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 최초의 직업화가 여성이었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요즘 이 언니를 추적 중이다. 기존 국내 서점에 나온 책들 중에서 이
언니를 책 한권을 할애하여 자세히다룬 책은 번역서건 국내 저작이건 이 책 한 권 뿐이다. 처음 읽어나갈 때는 인물의 대화나 심리 묘사가
섬세하게 들어가서 소설인가, 했는데 계속 읽어보니 전기문이다. 놀랍다. 각종 문서 보관소에서 아르테미시아 관련 문서들을 방대하게 찾아 인용했다.
끝에 실린 연보와 서지 사항도 아주 알차다. 딸과 아버지의 관계에 집중하는 플롯, 소설적 표현만 빼고 보면, 지금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아르테미시아 관련 책들 중 가장 자세한 책이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7세기 전반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덕분에 화가의 재능을 개발할 수 있었으나
아버지 동료 화가이자 그림 과외 선생인 타시에게 강간당한다. 아버지는 고소한다. '세기의 소송'이라 불리는 강간 소송 동안,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문을 당하고 주변의 멸시를 받는다. 순결을 잃은 여자로 결혼 시장에서 내쳐지고, 수녀원에서도 안 받아줄 신세가 된 그녀.
화가로서의 미래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처한 그녀. 그러나 그녀의 재능을 아낀 로마 참사원 덕분에 400에퀴의 지참금을 받아 그녀는 팔려가듯
피렌체의 화가 피에트로 안토니오 스티아테시와 결혼한다. 사치를 좋아하는 스티아테시는 빚을 갚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기위해 얼굴도 안 본 그녀와
결혼하기로 자원했다. 아르테미시아 입장에서는 남편이 화가여야지만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에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당시는 독자적으로 여성이
창작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여튼, 남편이 피렌체 상층 인간들에게서 주문을 받아오고 물감을 사 나르고 해서 그녀는 다시 붓을 잡을 수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일생의 대표작<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를 그린다. 칼을 든 여성 영웅 유디트는 자신을 모델로 그렸고,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홀로페르네스는 타시의 얼굴로 그렸다. 그녀는 이후 수없이 성경 속 여성 영웅을 자신을 모델로 그렸으며 수없이 타시를 죽였다.
그녀는 상처에서 벗어나 예술로도 인간으로도 승리했다. 1616년 23세에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디제노 한림원에 직업 화가로 가입해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611~1612년경, 캔버스에 유채, 158.8×125.5㎝,
국립카포디몬테미술관
경향신문 기사에서 가져와 인용했음.
여기까지가,여성인물열전이나 페미니즘 미술사, 카라바조 파를 논하는 기존 미술사, 여성의 역사, 심지어 메디치 가 역사 관련 서적에 매우
적은 분량으로 등장하는 아르테미시아의 이야기이다. 그럼 그 후는? 그녀는 남편의 보호 아래에서 평탄하고 행복하게 창작 생활을 계속했을까?
남편은 그녀가 번 돈을 낭비했고, 빚쟁이들은 그녀를 찾아왔다. 한동안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듯 싶었지만, 남편 역시
그녀를 이용하고 배반한 것이다. 아니, 아내의 재능에 압도당해 그녀의 정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 여인이 겪은 강간 사건은 평생
피해를 남긴다) 남편과 사이에 네 아이를 낳았기만 세 아기가 그녀의 품을 떠나 하늘나라로 갔다. 말썽만 일으키던 남편이 행방불명되었다.
아르테미시아는 음악가 러니어, 나폴리 부왕이된 에스파냐 귀족 알카라 공작 등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가진다. (어느 정도는 작품 주문을 해주는
패트런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그녀의 자유 의지였다. 그녀는 강간사건 때문에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기쁨과 인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이 점이,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 강간자의 얼굴을 그려 화풀이한 점보다 더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 딸에게도 미술 교육을 시키기는
했지만 자신이 살아온 삶이 뼈저리게 힘들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안다. 두 딸은 열심히 그림 그려 모은 두둑한 지참금으로 좋은 곳에 시집보냈다.
