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이어트 Quiet -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
수전 케인 지음, 김우열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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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말에 이런 말이 있다. “빈 깡통이 요란하다.” 특히 요즘 시대엔 더욱 더 그런 것 같다.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멋들어지게 소개하고, 포장을 해서 막상 만나서 이야기를 조금 해보면 그 기대보다 덜한 경우가 허다하다. 무엇이 그들을 기대감 있는 인물로 만들었던 것일까? 그런 부분을 콕 집어서 잘 소개해준 책이라고 본다.

 

나는 과거 “지나치게 쾌활한 아이”로 불렸었다. 그리고 지금도 크게 다른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극도로 외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의 내향성 평가를 해보면, 극도로 내향적인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다. 성격의 스펙트럼이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아주 넓은 편이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는데 큰 무리가 없는 것 같다. 이 점은 나에게 아주 큰 장점으로 다가온다. 혼자서 하는 작업도 아주 좋아라하고, 독서모임같이 함께 하면서 소통하는 것도 아주 좋아한다. 200명이 넘는 조직을 이끄는 것도 무리 없이 나서서 잘 수행하며, 혼자서 감당하고 견뎌내야 하는 고독도 상대적으로 잘 견뎌내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내향성은 20대에 들어서면서 조금씩 강화되어간 느낌이 적잖아 있으며, 군대에서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더욱 개발이 된 것 같다. 내가 누군가를 닮고 싶어서 흉내 내었던 이들은 이상하게도 전부 내향적인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닮고자 노력을 아무리 하여도 한계가 있었고, 항상 갑갑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지금 개인적으로 드는 느낌은, 그들은 내향성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던 이들이고, 나는 외향성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던 이였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같아질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나만의 색깔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가기 위한 시기에 도달한 것 같다. 그런 시기에 이 책을 접하면서 나의 외향성과 내향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것 같다.

 

20세기에 들어 성격의 시대, 개성의 시대가 오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문화적으로는 서구의 주체사상이, 사회적으로는 자본주의 도래가 절묘하게 결합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서양사회의 공동체는 주체위에 성립된 공동체이다. 따라서 각 개인의 인권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인권이 자본주의와 결합을 하게 되면서 사람들의 노동력은 상품을 생산해내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해낼 수 있는, 더 많은 상품을 판매해낼 수 있는 이들이 각광받게 되었고, 그런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물이 중요시되면서 자연스럽게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이들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보니 자본주의가 극으로 치닫고 있는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생존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많은 이들에게 매력인 사람으로 보이려 노력하는 중이고, 셀프 브랜딩이라고 하며 자기PR을 적극적으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이라는 존재를 그렇게 스스로 표현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지만 알릴 수 있는 그런 존재인 것인가? 본디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을 받으면서 성장하는 것은 맞지만, 그 인정이라는 것을 내가 먼저 나서서 ‘나 좀 인정해주세요~’ 라고 해서 인정받는 것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인정받을만한 수준과 실력을 갖춘다면 자연스레 찾아오는 것이 사람 아닌가?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갔던 것처럼 말이다. 분명히 내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확연한 강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방형 혁신 등을 주장하면서 집단지성이 필연적으로 개인의 지성을 앞지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처럼, 왜 우리는 끊임없이 외향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외향적 사고마저 요구받는 것일까? 과연 외향적사고가 반 고흐를, 뉴턴을, 간디를, 스티브 워즈니악을 탄생시킬 수 있었을까? 그렇진 않다.

