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육아 - 철없는 딸바보 아빠의 현실밀착형 육아 에세이
제임스 브레이크웰 지음, 최다인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저마다의 다른 삶의 방식을 배워가며, 삶을 알아가는 존재가 사람이 아닐까? 싶다. 다양한 경험의 잣대를 토대로 행동에 있어서 책임질 수 있는것이 어른이 아닐까? 이 책임성을 우리는 '역할부여'에 수반하여 일깨워가고, 터득해간다. 대체로 '결혼'의 방식을 통해 우리는 어른의 역할 상당수를 학습해간다. 즉 절대적인 피임이 아닌 한 한 가정을 이뤄가고 정착해가는 과정에서 육아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육아는 단순한 출산 교육에 그치지 않고, 세상의 풍파속에 부모로서 든든한 울타리로 지켜주겠다는 본능적인 신의성실의 약속을 의미한다. "네가 세상에 온전한 독립적인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줄께. " 이미 이전 세대의 양육을 통해 성인으로 자라나고, 그 부모가 했던 역할을 수행해 가는 것이다.
 

 그런데 1인가구가 점차 확산되고, '비혼'의 단어가 웃프게도 통용될 만큼 부모가 되는 시작 자체가 쉽지 않다. 시대가 발달할수록 평균적인 생활수준이 높아지는데, 기본 정주여건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결혼을 준비할 수 있다는 자체가 때론 부러움을 살 때가 있다. 중요한건 행복한 가정을 꾸려가겠다는 서로의 약속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자세에 있을 것이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의 모습은 대체로 경애롭다. 한순간에 복잡미묘한 감정이 새하얗게 씻겨나가는 감성을 쉽게 고양할 수 있다. 그런데 육아의 과정은 살벌할때가 많다. 장난끼 가득찬 아이가 혹여나 다칠까 싶어 쫓아다니다보면, 부모의 육체적 고단함이 엄청나다. 쫓아다니지 않아도 될 단계에 이르러서는 정신적인 수행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서도 부모에게 내 자식에 대한 걱정은 습관적으로 이어진다.
 

 결혼은 아직 하지도, 서두르지도 않고 태연한데 벌써 조카 육아는 오랜 세월을 거듭한다. 나이 차 많은 사촌 족보 막내 삼촌의 비애랄까? 하염없이 꾸벅꾸벅 졸아대는 모습, 어느정도 자라서는 이제는 천정 높이 사람 그네를 태워주며 놀아줄 수 없을때를 발견하면 허무함이 몰아온다. 에너자이저를 방굴케 하는 에너지 앞에 아주 가끔 '좀비'와 묘하게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봤다. 즉 좀비는 오로지 물어뜯으며 세균에 전염된 종족을 늘려가며 집단으로 몰려간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세균번식 하듯 숫자가 늘어나니 막강한 근력의 사람도 속수무책으로 좀비화되어간다. 그런데 좀비가 있는 곳이 아는 것과 모르는것은 극명한 차이가 있다. 딸 넷을 키우는 아빠가 쓴 「좀비육아」 는 다소 특이한 책이다. 좀비로 가득한 사회의 종말에 맞서 필연적인 육아를 대비하고 있다. 즉 지극히 당연한 부모의 역할에 대해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책이다.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대상의 하나는 아포칼립스 (apocalypse)의 존재이다. 종말, 대재앙 같은 표면적인 의미 이외에 아포칼립스는 탄생순간부터 해괴한 형체를 띈 불완전 존재에서 점차 가장 강력한 존재로 생존하는 흐름을 상징한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존재 스스로 거칠고 메마른 환경에 적응하는 방법을 터득하며 생존력 강한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을 일깨우고 있다.
 

「좀비육아」는 아이들이 거쳐야 할 불완전한 환경자체를 좀비에 비유하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에 맞서 강하게 키워낼 수 있는 법을 말해주고 있다. 기존의 전문적인 해설이 가미된 육아관련서적과 확연히 엉뚱한 맥락을 취하고 있어서 글 자체를 이해하는건 상당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곁들여 단순화된 캐릭터가 접목된 아이 관점의 삽화가 더해지니, 부모의식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각 이상으로 훨씬 학습습득력이 뛰어나다. 사람의 감정에 대한 이해도 밝고, 감정표현도 솔직하다. 당장에 억울해지면 울음을 터트릴 정도이다. 어른은 푸근한 품에 아이를 안은 체 토닥이며 어떤 감정상태가 잘 표현되지 않아서 슬픈걸까? 관심을 가지면 족하다. 이내 울음을 그치고 꺄르르 웃는 아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정확히는 어른보다 감정능력에 있어서는 탁월하다. 경험의 절대적인 부족에서 오는 감정 통제 자체에 익숙하지 못할 뿐이다. 아이는 실컷 울고 나서야 해맑게 웃을 수도 있다.


아이는 몸집이 작고 에너지가 넘쳐서

부모가 미처 보지 못한 구석까지

샅샅이 살필 수 있다.

