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분노하지 않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분노하지 않는가 - 2048, 공존을 위한 21세기 인권운동
존 커크 보이드 지음, 최선영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1년 12월
평점 :
절판


친구야 잘 지내지?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인권, 2048년에 우리는 결실을 맺을 수 있을거야. 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존 거크 보이드란 사람이 쓴 책 이야기 좀 들어볼래?  그래 맞다 2048 프로젝트가 뭔지 궁금하지?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공표되었잖아 한마디로 100주년이 되는 2048년까지 결실을 맺게 될 프로젝트라는 거지.  세계인권선언이니 그런 구호들은 집어치우고 인권을 국제 사회운동으로 확대시켜 강제력, 집행력을 가지게끔 하자는 게 2048 프로젝트의 요지야. 책을 다 읽기전부터 <왜 분노하지 않는가> 라고 도발적으로 물어오는데 사실 변명할 것도 세삼 물어보는 것 같아서 그저 멍때리고 있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는 현수막 아래 우리가 너무 오래(?)살아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도 무감각 해진 건 우리의 심성에도 문제가 있는 거지만 실재 같은 가상의 세계에 너무 오랜 시간 노출이 되어버려 실재의 세계도 가상처럼 느끼며 그저 구경만 하고 소비하며 살았던 거지. 그래서 <왜 분노하지 않는가> 그 말이 이제라도 정신 좀 차리고 진짜 현실을 깨닫고 타인에 대한 관심도 가지고 반성도 하고, 세계 어디에서나 진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세계권리장전을 만들자고 알아 들었어.  

 

 

2048프로젝트는 미국 대통령인 루즈벨트 선언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밝히고 있어.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야. 문제는 2048 프로젝트로 분열을 바로잡고 경제적 권리와 사회적 권리를 원래의 마땅한 위치로 돌려놓는 것이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문제는 저자가 너무 낙관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희망적이어서, 신념에 차 있어서 좋지만 독자인 나야 강건너 불구경하듯 그저 호기심어리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서 이러쿵저러쿵 딴지를 걸수도 수긍도 할 수도 있다는 거지. 인류의 합의로 만들어진 합의문은 기업과 정부를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p.51) 고 하였는데 너무 순진한 바람이 아닐까 싶어.어떻게 기업에 도덕성을 바라는 건지..어떻게 국가를 양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건지...또한 중립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의사결정권을 맡긴다고 하니..이건 누가판단하며 누가 정하지? 라는 생각이 앞서네.

 

 

 

그런데 유럽인권재판소 창시자 중 한 사람인 르네 카생이 유럽인권조약의 작성을 인정받아 노벨 평화상을 받으며 이런 말을 했대.

 

"효과가 있다니까요" (p132)

 

이 말이 왜 그리 웃기던지..내 마음의 어디를 건드렸을까?...눈물까지 찔끔거려가며 웃었어.

정말 효과가 있다니까요 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저자의 표정이 연상이 되어서일까? 아, 이렇게 진지한 프로젝트에 미친듯 웃어재낀 건 예의가 아닌데 말이야...ㅡ.ㅡ

아, 저자의 말대로 인권을 배워야 하는 것이 아닌 삶의 일부로 받아 들인다면(p40) 더할나위 없겠지만, 세상 일이 그리 녹록치가 않은 게 문제인 거지,. 그리고 이성으로 작동하는 게 있고 감정(혹은 감성)적으로 작동하는 게 있는데 어쩌자고 저자는 우월주의와 편견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온갖 잡동사니를 잔뜩 실은 트럭을 이에 물고 끌기위해 끙끙대는 차력사같은 느낌을 지울수가 없어. 그런데 가만보면 움직일 것 같지 않은 트럭이 조금씩 움직이는 게 보인단 말야.

 

 

세계의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누릴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는 희망이 있으니까 솔깃하긴 해. 솔직히 말하자면 저자의 그 진심에 순전한 동기와 인류애에 코끝이 찡할 지경이야. 하지만 의구심이 들어. 경제적 불평등, 전통, 윤리, 종교적 관습 등을  넘어서서 보편적 인권이라는 것을 과연 잡음없이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싶어서 말야... 괜한 걱정이고 의심일까? 그런데 모든 사람을 위한 보편적 인권을 사회계약으로 융합하자는 데 있어 모든 사람을 위한! 이 말에 의심이 드는 건 왜일까? 인권에 있어서  배재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 테두리 안에 다 끌어안을 수 있을지는 글쎄..회의적이야 인권에 위배되는 문화적 권리나 종교적 관습등을 포기하고(혹은 무시하고) 보편적 윤리 안으로 들어오라는 소리인데 이것 또한 폭력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인권을 다룸에 있어 분명 배타적이거나 상대적이거나(혹은 절대적인 것 까지도)배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보편성으로 묶기에는 이 지구상의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 다양하고 복잡미묘한데 말이야. 법의 지배가 가능할 때 사회는 번영한다(p.123)는 그의 말에서 법가사상으로 전국을 통일한 중국의 진시황제가 생각난 건 좀 뜬금없긴 한데 아무튼 이건 오바라고 봐. 아니 법이 세상을 구원할지니..하고 들려서 말이야. 그리고 저자의 중심은 유럽사회야. 국제사회가 유럽 국가들처럼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점은 조금 껄끄러워. 유럽이 무슨 이상사회처럼 보이잖아 진짜 왜그래?,,,

 

 

단일 문서 안에 모든 국가의 법정에서 집행력을 가지는 권리들을 만들어 내겠다는 2048 프로젝트,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해,.인권이 전지구적으로 보장 받으려면 전지구적 민주화가 우선인데 진짜 풀어야 할 일들이 산재해 있는데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2048년 이제 정확이 36년 남았어. 보편적 윤리안에서 집행력과 강제력을 갖추는 데 충분한 시간이 되어줄까? 분명히 다르지만 정확히 일치하는  보편적 윤리를 위해 싸우는 2048프로젝트가 부딪히는문제들을 완만히 해결해서 결실을 맺는다면 무엇보다 바람직하고 좋은 일이긴 하지만 말이야. 바로 얼마전이야.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보내는 송환 반대 집회를 본적이 있어,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눈물 몇 방울 흘리고 마음 아파하다 곧바로 일상으로 빠져들어 잊어버린 게 고작이었어.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그러고 보면 이러한 인권문제에 2048프로젝트가 추구하는 강제력과 집행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의 인권은 절차에 따라 보호받을 수 있을텐데 하는 절실함은 들었어.

