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의 거짓말>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9시의 거짓말 - 워렌 버핏의 눈으로 한국 언론의 몰상식을 말하다
최경영 지음 / 시사IN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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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대학에 가서야 알았다. 기자들에 대한 불신도 그 때 시작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뉴스를 보지 않았다. 이 책은 뉴스를 만드는 한 기자의 자기반성에서 시작되었다. 적어도 서문에서 작가인 기자는 그렇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대체로 합리적이라고 작가가 생각하는 워렌 버핏을 끌어다가 몰상식한 한국 언론과 상식적인 버핏을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을 기록한다. 그런데 과연 워렌 버핏이 그렇게 상식적인 사람인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언론을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왜 그를 내세웠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했고 독자로서 생뚱맞은 버핏의 등장에 나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경제정책에 대한 언론 보도에 대한 비판을 위해서였을까 했는데 책 내용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워렌 버핏의 상식이 그렇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상식인지.. 사실 나는 이 책은 출발부터 잘못되지 않았나 싶었다. 덮고 싶었지만.. 그래도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끝까지 읽었다. 

작가의 버핏 끌어다 붙이기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개인적으로 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겸손'과 '정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들었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은 언론의 교만을 고발하고 제발 겸손하고 정직하라고 이야기 하는 듯 했다. 하지만 언론인의 각성만으로는 어렵다. 수많은 언론인이 한 마음으로 각성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구조적 문제가 끼어 있어 극복하기가 쉽지는 않다. 결국 또 남겨진 몫은 시민들의 것이다. 시민들이 의식을 가지고 그들을 감시하고 개입하는 것. 그러고 보면 우린 정말 시민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기대하고 있다. 그건 결국 기존의 기득권층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다는 절망의 표현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할 일이 많다.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깨어서 더 많이 행동하는 것.  

언론인으로 언론을 비난하는 용기에는 찬사를 보내나 그 반성의 깊이와 방법에 조금 더 기대를 가졌는데 그 만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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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커피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더 커피 북 - 커피 한 잔에 담긴 거의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니나 루팅거.그레고리 디컴 지음, 이재경 옮김 / 사랑플러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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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커피란 것은 위 속에 떨어지자마자 일대 소동을 일으킨다.

새로운 생각들이 마치 전쟁터에 나선 나폴레옹의 대육군 부대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전투를 개시한다

기억이 바람결에 군기를 휘날리며 군마들처럼 전속력으로 달려온다.

비유는 경기병처럼 웅장하게 진군할 전열을 정비하고

논리의 포병대가 화약과 탄약을 가지고 잽싸게 그 뒤를 따르면

저격병의 총알처럼 날카로운 위트의 화살이 하늘을 난다.

직유가 샘솟고 종이는 검은 잉크로 물든다.

일단 창작의 몸부림이 시작되면 검은 물이 소용돌이치며 끝을 맺는다.

마치 초연에 뒤덮인 전장처럼

 
오노레 드 발자크 <현대흥분제에 관한 고찰>


 

커피를 마시면 몸이 가벼워지고 에너지가 솟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꽤 여러 해 동안 커피를 마실 때 시간을 들여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야금야금 알차게 마시곤 했었다.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면서도 '커피' 자체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커피의 작용에 대한 생리학적인 지식은 있었지만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큰 관심은 없었고 (중독 수준만 아니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커피의 생산지는 단지 미세한 맛의 차이와의 관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누구에 의해 커피가 만들어졌는지도 마지막 단계인 카페 바리스타의 기술에 대한 관심 이상은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 공정 무역에 대해 알게 되면서 '아름다운 커피'나 공정무역 커피 등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다국적 커피 기업에 대한 어렴풋한 반감과 개인적 차원의 보이콧 정도는 하게 되었다.

