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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레트라 5
사하라 미즈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사하라 미즈라는 작가를 본격적으로 좋아하게 된 건 그의 한국 데뷔작인 <별의 목소리> 나 단편 에피소드 집인 <버스 달리다> 부터가 아니고, 남자 고교생이 여성 무용수의 구두를 신고 춤을 추는 <영혼의 레트라> 부터다.
발레나 춤은 여성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던 <스바루> 시절과는 다르게 만화가 남성의 춤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볼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등으로 도전하기 시작한 지 꽤 오래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여성 무용수의 신발은 여성 무용수의 것으로 남아 있는 시절이라 <영혼의 레트라>는 대단히 충격적인 만화였다.
남자 고교생이 여성 무용수의 구두를 신고 춤을 추는 만화지만, <영혼의 레트라>는 스포츠 만화의 도식을 따라가지 않는다. 스포츠를 주제로 한 만화는 우승을 거머쥐거나 거머쥐지 못하거나 꼭 대회에 출전하고, 또 그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이 캐릭터들의 목표가 되기 마련이다. <캡틴 돈카베>처럼 이기지 못하는 주인공이 나타난다고 해도, 목적 자체가 변하는 법은 없다. 그게 스포츠니까!) 그러나 <영혼의 레트라>는 춤에 관해 오래 이야기하지만, 춤은 소외된 사람들을 한 데 묶는 목적일 뿐이다.
<영혼의 레트라>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는 남자 주인공은 왕따에 가까운 존재로, 키는 작고, 친구는 없고,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와 한부모 어머니, 시종 자신을 무시하는 여동생을 가진 “주인공답지 못한” 인물이다. 그가 가장 소중히 하는 것은 이름도 모르는 여학생이 울면서 그에게 던지고 간 “여성용 구두” 다. 그가 키가 작아 농구를 그만둬야 했던 날, 마찬가지로 키가 너무 커 춤을 그만두어야 했던 여학생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의 주변 인물 역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상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는 뚱뚱하고 키가 작고, 또 다른 친구는 훤칠하지만, 사람을 거부하기 일쑤다. 여동생의 얼굴에는 “여자애에게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흉터가 있으며, 할아버지는 치매 기운이 있어 의지할 만한 어른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소외된 인물들은 주인공이 여성용 구두를 들고, 춤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하나로 모인다.
소외된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영혼의 레트라> 답게, 주인공에게 춤을 가르치는 사람조차 “왕년에는 꽤 괜찮은 무용수였지만, 이제는 건강이 좋지 못해 춤을 추지 못하고 가게를 닫을까 고민 중인 할머니”다. 당연하지만, 이 노인은 주인공에게 춤을 가르치면서 역설적으로 춤추지 못하는 자신을 회복시킨다. 춤의 구성원이 무대에 서는 것이 즐겁고 또 “폼 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사람의 눈치를 보던 주인공은 “여성용 구두를 신고 춤을 추는 것은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되며, 오히려 그 행위 자체에서 자신감을 얻게 된다. 그가 추는 춤에는 두 명의 구성원이 함께하는데, 앞서 이야기한 두 친구들이 그의 반주자가 된다. 뚱보도 훤칠이도 여자 구두를 신는 변태도 무대 위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뿐인 웅변가” 가 된다. 완벽하게 소외된 사람은 없으며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스스로의 자리를 찾거나 혹은 만들 수 있다.
주인공은 농구를 잃어버렸지만, 춤을 찾았다. 주인공이 알던 여학생은 춤을 잃어버렸지만, 주인공을 대신해 농구를 시작했다. 여동생의 흉터는 오빠를 변호하고 얻은 훈장이었고, 그런 훈장들은 인물에게 주어진 소외를 벗겨내 하나로 엮는다.
<영혼의 레트라>는 결국 소외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이런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사하라 미즈라는 작가에 대해 기대하게 만든 이야기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이 작가의 다른 활약을 기대하게 만드는 멋진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