품점은 사람들로 붐빈다. 덩치가 남산만 한 알렉산드르는 술에 취해 아내를 때리고, 딸에게 술 심부름을 시킨다. 사람들이 무리 지어 오는 날도 있다. 그들은 공사가 끝나면 떠났고, 그것이 내 삶에 있어서 유일한 슬픔이었다. 우리는 남고 다른 사람들은 사라진다. 임신했다고 말하면 부모님은 발작을 일으킬 것이다.

 

낙태 시술자는 이름을 묻지 않았다. 이름을 지어내려고 했는데, 학교를 기억하기는 쉽다. <저 애를 사립 학교에 보내면 더 잘 배우고 아이들이 더 단정하거든> 모네트는 공립 학교에 다니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손님들에게 사과했다. <잘 가르치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사립이 공립보다 덜 멀어서 그래요. 데려다주기에 더 편하니까. 우리는 너무 바쁘잖아요.>

 

어린 시절 부모님은 뭐하냐고 묻는다. 친구들은 식료품점을 하니 사탕을 많이 먹겠네. 카페도? 그러면 취한 사람들도 있어? 역겨워라는 말을 듣는다. 나는 여러 번 10점 만점에 10점을 받았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기 시작한다. 선생님의 질문에 하나도 틀리지 않고 대답하고 싶다. 괴롭히는 애들에게 엿이나 먹어라 욕을 해준다. 나의 우월함과 복수를 지키기 위해 점점 더 학교의 가벼운 놀이에 스며들었다. 어머니의 딸, 당신의 딸 드니즈는 천부적인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님은 공부하고 카페의 상점 위에서 호텔이 있는 것처럼 잠이 드는 것을 고마워하게 될거라고 말씀 하셨다. 뭘 갖고 싶은지? 어머니는 읽는 것이라면 모든 게 좋다고 믿었다. 부모님은 외상으로 파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우리 일에 신경 쓰지 말고 네 공부나 열심히 해. 너는 나중에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좋은 직업을 갖도록 공부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5개월 동안 만났다. 토요일 네 시 반 혹은 일요일, 미사에 가야 할 시간을 잘 골라야 한다. 매번 지난번에 했던 여행을 다시 한다. 부모님은 벼르고 있었다. 공동묘지 길에서 부랑아 같은 놈과 뭘 하고 다닌 게냐?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얌전한 줄 알았지. 열 다섯에 남자들과 놀아나는 이 동네 여자애들처럼 된다. 너는 사립학교에 다니는 공부하는 아이라고. <나는 그저 노동자일 뿐이었지만, 네 나이에는 품행이 단정했어> 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혹시라도 너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 이 집에 발도 들이지 마라. 어머니는 옆집의 광견병 걸린 개처럼 나를 가뒀다.

 

계단, 거리, 다리를 걸으면서 하나만 생각한다. 낙태 전문 산파의 주방의 테이블, 긴 솔로 씻어내 주는 그 산파를 찾아야 한다. 흑인 여자, 은밀한 친구, 그녀는 어느 지붕 아래 숨어 있을까. 산파를 찾는데 두 달이 걸렸다. 부모님 집에는 갈 수 없다. 그들에게 설명할 수 없다. 모두 잊자. 나는 학위 수료증을 받을 것이다. 어머니는 믿지 않을 것이고 내가 성폭행을 당한 것이리라 생각할 것이다.

 

아니 에르노의 첫 작품, 빈 옷장은 그녀의 이름 앞에 늘붙는, ‘자전적 소설의 시초이다. 작가의 체험을 썼고, 그녀의 말처럼 기억에 대한 주관적인 시선은 있을 수 있겠으나, 거짓과 허구는 없다. 다만 드니즈 르쉬르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했다. 저자는 글쓰기란 세상을 향해 무언가를 던지는 행위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에 형태를 만들어 존재하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칼에 손가락을 베인 사람을 보면 내 손가락이 욱신거리듯이, 우리는 그녀의 글을 감각으로 느낀다. 살아낸 글, 살아서 건너오는 글, 그것이 바로 아니에르노의 문학이 가진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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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노을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82
이희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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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도 면접을 본다는 [페인트]의 작가 이희영의 신작이 나왔다. [보통의 노을]34세 철없는 엄마 지혜씨와 18세 애늙은이 아들 노을의 이야기. 청소년 문학으로 청소년에서 어른까지 읽을 수 있는 따뜻한 이야기다.