-p100-

 

 문득 바닥의 미세한 조각까지도 손쉽게 발견하는 조카의 관찰력이 떠올랐다. 그렇다. 어른의 잣대에서 보면 아이들을 과소평가 하기 쉽다. 더욱이 교육열이 치열한 우리의 경우 그런 아이들의 잠재력을 발굴하기보다, 아이들끼리의 경쟁을 부추기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얼굴에서 온통 근심가득한 육아의 현실은 흡사 전쟁터를 방굴케한다. 그런데 그 치열한 전쟁터속에 얻는 잠깐의 꺄르르 순간에 고단함이 사라질때가 많다. 치열하게 최선을 다한 만큼 순간의 희열은 크다. 그 보람으로 또다른 새로움을 기약한다. 자고 일어나면 아이들에게 어떤 미래가 열릴 지, 내 아이가 얼마나 자라나 있을지는 아무도 확신할 수 없다. 확실한건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진 아이들인데, 당장의 어른들 기준에서 바라보며 쑥쑥 자라날 기회를 박탈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부모로서 아이를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이 아닌, 아이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설계한다는 생각을 가져본다면 배워나가고 채워나갈것이 많다. 갈수록 생활 영역에 편리함이 더해지는데, 아이 스스로도 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박탈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좀비육아」 엔 체계적으로 육아에 관한 A~Z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오히려 부모를 힘들게 하는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마찬가지의 귀여운 복수를 펼치는 엉뚱한 전개로 이어간다. 관점을 달리하면 충분히 고단한 육아현실에서 최소한 긍정적인 위안을 찾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생각밖으로 책은 두꺼웠지만, 따분하지 않은 이유였다. 발상의 전환이 우리의 육아가정을 좀더 견고하게 오랫동안 행복하게 만들어가는 자생분이 되지 않을까? 부제만 해도 "세상에 종말이 오고 좀비가 득실거려도 기저귀는 갈아야 한다." 로 붙일 정도로... 우리들 스스로 되돌릴 수 없는 필연적인게 육아라면, 의미를 되새기며 아이들의 관점에서 세심하게 바라보고 아이들의 생각을 맘껏 표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자. 부모가 되는 순간 아이와 함께 새로운것들을 익혀가는것 만큼 최선의 육아는 드물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은 생각하기 따라서 풍요속의 빈곤을 스스로 자처하기 쉬운 세상이다. 제대로 쉴 엄두를 못내는 육아의 현실일수록, 마음만큼은 잠시라도 쉴 틈을 만들어둬야 한다. 힘들고 고단할때 엉뚱한 책이야말로 읽기도 좋고, 의외의 관점에서 웃을 계기점을 생성할 수 있다.

 

 

가족이 알아서 자리를 피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가족을 떼놓으려면 은근함과 눈치가 필요하다.

불행히도 부모인 당신에게는 둘 다 없다.

-p216-

 

 

 

 아이가 자라는 동안 부모에 대한 절대 의존도도 점차 줄어든다.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가 또래들과 함께 어울리는 과정이 이어지고, 친구들과 함께 뛰어 노는것이 즐겁기 시작한다. 아이의 성장과 반비례하여 부모의 자존감의 자리는 맹목적인 역할로 전락하기 쉽다. 어느 정도 육아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근근히 버티셨던 부모의 부모님들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정신없는 일상을 보내고 나면, 온전히 육아에 쏟아낼 애정보다는 오히려 감정풀이 하기 쉽다. '지금 상태로도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니, 제발 나의 상전님은 잠시라도 얌전하게 지내주소서.'
 

 그런데 현실속의 육아의 고달픔은 상대적 비교에서 오는 스스로의 완벽주의에 기인하는 면이 상당하다. 집중과 선택에 있어서 적재적소의 행동매칭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최소한의 관심이면 충분한 순간엔 도리어 지나치게 집착한 덕분에 정작 신경써야 할 부분은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능력좋다 한들 24시간 한계를 무한정으로 바꿔놓을 수 없다. 모든 일을 다 잘하려는 욕심이 지나치면, 어느 순간엔 만사가 귀찮아지는 그로기 상태에 봉착한다. 어른들의 기준에선 한낱 아이들의 본능적인 분별력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훌쩍 부모보다도 감성이 발달되어있음에도, 어른들의 단조로운 사고방식에 맡겨 아이의 행동을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유형에 가까울수록 육아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 보다 본인 자신의 상실감에서 비롯된 무기력증을 염려해야 할 것이다. 흐늘적거리는 좀비처럼 육아로 인해 넋나간 체로 지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따로 관상을 연구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사람의 인상을 보면 말하지 않아도 고단함을 짐작하고도 남을 때가 많다. 불필요하게 아이들 스스로 깨우칠 영역까지 침범하지 않고 , 배려하는것이 현명한 육아의 시작이 아닐까? 되돌아보면 부모가 될 즈음의 어른들은 이미 실감한다.

