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곱게 쓰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 못하지만, 그 사람이 썼던 특정 단어나 말의 내용을 잘 기억하는 편입니다. 제가 사람을 볼 때, 몸의 반듯함 이상으로 말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건 살면서 우연히 경험하는 에피소드로 알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도 에피소드 하나 겪었습니다. 소위 번개 모임으로, 굉장히 유쾌한 술자리를 가졌습니다. 이미 2시간쯤 판이 벌어진 술판에 제가 끼어든 셈이었는데요, 참석자 중 한 분은 완전히 초면이었습니다. 앉아 계시는 태도와 표정의 온화함, 말투와 목소리, 체화된 예의바름 등등 첫인상이 좋았습니다.

*  

그런데, 착석 후 2-30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말을 중요하게 여기는 제 안테나에 자꾸 걸리적 거리는 게 있었습니다.


"이 아줌마가 뭐라는 거야?" "이 아줌마 뭐래?"


그 (혼잣)말이 향하는 대상은, 사실 그 점잖은 분이 그날 술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초면이 여성분들, 그리고 이름 정도만 알고 있었던 여성 직장 동료였죠. 이후 4시간 정도 이어진 술자리에서 "이 아줌마 뭐래는거야?" 이 말을 족히 열 번은 들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습관적 추임새를 빼고는 그분 입 밖에서 나온 말들은 알코올 취기에도 불구하고 흐트러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기묘한 부조화가 더 강력하게 제 안테나게 들러붙었습니다. 그 말이 자꾸만 생각 나더라고요. 그랬더니 한 문장으로 해석 가능해졌습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나가서도 샌다."



감히 짐작하건대, 그분은 댁에서 아내에게 그 말, "이 아줌마가 뭐래는 거야?"를 습관적으로 써오셨을 것입니다. 술자리 에피소드 때문에 오는 저는, '항상 말을 곱게 쓰자'는, 도덕 교과서 같은 생각을 적었습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은오 2023-08-25 13: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얄님.. 그분 집에서 어떻게 말씀하실지 안 봐도 훤하네요. 어우ㅠㅠ
저는 평소에 생각한게, 행동을 예쁘게 하는 사람은 꽤 자주 볼 수 있지만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게 보이는 것 같아요(저도 예쁘게 못합니다 ㅋㅋ). 그래서 말 예쁘게 하는 사람은 확 눈에 띄고요.
말 예쁘게 하는게 어렵긴 한 것 같습니다. 근데 예쁘게 못하면 못나게라도 하지 말자...

얄라알라 2023-08-27 17:46   좋아요 0 | URL
^^ 제 말씨도 점점 유투브화 되어 가는지라, 이런 글을 올리기 사실 ‘제 얼굴에 침뱉는....‘

제가 어렸을 때 많이 들으며 컸던 속담이 ‘집에서 새는 바가지....‘ 였는데 그 분을 보고 속담이 생각나서 썼네요.

저는 은오님처럼 컬러플하게, 생동감 넘치게 말 좀 해보고 싶어요. 진지 모드여서 fun하지가 못한지라, 은오님이 부럽사옵니다

감은빛 2023-08-25 2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얄라알라님처럼 저도 고운 말을 쓰는 사람이 좋습니다.
말이 거칠고 태도가 불량하게 느껴지면 딱 기분이 상합니다.
물론 좀 친해지면 적당히 농담처럼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런 태도를 보이려면 정말 어느 정도는 친분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하는 편입니다.

얄라알라 2023-08-27 17:47   좋아요 1 | URL
ㅎㅎ예전에 한국 사회에서 ˝아줌마˝라는 호칭(?) 함의 분석한 논문을 읽었던 생각이 납니다.

˝이 젊은이야. 이 어린이야....˝보다 ˝이 아줌마야.˝가 주는 파급효과가^^;;;

감은빛님, 닉넴부터가 매우 고운말같이 느껴져요
 
빨강 연필 - 2011년 제17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일공일삼 71
신수현 지음, 김성희 그림 / 비룡소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빨강 연필은 과연 그 습득자에게 득일까? 독이 될까?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와, 실제 나의 간극을 더 벌려 놓을까? 아니면 지향하는 이상으로서 나를 이끌까? 속임수를 부려서라도 내 영향력을 키워준다는데 빨강 연필을 포기할 수 있을까? 민호는 연필을 태웠다! 심사위원들은 이를 높이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페 냅킨에 메모하며 책 읽는 습관을 후회한다. 분명 한 2~3년 전 [농경의 배신(Against the Grain)]을 냅킨을 알뜰하게 활용해 빼곡하게 요약하였건만 온라인과 오프라인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책에 우선 순위를 두는 나로서는 당첨 번호 일치한 복권을 잃어버린 심정으로 아쉽다. 메모를 소홀히 다룬 내 자신에게 화가 난다. 그렇다고 [농경의 배신]을 다시 정리하기에는 꾀가 나는지라 기억에 남는 부분만 기록해놓기로 한다.





