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한창 기승이던 2021년 [전쟁과 농업]을 읽었습니다. 읽고 저자의 생각에 굉장히 공감한지라, 오프라인 책모임을 꾸려 보려도 했었죠(제목이 좀 딱딱했는지, 제 광고에 딱 1분 호응하셨더랬죠). 그 때 제가 적었던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국제 무대에서 언어의 비빔밥 먹으며 살 인생도 아니고, 요즘 한국 출판계 외서 번역출간 주기가 짧아졌으니 외국어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전쟁과 농업: 먹거리와 농업을 통해 본 현대 문명의 그림자]를 읽다가, 처음으로 '일본어'를 몰라서 안타까웠습니다. 저자인 후지하라 다쓰시 교수에게 팬레터를 보내고 싶었거든요.
*
저는 '음식과 먹기' 관련 신간은 매의 눈으로 업데이트 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정작 가까운 나라 일본 학자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본 적 없다는 자기 반성을 [전쟁과 농업 戰爭と農業] 읽으며 했습니다. 교토대학 후지하라 다쓰시 교수는 식량체계와 식생활 연구를 통해 세계의 불공정한 시스템 파악하려는 학자입니다. 동시에, 인간을 길들이는 한 줌의 자본가와 시스템으로 일그러진 모래시계 자체를 뒤엎고 싶어하는 활동가이기도 합니다. 석사 시절부터 한결같이 민생기술(특히 농업기술)과 군사 기술이 얽혀 만든 블랙홀로 인간성이 분쇄되어 들어가는 과정에 관심을 두고 이 분야에서 계속 연구를 심화하고 있습니다. 다른 학자들이 상아탑 밖으로 나오지 않아 아쉽다던 다쓰시 교수는 직접 대학강단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가 일본의 풀뿌리 시민정치 활동가, 자연육아 모임, 원전난민 등 일반인 대상으로 진행한 대중강의를 엮어낸 책이 바로 [전쟁과 농업]입니다.
[전쟁과 농업] 전반부는 각각 "농업 기술," "폭력의 기술," "기아"로 20세기를 돌아보는 역사적 접근을 취합니다. 톱니바퀴처럼 각 장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데, "dual use 이중사용"이 그 연결 키워드입니다. 20세기 인구 증가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던 "농기계(특히 트랙터), 화학비료, 농약, 품종개량"이 군사기술 및 산업자본주의 세력과 어떻게 얽혀 있으며, 인간의 생 감각을 마비시켜왔는지를 시적인 우아함과 학자적 냉철함으로 분석합니다.
1. 19세기말, 트렉터가 등장함으로써 자연산 비료인 분뇨를 내지못하니 화학비료 개발을 촉진.2. 화학비료는 마치 실제 음식 섭취가 아닌 "영양제"라는 지름길을 통해 인체에 영양 공급하듯, 즉효성 추구하는 방식으로 땅에 양분 줌.
3. 농약은 세계대전 당시 화학무기와 뿌리를 같이함. 특히 미국은 1925제네바 의정서에서 금지시킨 독가스를 자국 목화밭에 살포함. 일본은 금지된 독가스를 1930년 대만 게릴라전 진압에서 사용하였음.
4 품종개량과 친환경 식물공장의 알려지지 않았던 대가 (친환경 식물공장 운영 위해서 필요한 에너지를 원자력발전소 통해 해결)
이 모든 기술의 기저에는 '즉효성' 극대화라는 강박이 작용합니다만, 저자는 '슬로우, 슬로우' 지효셩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삶의 방식, 식량생산 방식, 정치구조까지 전환해보자고 주장합니다. 추상의 차원에서 접근하면 해법이 모호해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먹는 음식, 음식과 맺는 관계, 먹기에 부여하는 생각 자체를 유연하게 바꿔간다면 그 파동으로 '현재 불평등한 식량체계'라는 모래시계를 깨버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실제, 혀로 농지의 흙을 핥아서 염분을 가늠했다는 농부를 할아버지로 둔 저자는 먹는 행위에 우주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현대 먹거리시스템에서야 편의점 방문이나 온라인 클릭 한 번으로 식품 구매에서 상상력이 종결되버린다고 저자는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먹기의 본래적 의미는 "인간 주도의 행위가 아니라, 우주를 몸에 관통시키는 장대한 행위 (163)"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후지하라 다쓰시가 제시한, 현시스템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실천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기업이 유발한 폐해에 항의하기
2. 유기농법을 상업화하여 변질시키지 말고, 시스템의 가치적 생태적 핵심으로 복원하기
3. 종자 지키기.