 행복은 성적순에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도적으로 남들이 밟지 않은 길을 거침없이 나아갈수록 행복해지기 쉽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내가 학창시절에 못 이뤄낸 욕구실현을 대리만족하려는 경향이 강할수록, 육아를 핑계로 내 아이를 가둬놓게 된다. '함께'가 중요하다는것을 잠시라도 육아를 경험해보면 실감한다. 잠시 잠깐 숨쉴 틈이라도 만들 수 있다면, 한결 육아는 수월해진다. 그때 그때 쉴 틈이 있어야 그만큼 육아에도 집중할 수 있다. 온종일 매달려 시간을 채우는 싸움은 아닐 것이니, 적재적소 쉬게 할 수 있는 지혜가 절실하다. 정말로 고단함 끝에 찾아온 끄트머리 쉼표로 잠시라도 쉬어갈 수 있도록 틈이 필요하다. 가장 인간적인 매력은 빈 틈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빼곡하게 미세한 틈조차도 채워져있다면, 우리는 숨막히게 그 속에서 삭막함을 경험할 수 밖에 없다. 기왕이면 즐겁고 보람찬 육아를 하자. 아이에 대한 세심한 관찰의 결과를 바탕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화로 보는 성차별의 역사 한빛비즈 교양툰 2
솔르다드 브라비.도로테 베르네르 지음, 맹슬기 옮김 / 한빛비즈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누구에게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행복을 누리기 위한 노력에 걸림돌이 될 성차별적 요소는 없어야 한다는 전제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평등 목적보다는 사회 질서유지 차원에서 제정된 법 요소가 많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마다 상이한 생각을 형평성있게 규율하기 위한 명확성이 아직 부족하다. 그런 까닭에 남녀에 관련된 이슈들은 젠더갈등을 야기시키는 양태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다. 남과 여가 공존하는 세상인 만큼, 남자 vs 여자의 이분법적인 해법은 특정 성별에 치우칠 수 밖에 없다. 현실과 괴리감을 보인 체 사회적 양극화를 가속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공존하기에 우리는 일면식도 없는 다른 사람들로 인한 영향을 받고 살아가고 있다.
 

「만화로 보는 성차별의 역사」 는 남녀평등에 있어서 절대적 소외를 당했던 그동안의 여성의 고단한 삶의 역사를 쉽게 만화로 풀어낸 책이다. 책 자체는 아주 가독성 높은데, 읽고나니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될 주제를 상기시키게 한다.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생명의 가치를 전제로 할때, 그 유수한 시간속에 여성의 불평등이 당연시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여성의 잠재적인 능력 자체를 봉쇄하려는 야만적인 속성에 기인하기도 한다. 사람에 비해 육중한 몸집을 지닌 동물들을 사냥하던 수렵시절에도 가냘픈 여성들이 수확한 식량이 70% 정도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는 어쩌면 당연할 수 있다. 지금에 비해 저장기술이 발달되지 않은 척박한 환경에서부터 여성은 식량을 증식하는 기술을 터득해오고 있었다. 오로지 위험을 무릎쓰고, 거대한 동물을 사냥한 가치만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불평등 자체가 차별의 묵인에 기인한 면은 아니었다. 드물지만 고대에서부터 여성이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던 국가도 존재한다.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과부가 생겨나자, 수녀원에 은신하는 여성이 늘어났다. 각자의 독립적인 역량을 펼치기 시작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한 세습 권력 계층의 탄압으로 이어진다.
 

르네상스 시대엔 수많은 여성직업이 생겨났다. 여성의 적극적인 자유권이 태동하기 시작하고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언급하는 순간 마녀로 지목되어 마녀사냥을 감행한다. 지금은 범죄로 규정짓는 많은 악습들이 관행적으로 이뤄졌다. 즉 그 당시 통치질서에 반하는 세력으로 규정된 이상, 최소한의 인간으로서의 고결한 가치도 존중받을 수 없었다.
 

 무려 30만년 씩이나 이어져오고 있는 성차별의 역사를 보니, 참혹하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전반적으로 여성들의 사회진출은 확대되었는데, 중요한건 양극화의 측면이다. 동일직무 동일임금의 원칙에서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상당한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점차 사회는 수평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기존에 선점한 조직질서 자체가 성평등과 괴리하기 때문이다. 조직 구조자체는 연공서열에 따른 직급을 갖추고 있는 반면, 갈수록 업무 자체가 파생적으로 발달한다. 즉 하위직일수록 많은 시간을 투입해 업무에 매진해야 하는 구조이다. 또한 개인적인 생각으로 학습된 무기력에 기인하는 바도 크다. 힘이 없으니 무기력하게 잘못된 관행을 방관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성차별을 해결하려면 남녀간의 그릇된 인식이 극복되어야 한다. 즉 겪어보지 않은 선입견에 고착화된 판단 보다는 개별적인 주체로서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 사람이 생활하다보면 알게모르게 외부효과를 발생한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이기적인 행동이 끔찍한 결과를 야기시키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늘 조심해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 나로 인해 선량한 다른 동성의 개별인이 피해보는 양상을 예방할 수 있다. 세상엔 나쁜 사람들 훨씬 이상으로 좋은 사람들이 많다. 다만 약육강식의 인식에 기인하고, 나약하게 무기력해지는 순간 그것은 수많은 방관자를 만들 뿐이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변하는 것은 없다. 잘못된 관행에 맞서 뭐라도 해야, 최소한 관행으로 여겨졌던 수많은 악습들을 근절할 수 있다.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곁들여 성차별이 근절되려면, 독립적인 주체로 이끌어주고 육성하며 다독거려줄 수 있는 따뜻한 리더가 많이 등장해, 푸근한 젠더감성을 삭막한 사회에 옮기는데 힘써야 한다.
 

