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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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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제 논란이 다시 생각나다.

 

책을 읽고 난 뒤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르셨나요? 저는 작년 말 문화계에 갑론을박을 불러일으켰던 아이유의 제제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그때의 논란은 제대로 결론지어지지 않은 채 미봉책으로 남겨진 느낌이 가득하지요. 이 사건을 저자 테리 이글턴이 평한다면 아래와 같은 한 마디를 던지지 않을까 합니다.

 

문학은 고정된 의미를 가진 텍스트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다양한, 가능한 의미를 산출할 수 있는 모태로 간주하는 것이 제일 나을 것입니다. 작품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기보다는 의미를 생산합니다.”

 

생산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듯이 그는 작품의 해석을 온전히 <독자>의 영역으로 남겨둡니다. 작품은 하나의 재료에 불과하며, 독자는 작품이라는 재료를 빚어 자신만의 해석을 생산해 내는 것이지요. 좀 더 정성을 드린 것은 있을 수 있겠지만, 여기에 불량품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유가 제제를 통해서 성적 코드를 느꼈다면 그건 아이유만의 감성이자 감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저자의 의견에 깊게 동의합니다.

 

2. 수준 있는 독자가 된다는 것.

그러나 이런 담론으로만 흘러간다면 이 책은 너무나 당연한 전개가 되고 맙니다. 수없이 많은 책을 인용하고 작가들을 불러내며 그가 하고 싶은 궁극의 이야기는 결국 <독자>의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책 속 저자의 한 마디를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문학은 물적 대상이 아니라 계약입니다. 독자 없이는 문학이 없습니다. 게다가 시나 소설이 어떤 의미를 갖게 만드는 독자의 능력은 역사적 상황에 의해 형성됩니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 텍스트가 갖는 의미는 그 의미를 만드는 독자의 능력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는지는 독자의 마음이지만, 그렇게 해석 된 텍스트는 지극히 독자의 능력에 좌우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무엘 베케트가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졌고, 평소의 성격과 친구들과의 관계는 어땠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게 된다면, 단순히 종이 위에 찍혀있는 잉크를 읽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해석이 나올 가능성이 농후할 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반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역사적 정황과 맥락, 작가의 성향들을 제대로 파악한 후에 해석한 것만이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해석인가?

 

3. 테리 이글턴. 그는 존 키팅 선생일까?

20세기 대표 명작으로 거론되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존 키팅선생은 첫 수업시간에 프리처드 박사의 시에 대한 비평이론을 찢어버리라고 한 장면을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시에 대한 평가는 객관적, 계량적, 통계학적 분석 방법을 모델로 하여 이루어져야 하며, 감상자의 주관 따위는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쓰레기라고 지칭하며, 학생들에게 시와 미, 낭만, 사랑은 삶의 목적이라는 말과 함께 카르페디엠, 시즈 더 데이를 가르친다.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신체를 나의 순간과 하루를 통해 만드는 것이 우선인 것이다.

 

이점이 바로 책에서 저자가 가장 강조한 <독자의 감응력>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같고도 다른 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영문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비평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비평을 위해서는 사전 지식이 필요조건이 되며, 그 정보들은 더욱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논리를 전개시키는데 큰 도움을 준다. 하지만 독자는 한 단락의 소리 구조를 분석할 수도 있고, 의미심장한 모호함처럼 보이는 표현에 집중할 수도 있고, 혹은 문법과 구문의 작용 방식을 살펴볼 수도 있습니다.’와 같은 그의 견해를 보자면 좀 더 독자에게 해석의 자유를 부여하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프리처드 박사와 존 키팅 선생의 중간 지점 정도에 위치하고 있지 않을까?

 

4. 소설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소설가 김연수는 소설가의 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왜 어떤 사람들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소설을 쓸 수밖에 없겠지만.”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생각의 고리 속으로 흠뻑 젖어 들어감이다. ‘카르페디엠, 시즈 더 데이처럼 삶이 생각을 바꾸기도 하지만, 생각이 삶을 바꾸기도 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결국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로 한 걸음 내딛기 위한 준비과정인 것이다. 알 수 없는 그 누군가를 그나마 잘 이해하고 바라보기 위해서 저자는 다양한 논리로 해체한 작품과 작가들을 불러 온 것이다. 비록 언급한 작가와 작품을 읽지 않고서는 책을 제대로 읽기는 불가능 하겠지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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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감 - 대중문화의 정치적 무의식 읽기
김성윤 지음 / 북인더갭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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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정의하고 내가 정리한 대중문화.