 

 

 

그래서 결론을 내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적이고, 의구심과 의심이 가는 것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싶어졌어. 진실로 바라노라고! 꼭 이루어지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겠노라고!

그리고 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했어.

 

 "효과가 있다니까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2-02-2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와는 다른 이야기인데,
온라인에서 내뿜는 분노 말이죠, 여기에서 분노하는 사람들이 현실 세계에도 그렇게 되바라지게 또박또박 화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좀 해봤답니다. 가상 세계에 너무 오래 사니까, 그리고 가상 네트워크가 훨씬 광범위한 부분을 커버하니까, 접하는 현실 세계는 점점 좁아지는거 같아요.

근데요, 저 이번 선거에는 진짜 분노하고 싶었거든요. 그러니까.. 제 의견을 대변해줄 적당한 사람에게
열렬하게 지지하고 편도 들면서 분노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대변해줄 적당한 사람이 없네요. 민주통합당에게 점점 실망스럽고, 진보신당도 그다지 싶은게.......... 점점 절망하는 중이랍니다. ^^

꽃도둑 2012-02-29 11:09   좋아요 0 | URL
그 나물에 그 밥이라면 비벼댈 그릇하고 고추장을 바꿔버리면 어떨까요?...
마고님이 느낀 분노에 저도 동감합니다. 그리고 온라인에서의 분노가 현실로 이어진다는 건 극히 미미한 부분일 것 같아요. 분노하는 게 무슨 일회성 감정의 표현으로 끝나는 법이 더 많으니까요.

진정한 분노는, 분노를 분노라 말할 수 있는 건 어느 정도의 지속성과 행위(실천력, 참여 등등)를 동반할 때에만 이름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마고님이 의구심을 가진 부분에 대해서는 비겁한 인간들이 더 많이 저지르지 않을까 싶은데요. 익명이니까 책임질 일 없고, 일회성으로 끝내기도 좋고... 분노를 다루는 데 있어서 간편성과 효율성을 극대화 할 수 있는 데가 온라인이 아닐까 싶은데요,, (여기서 말하는 분노는 뭘 말하는지 잘 아시리라 믿어요...^^)
너무 상심마세요. 당신들은 비겁합니다~~

굿바이 2012-02-28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든 하루를 보낸 저는, 잠시 여기서 분노하기로 했어요 ^^
하나는
탈핵관련 강의였는데, 강사가 핸드폰을 끄지 않고 강의를 하더군요. 전화가 3번이나 왔는데 전화를 끄지 않더군요. 그 무례함에 저는 잠시 멜트다운 되었답니다.
둘째는
채식을 주장하는 여대생과의 점심이었는데, 제가 먹는 갈치를 어찌나 노려보는지
먹던 갈치의 뼈를 발라 상대를 찌를 뻔했습니다. 어찌나 화가 나던지 제 송곳니를 보여 주며 인간은 잡식동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제 행동도 과격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죠. 역시나 잠시 멜트다운 되었답니다.

오늘 느낀 점은 상대방의 감정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는 사람들은
어떤 거창한 깃발 아래 있어도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감수성을 살려두는 일, 이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이 첫 번째로 갖추어야 할 덕목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제목을 보고 울컥해서....꽃도둑님에게 하소연을 했습니다. 아! 위로받고 싶은 하루였습니다 ㅜ.ㅜ

꽃도둑 2012-02-29 11:22   좋아요 0 | URL
첫째 둘째: 이런 왕싸가지들이 있나?....굿바이님, 정말 힘드셨겠다...ㅡ.ㅡ

나와 다름을 인정할 줄 모르거나 최소한의 배려나 돌봄이 없는 사람들은 대체로 양방향적인 입체적사고를 할 수 없어서 그럴 거에요. 일방통행에다 단선으로 이루어진 뇌구조 탓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누워 침 뱉는 건지도 모르지만...ㅎㅎ)
어쨌든 분노가 활화산이 되지않게 잘 견뎠네요...^^
ㅎㅎㅎ 둘째 이야기는 잼있어요...(지송~)
 
[침묵의 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침묵의 봄 - 개정판 레이첼 카슨 전집 5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홍욱희 감수 /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간지인 <뉴요커>에 3주간에 걸쳐 연재한 [침묵의 봄]이(물론 일부분이 실렸지만) 책으로 나온 지 올해로 50주년이 되었다. 50주년 된 기념비적인 작품이기 전에 [침묵의 봄]은 그 자체로 여전히 유효한 경고문으로 읽힌다. 그때 몰랐던 것을 지금도 모르고 있는 인간의 오만함과 자본주의적 탐욕을 향해서 말이다. 이 아름다운 지구에 인간이 그동안 무슨 짓을 해왔는지 알고자 한다면, 사실 그러한 자료는 차고 넘친다. 얼마전 미군기지에 맹독성 폐기물 매립이 알려지게 되면서 시민사회와 환경단체들은 그 진상을 규명하는 규탄에 나서고 있다. 사실 미국, 베트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이런 일들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일어났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사건이었다. 그렇게 매립된 폐기물이 지하로 흘러들어 오염된 지하수를 사용해온  인근 주민들의 대다수가 알 수 없는 병과 싸우는 동안에도 우리 정부는 과연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다 한들 미군기지에 대한 어떤 권한도, 감시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 노릇만 충실히 해오고 있었던 정부가 과연 무슨 대책을 세울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몇 해 전에는 낙동강에 미군이 몰래 방류한 페놀 사건이나 산업화의 발전에 걸림돌이던 환경문제를 뒷전으로 밀쳐두었던 정부가 기업에 날개를 달아준 것도 많은 것을 시사해 주긴 하지만 여전히 카슨의 시대에 맞닥뜨린 당국의 관료주의와 기업주의 뻔뻔함은 통하는 데가 있다. 발전이라는 명목 아래에 그들은 한마음 한 뜻으로 서로의 악행에 눈을 감아준 셈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달라진 점은 무얼까? 조금의 제재? 아니면 각성? 지금 이 순간, 여전히 지구를 오염시키는 사람들과 그 오염을 막고자 감시하는 환경운동가들과 별 관심없는 방관자들과, 저절로 어떻게 되겠지 하는 낙관주의자들이 한데 어울려 산다. 얼마전에는 원자력 발전소를 더 지어 더 많은 전기를 공급하겠다고 아름답고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 위로 수만볼트가 지나는 송전탑을 지으려는 정부의 폭력에 맞서 밀양의 한 늙은 촌부는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부어 산화하셨다. 얼마나 원통하고 원통하셨으면 그 길을 택하셨을까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렇다 여전히 삶을 위협하는 인위적인 요소들은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있다. 채소와 과일에 뿌려지는 온갖 농약의 문제 뿐만 아니라 발전이라는 구호아래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그래서 많은 것을 놓칠 수밖에 없는  환경문제들이 널려 있다.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 내 영역밖의 일이라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면 재앙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카슨이 살던 시대와 달리 무분별한 살포에서는 조금 자유로워졌다고는하나, 다른 양상으로 우리 삶이 위협받기는 마찬가지다. 항생제와 성장촉진제를 맞고 자란 동.식물, 유전자조작 먹거리와, 산업화에 따른 기후온난화, 원자력의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운좋게도 이 책을 잡고 반쯤 읽고 있을 무렵, 아는 동생으로부터 [침묵의 봄]을 연구한 이학석사 논문을 받고보니 그 감상과 생각이 남다르다. 130쪽에 달하는 연구논문에는 내가 알고자 했던, 혹은 모르고 있었던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침묵의 봄]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레이첼 카슨의 저작들과 인터뷰, 강연과 신문칼럼 등, 49세에 이르러 환경운동에 참여하기까지의 행보가 상세히 소개되어 있었다. 그리고 [침묵의 봄] 배경과 과학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다루고 있었다. 책을 읽는데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는지 세삼 고마울 따름이다. 국내에선 번역되지 않은 글들을 읽는 행운이란 말할 것도 없다. 까마귀 날자 배떨어진 곳에 내가 있었다...ㅎㅎ

