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야전과 영원]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야전과 영원 - 푸코.라캉.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 지음, 안천 옮김 / 자음과모음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아찾기의 어려움

지금의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개인이 겪고 있는 가장 큰 문제이자 두려움은 ‘현재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나’와 ‘현재’가 어떠한지 모른다는 ‘무지’에 많은 이들이 떨고 있으며, 그 불안을 이용하여 ‘지식과 정보’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이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착취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아 찾기’는 ‘현재 찾기’와 닮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위기와 국제적 안보의 위험 속에서 우리 사회는 점점 ‘전체화 된 사회’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자신’을 하나의 초월적인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개인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라캉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정체성은 오직 다른 누구와의 연결을 바탕으로 해서만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 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현재를 읽어내고, 그 속에서 자신을 발견 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저자인 사사키 오타루는 “자크 라캉, 미셀 푸코, 피에르 르장드르”라는 세 명의 철학자들의 이야기 속에서 찾아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현재 속에서 나를 찾아내는 힘”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읽기, 그리고 쓰기의 결과물

푸코도 풍자적으로 ‘철학자의 역할이 어느새 ‘현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하게 되었다.’라고 말 했습니다. 사회 비평가의 역할을 철학자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저자인 사사키 오타루가 강조하는 것은 결국 “쓰기”라는 행위입니다. 전 작인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소개하는 “문학 = 읽기 = 혁명”이라는 단순한 도식에 이제는 “쓰기”라는 것을 추가하는 것입니다. “쓰기”라는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은 남들과 차별화 되는 자신을 ‘직접적’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저자 역시 스스로가 생각하는 푸코와 라캉과 르장드르의 관계에 대해서 직접 공부하며 읽었고, 자신의 생각을 직접 써내려가며 엮어낸 것입니다.


저자는 말 합니다. “세 사람의 텍스트를 나름대로 철저하게 읽고 정성스레 재단해 세로실 가로실을 풀어 묵묵히 다시 짜는 작업을 꾸준히 한 결과, 지금의 필자로서는 <야전과 영원>이라고 밖에 명명할 수 없는 시공이 출현했다. 생각하지도 못한 현현이었다.”

 

대립관계에 있는 라캉과 푸코의 이야기만 듣게 된다면 독자들은 혼란이 올 수 있습니다. 어떤 이의 말이 옳은지 선택하기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그 중간 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내고 있는 르장드르를 등장시켰고,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위치시킬 수 있는 다양성까지 확보하게 됩니다.


너무나 방대한 양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책에서 소개하는 푸코와 라캉과 르장드르의 사상을 이 곳에 정리하는 것은 무의미 하다고 봅니다. 

 

읽겠다는 마음 먹기는 어려운, 읽어보겠다는 도전 의식은 타오르는 책

한 대학의 교수가 저자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양 뿐만 아니라 이 책은 독자의 능력을 무한히 높게 측정한 책이다. 이런 책을 독자들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에 저자는 “읽을 수 있습니다. 라캉과 푸코를 몰라도 읽을 수 있습니다. 원래 독자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모를테니 부드럽게 써주자’라고 하는 것은 독자를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쉬운 책은 아닙니다. 그리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도 아닙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이 책 한권 제대로 잡고 독파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책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덕적 불감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도덕적 불감증 - 유동적 세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너무나도 소중한 감수성에 관하여
지그문트 바우만.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공동체에서 네트워크의 시대로

 


“오늘날 시대에 뒤진 것으로 간주되는 ‘공동체’나 ‘친교 집단’ 같은 구식 관념을 대신해 선택되는 이름인 ‘네트워크’의 핵심 특징은 바로 이런 일방적 종결에 대한 권리이다. 공동체와 달리 네트워크는 개인적으로 조합되고 개편되거나 해체되며, 네트워크의 유일한, 그러나 매우 변덕스러운 기초는 이것을 지속하려는 개인의 의지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월드컵 열기가 한 창이던 때, 미군이 몰던 장갑차에 깔려 두 소녀가 숨지는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 발생했다. 많은 이들이 월드컵광장이 아닌 또 다른 광장으로 나섰고, 촛불을 들고 시위를 했다. 광장에서 우리는 함께 ‘공동체’를 외쳤고, ‘연대’를 요구했다. 이 같은 단어들이 우리에겐 익숙했었다.