그는 대중문화를 <전도된 욕망을 비추는 객관적이고도 주관적인 체계>라고 정의한다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는 욕망이다대중문화가 가장 잘 드러나는 매체는 TV 프로그램이기에 현재 이슈가 되는 프로그램들을 잘 살펴보면 대중이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게 된다자연스레 몇 가지로 압축 된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육아방송, ‘냉장고를 부탁해’ 대표하는쿡방, ‘마이리틀텔레비전과 같은인터넷방송아기 낳고 키우기 힘든 세상이니 남들이 육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삼고고품격 요리 역시 나에게 사치일 뿐이니 셰프들의 고급 음식들을 쳐다보며 컵라면으로 끼니를 떼운다거기다 공중파에서는 절대 만족시켜줄 수 없는 나의 원초적 자극은 아프리카 TV를 통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채워넣을 수 있다개인화가 되는 것과 동시에 고립화 마저 진행되고 있는 현 시대의 모습을 미디어는 보여주고 있다.

 

대중문화를 소비한다는 것

이런 대중문화는 언제나 소비되거나 향유하는 대상으로만 존재했었다내 취향에 맞으면 즐기는 것이고그렇지 않으면 쉽게 패스하면 되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하지만 우리가 웃고 떠들며 즐기는 사이아니 그렇게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대중들 스스로가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태도와 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이 책은 그 점을 파고든다때로는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파고 들어가기도 한다그래서 대중이라는 이름 아래 숨어있는 우리의 모습그리고 나의 모습을 들춰내고 만다저자는 그런 작업에서 통렬한 쾌감을 느낄 것이며독자는 무의식 속의 자신을 마주하면서 생각과 행동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그렇게 내가 어떻게 대중문화를 받아들이고 소비하고 있었는지 바라보게 된다.

 

책 읽는 즐거움나와 다른 관점을 마주하다.

책을 읽으며 선택에 대한 보답을 받는 순간은 나와 다른 새로운 시각을 마주하게 될 때이다자연스레 사고의 확장이 이루어지며내가 갖고 있는 생각이 하나의 고정관념이 아닌지 되물어보는 시간을 가진다나를 마주한다는 것이 두렵기도 하지만 하나의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이 책 역시 대중문화를 다루면서 내가 생각하지 못 했던 부분들을 접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HOT의 등장을 목격했고그렇게 나의 학창시절은 아이돌그룹의 역사와 함께 했다하지만 팬클럽과 같은 활동엔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팬덤현상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상황이었다단순히 그들의 행동은 도대체 왜 저럴까?’하는 의문 아닌 의문으로만 남아있었다그러나 ‘200년대 들어 나타난 팬덤문화의 새로운 지류는 전통적인 성적 시선의 구도와 시선의 권력관계를 전복시키는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라는 저자의 말처럼여성이 남성을 시각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했다는 그의 관점은 내가 단 한번도 생각하지 못 했던 것이다.내게 있어 이런 현상은 학업이라는 억압된 환경 속에서 하나의 탈출구 정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생을 판타지물로 바라보다니우리가 이 드라마에 그렇게 열광했던 이유는 로맨스와 막장 스토리로만 가득했던 드라마에서 벗어나지극히 현실적인 상황과 사건으로 우리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 아니었던가하지만 이내 그의 주장에 설득 당하고 만다오과장김대리장그래라는 현실 속에서는 절대 함께 있을 수 없는 조합이 팀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우리는 가장 중요한 핵심을 외면한채 드라마 속 사건에 열광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깨끗하게 포장 된 유통기한 지난 식품 같은 건 왜일까.

