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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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일본 소설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1960년대. 그 시절에 폭풍같이 등장하여 ‘감수성 혁명’을 불러일으킨 김승옥의 소설은 얼마나 많은 청춘들에게 소외된 자기내면의 아름다움을 표출해낼 수 있도록 이끌었을까? 그리고 우리말에 대한, 우리 감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대해서 다시금 재조명하고 많은 이들이 문학계로 뛰어들면서 한국적 문학의 시류를 이끌어내지 않았을까? 그 시절의 서울대 문리대는 대한민국의 현대 문학사를 이끌어 내고 있었다.

 

무위자연의 공간, 무릉도원의 분위기를 화폭에 풀어놓을 때, 그 매력의 화룡점정 역할을 하던 것은 언제나 소나무와, 학과, 안개였다. 나에게 안개는 무릉도원 속의 이미지로 지금까지 남아있었다. 하지만 작가 김승옥은 안개를 무진이라는 공간에 덧씌움으로서 희미한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다시금 되살려 놓는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도시 ‘무진’과 그 무진을 ‘여귀가 찾아와서 내뿜어 내놓은 입김처럼 뒤 덮고 있는 안개’를 만들어 내었고, 이 안개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속에 표현되는 참으로 일본적인 ‘설경’과 비교되어, 참으로 한국적인 ‘안개’를 창조해 내기에 이른다. 이 안개는 1980년대 기형도의 <안개>로 이어졌고, 2000년대 공지영의 <도가니>를 통해서 무진이라는 공간과 함께 다시금 안개가 살아나기에 이른다. 이렇듯 한 작가가 연상해 낸 이미지가 50년이 넘는 생명력을 가지고 꿈틀거리고 있으며, 그것은 한국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의 한국인들의 얼굴에는 깊게 드리운 안개가 누구에게서나 보이게 마련이다.

 

1960년대, 산업화 시대의 출밤점에 선 한국사회의 모습, 그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자본주의가 잠식하기 시작하는 물질주의, 그 속에서 괴로워하는 한 개인. 속세를 벗어나서 자기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내고 싶지만, 결국은 사회속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을 숨긴 채 살아내며, 내면이 아닌 표피로만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을 이 작품에서는 표현해내고 있다.

  

누구에게나 주인공의 ‘무진’과 같이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고 싶을 때 찾아가는 그러한 공간이 있지 않을까? 여기서 주인공은 그렇다고 해서 그 과거의 모습을 딱히 바꾸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 모습을 현실로 가져오려고도 하지 않으며, 그저 그 순간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한용으로만 간직한 채 묻어두고만 있다. ‘쓸쓸하다’라는 단어를 편지에 많이 썼듯이, 지금도 쓸쓸하게 존재하고 있을 과거의 자신을 위로해줄 사람은 자기밖에 없어서 그랬을까? 자신이 쏟아 낸 단어의 참뜻을 알지 못하는 이들 때문에 느낀 소외감으로, 그 뜻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자신이기에, 그렇게 찾아온 것일까? 보이지만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지만 얼핏 보일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자신의 모습을 ‘안개’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 안개속 공간을 찾아간 주인공에겐 사랑도 슬픔도 분노도 아픔도 기쁨도, 그 어떤 감정과 기분도 한 가지가 강조되거나 강요되지 않는다. 그저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 감정으로 희미하게 존재하고만 있다.

  