 

시간이 흘렀다. 모임에 참석하게 되면 언제나 듣게 되는 이야기가 ‘새로운 네트워크 형성’이다. 한 번 만나 명함을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그 사람은 나의 네트워크가 된다. 하지만 전혀 불편하지 않다. ‘공동체’와 같은 말이 주는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책임감’이 크게 없기 때문이다.


 

사회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이다. 2001년 다니엘 핑크가 쓴 「프리에이전트의 시대가 오고 있다」라는 선언 이후 역량 있는 1인 기업가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과거처럼 직장인의 삶이 아닌, 직업인의 삶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핵심도 역시 ‘네트워크와 협력’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장기 프로젝트 보다는 단기 프로젝트가 많아지고 있으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재빨리 시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실험해보고 진행여부를 결정하는 등 고정적이기 보단 유기적인 업무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위에 소개 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다양한 사회의 문제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환원되기 시작한다.


 

순수한 관계가 불러오는 탈 도덕, 그리고 도덕적 불감증


 

네트워크의 시대 속 관계는 ‘남녀관계’와 닮아 있다. 시작은 혼자서 할 수 없지만, 맺음은 한 쪽의 이별통보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별 앞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쿨 한 태도’. 이런 모습을 책 속에서는 앤서니 기든스를 들어 ‘순수한 관계’라고 표현한다.


 

“앤서니 기든스는 ‘순수한 관계’의 도래를, 즉 모호한 길이와 범위의 책임이 전혀 수반되지 않은 관계의 도래를 선언한 바 있다. ‘순수한 관계’는 오로지 관계에서 비롯하는 만족에 기초하며, 이 만족이 줄어들거나 흐릿해지거나 다른 데서 더 심대한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왜소해 보이면 그 관계를 지속할 이유가 전혀 없게 된다. 이 관계의 성립은 쌍방의 결정을 필요로 하는 반면에, 이것의 해체는 일방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이런 순수한 관계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구, 욕망, 소망의 충족이다. 관계의 대상은 이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며, 기대에 부응하지 못 하는 이들은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네트워크 시대에 관계 맺음에는 도덕적 판단이 개입 될 이유가 없는,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되는 현상계 바깥으로 위치되는 ‘탈 도덕’적 행위가 된다.


 

대중사회와 대중문화의 시대인 지금, 우리는 지속적인 자극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극에 반응하기를 멈추도록 만든다. ‘양치기 소년’의 우화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과잉자극이 되지 않고서는 사람들은 행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의 시대는 우리를 불가피하게 탈 도덕적으로 만들고 있다. 정말 뜻밖이거나 아주 잔인하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는 감수성 말로의 시대. 즉 “도덕적 불감증”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더 이상 행동 할 수 없는 개인


 

도덕적 불감증의 시대가 불러온 N포세대의 절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대학 졸업생의 평균 부채는 1321만원. 매년 사상 최대의 취업난은 갱신되고 있으며, 두산 인프라코어 사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취업 후의 상황 역시 안전을 보장받지 못 한다. 집 값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말자. 삶의 장기적인 전망이 불가능한 상황. 세상은 발전하고 있지만, 생존을 위한 투쟁은 더욱 힘겹기만 하다. 모든 고통은 결국 실존적 불확실성으로 요약된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으며 그것의 발생을 막을 수도 없다는, 우리의 무지와 무기력의 무시무시한 혼합물이자 굴욕감의 무한한 원천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활이 걸린 중대한 물음은 우리 세대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역사적 행위 주체’로 등장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하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나 같은’ 존재들인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이나 존중받을 가치가 없고,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심적 토대에서 연대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연대가 없이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행동 역시 동반되지 않는다. 나만 아니면 된다.