커피에 대한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책은 커피의 역사에서 시작해서 커피의 생산과정, 무역구조, 대형 커피 업체들의 이윤추구행태, 스타벅스를 비롯한 스페셜티 커피에 대한 설명을 거쳐 공정무역, 유기농인증 커피 등 '지속 가능한 커피'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다. 단순히 커피의 맛과 향, 커피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실용 음식책(?)이 아니라 커피라는 음료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담고있었다. 사실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커피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커피를 매개로 해서 식품의 생산과 거래에 대한 고찰을 담은 책이었다. 

커피에 대한 역사는 사실 새로울 것이 없다. 이성중심 합리주의, 산업사회가 발전할 수록 알콜이 주는 몽롱한 느낌보다는 각성된 상태를 요구하는 일들이 많아졌고, 커피는 이에 완벽하게 부흥하는 음료였다. 커피는 인간을 일하게 하는 원료로서의 역할을 해낸 것이다 (사실 슬픈 일이다. 인간이 꼭 기계가 된 느낌이니).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커피의 문화사적 의미보다는 커피을 둘러싼 경제적, 구조적 측면에 주력한다. 커피의 대량 재배는 탐욕스러운 서구 열강에 의해 식민지에서 시작되었고, 이러한 불평등한 구조가 현재까지 남아 가난한 나라들의 고단한 노동을 통해 우리가 마시는 커피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커피는 또한 불평등한 유통구조에 의해 다국적 기업들의 배를 불려주는 식으로 거래되고 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음식이 자급자족 수준을 넘어 기업이나 국가에 의해 다량으로 거래되고 이동경로가 길어지면서 음식에 대해 추상적으로만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먹는 음식'이 구체적으로 느껴지기보다는 그저 '음식'이라는 의미를 가진 무언가로만 인식된다. 우리는 그 음식을 만든 사람을 모르고, 그 음식이 어떤 경로로 내 테이블에 오르는지 모른다. 구체성의 결여는 음식에 대한 책임감을 희석시키고 결국 이런 경향은 유통된 음식에 대한 심각한 신뢰도의 저하를 가져오게 되었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커피를 마시면서 우리는 내 앞에 놓인 뜨겁고 검은 음료를 보지 그 이면에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 불공정한 거래 등은 보지 못한다. 커피는 그저 추상적으로 느껴지는 음료일 뿐이다. 이 책은 그러한 추상성을 버리고 이것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자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체적인 사고를 통해 내가 먹는 식품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발언을 하고 구조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식품 시장 먹이사슬에서 소비자들이 발휘하는 힘은 우리들 대다수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자유 시장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결국 다른 무엇보다 소비자 구매력이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시장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고 분명한 소리를 낼 권리가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떻게 재배되고 ,어떻게 가공되고, 어떻게 운반되어야 할지, 그리고 그 거래에서 마땅한 보상을 받을 사람은 누구인지 분명히 가르쳐줄 필요가 있다.  미나 그린필드 <커피를 강하게 만드는 법>

일부 부도덕한 식품 생산자나 유통업자에 대해 한탄하고 답답해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변화 가능한 소비자가 주체가 되어 사회를 변화시키자는 흐름이 거세게 이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된다. 공정무역에 대한 논의가 확대되고, 유기농 음식을 장려하며, 생협을 통해 건간한 먹거리들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힘있는 기업을 배제하고 소비자가 과연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에서 '소비자가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생각들이 힘을 얻고 있다.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러셀이 말한 창조적 충동으로 인한 자발적 움직임이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모여 사회를 파괴적 차원의 에너지에서 생산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키고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커피는 물론이고 내가 먹는 사과 한 조각, 포도 한 송이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음을 이해하고 그 과정에 문제가 있다면 행동하는 것. 창조적 시민, 건강한 소비자에 대한 믿음. 커피에 대한 책을 통해 엉뚱하게도(?) 그런 깨달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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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싸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 행복한 사회 재건의 원칙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비아북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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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전후 지식인들의 회의과 고민이 담긴 저작들이 참 많다. 그들은 인간본성에 대해, 민족성에 대해, 인간의 행동양식에 대해 고민했고 정치와 경제 체계의 문제에 대해 반성했으며 어떻게 하면 이 처참한 역사를 되풀이 하지 않을까 길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전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했고, 전쟁을 방불케 하는 생존경쟁과 불의에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위와 같은 고민은 그들만의 고민이 아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고민이기도 하다. 