이번에 접한 단편 모음집은, 단편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복선이나 상황에 대한 암시와 같은 기법들이 많이 배제된 채 자신의 시선이 옮겨가는 곳으로, 자신의 생각이 옮겨가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는 격이라 쉬이 읽히지만, 여러 페이지를 다시 되돌아가서 읽고, 또 읽게 만드는 ‘도돌이표’가 여러 군데 찍혀 있는 소설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된 이유에는 작가 특유의 문체도 한 역할을 하였다. 최인훈 작가의 문체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자신의 시선을 풀어낸다. 그렇다고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다. 멋스럽게 표현하려 노력한 흔적도 딱히 보이지 않는다. 서양문학을 접할 때는 무언가 자신의 내면과 싸워가는 그런 과정을 잘 느낄 수 있다면, 한국 작가들의 글을 접할 때는 번역본에서 절대 담아낼 수 없는 작가들만의 문체를 온전히 대면할 수 있는 기회이다. 하지만 이런 문체를 어떻게 감정이 없는 영어라는 언어를 통해서 담아낼 수 있겠는가. 점점 더 한국작가들의 관찰력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무진기행보다 <서울 1964 겨울> 작품이 훨씬 깊게 다가왔지만, 한국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문학적 표현의 혁명을 이끌어 낸 그러한 기념비적인 성격과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무진이라는 미지의 공간과, 그런 공간을 더욱 살려낸 ‘안개’라는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김승옥을 대표하는 작품이 <무진기행>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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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 구운몽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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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광장이 한국문학이 포함된 추천 도서에서는 빠지지 않고 포함되어있고, 여러 카피라이터 및 철학사를 공부하는 이들이 꼭 한 번씩은 언급하고야 마는 글인지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나에게 최인훈의 「광장」은 수능 공부할 때 자주 나오던 ‘중립국’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소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중립국이라는 단어가 나왔을 때 ‘아! 이게 그 소설이었구나.’ 하고 소리를 질렀던 건 비단 나뿐일 것인가?


한국 문학사상 처음으로 유토피아의 문제를 이데올로기적 갈등으로 풀어내었다는 광장은 참으로 복잡 미묘하고 그 마지막은 끝을 알 수 없는 심해 속으로 빠지고 만 한 나약한 개인이 되어버린 것 만 같다. 광장을 꿈꿨지만 남한이라는 사회는 개인의 부도덕한 욕심만이 가득한 ‘밀실’로만 채워져 있었고, 푸른 광장을 찾아 월북하지만 그곳에서는 집단의 이념만을 존재하는 ‘잿빛광장’만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것이 비단 그때만의 문제일 것인가? 지금의 우리 사회는 더욱 더 단단해져버린 밀실로 꽉꽉 채워지고 있으며, 그 밀실의 증가속도는 작가가 고민했던 때보다 더욱 빨라지고 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작가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 지 못한다. 정치적 이념으로 볼 수 있는 광장과 개인의 자유와 욕구로 생각되어질 수 있는 밀실은 언제나 상호보완적임과 동시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작가는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라고 표현한 것일까? 그러나 밀실과 광장은 결코 하나의 공간이 될 수가 없다. 자유를 보장하면 평등이 깨어지고, 평등을 전제하면 자유를 제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점점 더 밀실만을 생산하고 있는 사회에서 우리는, 그리고 리더를 꿈꾸는 자라면, 그리고 배웠다는 지식인이라면 더 깨끗한 밀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여야 하고, 그 밀실들이 모여서 지금보다는 더 나은 광장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처럼 새로운 광장을 만들고, 그 광장에 밀실을 만들어 넣는다는 실패로 판명이 낫기 때문이다. 광장을 추구했던 구소련의 붕괴도 그렇고, 밀실을 추구했던 미국의 극심한 양극화가 그렇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떠나, 시대적 상황을 떠나 지금 21세기를 살아가는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한 단계 더 높은 정신적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 3국인 중립국을 향해 가던 명준 에게 푸른 바다 속으로 자신의 몸을 맡기게 만들었던 것은 무엇일까? 남한에서 북한에서 두 가지 체제를 직접 몸소 겪고, 그 곳에서 발전가능성을 본 것이 아니라 실패의 참혹함만을 맛보았던 그였기 때문에, 중립국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일지도 몰랐지만,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결국 그런 경험 끝에 자신이, 그리고 우리가 온전히 소리칠 수 있는 광장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나의 밀실을 함께 나누어 쓸 수 있는 한 사람, 즉 인간 자체만이 광장의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가 꿈꿨던 푸른 광장과 같은 드넓은 푸른 바다 속으로 자신의 피붙이를 안고 저 멀리 떠난 은혜와 딸을 생각하며 뛰어든다면, 그 속에서 죽음을 통해서 진정한 광장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개인적으로는 이 작가가 다뤘던 사회 현실과 문학사적 의의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우리에겐 그 현실을 공감할 만한 사회 환경적 조건이 부재하기 때문에. 그저 많이 힘들었겠구나,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펜촉을 부러뜨리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 정도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잊을 수 없는 한 작품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작가의 문장력이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속에서 탈대로 타고 난 무서움의 잿더미에 미움의 찬비가 소리 없이 내리면서,