 

“개인주의 전략들은 주로 진정제 기능을 가진다. 국제 정치 수준은 사람들로 하여금 먼 미래에나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을 갖게 한다. 때문에 문화적 행위는 중간 수준에, 즉 그들 자신의 사회 수준과 그들이 미래에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를 둘러싼 민주주의 문제들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은 많은 경우에, 어쩌면 대다수의 경우에 그저 잠재의식으로 존재하거나 명확히 표현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바우만의 주장처럼 점차 개인화 되어가는 네트워크의 시대에, 파편화 된 개인들이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은 미흡 할 뿐이다.


 

그래서 디스토피아 소설들이 그리는 미래가 우리의 현재일까?


 

책 속에서 바우만과 돈스키스는 명확한 미래상을 제시하진 않는다. 그리고 둘 다 지극히 현실 속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이들이기에 그리 밝은 미래를 그려내지도 않는다. 돈스키스는 책의 말미에 “다만 사랑, 우정, 충성 그리고 그것들의 정직하고 충실한 산파인 창조의 정신으로는 그것이 가능했다.”라는 한 마디로 서로의 대화를 마무리 짓는다. 거대담론의 결과로 생각하기엔 허탈할 만큼 뻔 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이런 뻔 한 행동들이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몇 일전, 급작스럽게 한․일 위안부 협상이 타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합의 내용에 대하여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이미 일본 측에서는 ‘더 이상의 사죄는 없다’고 못을 박은 상황이고, 우리 정부 측에서는 ‘외교에 완승은 없다’며 이 정도의 성과 도출에 만족을 해야 한다 말한다. 많은 곳에서 다양한 불만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정부는 더 이상의 협상은 불가하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정치인들도 총선을 앞두고 있는 시기인 만큼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지는 못 하는 것 같다. 그냥 이렇게 흘러가는 것일까?


 

어제 TV를 보다 흥미로운 모습을 발견했다. 흰 저고리와 검정 치마를 입은 대학생들이 ‘인간 소녀상’이 되어, 부산에 있는 일본 총영사관 앞에서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매일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모습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부산의 청소년과 청년이 힘을 모아 일본영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도덕적 불감증은 우리를 분노하지 않도록 만든다. 그리고 행동하지 않도록 만든다. 너무나 깊게 우리 사회에 파고들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각하려 노력하지 않으면 이겨내기 어렵다. 바우만과 돈스키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너무나 비관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제나 희망의 빛은 비극 속에서 태어나듯이, 아직 우리에겐 작은 행동들이 이어지고 있듯이 희망의 끈을 절대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 희망과 회복력을 되찾기 위한 어느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불안장애'가 대중에게 다가오고 있다.

'4대천왕’ 정형돈이 ‘불안장애’로 인해 모든 방송에서 하차를 선언했다. 이 기사를 접하자 나는 김장훈, 김구라가 겪는 것으로 알려진 ‘공황장애’가 생각났다. 둘 다 방송 활동을 하면서 가지게 된 대표적인 ‘연예인 병’이지만, 이 두 병명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크게 차이가 난다. 연예인과 같은 공인들만 겪을 것 같은 ‘공황장애’와는 달리 ‘불안장애’라는 것은 일상 속에서 우리 역시 다양하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낼 수 없고, 표현하지 않은 채 곪아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온 것 같은 느낌이다.

 

2. 과연 불안이란 무엇일까?

