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역사서 독서를 한다. 1 진지하게 책상에 스탠드 켜고 정자세로 앉아
연필들고 시험공부하듯 사학자들의 정통 역사서를 읽는 방법. 이들은 버거운 상대들이어서 리뷰도 못 쓰고 하루 100페이지 읽기도 힘들다. 2 들고
다니며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서서 읽거나 엄마집에 가서 소파에 누워 읽는 대중 역사 에세이들. 이들은 2,3시간이면 한 권 읽어치우고 20분만에
리뷰 써 버린다. 2번 독서의 경우, 내가 모르는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내용에 주목하여 읽는다기보다는 뭐 나도 나름 내 꿈이 있으니까 비전문가
저자들이 역사를 보는 방식이나 서술 기법의 장단점등을 체크해가며 읽는다. 그러다보면 이따금씩 박홍규씨나 김상근씨처럼 자신의 분야 스페셜리스트의
시각을 가지고 제네럴리스트로서 신선하게 역사를 언급해주시는 저자분을 만나게 되는데, 이를 껌정의 전문 용어로 이렇게 말한다. "심
봤다!"
이 책 참 괜찮다. 세계사를 떠밀어 온 여섯가지 인간 심리로 '기억, 탐욕, 우월감, 통제욕,
개방성, 종교'를 보고 각각 6개의 장을 배분하여 세계사를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이 부분에서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을
염두에 두시고 기획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간 직후부터 관심 가지고 있다가 리뷰어 행사를 했는지 한날 한시에 칭찬 리뷰가 많이
올라와서 책의 수준을 의심하느라 이제야 읽은 것이 저자분께 죄송스러울 정도이다.
이 책에는 심리학자로서 역사를 서술하는 시각은 기본이고, 심리학도였다가 80년대 민주화 운동과
사회운동에 참여하신 후 다시 학계로 돌아온 저자분의 이력도 제국주의나 기독교 등 유럽사 관련한 서술의 시각에 반영되어 있다. 이 점은 어떻게
보면 책이 약간 아쉽고 혼란스러워 보이는 점이기도 하다. 다른 쪽 장들에서는 본 집필 의도대로 '기억, 탐욕, 우월감, 개방성'이라는 심리
키워드에 맞춰 관련 역사를 예로들면서 잘 서술되어 있는반면, '통제욕, 종교' 부분에서는 갑자기 목소리 높여 제국주의와 기독교, 미국 비판으로
빠져서 옛날 운동권 학회 세미나때 선배가 만들어 복사해 공부시키던 문건들처럼 서술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좀더 부드럽고 세련되게 표현해
주시거나 처음 의도로 계속 가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여튼, 앞으로 더욱 주목해볼 저자분이시다.
미국인은 지난 시절 인디언 대학살과 흑인 노예에 대한 악행으로 뿌리 깊은 죄의식에 시달렸고,
그 때문에 무의식적인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지배층은 이런 두려움을 효과적으로 이용해 왔다. 그들은 냉전 시기에는 소련이,
냉전 해체 이후에는 테러주의자들이 미국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선전하여 미국인을 집단적 광기 상태로 몰아넣었다. 2003년 부시 정부가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있다고 거짓말하면서 이라크를 재차 침공하겠다고 했을 때, 대다수 미국인이 전폭적으로 지지한 것 역시 미국인의 뿌리
깊은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다.
죄의식이 야기하는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자기 죄를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 뿐이다.
- 본문 220쪽
종교개혁은 날로 부패하고 타락하던 가톨릭교회에게 경종을 울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신교가
유럽인을 평화 애호적이나 도덕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종교적 교리가 절대적인 지배력이 있었을 때 인류가 지금보다 행복했는지 의심스럽지만, 그들이
지금보다 도덕적이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어느 시대나 종교는 도덕성 못지않게 부도덕성도 지원해 주었다.
가톨릭을 믿는 나라든, 개신교를 믿는 나라든, 유럽 나라들은 대부분 구교와 신교의 비호 아래
제국주의적 해외 침략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개신교는 서구의 제국주의자, 특히 미국의 아시아 침략의 길잡이로 충실히 봉사했다.
- 본문 258쪽
한 마디로, 이 분의 이 책, 참 생각해볼만한 점, 배울 점들이 많다. 이를 껌정의 전문
용어로 이렇게 말한다. "이분, 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