남은 재를 고스란히 적시며, 명준의 온몸에 스며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보고지라는 소원이 우상을 만들었다면,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최인훈의 글귀는 한자 한자 꼭꼭 씹어서 소화를 최대한 시켜서 삼켜도 아직은 넘쳐흐르고도 넘쳐흐른다. 속독을 해서는 절대 되지 않는 문장들이다. 한 문장도 놓치기가 너무나 아깝다. 그는 "삶 들여다보기"의 진정한 고수다.

 

마지막으로, 서양문학의 번역본이 아닌, 이런 높은 수준의 필력을 자랑하는 작가의 원본을 그대로 읽을 수 있음이 가장 값지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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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그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1
헤르타 뮐러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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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수용소 문학의 정점, 헤르타 뮐러 「숨그네」

“소설 창작에서는 사건 중심인 추리 소설을 플롯이 이끄는 소설이라고 한다. 그 반대편에 동기를 중요시하는, 캐릭터가 이끄는 소설이 있다. 사람들이 흔히 대중문학과 본격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는 플롯이 이끄는 소설과 캐릭터가 이끄는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 김연수 「소설가의 일」中

 

이 작품은 망명한 시인이자 실제 수용소 생존자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구슬을 토대로 헤르타 뮐러가 쓴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학적 증인”이라는 찬사를 받은 작품입니다. 2차 대전 후 루마니아에서 소련 강제수용소로 이송 된 열일곱 살 독일 소년의 삶을 충격적이고 강렬한 시적 언어로 밀도 있고 섬세하게 그려냈습니다.

 

개인적 선호를 따지자면 사건의 전개 속에서 주인공이 심적 갈등을 겪고, 이를 통한 내적 성장을 보여주는 ‘캐릭터 중심’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숨그네>는 제가 좋아하는 성향의 작품은 아닙니다. 주인공의 시점에서 써졌지만, 반 이상을 그와 함께 생활하는 수용소 내부의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자 시점으로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소재는 풍부하며, 다양하게 발견되는 현실 순응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무기력함은 한층 더 깊게 전해집니다.

 

2. 간접체험만으로도 느껴지는 수용소 생활의 잔혹함

그녀는 우리에게 수용소라는 곳의 잔혹함을 이렇게 전합니다.

 

“뼈와 가죽 배설되지 못한 수분이 삼위일체가 되어 여자와 남자의 차이가 사라졌고 성(性)은 퇴화했다. 그 혹은 그녀라는 말은 썼지만 저 빗이라든가 그 막사라고 할 때의 지시어와 다를 바 없었다.”

 

성이 사라진 채 욕구만 남아 있는 곳, 배고픔 앞에선 먹을 것이 그들의 기준이 되어버렸으며, 사람의 죽음을 마주하더라도 태연하게 대처할 뿐인 공간입니다. “삽질 1회 = 빵 1그램”으로 표현되는 노동의 무게 또한 상상할 수 있는 범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주인공 레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는 수용소 안에서의 삶의 무게는 특유의 담담한 문체로 인해서 더욱 무겁게 전해집니다.

 

예전에 읽었던 마르틴 그레이의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야 한다」라는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수용소를 탈출하기 위한 역경과 고난을 너무나 잘 표현했기에 개인적 선호로는 상대적으로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숨그네」속에서는 탈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수용소로 돌아오는 주인공을 바라보며 한층 더 깊은 시름과 절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소수의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영웅적 탈출기가 아닌, 다수가 보여줬던 치욕적인 현실 적응의 모습을 통해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수용소라는 공간적 특징에 더욱 부합하는 것 같습니다.

 

3. 조어(造語), 그녀만의 작품색을 견고히 만들다.