  

이 책을 읽고 난 나의 결론은 결국 사람이 소비재로 전락하면서 나타난 아주 깊은 폐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소비재가 아니다. 재화가 아니다. 그냥 존재 자체일 뿐이다. 그리고 내 눈앞에 있는 상대방도 위대한 또 하나의 존재이다. 그런 우리가 함께 만나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서로를 훈련시키며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억지로 자신을 알리지 않아도 자신을 그대로 받아주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지금은 그러기가 참 어려워진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자신을 성격의 시대에 맞춰 억지로 외향적으로 이끌고 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저 숲속으로 들어가서 오두막집 하나짓고 자급자족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그 답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문제에 대한 인식이 넓혀지고 있으며, 함께 잘 살기 위한 다양한 생각들이 모색되고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어쩔 수 없이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나약한 개인. 고독은 창의성의 필연적인 원료가 되듯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감에 있어서는 조금의 버팀이 필요할 것 같다. 나의 고독의 힘을 믿고, 나를 믿으며.

 

 

“순수하게 내성적이거나, 순수하게 외향적인 것은 없다” - 칼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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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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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이동도, 공간의 이동도 없는 그들의 이야기. 읽으면서 분명 나중에 반전이 있을 거야, 고도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무언가 새로운 이야기를 진행시킬 거야라는 기대를 하였지만, 점점 줄어드는 책장수와 함께 그저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솔직하게 왜 이 작품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작품이든 서사를 가지고 있었어야 했고, 기승전결을 통한 마무리를 가졌어야 했던 작품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방식으로 연출을 시도한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지 않았나 싶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경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베케트도 초연 때 연출자 알랭 슈나이더와의 인터뷰에서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었을 때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 이라고 얘기했듯이, 고도라는 존재는 알 수 없다. 교도소에서 연출되었을 때는 신이다, 빵이다, 희망이라고 수감자들은 얘기했다고 한다. 

  