그가 한겨례와 미디어스,미디어오늘에 기고했던 글들을 엮어서 낸 책이라 밝히고 있지만다루고 있는 사건들이 이미 사회에서 소화가 된 지 오래이거나되새김질까지 끝난 것들이 대부분이다지금 시점에서 좀 더 보완을 했다고 했지만 내용 자체가 새롭다고 느껴지진 않는다게다가 현 시점에도 충분히 다룰만한 대중문화적 이슈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루지 않았으며과거 사건들에 머물러 있다내가 위에서 언급한 현재 대중문화의 가장 트렌드라 할 수 있는 컨텐츠들은 단 하나도 다루지 않고 있다책을 출판하는 것이 목적인 모습이 다분히 보인다.그 점이 가장 아쉽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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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문을 두드리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 - 우주와 과학의 미래를 이해하는 출발점 사이언스 클래식 25
리사 랜들 지음, 이강영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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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연구는 기본 입자의 이론(우리가 아는 한 가장 작은 것에 대한 연구)을 중심에 두고, 때로는 끈 이론과 우주론(가장 큰 것에 대한 연구)까지도 뻗어 나간다. 동료들과 나는 물질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는가, 우주 바깥에는 무엇이 있는가, 실험가들이 발견한 기본적인 물리량들과 성질들이 모두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등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중략) 그러나 이 연구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를 가르쳐 줄 것이다.’

 

입자 물리학과 우주론이 중첩되는 현대 물리학의 최전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리고 물리학자들이 꿈꾸는 미래의 물리학이 어떤 것인지, 바로 그 분야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는 세계 최정상급 여성 물리학자 ‘리사 랜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를 모은 책입니다.

 

입자 수준의 단위에서 은하 수준의 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관찰하고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스케일’이 존재합니다. 이 스케일에 따라서 발생하는 다양한 현상들에 대하여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스케일이 달라지더라도 보존되는 성질이 있는 반면에, 완전히 새로운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런 차이를 발견하고 관계를 찾아가는 과학자들의 사고를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3부와 4부 같은 경우는 일반 과학 상식 수준을 벗어난 용어들이 사용되었으며, 자신들이 하고 있는 실험에 대한 소개와 장치들을 다루고 있기에 일반인들이 읽기엔 조금 괴리감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흥미 있게 살펴본 3가지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1. ‘중력파’의 발견과 역사 속 과학적 사고의 전환 - 2장 잠겨 있지 않은 비밀

2016년 2월은 과학계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순간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중력파’ 발견이 공식 선언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블랙홀이 중력할 때 발생하는 파장이다.’라는 설명은 전문적으로 과학계에서 공부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건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고의 전환입니다.

 

지구의 역사가 이어져 오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꾸준히 발전해왔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주장하기 전 까진 모든 사람들이 지구를 이 세상의 중심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약 500년 전 갈릴레오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려고 할 때에는 언제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과학을 모형으로 삼았습니다. 항상 믿음 아니면 직접 관찰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갈릴레오는 과학연구에 실험을 채용함으로써 순수한 사고와 추론의 한계를 넘어섰고, 그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도구와 장치를 사용함으로써 세계를 보이는 대로만 관측하는 것의 한계를 넘어선 것입니다. 다윈이 등장하기 전까진 인간을 신의 창조물로 바라보았지만 어느덧 지구에서 생존을 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다양한 논란이 있고 그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 지 예상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 이런 발견들은 우리의 사고체계를 완전히 뒤바꿔놓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 역시 그런 하나의 전환점이라 많은 전문가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 지 우리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쉬울 뿐 입니다.

 

2. 끝나지 않는 논쟁. 과학과 종교는 양립 가능한 것일까? - 3장 물질 세상에 산다는 것

‘그러한 외부 영향(신)이 있다는 생각이 종교 고유의 것이라면, 논리적, 과학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그 영향을 이 세계에 전달하는 매커니즘이 있어야만 한다고 따져 물을 것이다. 인간의 행위와 행동이나 세계 자체에 영향을 끼치면서도 보이지 않고 감지되지 않는 힘을 인정하는 종교적인, 혹은 영적인 믿음을 고수하려면, 종교인들은 믿음을 가지는 대신 논리를 포기하거나, 그저 무시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될 것이다.’

 

세계가 무질서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열역학 제2법칙은, 신이 세계를 이상적인 곳으로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이론들을 통해서 과학과 종교가 불화를 겪고 있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책의 제3장 <물질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과학자와 종교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관계가 왜 생기는 것인지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 둘은 양립할 수 있는 관계인지에 대해서도 소개합니다. 결론만 얘기하자면 양립 가능하지만, 양립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를 작가는 과학과 종교가 다루고 있는 방법과 목표의 차이에서 찾습니다. 과학은 물리적 실재를 추구하고 종교는 심리적 혹은 사회적인 바람과 필요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서로 인정하고 논의를 하게 되면 양립 가능한 것이지만, 이 출발점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 한 채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게 되면 언제나 논의는 제자리걸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목표의 차이가 대립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과학적 사고면 이 세상의 모든 진리를 설명하고 해결할 수 있을거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신의 계시에 따를 것일지니.'와 같은 사고는 세상 작동원리를 '유전자'의 생존욕구 하나로 설명하는 <이기적 유전자>식의 사고와, 모든 사회의 작동원리를 '자본'을 쟁취하기 위한 대립관계로 설명하는 <자본론>적 사고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장 우려하고 염려해야 하는 것이 바로 단 한가지만을 맹목적으로 맹신하는 것 입니다.