‘숨그네’, ‘볼빵’, ‘하조베’, ‘배고픈 천사’ 등 그녀는 작품 속에서 독특한 조어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력은 루마니아어와 독일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었던 작가의 삶 속에 있을 것입니다.

 

‘위가 조여든다. 그 느낌은 점점 올라와 입천장에 닿을 것 같다. 숨그네가 공중을 한 바퀴 돌고, 나는 헉헉거린다.’

 

다양한 조어 중에서도 가장 독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말은 제목이기도 한 ‘숨그네’일 것입니다. 그리고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야기를 펼쳐가는 것에 있어 이 단어는 ‘배고픈 천사’라는 말 보다 오히려 비중이 없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작가는 이 단어를 제목으로 선택했을까에 대한 의문을 우리는 가져볼 수 있습니다.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수용소 안에서의 삶은 언제나 죽음과 함께 합니다. 배고픔, 추위, 극심한 노동 속에서 나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매 순간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계인의 삶이라는 상황을 작가는 ‘숨그네’라는 표현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4. 수용소마저 그리워하게 되는 한 사람의 인생

‘수용소는 마음속의 소망을 박탈했다. 누구든 결정할 필요도, 결정할 의지도 없었다.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기억이 그 바람을 뒤로 밀어두었다. 감히 그리움을 앞세울 수 없었다. 기억이 이미 그리움이라고 믿었다. 머릿속에 항상 똑같은 장면이 돌아가고 세상과의 격리가 익숙해지면 그리운 것은 기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세상과 단절되었던 시간은 사회 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격리시키기 시작했으며, 가족 구성원들과의 삶마저 단절 시켜버렸습니다. 수용소의 경험이 가장 비참해지는 순간은 아마 이런 순간이지 않을까합니다. 세상으로 돌아왔고 자신에게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자유를 누리는 방법을 알지 못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가 만들어 낸 수용소 속으로 다시 걸어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밀란 쿤데라는 말 합니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만 있는 것,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헤르타 뮐러 역시「숨그네」속에서 이런 메시지를 전합니다.

“인간은 산다. 단 한 번만 산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자신의 삶이 결정 지어져버린 개인들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런 모습과 현실 앞에서 삶의 태도를 배우는 것 자체가 큰 사치이고 결례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결국 ‘한번뿐인 내 삶의 중요성’입니다.

 

5. 특별하고, 더럽고, 수치스럽고, 아름다운 - 소설가 김애란

소설가 김애란은 『한국 작가가 읽은 세계문학』에서 이 작품을 읽고 이렇게 얘기 합니다.

 

‘가스계량기가 있는 나무복도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는 심장삽의 공범이 되었고, 배고픈 천사의 적수가 되었다. 돌아왔으므로 나는 말 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

 

살면서 우린 많은 일을 겪게 되겠지요? 그중에는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을 테고요. 지저귀듯 노래하며 시를 읊을 시절도, 기도하듯 무릎 꿇고 말을 줍는 순간도 있을 겁니다. 『숨그네』는 한 인간이 처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허기와 고통의 시간을 그리고 있는 소설입니다. 거기서 사람이 만든 말이 사람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또 어떤 일을 돕고 있는지 목격하는 건 이제 여러분의 몫이겠지요?

 

-

제가 이 책을 마주하고 목격한 것은 삶이라는 것에서 격리 당한 이들이 그려내는 삶의 모습입니다. 극한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지만, 때로는 수용소 바깥의 세상보다 더욱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모습마저 보입니다. 생존의 경계에 있는 이들이기에 인간으로서 지켜야하는 최소한의 도리가 그들의 삶의 규칙이 되기 때문입니다.