 

 

 

사실 너무나 유명해진 [침묵의 봄]에 대해선 할 말이 없기도 하지만 역으로 할 말이 참으로 많은 역작이다.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노래한 섬세하고 따뜻한 과학자였던 카슨은 과학의 맹목성과 이기가 낳은 폐해 앞에 절망하지 않고 학자와 연구자, 정부 관계자, 피해자들의 편지와 조언 등을 시간을 들여 수집하고 정리해나간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도덕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카슨은 노력과 정성을 들인다. 문학적 감수성으로 아름다운 문체를 구사하면서도 구체적이고 방대한 자료와 지식을 바탕으로 과학적 객관성을 획득한 것에는 카슨이 과학커뮤니케이터로 완벽하게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과학적 이기에 앞서 생물을 마구잡이로 죽이는 것에 도덕성을 제기한 카슨은 자연을 자원으로만 인식하고 행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인위적 살포가 당장 목표는 달성될지는 몰라도 잘 짜여 있던 생태계의 네트워크에 문제가 생김을 역설한 카슨은 환경의 문제를 유기체적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위험을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곳에서만 인식할 뿐, 그 문제들이 모두 적용되는 광범위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구체적 사례와 함께 살충제, 제초제, 농약이 가지고 있는 독성이 인간의 몸과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집요하고도 성실하게 설명해 준다.

 

 

 

표지에 보면 파르르 떨다 마지막으로 가뿐 숨을 넘긴 듯한 가없은 새 한마리가 하늘을 향해 누워있다. 자유롭게 날고자 했던 날개는 접혀져 있고 까만 눈동자에는 하늘을 가득 담은 채 누워있다. '살아 있는 생물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를 묵인하는 우리가 과연 인간으로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을까?'(p.126)  7장의 마지막 문장은 뼈아프게 다가왔다.

 

인간들이여~

 

완벽하고 아름다운 이 세상에 인간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요?(p.129)

 

 

 

마지막에 카슨은 모두의 삶을 위협하는 인위적이고 화학적 방법이 아닌 자연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자연이용법(p.122~), 삼림유전학적 접근법(p.143) 등은 아주 지혜로운 조상들의 유산에서 해답을 찾은 셈이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라! 화학적 방제가 아닌 천적을 활용하는 방법은 다윈이 이미 1800년도에 제시한 것이었다. 카슨은 여기에 손을 들어준다. 화학적 방법은 더 독한 놈으로 살아남게 해서 왠만한 약에는 내성만 생기게 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니플링 박사가 제안한 '수컷불임화' 에도 카슨은 지지를 보냈다. 그렇다면 오늘 날, 당면한 문제에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들은 무얼까? 몬산토 같은 다국적 기업에 맞서 인도의 반다나 시바 여사가 하는 환경운동에서, 세계 곳곳에서 하는 풀뿌리 운동에서 희망을 찾고자 한다. 인위적이고 조작적이 아닌 그들의 문제는 그들이 해결하도록 내버려두라는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토종의 고귀함과 생명활동을 경외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과 목소리는 자연을 닮아 있다. '저 스스로 그러하게 하라'는 진언을 품고 있는 것이다.

 

 

 

환경문제, [침묵의 봄]으로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 있다. 거대한 기계로 굴러가는 시대에 겨우겨우 손으로 바퀴를 돌려가며 세상을 온전하게 돌려놓고자 하고 있다. 눈물겨운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낙담하기에는 이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일에 동참하고자 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각성하지 않고 안주해버린다면 늘 그렇듯 이 책은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을 알려줄 뿐이다. 끝난 이야기가 아닌,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언제든 되풀이 될 수 있는 현재진행형의 이야기로 말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리아 2012-02-21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배'인가요????
<침묵의 봄>이 너무너무 재밌는 책은 아닌것 같지만,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은 확실한 건 같아요.
좋은 리뷰 감사해요~~~

꽃도둑 2012-02-22 10:57   좋아요 0 | URL
ㅎㅎㅎ 샘~ 배는 샘의 논문이죠..
착각두....^^
하늘이 잔뜩 흐려있어요, 어제처럼 내리 비가 오려나?...
아...직접 갈아서 내려주던 원두커피향이 그립네요.
아, 물론 샘도 그립구요...

cyrus 2012-02-21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나온 개정판은 예전 판이랑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요. 제가 알기로는 서문이
새로 추가된 걸로만 알고 있거든요. ^^

꽃도둑 2012-02-22 11:00   좋아요 0 | URL
네 서문하고 후기가 추가된 걸로 아는데....맞겠죠?...
출판사,,역자가 달라지고.... 표지 달라지고..^^
있다면 굳이 개정판 살 이유는 없을 거 같아요..
전 이번 표지가 더 맘에 들어요..