책에 의하면 공식적으로 불안(anxiety)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채 100년이 되지 않는다. 영어로 된 표준 심리학·의학 교재에서 1930년대 이전에는 ‘불안’이라는 단어가 거의 쓰이지 않다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사용한 독일어 Angst가 anxiety로 번역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쇠렌 키르케고르는 ‘뚜렷하고 분명한 원인이 없는, 모호하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불편함’, 정신의학자 로버트 제이 리프턴은 ‘자아의 생명력에 위협을 느낄 때 혹은 자아 분열을 예상하여 생겨나는 불길한 느낌’이라 표현하며 정신적·철학적 문제로 바라보았다. 냉전시대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는 ‘죄의 내적 전제조건, 유혹의 상태를 내적으로 기술한 것’과 같은 종교적 개념으로 생각했으며,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부터 죽 병적 불안은 분명하게 의학적인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렇듯 불안의 정의에 관해서조차 의견이 모이지 않음에도 우린 다양한 불안에 관해 이야기한다.


 

3. 불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병적 불안은 히포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 현대 약학자들의 생각처럼 의학적 질환인가?아니면 플라톤과 스피노자, 인지행동 치료사들 생각처럼 철학적 문제인가? 프로이트와 그 추종자들이 생각하듯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성적 억압에서 비롯된 심리적인 문제인가? 혹은 쇠렌 키르케고르와 실존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정신적인 병인가? 아니면 W.H. 오든, 데이비스 리스먼, 에리히 프롬, 알베르 카뮈, 또 무수히 많은 현대 사상가들이 선언했듯 문화적인 병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 구조의 한 기능인 것일까?>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위의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불안에 관한 ‘종합백과사전’이라 볼 수 있다. 어느 한 가지 주장에 힘을 보태지 않고, 불안의 원인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과 비추어 소개하고 있다. 즉, 불안은 생물학적 기능인 동시에 철학적인 기능이기도 하고, 육체와 정신, 본능과 이성, 개성과 문화 모두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비록 시대에 따라 중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긴 하지만.


 

4. ‘불안’은 현대인의 병?

사실 30년 전만 해도 불안이라는 병명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1950년 이전에는 불안을 책 한권 분량으로 다룬 사람도 쇠렌 키르케고르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두 사람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0년 불안을 치료하는 약물이 개발되어 시장에 나왔을 때야 비로소 ‘불안장애’가 미국 정신의학회의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편람』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까지는 편람에 프로이트 식 “신경증”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불안 치료약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불안이 진단 범주로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치료가 진단을 앞선 것이다. 이런 단적인 예를 정신질환 통계편람 편찬위원회 소속 위원 몇몇이 식사를 하며 나눈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공황장애가 탄생했다. 그리고 와인이 몇 순배 더 돌았고, 테이블에 둘러앉은 정신의학자들이 공황 발작을 일으키지 않지만 항상 걱정을 놓지 않는 동료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은 뭘로 분류해야 할까? 그 사람은 뭐랄까 범사에 불안해하거든. 아, 그러면 ’범불안장애‘라고 하는 게 어때? 그러고는 와인 한 병을 더 주문해 새로운 병의 이름을 붙인 것을 자축했다. 그 뒤로 30년 동안 전 세계 연구자들은 범불안장애에 관한 자료를 모으게 된다.’

 

5. 약의 개발과 함께하는 정신약리학

‘약물의 발견은 정신병과 인간 본성에 관한 생각에 충격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성격, 지성, 문화 자체를 한 자루의 효소로 축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에드워드 쇼터, 『프로작 이전』(2009)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분야는 「3부. 약물」챕터였다. 이 장에서는 어떻게 약이 새로운 병을 만들어내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살펴볼 수 있게 된다. 1920년대 이전에는 우울증 진단을 받은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1950년대 이전에는 콕 집어 불안증이라는 진단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 이것이 1950년대 이전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으로 ‘불안’하거나 ‘우울’한 사람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렇지만 지난 세기 중반에 이런 정서적 상태를 완화하기 위한 새로운 약물이 조제되었을 때에서야 그런 상태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병’으로 규정된 것이다. 정신과 약물 등장을 “인류 역사에서 원자폭탄 개발보다도 더 중요한 사건”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우울증을 낫게 해준다는 최첨단 약이 어느 때보다 많은 이 시대에, 우울증 발병률이 1000배로 폭증했다. 제약회사가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다양한 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살 게 된 것이다.