 

책은 덮은 후 저에게 질문을 한 번 던져봅니다. 자유라는 것을 대가없이 누릴 만큼 너는 삶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지. 지금의 나의 모습은 한쪽으로 치우쳐진 숨그네를 타고 있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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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업 사회 - 일할 수 없는 청년들의 미래
구도 게이.니시다 료스케 지음, 곽유나.오오쿠사 미노루 옮김 / 펜타그램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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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실업 문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오는 기사의 주제 중 하나입니다. 성장은 둔화되었고, 기업은 비용절감에 혈안이며, 미래가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청년들에게 도전만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의 폭력이 됩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청년실업 문제가 청년만의 과제로 국한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하는 흐름 속에서 더 많은 세금이 필요하지만 일하지 않는 청년이 늘어나면서 이를 충당할 방법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가 함께 겪고 있는 공통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저출산·고령화 사회를 맞이한 일본의 현황과 정책은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며, 유교 등 문화적 배경에 적지 않은 공통점을 가진 한국 역시 이 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서 소개하는 ‘무업사회’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1. 무업사회란 무엇이며, 왜 등장하게 되었을까?

제목을 처음 보고 제가 했던 생각은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으며, 취업이 어려워지는 사회적 추세를 ‘무업사회’라 생각했습니다. 역시 저의 짧은 생각과 달리 제목이 다루고 있는 범위는 더욱 넓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이렇게 말 합니다. 


‘누구나 무업 상태가 될 가능성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무업 상태에 처하게 되면 그로부터 빠져나오기가 힘든 사회를 ‘무업사회(無業社會)’라고 정의합니다.’


사회적인 현상과 더불어 개인의 심리적 태도까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의 원인에는 다양한 것이 있겠지만 ‘종신 고용제’와 ‘연공서열형 임금’으로 대표되는 일명 ‘일본형 시스템’에 참가하지 못하거나 그 시스템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면 치열한 경쟁 환경이나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는 상황과 구조의 책임이 큽니다. 일본에서는 노동시장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과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거의 같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은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청년 무업자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어떠할까요?


2. 무업, 그건 너의 잘 못이야! vs 그게 너의 잘 못이야?

책 속 한 청년의 인터뷰를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저는 제 성격 때문에 면접을 봐도 채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시간을 상대방이 허비하게 만드는 것도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 데도 면접을 보러 가지 않았어요.”


여러분은 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너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은 너의 생각 때문에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잖아?’ 였습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에는 개인의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회·대중의 시선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열쇠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스스로 헤어나오고자 하지 않고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 책을 읽어가면서 알게 된 것은 무업상태에 빠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개인의 의지 부족이 아닌 ‘질병·부상’이라는 것과, 다섯명 중 한 명의 퇴직 사유가 직장내 분위기나 근로의 질 등을 통한 ‘심신박약’이라는 것을 통해서,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이유를 통해서 많은 이들이 무업상태에 빠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하나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시켜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하고 있는 현상을 개인의 차원에서 해결하도록 강요하고만 있는 현재의 분위기에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3. 청년은 일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일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통해서 우리는 문제를 바라보는 각자의 관점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전자는 개인의 노력에 따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바라보는 것이며, 후자는 사회구조적 문제로 인한 피해자로 청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렇게 이분법적 관점으로 정의하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두가지 관점이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문제는 언제나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로 인해 다시 사회 문제로 확대되는 것이 일반적 흐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오히려 새롭게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근본으로 돌아가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하지 않는 것인가, 못하는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벗어나 ‘일 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을 던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일본의 경영자 이나모리 가즈오의 <왜 일하는가>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궁금하다면 이것만은 명심해주기 바란다. 지금 당신이 일하는 것은 스스로를 단련하고, 마음을 갈고닦으며, 삶의 중요한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행위라는 것을.


이 이야기는 책에 나온 청년들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생기는 것 / 일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것 / 생활의 일부 / 누군가를 위해 일하는 것 / 막연했던 꿈을 실현해 주는 것 / 사회로 나가기 위한 첫걸음’ 즉, 일이라는 것은 관계를 향한 나아감이며,  누군가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것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4. 무업사회, 해결방법은 있을까?