 

노을은 자신의 이름을 딴 지혜 공방을 운영하는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다. 노을은 사랑에 빠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적어도 외롭다는 생각은 안들겠지? 그렇다고 노을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열여덟의 아들을 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젋고 예쁜 엄마 때문이다.

 

주말이면 6년 지기 성하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중국집 주방보조 아르바이트를 한다. 5층 건물인 3층에 위치해 있는 중국집 짜장짬뽕 맛이 끝내줘서 어떻게 알고 전화가 오지만 배달이 안 된다는 한마디에 세상에 배달 안 되는 중국집이 어디 있느냐며 목에 핏대를 세운다. 성하 오빠 성빈 형이 대기업 최종 면접에 합격하였다는 소식이었다. 시험에 턱턱 합격하는 것과 미련한 성격은 상관관계가 전혀 없을까? 벌써 5년이다. 성빈이가 노을의 엄마를 해바라기처럼 봐라봐 온 시간이 미련하다 못해 답답하게 여겨진다.

 

노을은 10대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한 번도 아버지에 대해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그런 존재 없이도 엄마와 생활하는 데 전혀 문제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엄마가 아프거나 경제적인 문제로 힘들어할 때면 어린 노을은 고민했다. 엄마가 힘들지 않게 곁에서 지켜 주는 사람이 존재하기를 바랐다. 노을이 알바하는 곳에 동우가 찾아왔다. 노을은 딱히 어울리는 친구가 없었다. 동우가 괴롭힘을 당할 때 도와준 후로 친구가 되었다. 동우가 성하를 소개 시켜달라고 하였다. 성하는 잘 알지만 동우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만남을 주선하는 게 맞는지 고민을 하였다. 동우의 커밍아웃이라는 뜻밖의 고백에 노을은 이해했다.

 

5년 전, 스물 아홉살의 엄마에게 스물셋의 형은 사랑을 말했다. 군대 다녀와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형은 입대했다. 다음은 학교생활에 충실해요, 졸업부터 하는 게 어떠냐고 했다. 형은 좋은 학점으로 졸업할 수 있었다. 노을은 엄마와 비슷한 나이도 좋고, 인생 경험이 많은 사람도 괜찮다. 나란히 보폭을 맞춰 줄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남들이 수군대며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길 바랄뿐이다.

 

평범함이 뭐냐 묻는다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은 게 평범한 것 아닐까. 노을은 말했다. 보통의 삶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 같지 않을까? 편리하고 빠른 만큼 이미 그 길에 올라섰으면 큰 선택지가 별로 없으니까. 성하가 대답했다. 배달원 오토바이 사고를 듣고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아저씨가 배달하지 않는 이유를, 무엇을 하든 늘 느긋하고 태평하기만 한지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지름길이 너무 끔찍했을 것이다. 아저씨는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며 성빈 형과 엄마의 교제를 이해해 주었다.

 

소설에는 노을의 절친 성하와 동우를 비롯해 엄마와 성빈, 성하 아빠의 다채로운 사연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사회가 말하는 평범함이 무엇인지, 세상이 정한 기준이 무엇인지 여러 인물들의 시선에서 묻고 답한다. 노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는 보통과 평균을 어떤 의미로 생각하는지 곱씹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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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 하늘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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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벨리스크의 문을 열고 살아남은 오로진은 에쑨이 유일하다. 에쑨은 기록된 역사보다 더 오래된 신비한 메커니즘의 힘을 해방시켜 승리를 거두었고, 그 힘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열 반지 알라배스터를 죽여버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그걸 원했다는 의심이 들긴 하지만 그는 죽었고, 일련의 사건들 덕분에 이 행성에서 가장 강력한 오로진이다. 종결을 선고 받았다. 왜냐하면 그녀의 몸은 돌로 변하고 있고, 지금은 오른팔뿐이다.

 

[석조 하늘]은 부서진 대지 시리즈 마지막이다. 에쑨을 따라다니는 스톤이터이자 시리즈의 화자인 호아는 대륙이 고요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한참도 전에 자리했던 고대 문명 실 아나기스트에 대한 회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쑨은 오로진을 인정하지 않는 아빠와 담판을 짓다가 살해하지만 어린 나쑨에게 여전히 감당하기 힘들다. 괴물 같은 나쑨의 두 보호자. 나쑨을 위해 서로 도와야 한다. 지자가 나쑨을 죽이려고 하기 전에 감지한 것, 그 엄청난 힘의 폭발은 수십 개의 오벨리스크가 한꺼번에 응축시켜 증폭한 스틸은 그것을 오벨리스크의 문이라고 불렀다.