이 책은 버틀란드 러셀이 1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 켁스턴 홀에서 <사회재건의 원칙>이라는 주제로 총 8차례에 걸쳐 강연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그는 인간의 삶을 형성하는 데에 의식적인 목적보다 충동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아래 전쟁의 원인을 고찰하고, 긍정적 충동인 창조적 충동을 성장시키는 방향으로의 우리 사회의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나는 가장 훌륭한 삶은 창조의 충동이 가장 주된 동인이 되는 삶이고 가장 나쁜 삶은 소유욕이 가장 주된 동인이 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20세기 초는 의식과 합리에 묶여있던 무의식적 충동과 욕망이 표현되고 분출되기 시작한 시기였던 것 같다. 프로이트의 출현은 특별하다기보다는 그저 대표적 상징에 불과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이미 분위기는 생동하는 우리의 욕망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러셀이 말하는 '충동'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한 술 더떠서 러셀은 욕구보다 더 순간적이고 강력한 충동이 인간의 삶에 더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러셀이 주장한 충동은  창조적 충동과 소유의 충동으로 나뉜다. 창조적 충동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에너지지만, 소유의 충동은 타인의 충동과 양립할 수 없는 이기적이고 제한이 필요한 에너지이다. 러셀은 창조적 충동이 좌절되고, 소유의 충동이 폭주하면서 전쟁이 발생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창조적 충동이 표현되도록 격려하면서 소유의 충동이 득세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을 정치, 경제, 교육, 가정, 종교적 측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군주에 대한 충성심에서 유래한 동족의식, 외부적인 위험에 대한 공포심, 그리고 종교적인 양상을 띄는 애국심, 이를 토대로 현대 국가는 막대한 권력을 불필요하고 해로운 방향으로 행사한다. 이런 국가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국가의 역할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러셀은 국가의 권력을 축소하고 자발적인 조직에 권력을 이양해서 정치적 행위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창조적 충동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일종의 이익집단이나 시민단체의 권력을 키워주자는 것인데, 국가의 역할은 그들 사이의 중재자로써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에 덧붙여 위생이나 전염병의 예방, 의무교육, 아동정책, 학문연구, 경제적 격차의 축소의 역할을 국가가 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즘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면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여러가지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부분과 좀 상통하는 면이 있는 듯 하다. 불필요한 권력은 버리되 복지에 대한 문제는 충분히 개입해야 한다는 식이 아닌가 싶다. 20세기 초의 고민과 21세기 초의 고민이 같다는 것도 해결책으로 나오는 것도 비슷하다는 것도 참 흥미롭다. 그렇다면 경제문제는 어떨까?

어떤 경제 체제의 효율성을 검증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은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드느냐 또는 분배적 정의를 보장하느냐가 아니라 사람들의 본능적 성장을 가로막지 않느냐이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경제 체제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인간의 개인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말아야 하고, 둘째 창의적인 충동을 배출할 수 있는 기회를 최대한 많이 제공해야 한다
 