 

3. ‘창조성’이라는 ‘재능’에 대하여 - 22장 전체적으로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행동하라

 

“영감은 시에서 필요한 만큼 기하학에서도 필요하다.”라는 세르게예비치 푸슈킨의 말을 본문에서 인용합니다. 예술과 인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입자 물리학, 우주론, 수학, 그리고 다른 과학 분야에서도 모두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저 역시 대학시절 수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하면서 이 말에 깊은 공감을 했습니다. 같은 정의(Definition)와 정리(Theorem)를 공부하면서 각자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그림은 조금씩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차이가 수학을 공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경계를 만들었습니다. 제게는 이런 영감과 직관이 부족했기에 상대적으로 이른 포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결정을 저는 너무나 잘 한 결정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영감의 차이는 타고난 재능이라 보기엔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근 창조성과 재능이 타고났다는 주장에 의문 부호를 찍고, 성공 요인이 재능을 조기에 발굴해서 갈고 닦는 데 있다 주장하는 경향이 가능해 집니다. 대표적으로「아웃라이어」로 유명한 말콤 글래드웰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의 이야기를 빌려오자면 빌 게이츠의 성공은 그의 추진력과 재능보다, 자라오면서 속해 있었던 특별한 기회로 가득한 환경 때문이었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다양한 사례들로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 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이유로 그는 중요한 한 가지 관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도 그는 그렇게 열심히 집중해서 일을 했으며, 학습과 수련을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리사 랜들은 천재들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인 ‘창조성’을 하나의 노력의 산물로 바라 봅니다. 사람들은 흔히 통찰력을 ‘직관’의 산물로 생각하지만, ‘직관의 계시’가 내리는 순간의 이면에 연구에 쏟아 부었던 시간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간과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리더 김태원씨가 쓴 <우연에서 기적으로>라는 책 속에 소개된 일화가 있습니다. 책 한 권 읽지 않는 다는 김태원과 책과 글 속에 파묻혀 사는 이외수 작가와 대화를 나누는데 이야기가 전혀 막힘이 없으며 서로의 이야기가 통하기까지 했습니다. 극과 극은 언제나 맞닿아 있으며, 서로 통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한 분야의 정점에 오른 이들은 다른 분야의 정점에 오른 이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겠지요.

 

참 오랜만에 과학 서적을 손에 쥐었습니다. 과학자가 전하는 이야기가 별 거 있겠냐는 생각을 잠시 했었지만,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역시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가장 과학적인 곳에서 가장 철학적인 질문을 찾아가는 그 모습이 사뭇 진지하기 까지 했습니다.

 

‘과학 분야건 아니건 간에 진전을 이루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열쇠가 되는 요소 중 하나는 스케일에 대해 아는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스케일에 따라 관찰되고 이해된 것을 범주화해서 우리는 물리학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멀리까지 나아갔다. 스케일의 단위는 물리적 스케일일 수도 있고, 인구 집단일 수도, 시간 틀일 수도 있다. 과학자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정책 지도자들도 역시 이런 개념을 가져야 한다.’

 

