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초보 영어회화 100일의 기적 - 100일 후에는 나도 영어로 말한다 100일의 기적
문성현 지음 / 넥서스 / 201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초등학생 자녀와 함께 영어 공부하기 좋은 책.
매일 외우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영어 잘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하는 책.
왕초보가 시작하기에 부담 없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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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23 12: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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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2 - 1부 2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2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올해 독서 모임에서는 연간 계획으로 토지 전권(20권) 읽기를 시작했다.

매월 격주로 1권씩, 월 2권씩 읽고 나면 한 해가 저물듯하다.

첫번째 모임에서는 토지 1부 1권을 각자 읽어 온 후 부록에 있는 '등장 인물 소개'편과 제1편 어둠의 발소리 '서(序)' 부분을 함께 낭독했다.

별도의 발제 없이 낭독만으로도 깊이 읽기가 가능할 수 있겠다 싶은 순간이었다.


다음 주 모임에서는 2권을 각자 읽고 한 가지씩 발제를 해 오기로 했다.

2권을 다 읽고 난 지금 내 머릿속에는 '무명번뇌(無明煩惱)' 네 글자가 선명히 남아 있다.

최참판댁 일가의 비극이 결국은 무명번뇌(無明煩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무명번뇌(無明煩惱)가 무엇인지 백과사전을 찾아봤다.

번뇌(煩惱)란 중생의 심신을 혼돈시키고 불교의 이상을 방해하는 장애.

무명(無明)은 우치이며 가장 근본인 번뇌이다이는 자기 중심으로 인해 공평, 정확한 진실된 지견(知見)이 없는 것이다아집에 의한 삿된 분별성이 무명이며, 삿된 마음가짐이 무명의 몸이다일체의 사악과 번뇌의 근원이 무명에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다음 주 독서 모임에서는 윤씨부인과 최치수의 무명번뇌(無明煩惱)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어 볼까 한다.


1. 윤씨부인의 눈물은 어떤 의미이며, 윤씨부인에게 김개주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윤씨부인의 무명번뇌(無明煩惱)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 봅시다.


윤씨는 김개주가 전주 감영에서 효수되었다는 말을 문의원으로부터 들었을 때, 무쇠 같은 이 여인의 눈에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81)

 

