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걷는 일이 잦은(카페 자주 순례하는) 나로서는 종종 동네에서 전구장식나무 사이를 지나기도 한다. 이 짧은 길을 지날 때마다 지인이 전해준 가쉽이 생각나는데, 그에 따르면 재작년 아파트 입주민 대표 위원회(?) 에서 겨우내 전구나무가 잡아먹는 전기세가 아깝다고 관행처럼 해오던 나무 장식을 생략했다고 한다. 그러자 온/오프라인 채널을 통해 입주민들이

"우리가 못 사는 사람들도 아닌데, 우아파트를 우중충하니 없어 보이게 한다(집값 떨어진다)"

"옆 단지 아파트들은 다 화려하게 조명 밝혀 놨는데 여기만 없어 보인다..."

"일 년 쓰는 관리비가 얼마인데 그깟 몇 백만 원 때문에 아파트 이미지 망치고 뭐냐?"


하며 거세게 반발했다고 한다. 2023년도 입주민 대표 위원회(?) 임원들이 대거 물갈이된 이면에 그 '조명나무장식'이 한 몫했다는 Gossip이었다. 사실이건, 부풀려진 이야기건, 나는 이 '전구장식 나무길'을 지날 때마다 왜 도시민은 불나방을 흉내 내고 싶어 하는지, 거기엔 어떤 상징성이 있는지 궁금해한다.


나 역시 아파트에 산다. 밤 산책을 할 때마다 흥미로운 관찰을 하게 된다. 시공사도, 평형도 같은 아파트. 올려다볼 때 "거기에서 거기" 다 똑같아 보이는 네모 구조의 아파트이건만 조명의 화려함이 극적으로 다르다. 어느 집은 고급 백화점 매장 천장처럼 거실 천장을 화려하다 못해 정신 아득하게 밝혀 놓았다. 어느 집은 입주할 때 기본으로 탑재된 (유행 지난) 조명을 꿋꿋하게 지키고 있다. 그 다채로운 조명 전시회를 볼 때마다 '자본주의 사회, 이 아파트 공화국에서 자신을 변별하고픈 욕구가 온통 밤에는 조명으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나는 과연 어떤 욕망을 품고 있나, 내 집 거실 조명을 올려다본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24-02-14 0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24-02-14 09: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얄라님 아파트는 조명장식이 정말 백화점 수준인데요? 저는 이 조명들을 보면 빛공해로 인한 생태계 파괴가 걱정이 되더라구요.
정말 어딜가도 돈냄새가 납니다.

꼬마요정 2024-02-14 10: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집값 때문에 밝히는 거였군요... 저는 전기도 아깝다 생각하고 밤에 너무 밝아서 안 좋지 않나 생각했는데 그런 거였군요. 저렇게 밝으면 잠 못 드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무들도, 거기 사는 작은 생명들도 쉬지 못할 것 같구요.... 돈이 최고인 세상이로군요. 씁쓸합니다.

얄라알라 2024-02-18 17:36   좋아요 2 | URL
네,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다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인데...

해당 아파트에 사는 분께 전해 들었던 에피소드가 잇는데, 짜장면(?) 먹고 배달기사님 힘드실까봐 1층 공동현관 앞에 가져다 놨더니 ˝아파트 격 떨어진다˝고 관리소장님이....^^:;;;;방송을

2024-02-16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18 17: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자란 성인치고 영어 공부에 최소 십수 년 쏟지 않은 이 없으리. 영어 사교육이 망하지 않을 나라, 초등학생이 TOFEL과 GRE 영단어를 외우는 나라. 그런 대한민국에서 나 역시 시험을 위한 영어 공부에 올인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관점을 바꾸었다. '보다 더 예의 바른 영어 표현, 보다 더 커뮤니케이션 기능에 충실한 영어를 구사하기' 목표를 바꾸니 공부하는 영역도 달라져서 요새는 "사람in" 출판사의 "결정적" 시리즈를 자주 찾아본다. 그중에서도 연휴 기간에 [영어 표현의 결정적 뉘앙스]를 읽으며 'A-ha' 모멘트를 여러 번 경험했다. 예를 들어 대다수 한국인이 'fat'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하는 'skinny'가 실은 '피골이 상접한'의 뉘앙스를 띤 단어라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휘 자체를 암기할 수는 있어도 그 이면의 문화적 상징성이나 복합적 뉘앙스까지 깨닫기는 참으로 어려운 길이라는 생각을 책 읽으며 여러 번 했다.


마침 이런 에피소드를 겪었다. 소위 "오징어 & 꼴뚜기" 껀이다.


<a href='https://pngtree.com/freepng/dried-seafood--cuttlefish--seafood_6732742.html'>png image from pngtree.com/</a>

설 명절 만난 꼬마 중, 너스레도 잘 떨고 쾌활한 녀석이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였는지 졸졸 따라다니며 이상한 소리를 한다. 다름 아닌

오징어! 오징어!

심지어 "말린 오징어" 실물을 들고 흔들며 내게 "오징어, 오징어!" 하며 따라다닌다. 꼬마가 그러는데도 '허허허!허허.......(야 이 꼬마야.....허허' 너그러운 반응이 나오지 않고 바로 부아가 치민다. 이것이야말로 속 좁은 밴댕이가 아닌가. 돌려 말한다.