경제 정책에서 성장과 분배의 문제는 오늘날 우리의 고민과도 같다. 성장 일변도의 시대적 분위기를 규탄하고 같이 먹고 살자는 식으로 진행되는 듯 하다가도 다시 어쩔 수 없이 있는 사람 위주로 흘러가곤 한다. 러셀은 성장이나 분배냐 하는 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 내부에 있는 충동을 들여다 보고 그것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의적 충동을 제공하고 무조건 소유하고자 하는 충동을 억제하는 것.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러셀은 협동조합 운동과 생디칼리즘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결국 자발적인 흐름을 키워가자는 것이고 국가는 그 흐름을 막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 어디까지 조합이 성장할 수 있을까? 국가는 그 성장을 충분히 보호해 줄 수 있는가. 러셀은 이 모든 자발적 흐름이 단기간에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교육을 통해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교육은 무조건적 수용 대신에 건설적인 의문과 지적 탐구심, 진취적인 태도가 승리를 거둔다는 세계관, 사고의 대담성을 조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현재의 상황'에 만족하는 태도, 정치적인 목적에 순종하는 태도는 정신적인 요소에 대한 무관심으로 기인하는 것으로 앞서 말한 해로운 습성들을 야기하는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러나 이런 원인들 뒤에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교육을 학생들의 성장을 돕는 수단이 아니라 학생들을 지배하는 권력을 획득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태도이다.

교실에서 일어나는 경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사회에서 경험하는 생존 규칙을 그곳에서 철저하게 답습한다.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이들은 교과서와 선생님 말씀에 순종적이어야 하며, 지나친 회의로 자신을 괴롭혀서는 안된다. 그리고 더 높은 성적과 인정을 향한 욕심을 가져야 한다. 아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성인들과 다르지 않다. 몇몇 설문조사에서 아이들이 되고 싶어하거나 갖고 싶어하는 것들이 매우 물질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었다. 우리가 그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소유하려고 한다. 내 뜻이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하고 따라주지 않으면 그것을 비정상적이라고 여긴다. 그들을 자유롭게 존중하는 것, 선택권을 허락하는 것. 그것이 교육의 본질이라고 러셀은 말한다. 그들을 자유롭게 한다고 해서 그들이 고삐풀린 망아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이 어릴 때를 생각해보라.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면 과연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 만큼 폭주했을까? 학교 교육에 대한 개혁은 중요하나 문제는 개인이 단기간에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변화의 시작은 가정일 수 밖에 없다.

서로의 인생관을 존중하고 전체 인류의 삶에 비하면 자신은 하찮은 존재임을 자각하는 남성과 여성은 자유를 훼손하는 일 없이 동료가 될 수 있고, 지적인 생활과 영적 생활에 해를 끼치는 일 없이 본능의 화합을 이룰 수 있다. 

결국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존중의 문제인 것같다.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는 것. 가정에서의 충돌은 결국 소유욕 때문인 경우가 많다. 내 규칙을 주장하고 상대방이 내 규율 내에 오기를 원한다. 즉 내가 그의 권한을 소유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 그 사이에서 접점을 찾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지낼 수록 절절히 느낀다. 충돌의 상황에서 모두가 만족할 새로운 활로를 찾는 창의력. 그런 노력들이 가정 내에서 연습되다 보면 사회에서의 갈등 상황도 비슷하게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러셀이 말한 것은 영적인 생활이다.

영혼은 본능에서 비롯한 사랑을 확장하고 일반화 한다. 영혼은 본능적인 생활에 포함된 집요하거나 무자비하거나 개별적인 요소들을 제어하고 정화한다.

'나'를 생각하는 삶에서 '우리'를 생각하는 삶, 그리고 '인류'를 생각하는 삶으로의 진화는 인간의 지평을 넓혀준다. 우리는 본능에서 지성으로 그리고 영혼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름으로써 우리가 가진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그곳에서 찾은 가치는 우리를 공허하게 하지 않고 의미있는 삶을 만들어주며,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결국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나와 내 주변에만 국한된 것에 머무르지 않고 전체를 바라봄으로써 소유의 한계를 인식하고 타인을 포용하며, 생명의 길로 가는 것. 그 길이 바로 우리가 싸우지 않는 길이 아닐까.