맥거핀 2012-02-22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이러한 환경문제는 확실히 각 개인들의 각성, 그리고 작은 노력들이 큰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여러 정부들의 환경에 대한 조약이나 기업의 선서 따위에 희망을 걸 수 있을까요? 저는 부정적입니다.) 최근에 <게릴라 가드닝>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 이야기와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구요..

꽃도둑 2012-02-22 11:29   좋아요 0 | URL
게릴라 가드닝? 잠깐 검색좀 하고 올게요..휘리릭~~

헉헉...
아, 이 책은 제목과 내용이 묘한 대비를 이루네요...
꽃밭만들기 프로젝트에 저도 참여하고 싶네요...일종의 유기체적 운동이라니...
그렇네요, 통하는 데가 있어요...^^


2012-02-25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구가 가슴을 쳐요.
"완벽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인간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요." (ㅠ.ㅜ)
오늘 아침 인천에서 서울로 차 타고 오면서 든 생각도 이거지요.
아니, 지금부터라도 아무 짓도 안 하면 좋겠는데... 뉴스를 보면 지금도 '많은 짓'을 하더군요.. 흑흑

카슨, 침묵의 봄과 관련된 주변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논문이라니요. ㅇㅇ 부럽습니다.. <침묵의 봄>은 아직 안 읽었고 그녀의 다른 책 <우리를 둘러싼 바다>를 사서 읽은 적이 있어요. 내용과 문체 모두 감동적인 과학책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일부만 읽고 잃어버렸네요.

초록 밑줄의 인용구도 뭐라 할 말이 없는 맞는 말이라고 맞장구 한 번 더 치고.. 슬픈 세상이에요. & 그나저나 여전히, 환경파괴를 막으려는 노력이 1이라면 개발로 콩고물 얻으려는 노력이 99인 세상이라는 게 참!

꽃도둑 2012-02-27 09:39   좋아요 0 | URL
섬님, 저도 녹색당에 가입했어요. 어제 광안리에서 번개를 했는데 저 위 논문의 주인공과 함께였지요.
핵얘기를 나누다가 녹색당 이야기가 나와서 아차! 싶었어요. 녹색당 가입권유를 받은지 보름이 지나있었지 뭡니까....너무 무심했어요...ㅡ.ㅡ 그래서 오늘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바로 가입을 해버렸어요.
아, 언젠가 EBS에서 한 체르노빌 관련 다큐영화를 보라고 권하더군요.. 유튜브에 올라와 있다네요...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저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어요.
필독서 목록에 추가해 놓을게요...^^ 좋은 하루~~^^
 
[인민의 탄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가 밝혔듯이 '이 책은 근대에 이르는 과정에 관한 연구다.' 그동안 근대화의 여명을 연 추동력이 조선사회 내부에 있었는가 외부에 있었는가는 학자마다  견해가 극명하게 갈리는 시점에서 저자가 굳이 이 연구에 뛰어든 것은 직업적 소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서문에서 사회학자는 한국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주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동안 토크빌의 민주주의론, 로크와 루소의 사회계약론, 베버의 사회 경제론과 방법론, 마르크스주의 발전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등의 서양산 사회이론으로는 한국사회를  설명해내기에는 한계점이 분명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있다. 서양 인식론으로는 성리학과 유교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한국사회를 설명하기란 심층은 들여다 보지도 못한 채 표층만 보고 판단하는 오류를 그동안 범해 왔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근대의 기원을 찾는 연구들은 흔히 맹아론으로 식민지근대화를 넘어서려는 역사학자의 책임감에서 비롯되었던 것이고, 또한 미시사적 연구나 목적론적 연구 방법이 근대 만들기를 가로지르는 공통된 시선임을 비판하면서 조선사회를 500년 동안이나 유지, 발전시켰던 동력의 구조, 즉 사회의 '거시적 구조'의 성쇠와 변질에서 근대의 여명을 찾는 시도를 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거시 구조의 전환' 인민은 근대 찾기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왜 하필 인민인가? 민중이니 하는 명사를 쓰지 않은 이유가 뭘까? 부르주아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는 테제는 대한민국에는 들어맞지 않는다는 인식부터 출발하고 있다. 노동계급, 부르주아지 없이 공론장을 만들어낸, 유교사회의 두터운 벽을 뚫고 나온 이들의 이름을 저자는 인민이라 부른다.

 

 

유럽에서는 인민이 신과 개별적으로 접속하는 길을 열어준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을 근대의 출발로 보고 있다면, 대한민국의 근대는 어디서 부터일까? 저자는 조선시대로 돌아간다. 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은 종교이자 정치이자 교육과 윤리였다. 지식이 곧 권력이었던 초기에는 통치의 객체이자 교화의 대상 즉 갓난아이 수준이었던 인민이 어떻게 행위하는 인민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세종이 정치적 목적으로 만든 훈민정음으로 된 언문을 익힌 문해인민의 등장과 함께 시작해 16~17세기에 걸쳐 문해인민은 투서, 벽서, 소설, 편지, 기록, 문학, 등등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 역사의 주변부로부터 중심부를 향해 서서히 이동을 하였다고 한다. 인민의 탄생은 18세기 말에 등장한 천주교, 민란 동학농민전쟁, 서민 문예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생각을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은 곧 의사소통의 장으로, 하버머스가 말한 공론의 장이 형성되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국문담론은 지배층의 통치 축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창출했다. 저자는 이렇게 인민의 탄생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는 구체적으로 조선의 근대를 언제로 보고 있나?