그동안 가졌던 ‘과학적’이라는 것은 하나의 가설을 새우고 그것을 증명해 나가는 선형적인 사고로만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스케일’이라는 개념을 알 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 관점의 변화가 되는지 역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야 한다.’라는 격언은 아주 과학적인 사고였습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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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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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소설을 읽을 때는 첫 문장과 끝 문장이 무엇인지 유심히 새겨보는 습관이 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로 시작하여, “정신없이 울부짖는 고마코에게 다가가려다, 시마무라는 고마코로부터 요코를 받아 안으려는 사내들에 떼밀려 휘청거렸다. 발에 힘을 주며 올려다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 했다.” 로 끝이 난다. 작가 가와바타는 우리에게 머릿속으로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따라오도록 유도하며, 자신의 시선 안에 비춰지고 있는 모습을 끊임없이 상상하도록 만든다. 칠흑 같은 어둡지만 쌓여있는 눈 더미에 비쳐진 달빛으로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새벽녘을 얼마나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었겠으며, 그 시선을 하늘로 이끌어서 보여주는 은하수는 또 얼마나 자신의 가슴을 저미는 아름다움이었을까? 가와바타가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던 그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느껴보고자 한국인에게 유명한 유미가 출연한 ‘신 설국’이라는 영화를 봤다. 눈으로 뒤 덮인 공간을, 작가의 표현을 잠시 빌려 작은 방울 소리를 온 몸으로 안고 들어오는 기차의 만남은 자연과 기계문화가 만들어낸 최고의 아름다운 조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작가는 그 시선을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공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와무라, 고마코의 두 가슴속으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그저 차가운 가슴으로 고마코를 대하지만 고마코의 진실 된 뜨거운 마음으로 조금씩 자기에게 당면한 현실에 때론 고민을 하기도, 그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더하기도 하는 시마무라의 내면. 한 남자의 약혼녀지이지만 새 애인이 있는 남자를 위해서 게이샤가 되어 그들을 부양하면서도 그 현실을 피하려하지 않고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그 순간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고마코라는 한 여인의 내면. 우린 그들의 가슴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를 통해서 일본의 서정문학의 대표작이자 시작점이 된 작품을 느낄 수 있다. 문득 눈이라는 것이 처음엔 차갑지만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알 수 있듯이 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있으면 나중에 오히려 주위 공기층을 형성해서 안은 따뜻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설국이라는 배경을 통해서 차갑기만 했던 두 주인공의 마음이 서로를 통해서 조금씩 따뜻해져가는 그 과정을 나타내기 위한 최적의 배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함께 해보게 되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일본 최고의 서정문학이라고는 하지만 나의 감성에는 잘 와 닿지 않았다. 예전에도 일본 문학을 접할 때는 이런 기분이었는데 일본 특유의 디테일한 감정표현을 읽어내기에는 아직까지 나의 내공이 부족한 것이라 생각한다. 소설을 읽어낸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니. 나에게 이 작품은 작가의 뛰어난 묘사, 즉 들여다보기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조금씩 나의 생각과 감정을 시적표현으로 풀어내는 것을 시도하고 있는데 문장 하나하나 놓치기 안타까운 것이 참으로 많았다. 잘 소화할 수 있게 꼭꼭 씹어 먹어보아야 겠다.

 

