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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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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은 존재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첫 감정은 두려움이다. 그러나 인류는 그것을 극복하고, 이해되지 않은 것들을 설명해 가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확장시켜왔다. 이 책은 이해되지 않은 존재 중 하나인 '귀신'에 대해 문화사적 잣대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 책이다

'귀신'의 존재여부에 대한 물음은 사실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예수가 과연 정말로 부활했는가?라는 것과 같은 물음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귀신'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며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에 있다. 

귀신 이야기는 현실에서 배제되고 억압된 죽음의 세계가 현실에 영향력을 미치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원히 지속되는 정신을 강조하는 이성 중심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필멸하는 육체와 그러한 육체가 드러내는 욕망은 억압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억압은 성숙하지 못한 방어기제로, 완벽하게 모든 것을 잡아 가둘 수는 없다. 육체적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류 역사의 곳곳에서 다른 형태로 살아남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곤 했다. 우리가 잊고 싶은 죽음에 세계에서 돌아온 귀신이야기는 억압에 실패한 욕망의 변주곡이다. 우리 이야기 속의 귀신은 자유롭게 감정을 표현하고, 무섭도록 파괴적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말하고, 피를 흘린다. 비명을 지르고 무서워하면서도 여름이면 호러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고, 귀신이야기에 기를 쓰고 귀를 기울이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의 무의식에 잠재된 감정과 목소리, 육체적 욕망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 유독 처녀귀신이 많음에 주목했다. 여기에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존재한다.남자와 여자.

남자귀신은 죽어서도 가족을 돌보고 그들을 염려하며 때로는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워 명령을 행한다. 가장의 이미지를 유지한 조상신이 되는 것이다.

남자귀신은 귀신 세계에서 벼슬도 하고, 간혹 후손들의 꿈에 나타나 현실세계에 긍정적으로 개입하곤 한다. 남자귀신은 두려움이나 공포를 불러 일으키지 않는다. 남성은 억압된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한국 귀신의 전형이 처녀귀신이라는 것은 곧 '처녀'야말로 한국사회의 약자, 억압받은 존재였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처녀귀신 이야기를 만들고 즐겨온 전통은 그들에 관한 사회적 책임과 죄의식이 공통의 문화적 과제로 사유되어왔음을 뜻한다.
 

우리 역사의 또다른 억압의 대상, 여성의 이야기이다. 여성은 우리역사에서 약자로 분류되어 왔다. 늘 주체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주변인, 목소리 없는 타자였을 뿐이었고 육체만으로 평가되는 (이건 좀 심할 수 있겠지만) 도구적 인간이었다. 억압된 여성의 목소리, 여성의 욕망은 귀신이 되는 순간 자유롭게 표현된다. 화를 내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자신의 권리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렇게 '목소리'를 가진 처녀귀신은 기득권을 가진 남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죄의식에 대해서는 개인적을 납득하기 어렵다. 이 책에서 인용되는 귀신 이야기의 대부분은 독자가 남성이다. 남성중심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사실 그들의 책임의식과 죄의식을 발견하지 못했다. 억울하게 죽은 처녀귀신에 대한 동정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존중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그들의 감정에 대해 그저 대인배의 위치에서 포용해 준다는 우월의식만 느껴진다고 한다면 좀 과장일까?

이 책에서 인상깊에 읽었던 부분은 '그 모든 억울함과 불행의 근원이 가정'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감싸주고 인정해주어야 할 가족이 서로를 배척하고 무시하는 광경은 슬픈 일이다. 가정이라는 것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뛰어넘은 사랑의 공동체라고 믿는 것은 우리의 순진한 환상일까? 옛날 이야기 속의 가정과 오늘날의 가정이 다르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는 가정의 규모가 달랐고 위계 질서가 강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그러나 과연 그럴까? 아직도 우리가 믿고 있는 그 달콤한 집에 위계와 억압이 살아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내 가족 중에 소외당하는 누군가는 정말로 없는걸까?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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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
김병준 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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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진정으로 고민하는 정치가였다는 점에서 애정이 간다. 이 책은 그의 고민을 함께 한 10권의 책에 대한 강독회 내용을 옮긴 것이다. 총 10명의 참여정부 관련 전문가들이 각각의 책에 대한 강의를 하고 청중 및 사회자와 토론을 벌였다.