(아참, 남편 행방불명된 후 알카라 공작의 아이로 추정되는 딸을 낳았기에 딸이 둘. ) 제노바, 베네치아, 로마, 나폴리, 런던,,, 그녀의
작품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이 그녀를 부르면 그녀는 이주하여 그림을 그렸다. 유럽의 귀족들은 그녀가 그린 역사화와 그녀의 자화상을 동시에 걸기를
원했다. 창작 뿐 아니라 화상인 다니엘 니스와 함께 거장들의 작품을 수입하고 중개하는 사업수완도 보였다. 이 모든 것이, 그 시대의 여성의
활동으로서는 매우 드문 것이었고,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다 훌륭하게 해 냈다. 46세되던 1639년에는 런던으로 가서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가 주문받아 그리던 그림을 도운다. (그녀의 강간 사건을 자신의 재산 손상사건으로 여기던 친아버지와도 25년만에 화해를 이룬 것이다.
- 여기까지, 괄호 안의 문장은 책에 없고, 내가 의미부여한 것임)
이런 이야기는 이 책에만 있다. 눈을 아프게 하는 빽빽한 글씨와 530쪽이 넘는 책, 그리고 번역 때문에 읽기 힘들었지만, 읽은 보람이
확실히 있었다.
아르테미시아는 로마의 코르소 거리에 정착했다. (중략) 그곳에는 로마의 호화로운 살롱들을 프레스크화로 그리고 있는 한 예술가의 아틀리에 겸
숙소가 있었다. 바로 아고스티노 타시였다.
그녀가 명예를 둘러싸고, 자신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온갖 싸움을 치렀던 장소로 되돌아왔다. 그녀에게는 재회와 내적인 화해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아르테미시아 로미라는 이름과 스티아테시 부인이라는 신분에 이별을 고하는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성을 되찾고, 그 이름을
빛낼 것이다. 그녀는 로마에서 가장(家長) 젠틸레스키가 될 것이다. (중략)
어떤 법적 후견도 없이, 자기 운명의 주인인 아르테미시아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속할 뿐이었다. 인구 조사 기록 속에서 그녀는 장차
'호주'로 등장할 것이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화가.'
- 본문 346쪽에서 인용
위 인용 문단을 보면, 가슴 벅찬 내용에도 불구하고 번역이 좀 껄끄러운 것이 느껴진다. 역자는 불문학 전공자이시고 유명한 소설가인데, 아마
역사 쪽으로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프랑스어 직역만 하신 것 같다. 지나친 피동 사역 등 서구권 언어 번역투의 문장이 눈에 거슬린다. 프랑스어
표기 인명을 영국, 독일인들에게도 적용한다. 그 나라 인물은 그 나라 인명으로 표기해주어야 한다. 또 한국문화에서 세분화된 친족호칭을 그냥
엉클, 앤트, 커즌, 퀸 그대로 숙부, 숙모, 사촌, 왕비로 번역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1세 여왕도 왕비라 번역했다. 이런 부분이 굉장히 많이
보이지만 가장 황당했던 두 가지 예를 들자면
467쪽 :
한 세기 전부터 영국 국교는 국민들의 공식 종교였다. 그러나 앙리 3세에 의해 만들어진 그 신앙은
=> 헨리 8세.
476쪽 :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받고 있는 발터 레라흐 경이 왕의 신발이 진흙으로 더렵혀지지 않도록 왕비의
발 밑에 자기의 망토를 펼쳤다는
=>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 왕과 왕비는 둘다 여왕.
사실 그 언어 문학 전공하신 번역자분이라면, 다른 분야는 좀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중학 역사 교과서에서 나오는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여왕 정도라면, 번역가 실수라도 편집실에서 미리 잡아주어야 한다. 작은 출판사도 아니고, '민음사'가 이래서야 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