조선의 근대는 바로 19세기 초반 순조 연간에 지식-권력이 분리되던 세도정치 때라고 밝히고 있다. 중앙과 지방간의 인적교류와 학문적 교류가 단절되던 시기에 느닷없이 근대가 찾아든 이유가 뭘까? 세도가 내부에서만 학문적 논쟁이 일어났을 때 그 변방에선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당시의 지배세력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조선은 지식사회라는 등식을 떠받친 공식이 와해되는 틈새로 종교, 문예, 정치 영역에서 형성되고 있었던 '평민 담론장'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는 것이다. 인민과 역사의 접속이 비로소 이루어지던 역사의 장이었던 것이다. 갓난아기 상태의 인민이 언문을 통해 겨우 말을 배워가며 옹알이를 하고 있을 때 느닷없이 찾아든 정신적 성숙과 함께 성장통을 겪은 셈이라고 해야할까?

 

 

그리하여 명사에서 동사로 이동한 주체로의 인민은 무수한 술어를 가지게 되었다. 인민으로서 ~되어가기는 시간의 경험과 공간적 배경이 있어야 완성되어지는 것이거늘, 자기의식 없이는 주체는 주체일 수 없다. 인민은 역사의 질료가 아닌 행위하는 자로서 개체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주체성도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근대의 추동력으로 인민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새로움이 있는걸까? 또한 심층을 분석해 보일 수 있는 연구에 대한 타당성을 과연 담보받을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다지 새로울 것도, 획기적인 연구방법론도 아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보게 된다. 문해인민의 탄생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은 근대를 연 것은 교양인이었다는 서양의 관점과 뚜렷하게 구별되는 점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문제의식이 거기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은 저자 역시 서양산 사회과학의 프리즘에서(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싶다. 몰론 우매한 독자의 오독일 수 있다. 아니 해석의 오류일수도 있다. 하지만 인민의 탄생이 한국사회의 공론장의 구조를 바꾸었다는 점에서 그 출발이 문해인민과 유럽사회의 교양인이라는 사실은 크게 새로울 것이 없는 관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 지난한 학문의 여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수한 사료와 자료집은 연구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고, 조선시대 내부로 들어가서 인민의 탄생을 절차탁마하는 심정으로 끌어 올려놓은 점은 높이 살만 하기때문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자면,

인민은 거대 담론에 가려져 있거나 억눌려져 있던 개인의 발견과도 같은 것이라면 인민의 진화의 추동력은 뭘까? 사회, 경제적, 정치적 변동과 함께 라는 것이다. 저자는 문헌공동체, 자발적 결사체,새로운 인민의 탄생이었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 천주교는 국문 담론장을 형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고, 독서대중의 탄생은 주로 사대부 계층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던 문예 담론장을 이원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개인의 발견이야말로 근대의 여명을 여는 가장 중대한 변화가 아니었을까, 문예적 평민 담론장이야말로 그 중심에 놓아야 할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보편어가 아닌 민족어의 발명, '주체의식의 리허설'을 가능하게 해준 문해인민이 근대의 주인공이 되기까지를 저자는 질문과 답의 형식을 빌리고 있다.

 

 

(1) 왜 근대의 기원을 인민과 결부시키는가? (2) 인민을 결박시킨 조선의 통치체계는  어떤 것이었나? (3) 인민은 어떤 통로를 통해 그것에서 풀려났는가?

이 세가지 질문은 '인민과 근대', '조선의, 통치구조', 국문담론과 공론장'으로 개념화되는 과정을 400쪽이 넘는 지면을 할애해 풀어내고있다. 결론은 그야말로 앞서 분석해낸 것의 요약본이라고 할 만 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식민지근대화론을 외치던 학자들에게 재갈을 물리는 확실한 계기가 마련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민족사관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야말로 인간을 짓밟고 집안의 물건을 몽땅 수탈해가고 남긴 사다리를 보고 근대화의 징표로 보는 그 짓물나는 눈을 감겨버리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기 때문이다. 중도우파라 일컬어지는 송호근 교수의 견해에 대해 (가령 서문에서 광주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라고 명명한 점 등) 동의할 수 없거나 반박하고 싶은 건 잠시 밀쳐두기로 했다. 이 책에 집중하는 독자로 돌아가 이 연구집이 타당한 가를 살펴보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제 인민에서 시민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2권에서 계속할 것이라고 소회를 밝혀놓은 것에 일단 기대감은 있다. 부디 이 연구집이 무화한 몸짓으로 끝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2-01-26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민에 대한 설명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네요. 그러니까 이 책에서는 인민의 탄생이 바로 근대화이며, 그 근대화가 문해가 가능해지는 인민이 나오는 시점 즉, 사대부의 문해의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객체로서의 인민이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주체로서의 인민이 탄생하는 시점으로 보고 있는 것인가요? 이것만 놓고 보면 꽃도둑 님 리뷰대로 그리 새로울 것은 없어 보이는데..리뷰만 보아도 책이 왠지 어려울 듯 합니다.

꽃도둑 2012-01-26 13:32   좋아요 0 | URL
저자의 변에 의하면 식민지적 근대를 자주적 근대로 전환하는 시점에 새로운 시대의 씨앗이었던 인민의 탄생에 집중하게 된 건,봉건제가 무너지고 개인이 근대를 찾고자 하는 내재적 발전론에서 인민의 위상의 변화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아서 였다고 합니다.

사실 근대라하면 '개인의 발견''시민사회의 태동'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 관점에서 본다면 서양의 중세나 조선의 중세나 그 무너진 틈을 타고 새로운 인민이 탄생하는 건 같다고 봐야 하겠죠. 하지만 조선의 인민은 서양의 부르주아 교양인들처럼 지적 역량의 면에서나 그다지 자각적이지는 못했다는 거죠. 갑오개혁이후 신분제가 철폐되고 비로소 소통의 장인 공론장이나 결사체가 움직일 즈음 일본제국에 의해 지체되어 버린 대한민국의 근대화의 의미를 그동안 역사, 경제, 사회, 정치, 여러 각도에서 조명했지만 총체적으로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서 그 씨앗을 찾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거죠. 저자는 바로 무지하고 수동적이던 조선의 인민이 역사의 장에서 어떻게 등장하고 움직였는지를 연구한 것이라고 봐요.