 검색만 하면 쉽게 원하는 정보를 찾아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디지털문화가 발달할수록 단편적인 정보에 의존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그러다보니 현상을 일으키는 배경정보는 소홀히 하게 된다. 사실 (Fact) 보다는 이미 결론을 단정내린 제목에 의존한다. 이러다보니 정작 회복해야 할 권리는 소홀히 한 체, 특정 집단에 함몰되어 권력화되는 현상까지 빚어진다. 오랜 세월의 암울한 그림자를 바로잡아 권익을 향상시키지 못하고, 특정의 이해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집단구성의 명목으로 전락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진정한 차별 해소는 끊임없는 자기성찰에서 비롯한다. 정작 남녀평등을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고정관념의 틀에 갇혀 있는 경우가 많다. 많은 시스템은 기계적인 평등에 일관한다. 그러다보니 평등을 위한 정책이 도리어 역차별을 가중시킨다. 평등을 이야기하는데도 여전히 약자의 관념을 관철할때가 많다. 현실에서 남녀의 생물학적인 차이가 일 자체의 능력을 결정짓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과연 여성의 경제활동자체가 제약되던 가부장적인 환경에서의 기준이 얼마나 오늘날의 스마트한 직무에 합리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까?
 

 성차별은 새로운 가치에 대한 배타적인 문화에 기인한다. 즉 기존에 가치로 인정받고 사회적 위치를 점한 세력들의 조직적인 반발에서 시작된다. 그것이 퇴행적으로 누적되면 하나의 악습이 관행으로 정착한다. 성차별은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의 총체라 할 수 있다. 약육강식의 습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 상명하복 방식의 조직을 구성하는 형태이다. 즉 일사분란하게 명령 통제될 수 있는 체계부터 마련하는 것이다.
 

 다가오는 3월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다. 작년에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법정기념일로 지정했다. 이 날만큼이라도 내 자신의 성평등 의식을 되돌아보는 계기점이 되었으면 한다. 끔찍하고 슬픈 일이 회자되며 공론화되는 순간에도 공감능력은 커녕 가십거리 삼는 경우가 허다하다. 적어도 '가까운 내 주변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항상 상기한다면, 가볍게 여길 수 없다. 또한 억울하고 끔찍한 일을 겪었을때 서슴없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따뜻하게 품어주는 정책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불합리한 사회 시스템이 개선될때만이 성차별이 점진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그런데 매번 산발적으로 일률적인 할당제 관념에 사로잡혔다는 생각을 품어본다.

 오늘날 우리가 당당하게 누리게 된 권리 또한 수없이 이어져온 투쟁의 결실이다. 여전히 결혼자체를 인구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지금의 현재에도 사람이 힘들게 감당해야 했던 많은 노동영역이 기계로 편리하게 대체되고 있다. 편리해질수록 그 틈바구니속에서 잠재력을 발휘할 가능성은 열려 있는 법이다. 다만 4차 산업혁명의 흐름대로 다변화되는 시대의 흐름에 발빠르게 정책이 쫓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더디게 하고 있다. 금기시되던 남녀의 성역이 역전되는 경우도 많다. 극히 일부에 국한하지만 가사영역을 전담하는 경우도 많다.
 

 남녀는 필연적으로 공생해 상호보완적인 작용을 한다. 소수의 지배계층에 기생하는 종속적인 습성이 강할수록 성차별 요소는 고착화될 수 밖에 없다. 반면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외치는 조직적인 목소리가 커질수록 외면할 수 없고 성차별은 퇴출될 수 밖에 없다. 18장은 다소 안타깝기도 하고, 아쉬운 대목아쉬운 부분이 가득했다. 특히 성범죄를 겪고서도 억울함을 신고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는 주변으로부터의 냉대와 솜방망이 처벌 때문이다. 혼란한 사회질서를 통제 규율하는 차원의 법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최우선적으로 챙겨야 할 피해자의 존중 배려는 거의 발견하기 힘들다. 처절하게 투쟁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천부인권을 보장받게 되어있다. 나 자신의 권리는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권리를 명명백백하게 행사할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나만 아니면 되지.'하는 무관심이 다수의 방관자를 양산하게 마련이다. 결국 성차별 문제는 개별적인 의식이 바뀔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다.
 