 

6. 불안의 시대

이 시대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불안의 시대>라 할 수도 있겠다. 세계적으로는 IS에 의한 테러의 위험이, 국가적으로는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전쟁의 위험이, 개인적으로는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경제불황 속에서 직장과 직업에 대한 불안함 등 다양한 불안요소로부터 우린 자유롭지 못 하다. 해가 지고나면 달이 뜰 것이며, 달이 지고나면 또 다시 해가 뜰 것이라는 하루의 반복은 인류가 처음으로 적응한 불안일지도 모른다. 반복된다는 것은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며,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한 가지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도와준다.

 


세상이 바뀌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기운 빠지게 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편안함을 주기도 한다. 이런 생각과 판단의 극단에서 우리는 나치의 등장과 그들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한 독일 노동자들을 바라볼 수도 있다. 틸리히는 1930년대 독일 정세를 이렇게 묘사했다. “경제적·정치적 안정뿐 아니라 문화적·종교적 토대로 사라진 듯했다. 기반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다. 언제라도 파국적 붕괴가 일어날 듯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안정을 갈구하게 되었다. 두려움과 불안을 가져오는 자유는 매력을 잃었다. 두려움을 수반하는 자유보다는 안정을 주는 권위가 낫게 여겨졌다.” 우린 이 발언을 통해서 복지가 더욱 필요한 저소득층에서 보수세력에 대한 지지율이 더욱 높게 나타나는 역설적인 심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절박함이 사람들을 정치적 권위주의에 매달리게 만드는 것이다.

 

 

 

 

 

 


7. 아쉬운 마무리


이 책을 쓴 저자 ‘스콧 스토셀’은 워싱턴에서 거주하며 잡지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평생동안 불안증세에 시달리고 있으며, 다양한 치료법을 동원해서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책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적당히 불안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 나도 노력하는 중이다. 이 책은 그 노력의 일부다.’라는 말처럼, 그는 불안에 머물기보다는 끊임없는 노력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결과로 어마어마한 양의 불안과 심리에 관한 책, 논문, 역사적 사건들을 뒤적일 수 있었고, 이렇게 두꺼운 한 권의 책으로 완성하게 되었다.

 


아쉽지만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증세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와 같은 류의 작은 위로이다. 불안이 당최 어디서 오는 것이며,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와 같은 명제도 얻을 수 없다. 이유도 알 수 없으며, 해결책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책을 우린 왜 읽어야 하는지 굳이 묻는다면, 제목에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한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해결할 수 없다면,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라도 찾아야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이스북 심리학]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페이스북 심리학 - 페이스북은 우리 삶과 우정, 사랑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
수재나 E. 플로레스 지음, 안진희 옮김 / 책세상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나는 어떤 모습일까.


매번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의 오늘 하루 일과는 페이스북 확인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곤 크게 ‘의미 없는’ 행동을 하며 30분이라는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책을 들고 서재로 향하게 되었다.


 

영업 및 납품을 다니는 일을 하기에 운전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 많다. 교통신호에 맞춰 차를 정차시켰을 때 습관적으로 주변 차들을 살펴보곤 한다. 예전과는 달리 대부분의 운전수는 짧은 시간을 활용하며 스마트폰과 눈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도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2012년 1월 친구와 함께 중국 여행을 다녀왔다. 그 시절 중국은 페이스북이 통제되어 있었다. 그 말은 여행하는 7박 8일동안 페이스북 로그인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멋진 여행 기록을 즉시 페이스북에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끔찍했다.