이들은 고도를 기다리기만 하지, 직접 찾으러 가던지, 다른 방법을 찾던지 등 행동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끊임없이 말하기를 멈추지는 않는다. 작가는 그렇게 이 삶의 허무함을 표현하려고 애썼던 것일까?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을 받기 시작하고,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죽음이라 생각하는. 그렇기 때문에 가장 행복한 삶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는. 이 삶을 살아가다보면 무엇인가가 일어날 것이고 나타날 것이라 생각하지만, 결국 그런 것은 나타나지 않고 우리 앞에 기다리는 것은 죽음만이 있을 테니 아등바등 열심히 살 필요 없다. ‘그냥 사는 대로 살아라. 그냥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고, 순간만을 즐기면서 그냥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라고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들에게 희망을 주고 해방을 시켜줄 것이라 믿는 잘 알지도, 알 수도 없는 고도를 기다리지 말고, 그냥 자신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스스로에게 더욱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 존재의 부조리함, 역사의 무질서함, 인류의 무능함을 이 극의 전개방식과 인물들의 대사를 통해서 전달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 작품은 연극으로 아주 큰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이야기의 힘을 가지지 못한 이 극본이 왜 연출되었을 때 큰 호평을 받았을 까라는 부분도 함께 생각하고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언제나 이야기의 힘에 집중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라는 형식마저도 파괴해버리는 현대 해체주의의 모습을 보게 되며,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연출되는 배우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에 집중하게 되며, 그 곳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리곤 좋은 작품이었다고 호평하며 알린다. 개그콘서트와 같은 현대 스탠딩 코미디와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심형래, 김형곤의 「유머일번지」와는 다르다. 요즘의 「개그콘서트」와 비슷하다 볼 수 있다. 90년대의 애절한 가사가 일품이었던 발라드와는 다르다. 반복된 리듬과 가사, 포인트 안무로 우리를 사로잡는 아이돌의 후크송 음악과 비슷하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할 순 없지만, 나에겐 채워진 그 무엇인가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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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일하는가 - 이나모리 가즈오가 성공을 꿈꾸는 당신에게 묻는다 서돌 CEO 인사이트 시리즈
이나모리 가즈오 지음, 신정길 옮김 / 서돌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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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적 배경도 역할을 하였겠지만 동양의 삶에서는 나의 일이 곧 삶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이 자신의 삶을 세우는 일이었고, 그 일 속에서 의미와 행복을 찾아갔었다. 하지만 서구근대문명이 들어오고 자본주의가 도입되면서 일이라는 것이 내 삶과 분리 된, 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버린 사고가 팽배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보니 많은 직장인들은 자신의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Work Life Balance라는 아주 우스운 이야기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그런 부분에서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의 삶에 대한 태도와 일에 대한 태도의 일치라는 부분은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동양적인, 참으로 동양적인 사고인 것이고, 그런 사고가 개인의 집합으로서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공동체의 일환으로서의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자기계발서라는 부분에서 2,3년 전 읽었을 때의 느낌과 지금의 느낌은 참으로 다르게 다가온다. 그 당시에는 내가 앞으로 해야 할 것, 해보아야 할 것들로 가득 찬 실천서로서 존재했다면,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읽는 자기계발서는 그동안의 경험을 통하여 많은 부분들이 나의 경험과 오버랩 되어서 재해석되기 시작하며, 그 부분들에 큰 공감을 하면서 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계발서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삶을 살아가다보면 느끼는 것이 있다. 이나모리 가즈오도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강연을 들으러 갔었고, 그 당시 들었던 한마디 ‘그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다른 사장들은 웅성웅성 거렸지만,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적용했던 이나모리 가즈오. 즉, 수려한 문장력을 가진 말이 아니더라도, 짧고 간결하게 한 문장이 가지고 있는 깊은 속뜻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키워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깊은 자기성찰의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서는 할 수 없는 경지다. 왜냐? 바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기 위한 과정은 여러 가지일 수 있지만, 그 끝에 달하여 얻는 메시지는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하나가 아니지만, 진리라는 그 어떤 것들 안에서는 일치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삶. 이 책속의 이야기만 본다면, 직원들과 동료들과 합의되지 않은 많은 결정들을 스스로 하고, 그 결정을 동료들에게 납득시키고 한가지의 신념으로 만들어 해내는 능력은 정말 존경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안에서 희생되고 착취당한 개인은 분명히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업을 하는 입장에서 희생되는 개인의 존재는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부산물 같은 것이라면 우린 이 부분을 철저히 고민해야 하는 것이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 부분에서 이나모리 가즈오의 선택과 행동은 무엇이었을지 책을 읽으면서 많은 궁금증이 들었다. 나도 비슷한 상황을 겪어 본 적이 있고, 그 일을 헤쳐나감에 있어 과정에서의 이해보다는 결과를 통한 납득을 시켰던 경우이다. 이 부분에 대한 이나모리 가즈오의 생각을 알고 싶다. 이 부분은 정말 딜레마인 것 같다.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그 것에 사활이 걸린 것이라면 과정 모두가 무의미해져버린다. 아직도 끊임없는 물음과 경험을 통해서 답을 찾아가야 할 물음이다. 지금까지는 결과를 통한 납득에 더욱 비중이 높은 것은 사실이다.

 

경영자라기보다는 참 인간의 삶을 살았던 이나모리 가즈오의 삶. 처음엔 뭐 그저 그런 자기계발서라는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읽기 시작했지만, 역시 구루라 불리는 이들의 글 속에서는 화려한 문체가 아닌 담백한 표현으로 녹여내는 삶의 내공은 자기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이들에게는 정말 질 좋은 영양소가 됨이 틀림없다.

 

즉, 책은 편식하면 안 된다는 것이고, 아직까지 나의 수준에서는 책의 수준을 평가할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금 더 참아내고, 조금 더 녹여내고, 조금 더 숙성시킬 때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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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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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평생 끊임없는 무수한 생존경쟁 속에서 살아간다. 수 많은 사건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판단과 선택을 하게되고, 자신이 앞으로의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라는 것에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기준이 있다면 그 순간 자신을 평가하고 남과 비교하는데 얼마나 용이할까? 그런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도록, 나는 누구보다 뛰어나다. 너는 나보다 부족하다. 그런 잣대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그들은 그렇게 철학적, 미적 기준들을 만들어나갔던 것일까? 하지만 이 기준이라는 것에 절대기준은 존재할 수 도 없을뿐더러, 존재해서도 안되는 것이기에 우린 끊임없이 상대적 기준, 상대적 비교를 통해서 성장하기도 좌절하기도 하며 끊임없이 평생동안 불안감에 휩쌓여 살아가게 되어있다. 정녕 이 불안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인 것인가? 그렇다면 이 불안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덜 느낄 수 있는 것일까? 더 많은 것을 소유한다면? 더 많은 것을 성취한다면?