 성별 차원을 떠나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자기 스스로의 만만함이 최대의 적이란 생각을 해본다. 상대방에게 만만하게 여겨지는 순간 일방적인 차별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만만하지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평소에도 솔직한 나의 목소리를 외쳐야 한다. 성차별에 있어서는 참는것이 독이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외친 용기로 인해 동성의 누군가는 뜻하지 않은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나로 인해 나와 너를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을때 평등또한 자연스럽게 실현된다. 이제는 차별을 속앓이하며 견디뎌 하지 말고, 숱한 세월 그랬던 것처럼 독립적인 주체로서 당당하게 투쟁을 외쳐 나가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아온 여행자에게 - 여행을 마친 뒤에야 보이는 인생의 지도
란바이퉈 지음, 이현아 옮김 / 한빛비즈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돌이켜보면, 일상 한 가운데서 발견하는 특별함이 많다. 그 도시의 명소, 내가 사는 동네의 명소는 오히려 그곳에 살지 않는 사람들의 검색에 의해 알려지는 경우가 많은 현실. 원래 그 자리에서 오랫동안 익숙할수록 특별함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웬만한 거리는 걸어다니는 편 이다. 걷다보면 펼쳐지는 조용한 풍경에 어수선한 마음까지도 내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익숙하지 않은 풍경속에서 마주하는 새로움은 보물찾기와 같은 즐거움을 준다. 여행은 늘상 동경의 대상이다. 홀가분하게 바쁜 일상을 미뤄두고 떠날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거주지역을 벗어나는 순간엔 만반의 채비를 갖춘다. 길을 나서면, 금새 사통팔달 전국으로 향하는 버스를 마주할 수 있는 내가 사는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아닌 이유이다. 여행을 통해 인생을 발견한 많은 이야기들이 책으로 펼쳐지곤 하는데, 대체로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용기 자체를 고무적으로 여긴다.

젊을때 아니면, 떠나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일까?

 

워라벨 에 대한 인식이 이제야 싹트고 있는 현실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한 홀가분하게 여행을 떠나기는 쉽지 않다. 얽매이지 않고 떠날 수 있는 자! 좋은 직장에 다닌다는 증빙으로 봐도 될 것이다. 물론 요즘은 오히려 직장 스트레스에 맞서 온전한 자기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여행을 개척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추세다. '남'이 아닌 '나 자신'이 누려야 할 자존감에 대한 인식이 생성된 덕분이다. 갈수록 여행에 있어서도 자기 주도적인 설계를 하는 경우가 많다. 점차 알뜰해지는 것이다. 『돌아온 여행자에게』는 여행의 과정을 설파하는 에세이는 아니다. 오히려 인생의 한 가운데서 여행이 가진 의미를 발견하고 자기 주도적 삶을 개척하는 담론에 집중하고 있다.

일상이야말로 진짜 장거리 여행이다.

최근에야 나는 장거리 여행을 일상처럼 하기보다

일상생활을 장거리 여행처럼 하는 게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낯선 곳을 다녀옴으로써 새로운 활력소를 얻는게 여행의 주목적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떠난 여행의 과정자체가 도리어 남들이 많이 가는 곳을 추천받아 빠듯한 일정에 '쉼없는 여정'을 이어가고 있진 않을까? 쉼없이 이어진 바쁜 일상을 해소하려고 떠나는 여행이다. 그렇다면 일상 자체를 조금은 차근히 쉼없게 보낸다면 우리는 충분히 재충전할 수도 있다. 시종일관 이 책은 정말 인생을 통해 실감하는 사실들에 대해서 공감력있게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맹목성이 우선적이던 세대에선 여행은 일종의 사치에 그치지 않았다. 또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에 대해서도 편견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가족으로서의 신뢰 보다는 가부장적인 질서의 한계만 여실히 드러냈다.

우린 모두 떠도는 사이에 어른이 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도 떠도는 사이에 어른이 된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수 있어야 어른이다. 집 떠나보면 집이 그리워진다. 떠도는 순간 순탄치 않기 때문이다. 하나에서 열까지 스스로 챙겨야 한다. 스스로 챙기지 못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 된다. 그러다보니 수동적인 자아에서 벗어나 능동적일 수 밖에 없다. 남이 챙겨주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본인 스스로 챙기고 준비하게 된다. 막연히 피할 수 없고, 떠도는 순간은 어떻게든 극복해야만 하는 상황의 연속이다. 그러다보니 현실의 실체를 눈으로 보고 느끼고 몸으로 겪을 수 밖에 없다. 떠도는 과정 속에 어른이 되어간다.

여행은 세상의 어려움과 고통을 느끼기 위한 것이다. -P27-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에서 어쨌든 나는 실제로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 지 확신할 수 없지만, 무엇에 관심이 없는지는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 고 말했다. -P92-

 

여행을 통해 저자가 얻은 성찰적 고찰이 이렇게 후련할 수가 없다. 구구절절 공감대를 자극하는 통찰력깊은 시각이 담겨있다. 대표적인게 여행을 막는 아홉 가지 부정적인 말의 유형인데... 대체로 이러한 것이다. 험난한 세상속에서 든든한 울타리 역할에 충실해야 할 부모님이 전혀 그렇지 못하고 안절부절 불안한 상황인 경우가 많다. 심지어 어떤 발언권도 허용되지 못하고 종속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행을 떠나지도 못하고 갇혀 지내게 된다. 현실적으로 여행을 떠날 용기조차 사라지게 하는 원인이다. 그러함에도 소중한 우리 자신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라도, 세상속에 온전한 내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라도 용기를 내어야만 한다. 인생을 통해 우리는 함께 돌아보는 지혜를 발견해야 한다.