인간은 더 안전하고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사회를 형성했다. 욕구를 추구할 자유를 보장하면서 지나친 탐욕으로 인한 자멸로부터 우리를 보호할 규칙과 질서를 만들었다. 인간사회의 역사는 욕구와 규제, 자유와 질서의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주소는?  불황이니 금융위기니 경제면은 늘 시끄럽고, 지나친 양극화로 서민들의 삶은 더 고달프다. 무분별한 개발로 지구는 오염될 대로 오염되고 자원은 고갈되고 있다. 우리는 지나친 욕구 즉 탐욕으로 인한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예술가들은 경고해야 하고, 지식인들은 현상황을 진단하고 탈출구를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가들은 이를 참고해서 행동할 차비를 해야하고, 시민은 이를 조직적으로 감시하고 참여해야 한다. 

이 책은 지식인들이 제시한 현 상황에 대한 진단과 해결책을 읽고 고민한 한 정치가에 대해 추억하며 ,시민으로써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탐색한다.  

지나친 탐욕으로 인해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다면 그 반대쪽 끝에 있는 다른 축에 무게를 줄 수 밖에 없다. 인간의 욕구를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조정하는 것. 한 국가의 수반이었던 그의 고민은 국가의 조정능력에 대한 것이었다. 

국가는 과연 어떤 역할을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가? 

국가는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해서 기업가 역할, 갈등 조정자 역할 (<국가의 역할> 장하준) 을 할 수도 있고, 평등에의 추구를 지향하며 복지에 힘쓸수도 있고(<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이제 당신차례에요. Mr 브라운> 앤서니 기든스 ), 폭주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법과 규제로 무장한 민주주의로 대항할 수 있으며(<슈퍼 자본주의> 로버트 라이시), 시장으로 부터 낙오된 빈곤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도 있다(<빈곤의 종말> 제프리 D 삭스) . 지나치게 자본지향적인 우리들에게 인권과 평화, 다양성의 가치를 교육하고 추구할 수도 있다. (<유러피안 드림> 제레미 리프킨)

정치가는 시대정신을 가지고 (<더 플랜> 탐 이매뉴얼, 브루스 리드) 국민의 욕구를 읽고 도덕성으로 그들을 움직이는 리더십으로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강인하게 일을 실행해야 한다.  

노대통령이 생각하는 국가란 바로 증세를 해서라도 국민들을 먹고 살게 해주고 최소한의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해주며 어디 가서 비겁하게 살지 않도록 하는 존재입니다. 

최소한 몸 아플 때 병원에 갈 수 있고 공부 잘 하면 대학에 갈 수 있고 밥은 굶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국가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한계가 있다. 국가가 행사하는 권력은 제한적이며 이미 어느 정도 시민과 공동체와 공유되게 되어있다. 이 때 정치가는 시민의 역할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깨어있는 시민, 조직화한 시민이 여론의 눈속임에 휘둘리지 않고 (<생각의 오류> 토머스 키다) 진정한 가치를 위해, 더불어사는 공동체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참여할 때 제한된 정부의 역할을 보완하면서 이 위기를 해쳐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탐욕을 통제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세금을 조금 더 내더라도 내 이웃이 존엄을 유지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태도,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 공유하는 마음가짐.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민주주의이자 깨어있는 시민이 아닐까. 

결국 인간은 정치와 경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그나마 가장 적절하다고 입증되온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했다. 문제는 그것들을 유연하고 균형적으로 잘 조절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위에서 말했듯 예술가는 예술가의 역할을, 지식인은 지식인의 역할을, 그리고 정치가는 정치가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으로써의 역할이다. 우리는 이제 행동할 준비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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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의 반어법 지식여행자 4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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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하라 마리는 각종 리뷰와 서평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작가라서 늘 관심은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마녀의 한다스'라는 에세이가 세일을 할 때 얼른 사서 읽었었다. 그 때의 느낌은 뭐랄까. '기대만큼은 아니다' 라는 거였다. 기대가 컸던 모양인지 그저 상당히 먹는 걸 좋아하는 유쾌한 작가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래도 역시 미련이 남아 이 사람의 책을 한 권쯤은 더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때 '올가의 반어법'이 반값 세일 항목으로 소개되었다. 당연히 기회라고 생각해서 구입해 읽었다, 이 소설은 이전 에세이에서 작가에 대한 나의 기대가 반감되어서 그런지 예상보다 재미있게 읽었다. 오랜만에 소설 읽는 재미를 느꼈다고 하면 좀 과장한 건가? 과장이 아니라 정말 재미있었다.