사실 책은 어렵지는 않아요. 살짝 지루할 뿐이죠...^^



2012-01-28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꽃도둑님. (닉네임과 서재 제목이 귀여워서 좋습니다~)

사실 '근대의 시작'이 어디인가 라는 질문 자체가 답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정확히 말하면 '근대'라는 개념이..) 그러니 교양인의 탄생과 문해인민의 탄생은 별로 다르지 않을 수 밖에 없지 않나 싶어요. 그나저나 한글의 존재가 조선 후기에 활발한 담론을 낳고 문해인민을 만들었다니, 그 실례가 매우 궁금해지는군요. 만일 실례가 매우 튼튼하게 제시되어 있다면 이거야말로 <뿌리 깊은 나무>의 든든한 배후가 될 책이구만요! (저는 이 드라마가 한글의 의미를 너무 과장했다고만 생각했는데요.^^;)

꽃도둑 2012-01-30 14:44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섬님, 닉네임하고 캐릭터 아주 강렬하시네요..^^
다른 분 서재에서 뵈었던 것 같아요.

저는 <뿌리 깊은 나무>를 보지 않아서 내용은 잘 모르겠어요, 한글의 의미를 너무 과장했다고 느끼신 것에 대해서 살짝 감은 와요. 아마도 작가분이 세종대왕이 성리학의 강화를 위해 만든 훈민정음에 대해 과도한(?)의미를 부여한 탓이라고 봐요. 민족이여 긍지를 가지고 단결하라~~~ ㅎㅎ

결국엔 훈민정음 덕으로 언문소설이니, 투서, 벽서,,,로 진화하다가 비로소 천주교 서학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도화선에 불이 붙은 셈이죠. 민란, 동학농민전쟁,서민문예로 진화하면서 공론장이 형성되었다는 것인데요 앞서 말한 모두를 저자는 실례로 들고 있는 것들이죠.
한마디로 인민의 탄생이죠. 그 출발점이 훈민정음으로 글을 읽고 쓸줄 알게된 문해인민인 거구요.

섬님도 지적하였듯이 저 역시도 조선의 문해인민의 탄생과 부르주아 교양인의 탄생이 근대를 여는 주인공들이라는 점은 일치하지 않나 생각하는데... 그동한 학자들이 조선의 인민의 탄생에 심도있게 주목하지 않고 간과한 점에 대해 사실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아요. 저자도 이런 사실을 지적하고 심층분석하고 접근하는데 연구의 목적을 밝혀놓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의문을 가진 건 서양산 사회과학의 눈이 아닌 우리의 관점으로 우리의 근대를 열어보인다고 했는데 그 변별점을 뚜렷하게 발견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달은 하난데 방안에서 창을 통해 보는 달이 다르고, 호숫가에서 보는 달이 다르고 언덕에서 보는 달이 다르듯이, 그저 관점의 차이로 느꼈어요.
시민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을 2권에서 다룬다고 하니 일단은 기대는 됩니다. 학자로서의 성실함이 좋았거든요,,,,,^^

2012-01-30 21:50   좋아요 0 | URL
앗 꽃도둑님. 제 닉넴과 사진이 강렬한가요.. 원래 제 서재 제목이 '화양연화'였기에 이런 이미지를 대문에 박았던 것입니다만.^^
(닉넴은, 저도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과거에 아무렇게나 붙인 이름인데, 이렇게 제 이름이 되어버렸죠. ;;)

저는 옛시절에 근대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자체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만. 그래도 꽃도둑님 말씀대로 성실하게 인민의 탄생을 고증한 학자의 자세는 좋군요.

꽃도둑 2012-02-03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강렬해요!
몽환적이고..에로틱하고...나른해요...^^
그런 섬에 놀러가고 싶어요,,ㅎㅎ

아이리시스 2012-02-03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도둑님, 저 왔어요! 반가워요^^
평가단이셨군요. 그것도 제가 도전했다가 나가떨어진 인문! (아이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이 책 완전 어려워 보이거든요.
인민..(흐아..) 조선과 인민은 뭔가 어울리지 않네요. 그리고 뭔가 쓰려다 탄로날까봐 그냥 가려다가.. 귀여워요, 대문사진! 저보다는 아니지만ㅋㅋㅋㅋ(죄송합니다^^;)

꽃도둑 2012-02-06 09:52   좋아요 0 | URL
하하 늦게 인사 받아서 죄송해요(넙죽~)
저 순박하고 귀엽죠?...다들 그래요...뭐.,*.-
제가요 게을러요 그래서 가끔 들어와서 휭하니 왔다가요.
암튼 들를 곳이 하나 더 생겨서 기쁘네요.
오가다 텅(내머리에서 나는 소리)하고 마주치면 반가울거에요,,,^^
 
[부채, 그 첫 5천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부채, 그 첫 5,000년 - 인류학자가 다시 쓴 경제의 역사
데이비드 그레이버 지음, 정명진 옮김 / 부글북스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인류학자가 쓴 경제사다. 주류 경제학이 풀지 못한 아니 질문하지 못했고, 등한시했던 담론을 다룬다. 그동안 경제학에서는 공식경제를 다루어왔던 만큼 사회속에서의 인간의 위치(인간의 삶)를 속속들이 설명하지 못했다. 인류학이 큰 덩치의 경제학을 걸고 넘어진 것은 덩치만 컸지 정작 다양한 인간의 삶을 설명하지도 못한 채, 수치화하고 사회로부터 경제를 분리화해서 자본주의의 잣대로만 활용해온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원래는 경제와 사회는 그냥  한 몸이었고 사회적 통화로 굴러가던 것을 저자는 인간경제라 부르며 아담 스미스의 물물교환이라는 허구의 신화와 대척점에 있는 원초적 부채의 신화를 옹호하면서 부채의 역사를, 그 부채가 의미한 바를 추적해간다. 화폐의 기원에 대한 견해조차도 눈여겨 볼 만하다. 국가와 시장, 정부와 상인들 사이의 투쟁은 인간조건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빚을 반드시 갚아야 하는 건 이적지 도덕적 진술이었다는 것을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다. 서구의 유별난 발명품인 자본주의, 그 시장경제 안에서 작동하는 빚이라는 건 분명 도덕적 진술이기 전에 사회체계를 잠식한 경제체계의 진술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채라는 건 뭘까? 시장이 있기 전 부채라는 건 인류의 역사와 이적지 함께 해왔다는 것이다. 부채는 돈이 있기전부터 있었고 지금에도 있지만 시장논리에 의해, 혹은 국가주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부채가 작동하는 방식과는 예전의 부채는 분명 다른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비자 부채가 경제의 피가 되기 전, 원래 모습을 가진 부채는 참으로 일관성이 부족한, 도덕적 의무가 부채로 남는, 유연한 진술이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쓰이고 있는 도덕적, 종교적 언어들의 어원은 혁명운동의 단 하나의 목적인 '빚을 탕감하고 토지를 재분배하라'는 요구와 고대의 금융언어인 구원이니 응보니 하는 것의 부채에 관한 논쟁 중 생겨난 것이라 밝히고 있다. 채무자는 그야말로 범죄인 취급을 받던 유럽의 언어로 부채는 죄의식, 잘못, 죄와 동의어라는 사실이다.