우리는 현재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보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많은 구직자들이 센터를 방문하는 공통된 목적은 ‘자신감 키우기’라고 합니다. 하지만 국내도 마찬가지이지만 다양한 기관에서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개인의 역량을 강화시켜주기 보다는, 구직자와 기업과의 매칭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근본적 문제의 해결 없이 결과만 도출하려다 보니 1년 이내 퇴사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의식의 변화를 행동의 변화로 이어가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 우리가 가장 집중해야 하는 부분은 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변화와 함께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 제도적·행정적 지원입니다.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미니멀리스트/트리머’라는 두 개념이 흥미로웠습니다. 전자는 어떤 시점에서 최소한의 공적 지출을 추구하는 태도이며, 후자는 ‘정원사’라는 의미로 때로는 잔디에 물을 뿌리고 거름을 주는 등 잔디를 키우면서 정원을 가꾸는 것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아름다운 정원’을 만드는데 합리적이면서도 지출이 적어질 수가 있다고 보는 개념입니다. 이 개념에 대해서 저자는 이런 의견을 보입니다.


‘실제로 지원의 확충은 해당 시점에서는 공적 지출의 증가로 나타나지만, 확실한 안정망 확충이나 노동시장에서 높은 부가가치 창출을 발휘할 수 있는 청년 세대 지원은 중장기적으로 볼 때에 비용 대비 효과가 오히려 높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5. ‘청년배당’, ‘청년수당’ 한국의 무업사회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까?

이재명 성남시장의 ‘청년배당’ 정책과, 박원순 서울시장의 ‘청년 수당’ 정책이 생각납니다. 둘 다 포퓰리즘이라는 단어로 연일 공격을 당하고 있지만, 직접적인 수혜를 받을 이들의 반응은 언론의 분위기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청년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도 하며, 도전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작은 울타리를 쳐주는 것만으로 그들이 누리게 되는 심리적 보상은 그 이상으로 보입니다. 정책이라는 것은 언제나 신중해야 하지만, 신중함이 때로는 우유부단함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개인적 의견은 국가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아닌 지자체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만큼 작은 성공사례가 될 수 있을지 지켜본 후 논의를 해도 늦지 않았다고 봅니다. 과연 이 정책들은 미니멀리스트가 될까요 트리머가 될까요?


20대를 지나 30대가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취업과 창업을 통해 자신의 길을 걸어나가고 있지만, 아직 기회를 얻지 못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너의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거야.’라는 말은 도저히 입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사회로 나가기 위한 준비를 어떻게 해왔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눈을 낮춰서 중소기업과 같은 도전할 수 있는 곳에서 기회를 기다려라는 말 역시 쉽게 하지 못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문제의 특징은 개인의 의지보다는 사회구조적 문제에서 더욱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대의 흐름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 책이 하나의 해결책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을 이해함으로써 나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 만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곧 총선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개인이 좀 더 노력해서 도전을 멈추지 않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청년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 많이 탄생해서 장기적인 안목으로 수행할 수 있는 청년정책들이 많이 탄생했으면 하고 기대하게 됩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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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먹는 책방 - 동네서점 북바이북 이야기
김진양 지음 / 나무나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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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연히 만난, 운명처럼 만난 <동네책방 북바이북>
새해가 되면 어김없이 뉴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사가 있습니다. 평균 독서율에 대한 기사이지요. 언제나 최저치를 갱신해나가는 독서량을 바라보면서, 한 번도 호황인적이 없었던 것 같은 출판업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은 책방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사는 것일까?’하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와는 별개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제게는 그런 일이 바로 ‘작은 책방’을 여는 것입니다.

 

맘속에 품은 작은 꿈은 작년부터 동네책방과 서점에 대한 이야기들을 한 번씩 찾아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술 먹는 책방’이 서울에 생겼다는 기사를 접했고, 우연히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렸다가 <동네책방 북바이북> 책이 입고된 것을 발견하고 바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2. 소소한 책방 창업이야기를 담다.
이 책은 저자이자 ‘북바이북’의 책방지기인 김진양씨가 쓴 책입니다. 그녀가 왜 책방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준비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 문을 열고 난 후 책방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 등을 담았습니다. 2013년 3월 책방 시작 결의를 다진 후부터 약 2년 여간 있었던 작은 서점의 분투기 이자, 누군가에겐 창업지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나중에 이런 일 들을 겪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흥미롭게 몰입해서 단번에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면 한발자국씩 앞으로 내딛는 모습 속에서 작은 희열을 함께 느끼게 됩니다. 아마존과 테슬라 같은 거대한 창업의 세계가 아닌, 어쩌면 우리의 일상 속에서 항상 마주하게 되는 소소한 생활 속 공간의 이야기인 만큼, 독자에게도 일상 속 작은 도전의 에너지를 전해줍니다.