윤씨부인은 끊임없이 매질을 하던 형리를 잃었다. 생전의 최치수는 아들이 아니었으며 가혹한 형리였던 것이다. 그것을 윤씨부인은 원했다. 원했으며 또 그렇게 되게 만든 사람이 윤씨부인이다. 그 사실을 지금 윤씨부인은 공포 없이 생각할 수가 없었다. 가엾은 형리, 세월을 물어뜯으며 물어뜯으며 지겨워서 못 견디어 하다가 그 세월에 눌리어 가버린 사람, 최치수는 윤씨부인을 치죄(治罪)하기 위해 쌓아올린 제단에 바쳐진 한 마리의 여윈 염소는 아니었던지, 사면(赦免)을 받지 아니하려고 끝내 고개를 내저었던 윤씨부인이기에 매를 버릴 수 없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제단 앞에서 지겨운 시간을 뜯어먹어야 했던 한 마리의 여윈 염소는 아니었던지. 산에서 돌아오던 날 어머님 하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르며 달려온 치수를 뿌리친 그때부터 윤씨부인은 죽은 남편의 아내가 아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남편의 아들인 치수의 어미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 의식의 심층에는 부정(不淨)의 여인이며 아내와 어미의 자격을 잃은 육체적인 낙인이 빚은 절망 이외의 것이 또 있었다. 핏덩어리를 낳아서 팽개치고 온 뼈저린 모성의 절망이었다. 전자의 경우 어미의 자격을 빼앗은 것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스스로 어미의 권리를 버린 것인데 결국은 두 경우가 다 버렸다 함이 옳은 성싶다. 그러나 버림은 버림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적악(積惡)이며 그 무게는 짊어져야 하는 짐이었다. 짐은 땅이 꺼지게 무거운 것이었다. 양켠에 실은 무게를 느끼면 느낄수록 허리는 휘어지고 발목은 파묻혀 들어갔다. 조금만 움직여도 산산조각이 날 것 같은, 그러나 윤씨부인은 이십 년을 넘게 모질게 지탱해 왔던 것이다. 자신의 살을 가르고 세상에 태어나서 젖꼭지 한 번 물려주지 못한 채 버리고 온 생명에 대한 소리 없는 통곡과 고독한 소년기를, 비뚤어진 청년기를, 권태에 짓이겨져 폐인을 방불케 했던 장년기를, 그렇게 변모되어온 최치수를 바라보며 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쪽 짐짝은 땅바닥에 굴러떨어졌고 한쪽 짐짝은 반공중에 곤두선 채 윤씨부인은 그 아래 서 있는 것이다. 그 균형이 부서져서 윤씨부인이 산산조각으로 난 것은 아니었다. 윤씨부인의 의식의 심층을 한층 더 깊이 파고 내려간다면 죄악의 정열로써 침독(侵毒)되어 있는 곳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십 년 넘는 세월 동안 그의 바닥에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그 남자의 비극이 삼줄과 같은 질긴 거미줄을 쳐놓고 있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 남자, 그 남자의 비극과 더불어 살아온 윤씨부인이 사면을 거절한 것도 그 때문이요 피맺히는 아들의 매질을 원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뜻밖의 재난으로써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운명을 원망하지도 않았었다. 영원히 사면되기를 원치 않았던 그에게는 그와 같이 끈질기고 무서운 사랑의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몹쓸 어미로고, 이 죄 많은 어미,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거짓으로라도, 아픔 위에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라도 치수에게는 어머니였어야 했던 자기 자신을 깨달은 것이다. 산산조각이 난 것은 저울대에 실렸던 무게의 변동 탓이 아니었다. 그것은 회한 때문이었다. 공포 없이 생각할 수 없는 치죄자(治罪者)로서의 최치수, 그는 아들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도현의 고초를 겪는 망모의 구원을 위해 석가에게 법을 물었던 목련존자(目連尊者)일 수 없는, 심판장의 형리로 그 어미 스스로가 만들었던 것이다. 목련존자의 악모 이상의 악모임을 윤씨부인은 깨달은 것이다.(402~404)


2. 윤씨부인에게서 비롯된 무명번뇌(無明煩惱)가 아들인 최치수에게도 이어집니다. 치수는 끊임없이 충동과 분별 사이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다 결국 살해당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하고 마는데요, 치수의 이 싸움에서 승자는 누구였다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무명번뇌(無明煩惱)에 빠지지 않고 벗어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 봅시다.


한편 치수 역시 우관과 흡사하게 밖으로 튕겨져 나가려는 충동과 그것을 거머잡는 분별과의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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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우화
류시화 지음, 블라디미르 루바로프 그림 / 연금술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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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 말할 때면
‘하늘에서 떨어졌다‘라고 말하곤 했다.

우리가 구입한 정의에서 악취가 나는 이유는
세상 어디에서나 정의가 부패했기 때문이오.

그들은 단추 없이도 잘 살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것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헤움 근처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바닷물로 목욕을 하는 것에 대한 지식이 무슨 쓸모가 있나요?

그들은 모든 낯선 사람을 특별한 방식으로 환영했다.
누가 메시아인지 알 수 없었기 대문이다.

지금 부자가 되면 이 세상에서도 돈을 돌려줄 수 있잖아.
굳이 다음 세상까지 기다려야 할 필요가 뭐야?

차는 왜 단맛이 나는가?
해가 더 중요한가, 달이 더 중요한가?
사람은 어떻게 성장하는가?

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고,
그 위치에 그대로 놓아두는 게 더 좋은 것이 있다.