 

 

 

부채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두 당사자가 아직 평등한 관계가 아니어서 서로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때 부채가 일어난다. 그러나 부채는 결국엔 평등을 되찾는데서 이뤄진다. 그러나 그 평등을 이루는 것이 관계를 맺을 이유를 파괴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온갖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진다. P.218

 

 
                                                        

고대에서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던 고리대금업자는 그야말로 사악한 인간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경제의 심장 역할을 하고 있는 은행의(특히IMF) 입지와는 분명 다르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채무자의 도덕적 진술은 이제는 반드시! 라는 강제조항이(법적부채)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정복자와 정복당한 사람들간의 채무관계 속에서 누가 누구에게 빚을 지고 있는가?   

 

 

사실 인류학이 경제학과 손을 잡은 건 20세기 들어서면서다. 1915년 말리노프스키가 트로브리안드 섬 주민들의 삶을 연구하면서 유럽과 다른 삶의 방식과 경제체계는 그야말로 유럽 밖의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단초를 제공해준다. 그가 연구한 것은 진화주의 인류학과 구별되는 현대인류학을 탄생시켰고, 시장체계가 사회체계를 잠식하고 경제인이라는 완벽한 인간상을 구현해나갈 즈음 인간의 삶을 다시 인간답게 바로 잡으려 시장경제의 오류를 지적한 사람은 바로 칼 폴라니였다. 폴라니의 등장은 그야말로 인류의 축복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아담스미스나 맑스에 비해 조명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오늘날 경제인류학이 있게 만든 장본인이자 근대를 넘어서고자 하는 데 초석이 된 중요한 인물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선 칼 폴라니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인류학자로서 '부채'라는 키워드로 5,000년 역사속에서 부채가 지닌 의미와 모습, 형태 등의 변용을 추적해 보여주는데 충실하다. 세상이 돈이 있기 전에 거기에 부채가 있었다. 이 책의 명제는 바로 이 문구에 있다. 경제학 교과서를 다시 써야할 판이다.

 

 

 

인류학과 손을 맞잡은 학문들이 매력있는 건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데 있다. 인류학은 전근대를 다루면서도 인류 전체의 흐름을 통찰하는 학문이므로 인간(본성)이 무엇이냐,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로 시작하는 물음과 동시에 출발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핵심적인 문제들 대부분이 경제인류학자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경제학이 가진 한계점과 오류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보인다.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을 설명하지 못한 채 허깨비에게 끌려다닌 지 백년이 넘어섰다. 우리의 진정한 잃어버린 인류의 역사를 되찾는 일은 인간의 본성과 삶과 도덕적 가치들을 찾는 일일 것이다. 그 일련의 성과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이 책도 그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때 얼마나 중요한 교차점에 있는 지 알 수 있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과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는 슬픈 신화에서 벗어나 본디 우리가 가졌던 본모습을 찾는데 목소리를 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인간관계는 부채의 형태를 취할 수 있다. 부채가 없다면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지지 않을 것이다. 부채 없는 세상은 원시의 카오스로 돌아갈 수 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벌어질 것이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P.225

 

 

그렇다면 자본주의, 근대를 넘어설 수 있을까?

저자는 마지막으로 시장의 혁명을 넘어서 사고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비인간적인 상업시장은 절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 그 신화를 감추기 위해 물물교환으로 차단하고 있음을 간파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일상을 채우는 드라마를 바꿀 수가 있을까? '신용경제가 이자의 경제로 바뀌고 도덕적 네트워크가 국가의 비인간적인 힘의 침투로 인해 변질되어가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는 자본주의의 기원이다. 무에서 돈을 만들어낸 금융제도는 지금까지 발명된 요술 중에서 최고다' 라고 영국은행 이사를 지낸 조시아 찰스 스팸프의 말은 자주 인용된다. 종이화폐는 부채화폐였으며 부채화폐는 전쟁화폐라는 진실 앞에 섰다. 경제학자들이 내놓은 자본주의 대안들을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정말 그 비전이 정확한 것일까? 자본주의 도박은 여기서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반세계화운동이 갖는 의미를 새겨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 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 세대는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미래를 보는 시야를 넓히고, 실현에 대한 자신감을 키우고, 시대에 맞춰 넓게 보고 장대하게 사고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묻고 있다. P.672

 

지금 이 순간 진정으로 던져야 할 물음은 사람들이 더 적게 일하면서 어 알차게 살 수 있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도록 어떻게 방향을 돌려놓느냐 하는 것이다. P.683

 

 

 

마지막으로 떠도는 말 말 말,,

 

부채와 도덕적 기준과 의무와의 관계, 종교적, 도덕적 언어의 어원은 부채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 연대와 상호부조의 삶의 모습,  돈의 수단으로는 해결될 수없는 부채가 존재한다는 사실, 생명의 대체물로, 피의 부채, 인육 부채, 노예무역, 가장 오래된 화폐일부는 명예와 추락의 척도로 이용되었다는 사실, 경제학에서 내세운 잘못된 가설들, 부채가 없는 세상은 사회적관계가 사라진다는 사실, 불교에서의 업보의 의미와 신과 인간관계에서의 부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의 부채, 도덕적 측면이 무시된 자본주의 맨얼굴, 금융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적인 돈, 돈이 어떤 시대를 만나는 가에 따라 변한 모습,근대의 돈은 정부부채에서 비롯되었고, 미국의 부채는 전쟁부채이고, 대출을 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문제의 일부인가, 해법의 일부인가, 문제의 발견없이 문제해결이 가능한가? 라는 어느 글에서 읽은 글귀가 이 책의 마지막장을  잡고 오래도록 머물러 있다.