 

3. 가장 강력한 성장의 힘은 ‘연대 - 콜라보레이션’
작은 서점이 자신만의 색깔을 입히기 위해선 주인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그 공간을 이용하고 방문해주는 이들의 향기가 없이는 오랫동안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북바이북’이 지금처럼 많은 화젯거리가 되고, 손님들의 방문이 이어질 수 있는 이유에는 핵심 콘텐츠를 살리기 위한 다양한 이들과의 콜라보레이션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보입니다.

 

실내 디자인과 인테리어는 ‘마누파쿰’, 인기디저트는 ‘배러댄초코렛’, ‘우연’, ‘더브래드팬트리’ 등 많은 곳과 제휴하면서 메뉴개발과 관리에 대한 노고는 최소화 시키며, 자신들은 좀 더 책 큐레이션과 도서관리 등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브랜드를 시작하면서 가지는 환상 중 하나는 ‘모든 것을 내 손으로 직접 할 거야.’입니다. 분명 자신의 정성을 한 곳도 빼먹지 않고 모두 들인다면 가장 자기다운 공간을 만들 수 있겠지만, 전문가들이 존재하는 영역에 대해서는 충분히 그들과 상의하고 협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바이북’은 이런 콜라보를 통해서 좀 더 수준 높은 서비스를 오신 손님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4. 「북바이북」‘책’이 아닌 ‘콘텐츠’를 파는 공간
많은 동네서점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동네서점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고,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좀 더 편안한 공간이다.’, ‘상암동이라는 직장인들이 많은 곳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등 ‘북바이북’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주인이 가지고 있는 책방에 대한 관점이 생존의 열쇠였다.’

많은 이들이 책방이라 하면 ‘책’이 핵심이고, 자연스레 책방주인은 자연스레 ‘독서광’ 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조금 고루해 보이는 인상은 덤으로 따라옵니다. 하지만 저자의 관점은 조금 달랐습니다. 그녀는 책에서 이렇게 말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니 그냥 생각해 봐도 난 책을 그렇게 많이 읽지 않는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긴 하지만 ‘독서광’이라고 불릴 만큼 늘 책을 옆구리에 끼고 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책과 관련된 페이스북 커뮤니티만 살펴보아도 소위 말하는 책벌레들은 확실히 독서량이 어마어마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책 자체보다는 글쓰기의 연장선에서 콘텐츠를 다루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책은 트렌드의 가장 최전방에서 트렌드의 시작을 알리는 가장 최소 단위의 콘텐츠이다. 독서광이 아닌 콘텐츠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난 책방 주인장이 되어 있는 것이다.”

 

‘다음’이라는 대표 미디어콘텐츠 기업에서 근무한 경험 때문일까요? 책을 콘텐츠로 바라보는 그녀의 관점이 신선합니다. 이런 생각이 상암동이라는 가장 트렌드에 민감한 동네에서 작은 책방에 끊임없이 숨을 불어 넣을 수 있는 원동력이지 않을까요?

 

5. 책장을 덮으며
제가 꿈꾸는 공간과 비슷한 곳을 자신의 방식으로 먼저 이뤄낸 이야기를 만나는 것은 작은 질투와 무한한 동경을 불러일으킵니다. 책을 콘텐츠로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서 저의 생각과 맞닿아 있음을 발견했을 땐 묘한 동류의식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전자책 시장이 커진다 하여도, 종이책의 생명은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겨가며,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 하나의 경험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책이 좀 더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독서 자체가 아니라 다른 하나의 문화와 연결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독서모임 / 글쓰기 / 문화여행 등 다양한 장르와 함께 어우러지는 책의 시대를 꿈꿔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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