 

친구들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을 때 우린 언제나 그랬듯이 기념사진을 남겨왔다. SNS가 등장하기 전에는 순간의 기억을 사진 한 장에 남겼다면, 지금은 페이스북에 기록을 남기는 것 같다. ‘사진’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물질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페이스북과 스마트폰에 의존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스스로를 경계하는 이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빠져나오지 못 하고 있으며, 빠져 나오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언가 잘 못되어 가고 있어.’하는 경계는 ‘나만 그런 건 아니니까.’하는 안도로 바뀌고 있다. 개인의 행동변화에 대해서 이 책은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며 사이버 공간이 아닌 현실의 삶 속으로 중심을 가져오기를 권하고 있다.


 

나 역시 한 동안 페이스북에 내 삶을 의존하고 있었던 적이 있다. 친구들이 나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라는 질문을 한다면 ‘페이스북 대로 살고 있어.’라고 답해도 무방할 정도였으니까. 그 만큼 내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공유했었고, 매 순간 친구들과 연결되어 있는 ‘느낌’은 큰 만족감을 가져왔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쫓고 있었던 ‘느낌’이 오감과 같은 직접적인 감각에 의한 것도 아니며, 친구들과 직접 교류하며 공유된 감정 또한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즉, 나의 상상 속에 나를 가둬버린 것이었다.

 


 


2. 생각을 벗어나지 못한 전개에 대한 아쉬움.


 

<페이스북 심리학>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한다면 어떤 내용을 떠올리게 될까?

내가 떠올린 내용은 현재 페이스북을 통해서 펼쳐지고 있는 다양한 개인들의 포스팅과 여러 단체들의 홍보 및 소셜프로젝트 등을 통해서, 사이버공간 상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표현과 사건들에 대한 심리적 분석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목차를 보는 순간 이 책은 지극히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문사회 분야의 책들을 꾸준히 접하다보면, 자연스레 현재 이 시점에 가장 “핫”한 트렌드를 제목에 내세우면서 등장하는 책들이 있다. 전문적인 연구결과 데이터를 제시하기에는 정보의 전문성 및 시간의 역사성을 도출해내기가 어려울 때 자주 사용되는 방식이 ‘다양한’이라는 말을 내세운 ‘사례제시’이다. 작가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주장의 얼개에 맞춰진 사례들로 내용은 채워지고, 그 사례들이 자연스레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어있다. 따라서 이 책들은 자연스럽게 어느 정도 책 내용이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전개되겠구나.’하는 예상이 된다. 나에게 있어 좋은 책은 그런 예상을 벗어나는 책이 된다. 하지만 이 책은 안타까지만 그런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페이스북을 통해서 펼쳐지고 있는 다양한 소셜마케팅 및 프로모션의 사회적 영향을 사회심리영역으로 확장해서 풀어놓았다면 괜찮은 참고서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책을 읽은 말미에 진하게 남는 여운이다. 그 이유를 찾아보니 이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었다. 원제는 <Facehooked>. 즉, 페이스북 심리학이 아니라 ‘페이스북 중독’인 것이다. 한국으로 수입되어 번역, 출판하는 과정에서 출판사가 제목에 작은 손질을 가한 것이다. 작은 상술에 당한 것이다.



3. 이 책을 읽는다면


 

이 책을 손에 쥐었다면 <7. 적보다 못한 친구>는 꼭 한번 읽어보자.

- 나는 어떤 유형의 ‘감정 조종자’에 가까울까?

 


지금은 내가 진행하는 모임을 알리는 것과 정보 수집(지인 동향, 행사, 프로모션) 외에는 페이스북을 활용하지 않는다. 이 공간에서 지금의 나는 수용자인 셈이다. 하지만 적극적 생산자였던 과거가 있었다. 그 시절의 글들을 살펴보니 내게 발생한 여러 사건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느끼고 깨달은 점 등이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류의 글 들이다.

 


"

시대는 우울하지만, 우리의 일상마저 우울해선 안되기에.

 

나이는 나보다 두세살 많을까? 우리 매장 납품을 담당하던 한 청년.

 

과거에는 농구선수 였다는 그.

언제나 웃으며, 빠릿빠릿하게 몸을 놀리며, 자기가 하나라도 더 내리려고 노력하던 그.