 "약자의 무기 Weapons of the Weak"로 널리 알려진 제임스 스캇은 국가와 국가권력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정치인류학자이다. 그는 20년 이상 대학원에서 농경사회, 특히 길들임(domestication)과 초기 국가의 농경구조를 가르쳐 왔다.  2011년, 계기가 생겨서 자신의 강의 노트를 뒤 엎을 수준으로 강의자료를 업데이트를 한다. 제임스 스캇은 세계적 대학자이면서 겸손하게도 고고학, 역학, 인구학, 환경역사학, 생물학 등 여러 분야의 최신논의를 학생의 자세로 공부하여 그 결과를 독자에게 압축해준다. 이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정착과 농경'에 관한 표준서사를 폐기,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거의 전 세계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워온 바로 서사, 이동하는 수렵채집민에 비해 정착생활을 했던 농경민이 더 진보했으며, 농경이 우월하다는 주장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 이 주장은 농업혁명이야 말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sham)라고 했던 제러드 다이아몬드를 떠올리게 한다. 



[농경의 배신]을 본격 읽기 전, 예비독자로서 아래 진술 중 어떤 생각에 동의하는지 자가체크해 보아도 재미있겠다 


1-1. 수렵채집, 목축, 화전, 농경 생계양식은 진화적 발달 순서에 따른다. 

1-2. 그렇지 않다. 인간은 중첩된 복수적 생계양식을 구사하는 억척 재주꾼이다.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언제나 활에는 시위를 두 줄 걸어두는 법이다."라는 속담을 떠올려보라! 


2-1. 이동하며(떠돌며) 사는 노마드는 정착하여 발전을 이루는 정주민에 비해 야만적이다. 정주 욕구는 인간의 보편 욕구이다. 

2-2. 뻔한 진보 서사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은 어쩔 수 없이 내몰리다 보니, 정주하고 농경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1. 만물의 영장, 인간은 농업혁명과 함께 동물과 곡물을 길들였다. 

3-2. 일방향의 표현이라 동의하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간은 대상을 길들였고 길들임을 당했다. 또한 단지 동물과 곡물뿐 아니라 사람을 길들였다. 노예, 특히 재생산 능력이 있는 가임기 여성 노예를 생각해보라.


4-1. 인간은 국가체계 안에서 더 안전할 수 있다. 소속을 원한다. 

4-2. 과연 모든 인간이 그럴까? 그래왔을까? 도무스 domus에 묶이는 것을 거부하는 존재들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국가 없는 사람들'의 실례를 찾아보아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초란공 2023-08-04 2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얄라님이 이렇게 아날로그 매니아(?)셨는지 몰랐네요! ㅋ 왠지 철저하게 파일작업하고 분류해서 백업도 하실 것 같은데 말이죠!! 저는 예전에 파일 다 날아가고 나서는 한동인 머리뜯다가 어느 순간 차라리 시원하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ㅋㅋ 계속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느니 차라리 다시 새롭게 시작하자... 이렇게 되었습니다^^;;

얄라알라 2023-08-04 21:30   좋아요 2 | URL
^^ 네네, 초란공님 ˝아날로그 마니아‘라고 하셔도 어울릴지도 모르겠어요. 예전에 [이퀼리브리엄]이란 영화를 봤는데, 저 같은 사람들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아날로그로 살고 있더라고요 ㅎㅎ

이 책은 너무 재밌고 참신해서 엄청 열심히 메모했는데 속상했어요 ㅎㅎㅎ
초란공님처럼 ‘시원하다는 꺠달음‘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지만, 찾는 건 꺠끗하게 포기했습니다

어딘가 비슷한 류의 책, 고고학이나 고생물학 책에 끼어 있을 것도 같은데 ㅎㅎ

공통점을 느끼니 좋네요 초란공님^^
 

몇 년 만에 다시 읽는 책인데,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헉!' 반응. 

이번에도 똑 같은 반응을 했던지라, 수 년 전 독서 경험이 생생하게 떠오른다....드라마로 치면, 순항 전개하다가, 막 내리지 않고 캐릭터들 저녁 식사 중 대화나누는 장면으로 작품 끝. 7장 "야만인들의 황금시대" 뒤에 제임스 스캇이 좀 더 정리한 마무리 글을 써줄 거라 생각했는데, 이 태도는 떡을 만들어주었더니 입에 넣어달라는 학생의 태도와 다르지 않기에, 내가 직접 정리하며 복습하기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정보생산자가 돼라‘.
 고등교육 이상의 단계에서는 억지로 하는 공부가 아니라, 배우고 질문하는 학문이 필요하다. 정답이 있는 질문이 아니라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을 만들어 스스로 그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질문을 추구하는 연구다. - P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