  

또 다시 부활했다. 4대악, 악이라는 것을 규정하는 것에는 한단계 더 나아간 의미가 있다. 그들이 선이라고 믿는, 절대 선이라고 믿는 개념들을 규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도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그들의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들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가지지 못한 자들은 가지지 못할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이유를 만들어 내기 위함이다. 특정한 상황으로 인하여 그들이 정의한 성공을 위한 노력을 할 수 없는 이들도 있다. 그런이들이 삶을 당면함에 있어서 느끼는 불안, 이것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노력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이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불안, 그런 것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성공할 수 있다고 여기는 길 속에서는 철저히 배제되어있다. 자, 그렇다면 우린 성공이라는 개념을 다시 재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들이 정해놓은 선과 악이라는 개념, 성공과 실패라는 개념을 나 자신에게 정말 진지하게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강요된, 주어진 개념에 의해서 희생되고 있는 반대개념 속, 나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해서 배우기 전에,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왜 살아야만 하는지도 모른채 우리는 살아야만 했다. 그런데 우린, 많은 돈을 벌지 못하는 영역안에서 나의 특정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나의 도덕성이 훼손당하기도 한다. 자본주의가 들어서면서 끊임없이 시도된 부와 선의 연결, 고가의 제품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고, 더욱 많은 돈을 벌어다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명예로운 사람이며, 희소성이 있는 제품은 더욱 가치있는 것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런 삶을, 모습을, 물자체를 소유하고 영위하게 되는 것에다가 행복을 연결시키기 까지 한다. 즉, 우린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있게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어쩔 수없이 주어진 사회구조는 자본주의다. 소유의 개념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소유로부터 오는 행복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그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 우리 삶은 감탄 할 것이 많이 있고, 아낄 것이 많이 있고, 나눌 것이 많이 있으며, 사랑할 것이 많이 있다. 사회구조가 나에게 강요해버린 그 구조속에서 당연하다 생각하고 받아들이며 살아가기에는, 우리 개인의 역량은 너무나 무궁무진하다. 즉, 소유로부터 오는 불안으로부터의 회피만을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넣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유에 대해 모색하고, 이유를 찾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어가는 인생, 그 속에서 소유도 존재할 수도 쾌락도 존재할 수도 절망도 존재할 수 도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무엇을 행동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것에서부터 삶의 이유를 알게 될 것이며, 그 무엇인가를 실천하는 것으로부터 진정한 행복의 출발일 것이다.

 

나 자신을 괴롭히고 속박하고 있는 다양한 불안은 분명히 자기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어떤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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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산문선 우리고전 다시읽기 45
구인환 엮음 / 신원문화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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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그래서 그냥 씹어 삼켜 버리려고 했다. 우걱우걱. 하지만 그 마저도 실패했다. 씹어 삼켜 버리는데 필요한 내공조차도 부족했다. 그랬다. 이 글을 써내려간 이는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던 정약용이었던 것이다. 왜 이렇게 어렵게 다가왔을까? 왜 그렇게 책을 이해하는 것이 힘들었을까?