 

샤파는 제키티 마을 여덟 아이들과 함께 가기로 한다. 너희들의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려면 너희를 해치려는 자를 고르되 딱 한 명을 죽이라고 한다. 나쑨의 수호자 샤파와 의문의 스톤이터 스틸은 반대쪽에 있는 도시 코어포인트로 향한다. 에쑨이 달을 붙잡아 이 끝없는 계절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호아는 네 딸이 네 짐작보다 훨씬 대단하고, 지자가 죽었다는 말을 전한다.

 

샤파는 지자에게서 나쑨을 보호했다. 나쑨에게 다정했다. 에쑨은 그 애에게 다정하게 굴지 못했는데, 그 생각을 하자 네 안의 모든 것이 진저리 친다. 나쑨은 샤파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고 결심한다. 샤파의 머릿속에 심어 놓은 코어스톤이 어떻게 들어가게 됐는지 궁금해진다. 수호자는 조산술이 사라지는 것을 예방하고, 그게 없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생존하지 못할 테니까. 오로진은 꼭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너희는 반드시 도구여야 하고 도구는 사람이 될 수 없지. 수호자는 도구를 지키고, 도구의 유용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적인 부분을 죽여야 한다.

 

에쑨은 레나니스에 도착한다. 화산재 때문에 고생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열개가 너무 가까워서 장벽이 가벼운 입자를 상층 대기로 상승시키고 있는 덕분이다. 이 도시는 변칙적인 건물들의 향연이다. 얼마 전에 사라진 유메네스나 그보다도 훨씬 오래전에 죽어 버린 실 아나기스트에 비하면 그리 높은 건물들도 없다. 코어포인트는 커다란 해저 순상화산 위에 세워 졌으며, 도시 중앙에 뚫려 있는 구멍의 상층부에는 몇 킬로미터 아래까지 복잡한 거주 공간과 연구실, 제조공장 등이 설치되어 있다.

 

영원히 산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아느냐? 샤파의 나이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느냐? 관심이 있기는 하니? 수호자는 대개 3000년에서 4000년 가량 산다. 그렇게 긴 세월을 상상할 수 있겠느냐? 지난 2년간 네가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해 보렴. 이제 그 3년에 1000배를 곱한 시간이 끝없이 이어진다고 상상해 보라.

 

아버지 대지는 나쑨이 달을 끌어 내리려고 하는 것을 알고, 그것이 붕괴보다 더 끔찍한 재앙을 초래할 것임을 아는 것이다. “나쑨!” 너는 외친다. 에쑨이 기억하는 것보다 키가 많이 자랐다. 나쑨은 만날 거라고 기대하지 않은 사람을 마주친 것처럼 에쑨을 응시한다. 모녀 상봉이 너무 애처럽다. 나쑨은 고요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평온하고 화창한 날에도 결코 고요하지 않은 땅. 대륙을 뒤흔든 대격변과 함께 찾아온 가혹한 계절, 수만 년간 이어져 내려온 억압과 낡은 질서를 불태울 혁명의 서사시, 재미있게 읽었다.

 

[부서진 대지] 3부작에서 그려지는 계절과 인간관계의 양상이 현실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새로운 시작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보여 주는 [석조 하늘]의 결말이 더욱 감명 깊고 절실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다섯 번째 계절]과 함께 [타임]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판타지 100선에 오르며 3부작의 완벽한 결말임을 유감없이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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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미셸 포르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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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작가가 글을 쓰는 장소에서 20111, 미셸 포르트와 인터뷰다. 아니 에르는 두 권을 제외하고 모든 책을 이 집에서 집필했다. 1980년 초 남편과 이혼을 한 후 이곳에 남아 34년째 살고 있다. 다른 곳에 사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글쓰기에서 많든 적든 기대하는 것과 유사한 위험에 빠트리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글의 상상적, 실제적 공간의 주변을 이토록 배회했던 적은 없었다. 글쓰기는 <진정한 나만의 장소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남자의 자리소설을 쓸 만큼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고 불 같은 성격이지만 페미니즘 어머니를 둬서 작가의 꿈도 이룬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다. 그 시대에 사립학교를 보내줄 만큼 열성적인 부모님을 두어서 가능한 일이다. 저자의 글은 부모님이 운영하셨던 카페 겸 식료품점이 있는 이브토에서 출발하여 작품이 탄생하는 세르지, 그녀의 집에서 잠시 마침표를 찍는다.