원래 내가 이런 류의 악인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착한 성장 소설을 좋아한대다가 - 사실 이 책에 악인이 없는 건 아니다. 개인화 되지 않았을 뿐 거대한 악의 세력은 존재했다. 그걸 불쾌하지 않게 묘사한 그녀에게 박수를 보낸다-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긴박감 까지 더해져서 좋았다.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주인공 히로세 시마가 프라하의 소비에트 학교를 다니면서 여러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나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학교의 무용선생님인 올가 선생님과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엘레오노라 선생님은 특별한 언행때문에 늘 이슈가 된다. 소설은 시마가 성장해서 올가선생님과 엘레오노라 선생님의 숨겨진 이야기를 파헤치는 과정을 담는다. 
 

이 때 1937년에서 1937년 사이의 스탈린의 정치적 숙청 과정-소련대숙청, 소련대학살- 과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한다. 스탈린은 이 시기에 당내 정적들과 반스탈린주의자들을 대거 제거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에는 이 때의 사상자 수가 공식적으로는 681,692명이지만 실제로는 2백만이 넘는다고 나와있다. 작가는 억울하게 끌려간 사람들의 고난과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외면하는 불합리한 권력에 대해 놀랄만큼 담담하게 묘사했다. 감정의 과잉없이 사건을 그대로 전달하는 그 담담함이 마음에 들었다. 담담함 속의 슬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정치적 계산, 경제적 이해관계등등 모든 요소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나와 같은 종(種)인 인간에게 그럴 수가 있을까? 

 '거리(distance)'의 문제가 아닐까? 우리는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에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내 시야를 벗어난 일에 대해서 우리는 곧잘 현실감을 잃곤 한다. 전쟁이 언제부터 대량 살상이 되었나? '털없는 원숭이'의 데즈먼드 모리스에 의하면 그것은 적(敵)이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의 눈 앞에 안 보이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미사일이 날라가고 표적을 표시하는 화면속에서 작은 불빛만  몇개 번쩍일 뿐이다. 우리는 그 불꽃 속에서 죽어가는 개인들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 시대 소련의 그들도 그랬을까? 비단 그 때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최근에도 우린 그런 경험을 이라크에서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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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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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느 강박증 환자의 자기 합리과 과정이라고 평한다면 지나친 걸까? 성격적 취약성을 가진 주인공이 청년기에 친구의 죽음이라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경험하면서 죄책감과 분노를 갖게 되었고 그것을 억압하는 과정에서 강박증이 발현하게 된 것 같다. 죽음과 책임에 대한 반복적인 생각, 그 생각으로 인한 불안감을 해결하기 위해 행하는 반복적인 애도행위는 전형적인 강박증 증상으로 보인다.

 어떤 인물의 행동을 이렇게저렇게 평가하기보다..... 그 사람과의 만남으로 나는 무엇을 얻었나, 무엇을 남겼나 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강박증이니 뭐니 하는 것은 일단 제쳐두고 이 소설과의 만남으로 우리는 무엇을 얻었나? 생각은 해 볼일이다 싶다.

 내가 어떻게 되든 단 한 사람만은 날 이해하려고 애써줄 거라는 믿음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 직전에서 목숨을 건진 소설 속 기자의 말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간절히 원했던 것은 이해받고 싶은 마음, 기억되고 싶은 마음이었나보다. 그 마음을 헤아려주는 주인공에 대한 고마움, 안도감이 자기 중심적이고 공감을 모르는 기자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우리를 가장 두렵게 만드는 것을 나는 '외로움'이라고 생각한다. 혼자라는 느낌은 내 존재에 대한 인식마저도 불확실하게 만든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자에 의해 확인받으면서 자아를 찾곤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의해 기억되는 것, 이해받는 것은 우리의 '외로움에 대한 깊은 두려움'을 완화시켜주고 우리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