이제부터는 ‘위기‘라는 단어의 사용을 금지하기로 했다.
그 대신 ‘축복받은 환경‘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시장에서 노래하는 눈먼 거지는 천사일지도 모른다네.
그대의 아내는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 열쇠를 갖고 있을 수도 있어.

만약 이 불이 나지 않았다면, 불을 끄기 위해
어디에다 물을 부어야 할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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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본 생활의 기본 100 - 프로들의 프로 마쓰우라 야타로의 베스트셀러가 된 작은 수첩
마쓰우라 야타로 지음, 오근영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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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항상 생각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나 자신을 응시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상의 것을 좇느라,

정작 나를 소홀히 하면 어느 순간

허무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열심히 생각하면서 펜을 들고

하나씩 적어 나갔고,

바로 그 3년 동안의 기록이 이 책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기본을 알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나의 기본'을 나누고 싶습니다.

 

기본이 가장 중요합니다.

기본은 반복하면 연마됩니다.

기본은 언제나 나를 돕습니다.

 

- 마쓰우라 야타로

 

책 속의 내용보다 책 표지 뒷면의 이 글귀가 더 마음에 들었던 책.

매일 반복적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습관일텐데, 좋은 습관 하나 갖기가 참 힘들다.

좋은 습관 하나를 갖기 위해서는 절실한 마음과 지속적으로 행할 수 있는 건강한 체력과 의지 등등이 필요한데 내게는 지금 당장 할 수 없는 핑계만 가득하다.

 

지난 일주일 내내 우울해서 잠만 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마음은 죄책감으로 가득하고 누워만 있었더니 허리가 아프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따위의 거창한 질문들에 대해서는 좀처럼 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답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고 실천하기 쉬울것 같은데...

문제는 늘 오늘은 생각만 하고 실천은 내일부터로 미루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말과 행동이, 글과 실제의 내 모습이 일치하는 날이 언젠간 올 수 있을까?

삶의 질을 높이는 조건 두 가지. 시간의 여유와 마음의 여유입니다. 늘 쫓기는 상황이라면 눈앞의 일을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삶의 질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시간의 여유가 마음의 여유를 만들고,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비로소 플러스 알파의 배려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배려가 삶의 질을 높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배려가 가장 필요한 곳은 타인이 아니라 우리의 삶일지도 모릅니다.

일이란 곧 생활이고, 생활이 바로 일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일과 생활을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던 제 머릿속에서 기존의 고정관념을 뒤집을 정도의 새로운 의식이 탄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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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소설로 그린 자화상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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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읽기 시작한 책을 오늘 아침에서야 다 읽었다.

요즘 도서관에 가는 것도 귀찮고, 무거운 책을 가방 가득 들고 다니는 것도 힘들던 차에 전자책을 빌려 읽는 재미에 빠져 읽게 된 책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다.

모든 전자책이 다 그러한 건 아니지만 이 책은 페이지 표시 단위가 '쪽'이 아닌 '%'였는데, 책의 92%가 소설의 내용이라면 나머지 8%가 문학평론가의 작품 해설이었다.

 

"기억과 묘사"라는 제목의 작품 해설을 쓴 평론가는 김윤식 서울대 교수였다.

문학평론가도 문학 비평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는지라 '김윤식 교수' 역시 생소했다.

그냥 그런 교수려니 별 생각 없이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 습관적으로 인터넷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방금 읽은 문학평론을 쓴 교수가 어제 별세했다는 기사를 접해서다.

수 많은 평론가 중 한 명이려니 했는데 그가 '한국 문학의 산증인'이요, '문학평론계의 거목'이며, 1세대 문학평론가로서 수많은 제자를 배출하고 남긴 저서만 200권이라는 기사를 접하고 다시 한 번 작품 해설을 읽어내려갔다.

 

문학 평론에 문외한인 내가 읽기에는 다소 어려웠으나 소설의 본질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박완서 문학을 제대로 읽는 지도를 만난 기분이었다.