 

부모님들은 언니의 죽음을 숨겨 왔다.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 6살 언니는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한마디도 안했고 물은 적이 없었는데 치매를 앓으면서 <나는 딸이 둘 있습니다> 라고 의사에게 말했다. 기억을 잃어도 가슴에 묻은 아이는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춘기가 되자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등을 읽게 하면서 감시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경계하셨던 것은 자신의 딸이 임신하는 것이었다. 딸이 결혼하기 전까지 강박 속에 사셨다. 그러나 저자는 남자애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을 어머니는 기가 막히게 알아냈다. 저자의 어머니가 이해가 되고 공감한다. 어느 시대이든 딸 가진 부모의 마음은 같을 테니까.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첫 번째 모델은 어머니였다. 키우는 방식, 세상을 사는 방식, 열정적인, 무슨 일이든 자신에게 강요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방식에 있어서 그랬다. 침대와 독서를 자랑했던 저자를 엄격한 눈빛으로 보던 선생님이었다. 모든 시간을 공부와 놀이, 독서에 쓰였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강렬한 사건이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바꿔 놓았다. 심근경색을 앓으셔서 일주일을 같이 보내려고 했는데 아버지는 사흘만에 돌아가셨다. 그 모든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바로 글이다. 글은 하나의 장소이고, 비물질적인 장소, 상상의 글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기억과 현실의 글쓰기 역시 하나의 도피 방식이다.

 

빈 옷장은 의식하고 정치적으로 쓴 책이다. 문화적인 지배, 경제적인 지배에 반하여, 1972년 불법 낙태를 강요당한 여성들을 지배한 것에 반하여, 서민적인 단어, 노르망디의 단어들을 전달하는 언어로 글을 쓰는 방식을 선택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개입하는 것은 그것이 아주 작은 변화라고 할지라도, 할 말, <주제>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물론 그것도 포함되기는 했다. 글쓰기는 교육과 수치심을 통해 드니즈라는 화자에게 행사되는 보이지 않는 긴 폭력성을 지녀야 했다. 남자의 자리의 형식을 찾는 데는 시간이 더 걸렸다. 빈 옷장처럼 드러나진 않지만 억제되었을 뿐, 그것만큼이나 효력을 발휘하고 있는 폭력성을 지닌, 사실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였다.

 

1960년대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누보로망의 영향권에 들어갔다. 1970년대에는 실질적으로 여성 운동권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여성 운동이 자신에 대한 글쓰기의 원동력과 격려가 됐다. 글을 쓸 때는 완전히 혼자지만, 반드시 시대와 글을 쓰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러나 글을 쓸수록 타인들의 글에 둘러 싸이는 것은 더욱 멈추게 됀다. 아니 에르노 작품을 읽으면서 왜 우리는 글을 읽고 생각해야 하는지, 진정한 나만의 장소는 어디일까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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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엔딩 (양장)
김려령 외 지음 / 창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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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거짓말, 아몬드, 페인트, 유원까지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은 작품들의 뒷이야기를 엮은 소설집 [두 번째 엔딩]을 가제본으로 받았다. 여덟 편의 단편 중 세 권을 읽어보았다.

 

*구병모 [초원조의 아이에게]

이방인에 대한 혐오와 치유의 이야기를 다룬 강렬한 판타지 [버드 스트라이크]의 외전

*김려령 [언니의 무게]

한 소녀가 왜 자살하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 뜨거운 이야기 [우아한 거짓말]의 외전

*김중미 [나는 농부 김광수다]

농촌에 살고 있는 중학생 소년 유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모두 깜언]의 외전

*배미주 [초보 조사관 분투기]

빙하로 뒤덮인 시대에 지하 문명 도시를 짓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첨예한 SF [싱커]의 스핀오프

*백온유 [서브]

살아남은 아이의 복잡한 심리를 완성도 있게 그려 낸 [유원]의 외전

*손원평 [상자 속의 남자]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의 특별한 성장 이야기를 그린 [아몬드]의 외전

*이 현 [보통의 꿈]

우리나라의 중요한 역사적 기점인 일제 감정기, 한국 전쟁을 그린 [1945, 철원][그 여름의 서울]의 외전

*이희영 [모니터]