4. 발효식품 활성화
5. 먹거리의 대량 고속 생산, 고속 폐기를 부추기는 시스템에 대항하기 위해서 유통기한 늘이기.
자포자기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입니다.
논밭에 뿌리는 콩과식물은 '녹비'라고도 불립니다.
번개도 같은 힘을 지닙니다. 번개는 방전에 의해 공기 중의 질소를 암모니아로 바꾸어 비와 함꼐 토양에 뿌립니다...옛날 사람들은 번개가 치면 벼가 잘 자란다는 것을 감각으로 알고 있었던 게지요.
민간기술을 군사 기술로 전용하는 것을 '스핀온spin-on'이라고 하는데요...트랙터는 말하자면 '탱크의 어머니'인 것입니다.
*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기가 전부 폐기된다 하더라도 언제든 민간 기술이 곧바로 전쟁에 동원될 수 있는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전쟁과 폭력이 발생하기 쉬운 이 시스템에 옴싹달싹 못하게 결박되어 있습니다. 이 정도로 무기, 그리고 무기로 전용될 수 있는 민간 기술로 가득한 지구에서 전쟁이 없어진다는 것은, 재미난 장난감이 널려 있는 공원에서 아이들이 장난감 없이도 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무명한 일이겠지요.
전후(WW2)에도 굶주림은 무기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팔레스탄인에 입식한 이스라엘은 국제법에 위배되는 군사 행동과 점령을 70년 가까이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지금의 이스라엘에 의한 가자 지구 봉쇄와 포탄 공격은 굶주림을 무기로 삼는 잔혹한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일본군은 병참을 등한시했습니다....아시아 대륙과 도서부, 태평양의 섬들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식량은 현지에서 빼앗는' 현지 조달을 기본 방침으로 삼았습니다.
현재 먹거리체계의 정의는 인간이 식품을 구입하는 데서 끝납니다. 식품 기업으로서는 식품이 입에 들어가지 않아도 구입만 해주면 그만입니다...그러나 식품이 불러일으키는 피해는 입속에 들어간 뒤에 나타납니다. 이 time lag가 식품화가 품은 문제의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식사와 배설은 사실 동일한 행위의 경과를 드러내는 말일 뿐입니다.
...
교육 현장에서는 식사와 배설을 이러한 관계성 속에서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배설물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농민의 지식은 추상이 아니라 구체입니다...벼농사를 생업 삼았던 할아버지께서는 흙을 핥아 염분을 가늠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각은 기계나 화학의 발달과 함께 점점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흙을 핥는 감각에서 멀어져도 농업을 경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든 실든 그것이 20세기 농업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생물이 교류하는 세계를 모험하는 주체라기보다는 생물의 사체가 통과하고 또 많은 미생물이 서식하고 있는 하나의 취약한 관이라는 것. 요컨대, 생명이 변화하는 과정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데에서 존재의 기반을 찾아야 한다는 것. 그 기반을 전제로 시스템을 꾸리는 것, 결과를 재촉하는 세상에서 사는 것만이 인간의 유일한 양식이 아닙니다
...
'음식을 먹는 것'이 위장에서 끝나지 않는 영원성과 순환성을 가진 현상인 이상, 인간은 타인이나 다른 생물과의 즉흥적인 상호작용 속에서밖에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효성이 즉효성을 앞서는 시스템이야말로 살기 좋은 시스템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