러셀의 글은 깔끔하다. 너무 깔끔해서 내가 혹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러셀의 이미지가 고집센 영감같아서 그럴 수도 있고, 그가 지나치게 확신에 차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고 그것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통해 나름의 합리적 대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해답은 성장을 향한 자발적인 움직임과 그것들을 억제하지 않고 존중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문제는 부정적인 충동들을 우리가 얼마나 잘 조절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그것은 부정적 에너지에 대한 두려움 보다는 긍정적 에너지의 건강한 분출로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붙잡고 싶다. 우린 계속 이런식으로는 안된다고만 하는데, 그것을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반대하는데에 에너지를 쏟는 것보다는 긍정적인 흐름에 힘을 더 실어주는 것. 우리는 싸우지 않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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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꼬르뷔지에의 동방여행>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르 코르뷔지에의 동방여행
르 코르뷔지에 지음, 최정수 옮김, 한명식 감수 / 안그라픽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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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건축가로 유명한 르 코르뷔지에가 젊은 시절 동방여행을 하면서 기록한 글을 모아  엮은 책이다. 나는 늘 개인적으로 동유럽에 대한 환상같은게 있었다. 동유럽은 좀 을씨년스럽고 뭐랄까 애잔한 느낌이 든다. 과거의 영광을 먹고 사는 사람들, 나른한 눈빛 속에 자부심과 열정이 살아 숨쉴 것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늘 상상했었다. 한 번도 가보지는 못했지만.. 따라서 작가에 대한 정보는 없었지만 동방여행기라는 것 만으로 호기심이 가는 책이었다. 

사실 건축에 문외한인 나에게 르 코르뷔지에는 낯선 인물이다. 작가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애정 없이 읽는 책은 그에 대한 선입관이나 명성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책이 몹시 매력적이지 않은 한 몰입도가 떨어진다는 단점은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집중에 큰 어려움을 느꼈다. 글은 몹시 단편적이었고 ,특별한 흐름을 찾기도 어려웠으며, 자신의 기분과 의식의 흐름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씌여진 듯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동유럽 나라들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만을 적은 글들이었고, 독자의 입장을 염두해두었다기 보다는 자신의 개인적 감정을 쏟아낸 것에 더 가까웠다. 이기적인 작가라고 생각했다.  

공감하기 어려운 책은 애정이 가지 않는다. 타인의 감정을 그냥 읽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함께 이해하고 뭔가를 공유하면서 예정에 없던 교류를 만들어내는 것이 독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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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장인 - 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
리차드 세넷 지음, 김홍식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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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노동)이 우리 삶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일과 삶을 분리하고자 한다.그래서 종종 직장에서의 노동시간은 단지 생계를 위해 참아내는 시간으로 치부된다. 그런데 그러한 분리가 우리를 얼마나 무기력하고 공허하게 만드는지. 우리는 삶의 가치를 찾아 헤매지만 결국 삶의 가치는 일과 삶을 일치시킴으로써 의외로 손쉽게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하는 일은 우리 자신을 규정한다. 사회 속에서의 내 역할을 알려주고 존재를 확인시킨다. 혹자는 인간을 너무 도구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노동으로 사회에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면 존재가치가 떨어지는가? 가치를 확인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순수한 나 자신의 가치를 찾기 위해 우리는 신앙에 길을 물을 수도 있고, 철학에 길을 물을 수도 있다. 그리고 생활인으로써 우리는 노동에 길을 묻기도 한다.

자신이 행하는 노동에 몰입하는 사람을 우리는 장인이라고 한다. 그들은 복잡하게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오직 자신의 일에만 집중한다. 그러나 우리는 '따지지 않고 그저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들'에 대해 늘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집중하는 일이 인류에게 해를 미치는 일이라면? 원자폭탄을 만든 사람들, 인간복제를 꿈꾸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폭주하는 고집쟁이 기관차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을 멈추게 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이 책은 '장인'은 우리가 걱정하듯 생각없이 폭주하는 기관차가 아니라고 한다. 진정한 장인의 일에는 그 과정 내부에 철학과 의식이 갇혀있다고 본다. 문제는 우리가 장인이 일하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오해를 풀기 위해 씌여졌다고 말한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일하는 동물로서의 인간에 희망을 거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판도라 상자 속의 공포는 줄일 수 있으며, 물질적 삶을 좀 더 인간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우리가 물건을 만드는 과정을 더 잘 알게 되기만 한다면 말이다.