국가에서 아이를 키워 주는 양육 공동체가 실현된 미래 사회를 그린 [페인트]의 외전

 

김려령 [언니의 무게]

너는 네 몫만 하면 돼. 자기 몫만 하고 사는 것도 힘들어. 마음은 기특하고 예쁜데, 너는 너로만 살아. 엄마는 그랬으면 좋겠어.”p27

 

천지는 벌써 청소년 자살률 통계로만 남았다. 누구는 그 숫자에 놀라고 안타까워했으나 누구는 그저 그런가 보다 무관심했다. 어떤 이에게는 영원히 아픈 현실이 다른 이에게는 통계상에 나타나는 수치일 뿐이었다. 미란의 아빠가 한동네로 이사 와 엄마에게 수작을 부렸더라도, 딸들이 나란히 친구가 되어 같은 일에 연루되기는 힘들었다. 한 언니는 동생을 방관했고, 한 언니는 동생을 적극적으로 돌봤다. 미란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잃고 싶지 않은 친구였다. 동생이 밖에서 맞고 오면 언니가 가서 때려 주는 법이다. 자신은 오히려 함께 식사하며 떠들었다. 미라는 천지의 죽음을 힘들어하고 있었다. 미라도 알 것이다. 부모들 일이 천지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을.

 

손원평 [상자 속의 남자]

나는 상자 속에 산다. 상자 안은 안전하다. 그 안에 머물면서 세상을 지켜보고 관찰한다. 형의 얼굴은 굳어 있고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는 것만 한다. 형은 밝은 미소를 아낌없이 내비치던 사람이었는데 상자 밖으로 부주의하게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를 위험에서 구해주고 난 후 형은 어두운 6인 병실에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쌕쌕댄다. 그의 시간은 십이 년째 멈춰 있다.

 

사람들이 쉽게 감사의 마음을 잊는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굳이 남들이 감사할 일을 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누군가가 고마워할 만한 일을 한다는 건 내가 더 위험해지거나 손해를 본다는 뜻이니까. 절대로, 절대로 나와 상관없는 일에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일을 겪으면서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한 식당 문이 열리고 모녀에게 한 남자가 그녀들을 향해 흉기를 들고 다가가고 있었다. 쓰러진 그들을 바라보는 한 소년이 보였다. 참고인 조사도 받고 장례식장에 갔었다. 소년은 눈밭에서 엄마와 할머니를 잃은 아이였다. 아이는 화낼지도 누군가를 탓하거나 원망할 줄도 몰랐다.

 

누군가를 향해 손을 멀리 뻗지는 못한다 해도 주먹 쥔 손을 펴서 누군가와 악수를 나눌 용기쯤은 가끔씩 내 볼 수 있을까. 형의 말대로 삶은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 내가 알고 싶었던 답을 영원히 찾지 못할 것 같다.

 

이희영 [모니터]

가디들이 하나 둘 회의실에 들어왔다. 윤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왔다. 늦잠으로 인한 지각임에 틀림없었다. 오늘 모니터는 센터장인 박과 신입인 윤의 차례였다. 박이 멀티워치를 작동해 방을 한 바퀴 스캔한 뒤 의자에 걸터앉았다. 드물긴 해도 아이가 가디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는지 엿들으려는 부모들 때문이었다. 여전히 자신의 고유번호를 지니고 사는 그는, 계속해서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과연 진짜 정답이라 믿느냐고.

 

센터에 경고음이 울렸다. 복도에서 헬퍼와 가디 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외부자의 침입은 아니었고 시스템 오류도 발견되지 않았다. 제누 301을 바라보았다. 한 달 후면 센터를 떠날 녀석은 어느덧 박과 마주 볼 정도로 자라 있었다. 부모 면접을 포기한 아이였다. 윤은 왜 가디가 됐냐면 밖에 아이들처럼, 때론 짜증도 부리고 화도 내면서 자연스럽게 커도 된다고 말해주려고요. 윤이 된 노아가, 가디가 되어 다시 센터를 찾은 말썽쟁이 노아 208이 웃으며 소리쳤다.

 

창비청소년문학상 1회 수상자인 김려령 작가부터, 배미주 이현 김중미 손원평 구병모 이희영 백온유 등 청소년문학과 성인문학을 넘나드는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완성도 높은 단편이 실렸다. 전작에서 주인공이 아니었던 인물들의 속내까지 따스하게 보듬으며 모든 삶이 조명받아 마땅한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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