 
그 이유로는 첫째. 18세기 시대 상황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했다. 대학에 들어와서는 한국사에 대한 공부는 단 한번도 하지 않았기에, 이과를 선택하면서 역사는 선택조차 하지 않았기에,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이름을 들을때 ‘아 맞다!’라고 떠오르는 수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쉬이 읽기만 한다면, 그저 당연한 말들을 늘어놓은 글자들의 집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었다. 이런 고전을 읽을때 제대로 읽기 위한 그 첫 번째가, 그 작품이 쓰여진 시대적 상황에 대한 명확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선 그런 생각과 기술이 나타나게 된 이유를 파악할 수가 없고, 그 내용들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알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당시 백성들이 겪고 있던 다양한 어려움들을 양반 집안의 자손으로서 이해하고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었을까?

 
둘째. 아주 높은 수준의 논리적 기술서였다. 아들에게나, 이인영에게나, 임금에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글. 어떤 형식의 글을 쓰더라도 논리 구조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시대적 상황, 상대방의 상황 또는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 그것에 대한 비판, 그냥 비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명확한 대안 제시, 이를 통해서 얻게 될 에상 도출 결과까지. 4단 구성이라는 형식적으로 완성 된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냥 자신의 생각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다양한 지식인들의 글을 통해서 배운 정확한 지식을 바탕으로. 완전한 논리 흐름으로 인하여 나는 읽으면서 어쩜 이렇게 당연한 말을 늘어만 놓고 있지? 라는 역설적인 이해에 빠지기도 했다. 그 만큼 정약용의 생각이 이해에 밝고 민주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뒤의 내용을 현 시대로 끌고 들어온다면, 아이디어 공모전의 기획서라고나 할까? 상금 꽤나 많이 벌었을 것이다.

 
셋째. 책 구성자체에서 오는 어려움이었을까? 아니면 이것도 다산 정약용의 박식함 때문일까? 너무나 다루고 있는 분야가 다양하다. 정치부터, 기술, 사회제도, 다양한 이념들의 근본에 대해서 우리 삶 전체를 다루고 있다. 이는 그의 500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에서 볼 수 있다. 18년간의 유배지 생활마저도 자신에게 학습을 하라는 이유로 받아들이고 방대한 지식을 집대성 할 수 있었던 그의 삶. 일상적이라 생각하고 있는 우리의 삶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삶이었기에 그의 삶이 묻어나 있는 글을 통해서 괴리감을 느꼈던 것일까?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한가지 놀라웠던 사실은, 정약용이 바라보고 질책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다양한 정치 및 사회제도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정치며,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며, 인류는 언제나 조금씩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하지만, 어쩜 이렇게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까? 그런 만큼 정약용의 생각을 지금의 시대에 맞게 옮겨 표현한다면 우리 삶에 많은 개선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온전히 세운다는 것은 참 어려우며,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꼭 목표로 해야 하는 업이라 생각한다. 그런 부분에서 정약용의 삶은 정말로 깊이 존경할 만하며, 지식의 잣대로 칼을 휘두르지 않고 널리 이롭게 쓰고 하는 부분에서 내가 살아가고 하는 삶의 모습에 많은 귀감이 된다.

  

“시(詩)라는 것도 끊임없는 학습의 기초가 완료 된 후에야, 비로소 안개 낀 아침과 달 발은 밤, 짙은 녹음과 보슬비 내리는 것을 보면 그 서려 있던 감흥이 격동하며 표연한 시상이 떠올라 자연스럽게 노래하고 음조와 선율이 유창하게 우러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 세계의 생동한 경지이다. 나의 이 말을 실제와 동떨어진 것이라고 여기지 말라.”

  

“이렇게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한 번 자기가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을 터뜨려 놓으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일러 ‘문장(文章)이라 한다. 이런 것이 참으로 문장이다.”

 
나는 정약용의 글을 읽으며 우리가 삶 속에서 흔히 쓰던 그 한문장의 의미를 뼈저리게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그 시작점을 찾은 것 같다. ‘지식을 토해낸다.’ 도저히 도저히 그 속에 담아둘 수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토해낼 수 밖에 없었던 그 경지. 학습하기를 멈추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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