혼자 하는 여행은 스스로를 잘 돌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둘이 하는 여행은 서로를 잘 돌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여행은 여러 사람이 함께 돌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P32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첫 불렛저널
Marie 지음, 김은혜 옮김 / 한빛비즈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좋은 습관이 생활을 바꾸고, 결국엔 기본적인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옛말이 틀릴것 없는것이 결코 좋지 않은 행동습성을 버릇이라 한다. 고쳐야 하는데 결코 쉽게 고쳐지지 않는 악순환의 유형이다. 새해가 되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모두들 시작한다. 2019년의 달력도 이제 첫 장을 넘겨야 할 순간이 다가왔다. 그런데 올해는 제대로 기록조차 못하고 있다. 새롭게 시작할 엄두를 못내게 하는 의욕상실의 일들이 이어지고나니, 기약없이 일정이 멈춰서 있는 상태에 있다. 사실상 해야만 하는 당의적인 일들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날짜로 구분되는 현재, 과거, 미래의 장벽에 스스로 갇혀 있기 때문이다. 당장에 현재 시점만 충실하면 되는데, 현실은 과거에 하지 못했던 일과들을 떠올리며 머뭇거리고 있다. 일의 우선순위가 뒤죽박죽된 여파이다. 시간을 거슬러 이미 하지 못한 일들을 되돌릴 수도 없고, 아쉬워 할 필요도 없는데...

더미에서 우선 벗어나는것 부터 불렛저널 시작하기

 

가득 쌓인 '더미'들 속에서 당장에 해야 할 일들부터 정리해야 할 필요가 생겼다. 책상 위를 가득 점령한 물건들을 치우고 나니, 한켠에 수북하게 쌓인 메모들을 발견했다. 간편하게 떼었다 붙일 수 있는 포스트잇도 있지만, 유독 애용하는건 이면지의 A4용지들이다. 한면만 인쇄된 용지들을 가지런히 놓고 8등분으로 잘라서 사용한다. 필기구의 종류에 상관없이 빠르게 써내려갈 수도 있고, 살갗에 닿은 종이의 촉감이 편하다.

누렇게 변한 책을 넘길때마다 손끝에 느껴지는 아날로그 감성과 만난 느낌과 일맥상통한다. 빼곡하게 적어둔 메모를 보니, 지나온 과거의 경험의 흔적들과 생생하게 마주하는 감회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점의 감정상태, 배경 상황 까지도 떠오를 정도였다. 그렇게 정리의 과정을 거치고 나니, 한결 비좁기만 하던 공간도 여유를 찾아갔다. 가득쌓인 공간의 답답함에서는 실감할 수 없었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텁텁하고 답답한 심리적 상태에서 안정을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불렛저널』 방식의 편리한 기록을 떠올린 라이더 캐롤의 당시 상황또한 이렇지 않았을까? 싶다.

혁신적인 방식의 다이어리 기록으로 손꼽히는 불렛저널은 알고보면 오래전부터 효과적인 메모의 방식으로 정착해왔다. 노트필기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네모체크리스트에 넣어 기록하며 항목별로 구분하는것이 드물지 않았다. 꾸준한 기록의 습관을 이어가다보니, 터득된 습관의 유형이다. 최근 불렛저널이 주목받는것은 책의 형태로 체계성을 갖췄다는 데 있다. 즉 쉽게 흉내낼 수 없었던 맛의 비결을 레시피 형태로 정형화된 지식으로 옮겨오면서 손쉽게 요리감각을 높일 수 있게 된것과 같다.

생활의 기록을 일목요연하게 시작하는 비결

 

아무리 좋은 책도 딱딱하기만 하면 보는 내내 나른함과 악천고투를 벌인 체 덮는 일이 수두룩할 것이다. 다이어리 기록또한 마찬가지다. 흔한 작심3일의 예가 새록새록 기록하겠다는 연초의 각오가 무색한 새하얀 종이의 발견에 있다. 뭣이 중한지 핵심만 시원하게 간추려주는 일의 순서는 고사하고, 그 흔한 중요일정도 적혀있지 않을때가 많다. 하루의 일정이 일정하지 않은데 1/2장~1장 정도로 배정된 날짜 속지에 기록해야 한다는 강박을 불러일으킨다. 그렇다고 이미 지난 날짜에 기록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불렛저널은 편리하다. 꼭 매일 일정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최우선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이다.

검정 하드커버의 불렛저널이 원서를 번역한 버전이라고 한다면, 『나의 첫 불렛저널』은 대한민국 버전으로 재구성한 실생활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즉 실제 불렛저널을 통해 꼼꼼한 기록을 이어가는 내용을 담고 있다.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활용한 다양한 교육법을 블로그를 통해 소개하고 있다. 사실 불렛저널 책을 처음 읽게 되었을때서야 비로소 불렛저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원리는 간단한데, 다소 서술에 있어 복잡하다는 생각했다. 『나의 첫 불렛저널』 은 불렛저널의 개념을 인지하지 못한 분이라도, 읽어보면 고개 끄덕할 만한 흥미로운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다.