 지구가 터질 듯 많은 사람들, 시끄럽고 굉장한 함성들,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 섞여 지내면서도 우리는 늘 외롭다.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보다는 내가 가진 돈, 내가 가진 능력, 내가 가진 외모에만 관심을 기울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에 밀려 진짜 나의 존재는 기억되지도 이해되지도 못한다. 그런 우리에게 어쩌면 이 책의 주인공은 진짜 나 자신에게만 집중해준, 혜성처럼 나타난 위로자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책 속의 다른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기자나 주인공의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그에게 화를 내고 모욕당했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 그의 애도행위가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게으름과 자기기만을 깨닫게 하고 직면하게 만들어서가 아닐까? 자신이 부정하고 싶은 모습을 맞닥뜨리면서 느끼는 자기에 대한 분노를 주인공에게 투사한 셈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외로워서 어쩔 줄 모르는 내 모습에 대한 분노, 위로받고 인정받고 싶지만 막상 타인에게 그렇게 해주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분노, 덮어놓은 내 두려움을 들춰내고 있는 이 책의 어두운 그림자는 이 책에 별을 1개 반만 주고 주인공을 강박증 환자로 몰아붙이는 식으로 투사된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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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라이어 -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
말콤 글래드웰 지음, 노정태 옮김, 최인철 감수 / 김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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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성공의 의미라는 것이 워낙 자본주의적 색채가 강해 나 스스로 동의하지 않은 측면이 많아 성공신화와 관련된 책을 사실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워낙 입소문이 대단한 책이었고, 글래드웰의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를 이미 읽어 작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신뢰가 생긴 후였으므로 충분히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결과는? 괜찮았다.^^

 우리는 성공을 개인적인 요소에 따른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본 모든 사례는 어떤 것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열심히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꽉 움켜진 후, 그 특별한 노력이 사회 전체로부터 보상받을 수 있는 시대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그들의 성공은 그들만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라난 세계의 산물이다. 

 저자는 우리가 가진 성공하는 사람에 대한 편견 - 특별한 재능과 높은 지능지수로 무장한 소수의 천재들-을 지적하고, 성공의 요소를 일정 수준의 재능과 노력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역사적 환경이 주는 기회로 설명한다. 

 성공의 첫 번째 요소인 재능에 대해 저자는 '범위효과'를 주장한다. 즉 성공을 위해서는 일정범위의 재능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이를 초과하는 뭔가가 더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지능지수 115 까지는 지능지수와 성공이 비례한다고 볼 수 있으나 그 이상의 지능지수는 성공의 정도와는 무관하다. 그러니까 성공하려면 아이큐가 꼭 140이나 180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물론 이러한 결론은 여러 심리학자들의 종단 연구로 입증된 것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줄세우기식 우리 교육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것인지 더욱 절절하게 느끼게 되었다. 쓸데없이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 차별하는 습관만 키워주니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공의 또다른 요소인 노력에 대한 설명에서 그 유명한(?) '일만시간의 법칙'이 나온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주력 분야에 적어도 1만시간 이상을 투자하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성취공식은 '재능 더하기 연습'이다. 문제는 심리학자들이 재능있는 이들의 경력을 관찰하면 할 수록 타고난 재능의 역할은 줄어들고 연습이 하는 역할은 커진다는 데 있다... 촤고중의 최고는 그냥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훨씬, 훨씬 더 열심히 한다.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 

세번째 요소는 앞의 두가지 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다.  그들을 둘러싼 모든 환경들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또한 그의 성공이 가치를 인정받는 바로 그때여야한다는 것이다. 어떤 부모밑에서 어떤 교육을 받을 수 있었는지, 어떤 사회적, 문화적 흐름 가운데 그들이 처해 있었는지는 이미 개인적 차원은 훌쩍 뛰어넘는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적, 세계적 차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아웃라이어들은 탄생한다. 

 성공한 사람들은 늘 일종의 찬탄의 대상이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었을까?' '정말 대단하군, 난 꿈도 못 꾸지.' 그러나 그들은 허공에 떠 있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최고의 타이밍과 최고의 노력이 만들어낸 우리 자신이었다. ㅋㅋㅋ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개인, 그 너머를 보는 습관이다. 사람을 독립된 개체로만 이해하는 것은 지나치게 제한적인 관점으로 그 사람을 보는 것이다.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를 둘러싼 관계의 거미줄을 이해해야 한다.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시간, 그 사람이 존재하는 공간, 그 사람이 관계를 맺는 사람들. 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교육, 문화, 사회적 분위기. 결국 우리는 수많은 필연의 산물이다. 그 모든 필연들을 무시하고 그 사람 개인에게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웠던 나의 무지에 대해 반성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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