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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페터 슬로터다이크 지음, 이덕임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신과 인간의 분노 … 지옥과 혁명으로 나타나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이야기가있는집, 2017.5)
국내에 꽤 알려진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쓴 철학 에세이 『분노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가 번역돼 나왔다. 슬로터다이크는 2004년 방한해 의사소통행위이론의 하버마스를 맹렬히 비판했다. 철학자 슬로터다이크는 이번 에세이에서 ‘분노’라는 키워드를 통해 역사를 관통하는 힘이 무엇인지 파헤치고자 했다.
슬로터다이크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분노는 단지 분노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분노는 영원과 지복을 위한 종교적 의미와 부르주아에 대한 복수의 사회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지옥은 하나님의 분노와 혁명은 분노의 실천과 연결된다. 인간 사회는 제한된 자원으로 인해 누군가는 상처를 입고 누군가는 복을 누릴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약육강식의 인간세계에서 분노는 정신적 허탈감을 채울 수 있는 단 하나의 묘약이다. 하지만 슬로터다이크가 보기에 현대의 분노는 응집되지 못 하고 분산돼 있다. 그래서 분노가 분노답게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분노가 분노답게 작동하기 위해서
인간은 ‘죄’를 범하는 존재다. 죄가 있기 때문에 인간은 결함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이 때문에 슬로터다이크의 표현을 따르자면, ‘치욕의 윤리학’이 번성한다. 책의 제2부 제목은 ‘분노의 신’이다. 죄를 범하는 인간을 하나님은 벌하는 것이다. 신의 분노는 영복 아니면 지옥을 가리킨다. 악마가 있는 곳은 죄의 기록 보관소 역할을 한다. 신의 반대말이라고 할 수 있는 악마는 분노와 복수의 충동을 지속적으로 반복하기 위해 지옥으로 인간을 데려간다. 슬로터다이크는 “기독교인들은 마지막 분노의 날을 완벽하게 구경하며 즐기기 위해 스스로의 분노를 억제하도록 학습되었다”며 “그러므로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하느님의 분노는 언제나 상상 그 이상이었다”고 적었다.
종교만 분노를 활용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철학자인 마르크스와 수많은 혁명가들 역시 분노를 적절히 활용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모든 역사가 분노에 의한 투쟁의 역사라고 간주했다. 이미 1848년에 말이다. 지성은 분노를 필요로 하고, 분노는 지성을 요구한다. 분노라는 재료는 혁명이라는 열차가 움직이도록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사유재산을 몰수하려는 복수심의 분노를 표출하고자 했다. 공산주의의 이념을 실천하는 것보다 분노의 표출이 더 중요했다고 슬로터다이크는 분석한다.
혁명가들뿐만이 아니다. 현대사회에서 역시 분노는 좋은 치료제이다. 합리적이고 완벽한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법적 문명이라는 것은 모순투성이다. 이때 개인의 복수가 등장한다. 신의 입장에선 ‘복수는 나의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의 입장에선 복수 낭만주의가 필요하다. 애써 구축한 규칙과 법이 소용없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개인 차원의 분노일 수밖에 없다. 특히 현대사회는 경쟁과 패배의 쳇바퀴가 계속해서 돌아간다. 이때 패배자들의 분노는 극에 달한다. 따라서 분노라는 묘약은 질병에 대한 치료제이다. 슬로터다이크는 “분노에는 기본적인 감정을 받아들이는 즐거움이라는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고 적었다. 분노가 베푸는 것이다. 분노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혁명과 지옥과 묘약으로서의 분노
우리는 분노의 속성에 대해 좀 더 깊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역사의 종언』으로 유명한 후쿠야마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후쿠야마는 자유주의의 승리 후 세계의 시민들은 항상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불만족의 물결에 젖을 수밖에 없다고 이해했다. 그 이유는 인간이 티모스적인 불안의 에너지에 시달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티모스라는 것은 무엇일까. 플라톤은 티모스를 해석하기를, 자기 자신에게 분노할 줄 아는 인간의 능력(자신에 대한 무례)이라고 보았다. 티모스의 발현 방법은 첫째, 주체를 완전히 에워싸고 짓누르는 감정인 수치심이라는 형태로 표현된다. 둘째, 자신에 대한 내면적 성찰이라는 형태를 띤 분노에 찬 자기 비난이다. 티모스는 욕망도 아니고, 이성도 아니다. 열정이자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반성하며 살아가게끔 하는 기개이자 용기이다. 책에선 “자신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자신을 제어할 수 있다”고 나온다. 한편,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분노란 필요한 것으로써 영혼을 충족시키고 용기를 북돋운다고 생각했다. 분노는 지도자가 되어선 안 되고 동지로 작용해야 한다.
분노의 경제학을 찾아가다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주고받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짜란 없다. 죽음마저도 생명을 부여해준 이에게 되돌려주는 채무 갖은 것이다. 슬로터다이크는 이를 ‘분노의 사슬과 변제의 경제학’이라고 표현했다.
슬로터다이크는 분노란 “대인적, 정치적, 문화적 관계에 있어서 상호작용하는 생태계의 기본동력”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서구문명에서 분노가 발현되는 방식은 제4부에서 보듯이 중심으로부터 벗어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 하고 있다. 세력은 분산화 하면서 흩어지고 있다.
『분노는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는가』는 전체적으로 글이 매우 격정적이다. 즉, 선언적이다. 또한 2006년에 나온 이 책이 현재 어떤 의미를 가질지 고민해봐야 한다. 아울러, 번역은 조금 매끄럽지 못하고 오탈자가 있다. 그럼에도 ‘분노’에 대한 심리적, 사회철학적, 종교적 분석은 에세이라는 차원을 넘어 심오한 사색을 담고 있다. 이제까지 분노를 이렇게 심도 있게 다루진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