소책자 같은 가독성 높은 구성방식

 

불렛저널에 관한 활용 전반을 소개하고 있는데, 책 자체가 두껍지도 않고 가볍게 되어있다. 손에 쥐고 다니기에도 간편해 짜투리 시간을 활용해 쓱쓱 읽어나갈 수 있는것이 매력이다. 저자는 엉망진창 흐트러진 일상에서부터 메모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그리고 우연히 2013년 불렛저널에 관한 기사를 접해 입문했다고 한다. 전작의 불렛저널을 접하면서 사실 불렛기호를 사용한 항목별 정리 방식은 쉽게 이해갔지만, 습관이 되지 않아 실제 적용하는것이 쉽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첫 불렛저널』을 발간한것도 나와 같이 아직은 습관되지 않은 기록자들이 많은 덕분일 수도 있다.

노트와 펜만 있으면 빠르게 기록하고 싶은데,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필기환경은 짧은 시간에 손가락의 힘을 마비시킨다. 위 아래로 춤을 추려는 필체를 진정시키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러다보면 습관도 정착되기 전에 기본적인 성격만 변질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스쳐지나가는 바람처럼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들을 당장에 기록해두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일쑤다. 한참 일정표 범주에서 벗어난 순간에야 깜빡 잊은 자체를 떠올리며 후회하는 일이 많다. 늘 오늘 생각난 일을 미루는 순간 차일피일 결국엔 하지도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 일상이다. 기록을 효과적으로 한다는건 일상의 효율을 높여주는 측면이다.

불렛저널을 잘 활용하는건 시간활용성을 극대화하는 비결

 

불렛저널은 나 자신이 나에 관련된 일들을 주체적으로 기록 정리하는 연속선에 있다. 나 자신에게 좀더 전념할 수 있는 동기부여를 해준다. 즉 남으로부터 방해받을 시간을 어느정도 제어해주는 역할을 한다. 하루를 부지런히 보냈음에도 정작 일과를 마치고 나면, 한 일을 별로 떠올릴 수 없는건 중요치 않은 일들을 반복적으로 시간소비도구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불렛저널을 잘 활용한다는건 그만큼 시간 가용성을 축적할 요소를 비축한다는 의미이다. 선택과 집중의 문제에 있어서, 보다 기존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여지를 제시한다. 지금은 매 순간이 고민의 연속이다. 정보 과잉의 시대로 불려도 충분할 만큼 많은 선택지들이 있기 때문이다. 누가 대신 선택해주길 바랄 정도의 햄릿증후군 상태의 요즘에서 불렛저널은 일목요연하게 일의 흐름을 개선할 수 있다. 모든 것을 만족시킬 수도 없고, 모든 것을 한꺼번에 할 수도 없다. 시간은 우리가 하고 싶은 욕구에 대비 현저하게 한정적일 수 밖에 없다.

뒤죽박죽 혼돈을 경험하는 사람이라면 불렛저널 방식의 기록을 통해 일상의 단조로움에서 탈피할 수 있다. 당장에 하지 않아도 되는 미완료 상태의 리스트들 덕분에 마음의 여유를 누리기 힘든 경우가 허다하다. 즉 꼭 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숙제와 같다. 미처 숙제를 하지 못한 아이가 안절부절 숙제검사 없기를 은근히 바라는 심정과 같다고 할까? 홀가분하게 끝내놓고 나면 오히려 참잘했어요. 도장을 받기위해 기다려지는 법이다. 일상의 숙제를 홀가분하게 마무리한 사람의 여유는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사람의 감성은 디지털 문명을 통한 편리함보다는 아날로그 방식을 통한 전달에 익숙한 측면이다. 꾹꾹 써내려간 긴 편지 자체로도 그 사람의 마음이 읽혀질 때가 많지만, 장문의 메세지가 오히려 불필요한 오해 착각을 불러일으킬 때가 많다. 지나치게 "빠른 전달"에 익숙한 나머지 최소한의 마음배려를 생략하기 때문이다. 노트와 펜 그리고 꾸준한 습관으로 이어지면 충분한 불렛저널은 그런 면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고양시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펜보다는 키보드에 익숙해지다보니 갈수록 기본적인 필체도 나빠질 수 밖에 없다. 글씨를 잘 쓰고 못쓰고를 떠나 최소한 고사리같은 아이손으로 그려낸 글씨보다는 나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 깔끔하게 정리된 불렛저널 기록들이 차곡차곡 쌓여갈 때마다 얼마나 뿌듯할까? 손으로 쓰는 학습만큼 좋은 사고습관도 드물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당장에 스마트폰이 없으면 고립된 것처럼 불안하다. 당장에 연락해야 할 전화번호는 머릿속에서 사라진 즈음이다. 단순히 불렛저널을 통해 일목요연하게 일의 진행상황을 체크하는 것을 떠나서 기록을 하다보면 의식적으로 해야 할 일의 순서가 정리될 수 있다. 일일히 훑어보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기억하려는 노력을 촉진한 결과이다. 일일히 당장에 중요하지도 않은 일을 수정하기 귀찮아서라도 꼭 해야할 일들 위주로 정리해 일사천리로 정리하는 습관이 키워질 수 밖에 없다.