 

 

 

조금 아쉬웠던 점:

책의 겉표지가 야들야들(?)해서 금방 벗겨짐. 700쪽 가까운 책을 감싸기에는 너무 연약함!

그리고 속지가 붉은 색이어서 낙서하며 책을 읽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굿바이 2012-01-16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도둑님 < Wall Street: Money Never Sleeps, 2010 > 라는 영화 보셨나요? 마이클 더글라스가 나왔던 영화입니다요~! 영화의 완성도는 생략하고 여튼 그 영화는 화폐가 스스로를 키워가는 과정을 쉽게 보여주고 있답니다. 참으로 어이없지만 또 놀라운 과정이기도 하죠. 이게 살아있는 생물처럼 보이거든요. 창조주가 아담을 만들었다면 인간은 신용이라 불리는 화폐에 입김을 불어넣었을 겁니다. 역시나 아들은 아비를 따라하는가 봅니다.

그나저나 책에 어떤 대안이 제시되어 있던가요?
하기야 대안이 있다고 그걸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꽃도둑 2012-01-27 13:33   좋아요 0 | URL
저 그 영화 보지 못했어요. 화폐가 자가증식을 했다는....ㅋㅋ

이 책 흥미로워요 굿바이님도 함 읽어보세요. 사실 저자도 흥미로운 사람이지만요,
자본주의적 가치질서를 넘어서는 작업을 끊임없이 해오고 있고, 반세계화 투쟁, 반 신자유주의 투쟁 등 관점을 행동과 결합하고, 이를 통해 글을 쓰고 있죠,그러한 작업들이 다른 미래의 잠재성을 키우는 게 대안이 된다고 믿고 있고요...시장의 혁명을 넘어선 사고의 혁명을 역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지요.
사람들이 아,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고 깨닫기 시작한 순간부터 변화가 오는거잖아요. 그 일에 대해 열심히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어요. 우리나라에도 얼마전에 온 걸로 알고 있어요.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에서도 복지, 복지, 하고 외치는 소리들이 갑자기 커졌다. 보편적 복지를 외치는 민주당과 복지포퓰리즘은 망국의 지름길이라 의름장을 놓은 한나라당도 슬그머니 맞춤형 복지를 들고 나오니 말이다.

'경쟁이 즐거운 나라'를 지향하던(물론 독식은 능력이고! 몰아주기는 서비스고!) 이명박 정권 뒤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분명 복지일 것이다. 그래서 정신차려야 한다.  이 책이 죽비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거창하지가 않다. 한국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지를 지켜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관심과 정치적 참여와 감시가 필요할테니 말이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겠다는 건 복지사회로 나아가는 시민의 자세가 아니지 않을까? 남의 집에 불난 게 아니라 지금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이기 때문이다.

 

과연 잘 사는 게 어떤 것일까?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라고 외치는 저자도 결국 유럽(특히 독일) 사람들의 여유있는(풍족함이 아닌) 삶의 모습에서, 표정에서, 삶의 질에서 복지가 잘 되어 있는 유럽을 체험함으로써 미국이 표방하는 신자유주의는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제도임을 역설한다. 과연 높은 1인당 GDP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구의 것인가?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저자는 비근한 예로 GDP의 함정에 대해 미국에 사는 바바라하고 독일에 사는 이사벨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생산적 삶을 사는 미국과 소비적 삶을 사는 유럽의 차이는 사실 한끗 차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명부지를 위해 일하는 것과, 효율적이고 짧은 노동 이외의 시간엔 삶을 향유하며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고 것 하고는 질적으로 다름을 보여준다.

복지를 겁내는 사람들은 말한다. 국민들이 복지에 너무 기댄 나머지 결국 게으름이 나라를 망하게 할 거라고.....

무슨 소리~! 자유방임주의야말로 얼마나 잔인한 짓인가? 정글 속 법칙을 인간의 삶에 그대로 적용하고는 개인의 욕망대로! 능력대로! 자유롭게! 듣기에는 참으로 그럴싸하게 들린다. 하지만 적어도 좋은 사회의 모습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한다. 또한 자유방임주의를 국가회피주의의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독일에서 가장 놀라웠던 점을 꼽는데 그 중에서 어딜가나 사람들의 손에 책 아니면 신문이 들려 있었다는 사실이다.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그들은 평생 신문과 책을 보며 사회의 일원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복지는 정부 혼자의 힘만으로 굴러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에 앞서 정부가 해야할 일은 사실 공공재의 폭을 넓혀 사수하는 일일 것이다. 한미간 FTA 문제도 사실 공공재가 외국자본에게 잠식당할 수 있다는 거! 그 잠재적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이명박 정권은  행동만 하는 무뇌 상태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물론 복지사회라고 해서 모든 것에 만족을 주거나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는 건 아니다. 그들에게도 불만은 있고 개선되어야 할 점이나 정책적으로 실수도 하고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문제들을 인간적 개입이라고 말한다. 시장의 논리대로 제멋대로 움직이는 거대한 손이 아니라 단합된 시민들의 힘으로 정책을 세우고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연대정신 만이 복지사회를 떠받치는 대들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필요조건이 존재한다.

 

 

첫째 복지제도가 제대로 관리되기 위해선 노동조합은 반드시 필요하고(단체행동을 통해 고용주와 교섭을 한다)  

둘째 정치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 깨어 있는 시민이 되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습득한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 등의 정치적 교육이 필요하고

셋째 공공재를 통한 사회 안전망이다.

 

 

문제는 이제 우리다! 이제 막 논의하기 시작한 복지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사팔뜨기 처럼 서로 다르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아직 논쟁중이긴 해도 보편복지로 프레임을 짤 것인가 선택적이고 맞춤형 적인 복지로 프레임을 짤 것인가의 문제, 증세를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이며 증세대상과 증세 방안 등 뚜렷하게 나온 건 없는 상태다. 물론 다음 선거때 어느정도 모습을 뚜렷하게 갖추겠지만 복지공략이 주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 전에 공부를 잠시 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실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이 하는 말을 무조건 주워 삼켜서는 곤란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감시자가 되어야지만  대한민국에서 태어난게 잘못이야 하는 한탄을 줄이고 삶에서 얻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일이 되리라 믿어본다.

 

"세상은 악당들에 의해 망쳐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악당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 의해 망쳐진다."

 

                                                                                                            -아인슈타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