이 책의 저자인 리처드 세넷은 사회학 전공자로 노동 및 도시화 연구의 최고 권위자라고 한다. 스피노자상, 게르다 헨켈상, 헤겔상 등 나에겐 생소한 상들을 많이 수상했다. 그의 다른 저서를 읽은 기억도 없고 그의 짧은 인터뷰 조차도 읽지 못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인문학 책 치고는 꽤 쉽고 재미있게 씌여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적어도 난해한 말로 독자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악취미는 없는 작가인 것 같다. 놀랍다고 생각될 정도로 공감이 돼어 밑줄을 그은 부분이 많지는 않았지만 몰랐던 사실을 꽤 알았고 성실하게 자신의 논거를 전개하는 학자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주로 장인의 역사에 대해서 - 그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성장했으며 어떤 대우를 받아왔는지, 그들의 지위를 위협했던 것들은 무엇이었는지 등- 2부는 실기편으로 장인이 일하는 방식에 대해 그리고 3부는 일하는 과정에 깃든 진정한 장인의식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장인은 무언가에 확고하게 몰입하는 특수한 '인간의 조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책의 목표 중 하나는 실제적인 일에 몰입하면서도 일을 수단으로 보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 부류는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우리가 가야 할 곳을 숙고해서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자 노력한다. 또 한 부류는 그 방향을 따라가는 사람이다. 기능인 즉 장인은 주로 두 번째 사람으로 묘사되곤 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아니말 라보란스. 그러나 저자는 평가 절하된 아니말 라보란스의 철학과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하자고 말한다. 그들의 공감적 상상력, 아집에 휘말리지 않은 유연성, 저항마저 포용하는 관용.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덕목은 '진정한' 장인의 덕목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간혹 자신만의 방법을 고집하며 타협을 허용하지 않고 묵묵하게 일하는 사람들을 장인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매스컴에서 비추는 모습이 그들의 고집에만 집중되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간혹 그들의 작업과정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그 안에 상상력과 유연성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자신만 믿고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저항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변화를 목적에 맞게 이용하고 조정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진정한 장인은 우발적인 일과 제약 조건에 긍정적인 가치를 둔다. ... 한 번에 완벽한 일반형을 만들려고 할 게 아니라 먼저 스케치 하듯이 하나의 구조를 만들어 두고 차차로 진화해 가도록 한다. 

장인은 강박적으로 완벽을 추구하는 일의 노예가 아니다. 완벽에 도달하지 못할 가능성을 인정하고, 겸손하며 고집 부리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안다. 성긴 형태의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하며 자신의 노동이 낳은 작품 자체의 자연스러운 진화 과정을 즐긴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장인은 얼마나 남아있으며 그들의 가치는 얼마나 올바르게 평가되어왔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사실 장인은 수공업자에만 국한된 개념은 아니다. 작가, 예술가, 의료인, 학자도 결국 넓은 의미의 장인이 될 수 있다. 작가의 한 줄, 예술가의 한 획, 의료인의 행위, 학자의 연구 속에 그들의 철학이 녹아있고 그들의 삶의 가치가 쌓여 나간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식으로 일을 하고 있을까? 나는 일을 통해 삶의 가치를 찾고 있는가. 그 일을 위해 충분히 반복해서 연습하는가. 충분히 몰두하는가. 저항에 부딪쳤을때 어떻게 대처하는가.여유를 가지고 유연성을 발휘하는가 아니면 내 고집을 고수하는데 지나치게 에너지를 낭비하는가. 앞으로 내가 가야할 방향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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