거듭 『나의 첫 불렛저널』을 통해, 1년을 마무리할 시점되면 차곡차곡 쌓인 기록들을 마주할 수 있길 바라며, 지금부터라도 당장 해야만 하는 것들부터 망설임없이 시작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구나 거꾸로 설 수 있다 - 몸이 뻣뻣해도 운동신경이 없어도 4주 만에
김다혜 지음 / 비타북스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척추골절을 겪은 이후 부쩍 자세에서부터 척추에 좋은 운동들을 살펴보게 된다. 요가는 빠질 수 없었다. 그런데 남성들은 배우고 싶다고해서 쉽게 접하긴 힘들다. 자연스럽게 요가 동작을 조용하게 익히는 데 열중하게 된다. 사실 생활속 동작이 체계적으로 운동으로 정착된것이 대부분이다. 요가의 경우에도 그렇다. 원래의 기원자체가 심신수양 마음의 평정상태를 목적으로 하는 균형의 목적이다. 그러다보니, 우연의 일치로 뻐근할때 하던 동작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나의 동작을 하더라도 올바른 자세로 동작을 취하는것이 중요하다. 제대로 된 교본이 필요한 이유이다. 

 

 

 

 

 

 

 25만 팔로워를 이뤄가는 요가 인플루언서 김다혜 저자의 「누구나 거꾸로 설 수 있다」 책은 요가를 통한 삶의 변화를 담고 있다. 또한 보다 많은 사람들이 효과적인 헤드스탠드 동작을 취할 수 있도록 친절한 안내를 담고 있다. "그거 어떻게 해요?" 하는 질문을 수도 없이 접했을 법 하다. 일명 물구나무서기의 헤드스탠드 이기에 요가를 접하지 않은 사람들도 익숙하다. 하지만 처음 발을 천정을 향해 내디는 순간의 망설임을 순간 떠올릴 수 있었다. 원래 탁월한 운동능력 제로인자인데, 운동회의 매스체조 동작으로 물구나무를 하다보니 정말 공중으로 다리를 곧게 뻗어내는 순간  나도 할 수 있다는 무한 운동긍정을 경험할 수 있었다. 

 

 

 

 

 

  원래의 상태보다 균형이 흐트러진 현재의 척추상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하여 책을 읽어봤다. 가끔은 헤드스탠드의 역동작으로 누운체로 다리를 뻗어 하늘자전거를 하기도 한다. 즉 목뒤로 깍지 쥔 상태에서 서서히 몸을 뻗어 페달밟듯 다리 스트레칭을 한다. 이러고 나면 몸 전체를 짓눌렀던 통증도 덜해지고 한결 가벼운것을 느낄 수 있다. 책을 읽기 전만해도 헤드스탠드에 대한 동작 설명으로 일관하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실제 실시한 4주간 챌린저 프로그램 내용을 바탕으로 기승전결을 이루고 있다. 그에 앞서 헤드스탠드를 접한 다양한 수강후기를 담고 있다. 왜 요가를 해야 하고, 주의해야 할 사항이 무엇인지 일목요연하게 말해주고 있다. 서술방식도 간결해 가독성높은 독서효용을 느낄 수 있다. 

 

 헤드스탠드 동작을 취하기전에 충분한 스트레칭 동작 숨고르기에 관해서도 핵심만 짚어 이야기해준다. 직접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는 순간 그 분야에 관한 책들을 모조리 찾아 읽는 습관이 있는데, 요가에 관한 책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아름다운 몸의 곡선을 만들어주는데 집중하다보니, 책속의 동작 하나하나를 끝까지 터득하기 힘들다. 중간에 흥미를 잃기 쉽다. 헤드스탠드는 요가의 동작중에서도 고난도로 분류하는데, 역설적으로는 자신을 믿고 발을 내디딜 수 있느냐에 승패가 결정된다. 물론 이는 물구나무 과정에서의 시행착오를 떠올려본 개인적인 생각이니, 실제와 다를 수 있다.  

 

 

 

 

 요가를 직접 보고 느낀것이 아니다보니, 책속에 담긴 자세한 설명과 자연스런 전개는 인식 자체를 깨우치게 하는 것 이었다.  어느정도 요가를 꾸준히 연마한 사람일수록 이 한권의 책이 화룡점정의 효과를 누리게 할 것이다. 운동동작이 몸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알고 접근한다면 보다 심도있으면서 생활속의 좋은 운동 습관으로 정착할 수 있다. 사실 건강하다 자부하는 순간엔 정작 건강엔 무관심한 경우가 많았다.  건강이 위협받는 순간일수록 관심을 갖게 된다. 몸의 균형이 무너지면, 마음의 평정심도 순식간에 무너질 수 밖에 없다. 단순히 거꾸로 설 수 있는 헤드스탠드 동작의 효용 차원이 아니라, 거꾸로 되어버린 심신의 위치를 바로 잡는게 아닐까? 꾸준히 연마하여 언제부턴가 자신없어진 내 자신의 기피성향을 떨쳐버리고, 자신감있는 모습으로 변해보고 싶다.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내용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