 

이쪽 업계에 있으면 젊은 친구들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었을까?

나 역시 그러했기 때문이었을까?

무언가 눈빛으로 '우리 서로 힘냅시다.'라고 함께 주고 받았던 그.

 

하지만 오늘은 어쩐일인지 오전에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납품을 왔다.

의아했다.

 


오후가 되었다.

낯선 승용차가 한대 들어왔다.

언제나 쓰고 있던 야구모자는 없었다.

언제나 입고 있던 작업복, 작업화도 없었다.

언제나 끼고 있던 목장갑 역시 없었다.

 

말끔하게 차려입는 그가 사무실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왔다.

이제 납품업무는 인수인계하고 영업팀 과장으로 승진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아버지도 항상 요즘 애들같지 않게 싹싹하다며 칭찬을 마르지 않게 해왔던 그였기 때문인지,

1시간 정도 본인이 영업을 하시던 과거 에피소드 부터해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셨다.

 

나는 그를 응원한다.

남들이 꺼려하는 곳에 당당히 발을 내밀었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만들어 낸' 새로운 기회를 그는 잡은 것이다.

 

뱀의 머리가 나은지, 용의 꼬리가 나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분명한 것은 '삶의 만족도' 부분에서는 뱀의 머리가 높은것이 분명하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정을 받으며 애써 일 하는 그가 나는 너무 고맙다.

그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뜨거운 청춘과 열정은 곳곳에 숨어있었다.

 

다음에 오면 하루 날 잡고 농구 같이 하자 해야겠다.

 

"


대부분의 글들은 언제나 나를 향해 있었고, 누군가와 소통을 하기 보다는 나 자신과 대화하는 느낌이 짙은 글들이었다. 여기서 제시 된 감정조종자들의 예시 중에는 ‘나르시시스트’에 가장 가까운 면이 있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나모리 가즈오 1,155일간의 투쟁 - 재생불능 진단을 받고 추락하던 JAL은 어떻게 V자 회복을 했나
오니시 야스유키 지음, 송소영 옮김 / 한빛비즈 / 201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손에 쥐기 전까지 내가 읽고 있던 책은 존 러스킨의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였다. 책은 경제학에도 인간의 정신과 영혼이 담겨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다. 기존 경제학이 ‘너무도 우발적이고 교란적인 요소’여서 논의에서 배제한 변칙적인 힘, 그러나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요소인 ‘애정’이야말로 경제학 최대의 변수라고 역설한다. ‘생명’을 가치의 유일한 척도로 놓는 그의 경제론에서는 정직, 도덕, 정의 등 인간의 정신적 가치들이 더 중시된다. 이를 통해 노동, 자본, 고용, 수요와 공급 등의 경제용어들이 전혀 새로운 철학적 의미를 얻는다. 그렇게 러스킨에게 경제학은 학문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분으로 들어온다. 그런 책을 읽고 있던 도중 내 손에 이 책을 쥐게 된 것이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나 계획된 우연이다.

<이나모리 가즈오 1,155일간의 투쟁> 이 책을 통해서 러스킨의 경제학이 우리의 상상 속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영학원론에서 기업의 목적은 ‘이익 창출’이라고 배운다. 처음 배우는 그 순간에는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여러 책을 접하고 생각을 하게 되면서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이익 창출’ 일까? 지금의 패러다임을 쥐고 있는 시장 중심의 논리에서는 자본가의 이익을 말하게 된다. 하지만 러스킨도, 이나모리 가즈오도 그 논리를 거부한다. 이나모리 가즈오에게 기업경영의 목적은 “사원의 행복추구”였다. 그렇게 되면 기업이 나아가는 방향과, 사원이 바라보는 목표가 같을 수밖에 없다. 노사합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정말 이런게 가능할까 라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걸어오면서 펼쳐낸 수많은 책과, 교세라, KDDI,그리고 이번의 JAL이 보여준 모습을 본다면 그저 듣기 좋은 말에 불과한 내용이 아니라고 본다.