많은 평론가들에게 설국의 첫 문장은 최고의 찬사를 받는 문장이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최고의 첫 문장은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하루빨리 이 문장을 넘어서는 첫 문장을 만나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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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
서머셋 몸 지음, 송무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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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 둘 다 둥글며 둘 다 은은한 색으로 빛난다. 난 생각했다. 책 속에는 달과 6펜스에 대한 비교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언급조차 없다. 하지만 왜 이 책의 제목은 ‘달과 6펜스’인지 참으로 궁금했었다. 그 내용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은 책의 뒤에 있는 작품해설에 나온다.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대표하는 6펜스, 속세를 벗어나서 자신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대표하는 달. 둘 다 인간의 삶이라는 젊에서 참으로 닮아있지만, 다를 수밖에 없다. 6펜스는 삶을 살아가는 순간에는 그 무엇보다 중요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에게 이 6펜스는 아무런 존재의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눈앞에서 자신을 비춰주고 있는 은은한 달빛 한 줌에 위안을 얻고, 그 동안 살아온 삶을 다시 되새겨볼 뿐이다. 우리 삶의 본질은 과정에 있는 것인가, 영원한 평형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죽음에 있는 것인가? 이것도 우매한 질문일 수도, 과정과 결과는 너무나도 인과적인 관계가 있으니깐. 이렇듯 ‘달과 6펜스’는 닮은 듯 다르고, 다르지만 같을 수밖에 없다.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고흐와 함께 살았던 고갱. 나는 고흐의 삶은 ‘영혼의 편지’를 통해서 들여다 볼 수 있었지만, 딱히 고갱에게는 관심을 가지지 못했었다. 그 찰나 이 책을 접하게 되었고, 주인공 스트릭랜드가 고갱의 재해석 된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들이 함께 했을 그 순간, Yellow House를 다시 떠올려 볼 수밖에 없다. 미술가들의 협동조합을 꿈꿨던 고흐, 하지만 이 책 속 스트릭랜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런 예술가들은 그저 자신을 혼자 놔두기만을 바랄 뿐이다. 자기 삶을 살아가도록 놔두기만을. 참으로 자유로운 영혼들이기에 공동체 생활이라는 것은 그들에게 또 한 가지 짊어져야 할 책임감을 부여할 수밖에 없으며, 그 결과 고흐는 자신의 귓불을 자르며, 고갱은 Yellow House를 떠나고 만다. 하지만 이 둘이 함께 했던 순간이 둘 다 불멸의 미술가로서 재탄생 하는 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겠다. 고흐는 ‘별 헤는 밤’으로, 고갱은 ‘타히티의 여인들’로. 둘 다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았고, 그 삶을 자신의 화풍으로 풀어내었고, 죽은 후 더욱더 위대해졌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하느님의 연자매는 느리게 돌지만 가루는 아주 곱지요」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만들어냈기 때문이 아니라,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켜냈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누구의 시선에도 개의치 않고 자기의 소신대로, ‘자신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켜버린 삶을 살다간 사나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빠른 성공의 길이 아니라, 자기의 길을 묵묵히 자기 속도로 꾸준히 달려간 사람의 인생은 어느 누구라도 경외감을 가지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너무나도 곱디고운 가루들의 집합체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가 살아가면서 주인공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삶을 남들의 시선에 하나둘씩 맞추기 시작했다면 타히티 섬에서 작업한 작품이 천지창조를 넘어선 그 무언가로 다가올 수 있었을까? 과정에서는 끊임없이 주인공이 스트릭랜드의 삶을 비판하지만, 그저 스트릭랜드는 콧방귀를 뀔 뿐이다.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면서 스트릭랜드를 비판하지만 그것은 그저 사회적 통념이 빚어낸 도덕일 뿐. 스트릭랜드는 도덕 위에 군림해야만 하는 자신만의 윤리를 따라서 살아갔으며, 그 윤리대로 평생 살다죽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 후에는 그를 잘 모르던 사람들마저도 그 삶을 존경하기에 이른다. 이 어찌 삶의 모순이자 역설이 아니겠는가? 우린 도덕이라는 기준에 맞춰서 살아가야 하고, 사회 규칙과 법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그런 것을 때로는 무시하고 짓밟아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을 우러르고 칭송하고 있다. 결국 도덕이라는 것은 지배층이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창조해 낸 것일 뿐인 것이다.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을 만한 영향력을 가진 개인이 탄생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장치였다.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은 삶을 살다간 이들은 이렇게 무언가를 창조해냄에 이르게 되며, 사회라는 유기체의 일부로서 그 안에서 그것에 의지하며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흐릿한 그림자가 아닌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찬란한 태양처럼 빛나게 되는 것이다.

 

 

왜 우리는 나중을 위해서 지금의 삶을 희생시키는 것일까? 지혜로운 이들은 점잖게 자기들의 길을 간다. 하지만 참으로 점잖게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언제나 딴죽을 걸기 시작하며 자기의 영역 안으로 그들을 끌어들이려고만 한다.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을 자신의 영역 안에 많은 이들을 끌어 들임으로서 안정감을 꾀하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서로의 길이 있을 뿐인데 말이다. 서로가 자기의 길을 온전히 걸어갈 수 만 있다면 그것이 가장 안정적이고 이상적인 사회일 것이다. 너무나 평온하고 조용하며 초연한 곳에서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할 수밖에 없다. 안정적인 것은 더 이상 안정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나는 인문고전을 읽으면서 자신의 삶을 창조한 이들을 만날 때 마다 내 가슴 속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는 것을 그저 가만히 놔둘 수가 없다. 나는 내 삶을 창조할 것이며, 사회라는 유기체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지만은 않을 것이다. 무엇인가에 의지하는 순간 그것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상황이 왔을 때는 자신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한 몸으로 살아가야 하고 살아내야 한다. 삶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의 영역 안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서로의 삶으로 존재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래야 우리라는 개념은 힘을 얻을 수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여야만, 우리 아래에서 조금씩 약해진 개인도 힘들 때 의지할 수 있고 버티며 버텨주며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예술가의 혼을 나는 끊임없이 갈고 닦아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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