 

서사시에서의 기억이란 소설에서는 회상으로 강화되는 것.  서사시에서의 기억이 순간적 기억이라면 소설에서의 그것은 지속적이자 절대적이라는 것.  외부와 내부,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의 통일(서사시적 세계)이란 근대 시민 사회 속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는 것.  그럼에도 그것을 찾아 헤매는 문제아가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곳이란 오직 자기의 '기억' 속에서인 것.  그것이 소설이라는 것입니다.(중략)

 

여기까지 이르면 작가 박완서가 '순전히 기억력에만 의지해서' 《그 많던 싱아……》를 쓰겠다고 새삼 공언한 것이 무엇을 가리킴인가라는 물음에 한 가지 해답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을까.  소설의 가장 본질적인 영역에 접근하겠다는 결의가 아니고 새삼 무엇이겠는가.  기억의 도움을 받는 회상의 형식, 이것만이 소설의 순수 혈통이라는 것.  주관·객관의 자기 속에서의 통일이 가능한 영역이야말로 소설이 서고 머물 수 있는 장소라는 것.  무슨 손재주라든가 꾸며서 만들기를 떠나 본질적인 소설의 장소에 들어가겠다는 결의로 쓴 것이 《그 많던 싱아……》이기에 이는 소설 중에서도 진짜 소설이라는 작가 박씨의 확고한 의지 표명이라 할 수 없을까.  이 의지 표명이 어찌 자화상이라는 속된 표현을 용납하랴.  소설과 기억, 이것만큼 본질적인 것은 없었던 것입니다.(중략)

 

남에게 받아쓰게 할 수 없는 기억, 그러한 회상의 형식이야말로 소설의 적자이자 순종이라는 사실이 이로써 조금 드러나지 않았을까.(중략)

 

저자의 기억에 의해 타인의 발언을 기록할 경우, 작가라면 필연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 그것.  기억에 의한 회상이란 그러니까 묘사를 가리킴인 것.  문학, 특히 소설의 육체란 무엇인가.  철학과도 시(단편)와 다른 소설의 특질이란 묘사에 있지 않았던가.  그 대단한 묘사라는 것의 정체를 묻는다면 누가 뭐라 대답해야 적당할까.  《그 많던 싱아……》는 아무나 쓸 수 있는 '문학 앨범'과는 나란히 가면서도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안고 있는데, '남에게 받아쓰게 할 수 없음'이 그것.  기억에 의한 것만이 묘사의 대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기억력에만' '순전히' 의존한 글쓰기로 《그 많던 싱아……》가 씌어졌던 것.  중요한 것은 이 '기억'만의 것, 묘사의 것을 아무나 베껴 쓰게 할 수 있는 '문학 앨범'과 동시에 제시해 놓은 점입니다.(중략)

 

《그 많던 싱아……》는 감동적입니다.  그 첫 번째가 그러니까 저에게는 《엄마의 말뚝》(4)에 해당된다는 것.  작가 박씨는 결코 (4)라는 번호의 작품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 (4)의 번호를 헌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주의하게도 《꿈꾸는 인큐베이터》(현대문학상 수상작, 1993. 2.)를 두고 저는 《엄마의 말뚝》(4)가 아닐까라고 했지만, 정말은 이는 제(5)에 해당되는 것이겠지요.  요약하겠습니다.  작가 박완서의 문학이란, 그러니까 《그 많던 싱아……》로 요약되는 그의 대표작이란 엄마인 기숙 여사와의 대결이라는 것, 말을 바꾸면 《그 많던 싱아……》란 《엄마의 말뚝》(4)니까 이 시리즈와 분리시키면 '전혀' 무의미한 것. 모녀 대결 의식이야말로 이 작품의 긴장력이자 박완서 문학의 긴장력의 근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중략)

 

 

고인이 그려준 지도를 보며 박완서 문학을 다시 한 번 제대로 읽어 봐야겠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311~3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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