“과연 나라면 그와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과거를 통해서 존재하게 된다. 과거의 경험과 기억을 제외하고는 자신이 이 순간을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즉, 자신의 과거가 부정된다면, 자신의 현재가 부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만큼 과거는 소중하다. 80세를 앞둔 나이에 자신의 과거를 통해 쌓아온 명성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을 수 있는 선택을 해야한다. 성공을 했을 때 얻게 되는 득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은 자신이 감내해야 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예전과 같이 실패를 겪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시간이 많은 것도 아니다. 이나모리 가즈오가 그러한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는 <3가지 대의(大義)>. 그처럼 모두가 큰 뜻을 품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뜻을 이룰 수 있는 실력도 겸비해야 한다. 시대적 운과 상황도 맞아 떨어져야 한다. 이 삼박자를 이나모리 가즈오는 극복해 낸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개인의 자아와 품은 뜻이 분리되지 않은 것이다. 말 그대로 ‘혼연일체(渾然一體)’ 이렇게까지 생각을 끌고 와보니, 지금의 나로서는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선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나 역시 리더의 자리에 있었고, 리더를 꿈꾸는 동생들을 만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었다. 그럴때 항상 했던 말이 ‘내 개인의 이익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대의, Big Picture가 있다면 어느 순간 그 대의가 나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을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이게 딱 하수, 중수의 수준이었다. 이나모리 가즈오 정도의 진장한 고수, 고수를 넘어선 구루의 영역에 있는 이들에겐 대의가 곧 개인의 뜻이고, 개인의 뜻이 곧 대의였다. 이런 모습은 도대체 어떻게해서 키워질까? 지금 이 순간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끊임없이 배움의 자세를 잃지 않는 것 뿐이라 본다.

마지막으로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JAL을 3년이라는 기간만에 흑자전환과 역대 최고 이익을 내게 만든 모습을 보면서, 현재 우리나라의 가장 큰 이슈인 철도노조 파업문제에 대해서 다른 관점으로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공사와 독점기업, 그리고 관료조직은 내버려두면 점점 더 비대해지고 효율이 떨어져 세금을 잡아먹는 ‘택스 이터(Tax Eater)'가 된다. 국민의 세금이 비효율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분명히 수술대에 올려서 환부를 도려내야 한다. 민영화가 정답은 아니겠지만, 하나의 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파업은 노동권에 보장되어 있으니 당연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국민을 볼모로 하는 파업은 부당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이 문제를 논할때도 큰 쟁점이 이 2가지 부분에서 발생하고 있다. 공기업의 경영개선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또 다른 자본의 논리에 의한 승자독식으로 넘어가선 안된다. 이나모리 가즈오의 생각 ’독점은 악이다‘로 넘어가기 쉽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이나모리 가즈오와 같이 국가를 위한 결정을 할 수 있는 경영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독점을 방지할 수 있는 규제장치가 필요하다. 수서발 KTX를 법인화 시켜서 공기업 방만경영을 해결하기 위한 시범 운영을 해보겠다고 하는데, 그것이 또 다른 독점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버릴 수 없다. 지금 이 사회엔 ’리더의 부재‘가 큰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앞으로 수많은 기업들의 민영화가 진행될 것이다. 정말 국민을 위한 민영화를 바라는 것이 꿈이 아니길 바란다.

이 책은 나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주었다. 개인적으로는 앞으로 내가 운영해나가야 할 사업에 대한 부분. 4명이 함께 일하고 있는 작은규모의 사업체다. 아메바 경영을 적용시켜보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그리고 현재까지는 말 그대로 맨손으로 일궈내신 개인사업 1.0의 상황이다. 이 사업장을 철학이 있는 곳으로 변모시켜보겠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부를 어떻게 하면 이 사회를 위해 활용할 수 있을까에 대한 큰 그림 그리기도 시작해야겠다. 이나모리 가즈오 정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 내가 되지 마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부터 시작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