꼬마야! 한국에서는 '오징어'가 사람 부를 땐 좋은 말이 아니란다..(허허허허허)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묘용 두상에서처럼 3D 입체 이목구비를 가지지 않았기에 더더욱 "오징어"는 욕이 된다....라는 말을 꼬마에게 직접 하지는 않았다.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이미 눈빛에서 차가운 레이저가 뿜어나가는 것을 감지한 꼬마는 이번에는 다른 단어를 골랐다.

https://www.needpix.com/photo/749093/

꼴뚜기! 꼴뚜기!


아니! 그 많고도 많은 단어 중에도, 그 많고 많은 어류 중에 왜 저 아이는 하필 나를 꼴뚜기라 부르는가. 기분 나쁘게. 저 녀석은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라는 옛말을 들어봤을 턱이 없지


꼬마가 장난하는 걸 알면서도, 점점 빈정이 상하는 나는 [영어 표현의 결정적 뉘앙스]를 다시 떠올린다. 꼬마가 내게 포식자 이미지 "상어"나 귀여운 "돌고래"라고 놀렸으면 덜 신경질 났을 것 같다. 뉘앙스는 어느 언어에서나 중요하다. 사회생활이 필요한 어른뿐 아니라, 세뱃돈을 기대해야 하는 꼬마에게도 !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24-02-11 16: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등학생이 GRE단어를? 정말요? 세상에나. 어려서부터 영어에 학을 떼게 할 일 있나요.
그 꼬마 맹랑하네요. 친하고 싶어 그러는 것이라면 ‘으른‘된 사람으로서 우리가 이해를 해줘야겠네요. ^^

반유행열반인 2024-02-11 16: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걸 안 갚아주시고 그냥 두세요?ㅋㅋㅋ 저라면 오징어야! 하면 왜 해파리야? 왜 삼엽충아? 오징어랑 놀래? 하고 갚아주지요 ㅋㅋㅋ 부모가 듣고 있으면 더더욱 ㅋㅋ엄마 해파리한테 가 임마! 이러고 ㅋㅋ

transient-guest 2024-02-13 0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가 아는 단어가 별로 없었나요?? 근데 그 애는 왜 다른 사람을 그런 표현으로 부르는 건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아는 단어가 그런 것들만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아서 더더욱.
 

요즘 세상에 1500원이면 우유 200cc 사면 끝이다. 컵라면도 1500원 넘는다. 그런데 1500원짜리 커피를 파는 무인카페가 있다. 커피 맛, 좋다. 게다가 점주분께서 매장 관리를 어찌나 철저하게 하시는지 "무인카페"라 적고 "18시간 유인 카페" 수준이다. 점주님께서 매장에 거의 항상 나와 계신다. 이 카페 단골 지인들의 정보를 종합해서 과장한 말이다.

오늘 딱 24시까지만 책 보다 올 생각에 21시 40여 분에 도착했는데, 음료를 뽑아들고 보니 10분 후 마감이다. 허망함. 차라리 23시까지 운영하는 카페에 갈걸...

동시에, "무無인 카페의 18시간 유有인 카페 화"를 선도하신 점주님께서도 쉬실 시간이 필요하니 22시 마감, 나쁘지 않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음료만 챙겨들고 카페를 나오려는데 웬 남자의 전신 사진이 게시되어 있다. 출입문 쪽에도, 게시판 쪽에도, "05:46"라는 타임라인과 함께. 호기심이 동해 읽어보니 사진 속 남성은 무인카페에서 절도를 했고 점주님께서는 원만한 해결을 희망하셨다. 훔쳐 간 물건을 다시 되돌려 놓으면 법적 대응까지는 안 가겠다는 메시지를 남기셨다.

무인 카페에서 도대체 훔쳐 갈게 뭐가 있지?

놀랍게도 도난당한 물품은 "메모리폼 방석 2개"

검색해 보니 개당 약 1만 원대 제품인 듯하다. 이름 모를 숱한 시민의 엉덩이를 보듬어주었던 그 방석을 몰래 가져가서 쓰면 기분이 찜찜하지 않을까? 남이 신던 양말이나 속옷을 훔쳐 입지 않듯 방석도 절도 품목으로 안 어울리는데? 다 큰 어른이 새벽녘 몰래 무인카페에서 방석을 훔쳐 가는 그 마음은 뭘까?


갑자기 고등학교 때 생각이 난다. 한 반에 50여 명씩 꽉꽉 들어차 있던 그 시절 교실, 아침에 등교했더니 '수학의 정석' 2권 (기본 + 실력)이 온데 간데 없었다. "수1, 수2...기본 + 실력"을 쌓아놓으면 희대의 벽돌책으로 변신했던 [수학의 정석] 시리즈는 워낙 무거워서 다들 학교에 두고 다녔다. 내 책 뿐 아니라 반 친구들 책 전체가 싸그리 사라졌다. 옆 반, 그 옆 반 '수학의 정석'도 사라졌다. 어떤 도둑인지는 몰라도 아마 꽤 큰 자루(?? 트럭?)를 가져왔어야 백여 권의 책을 제대로 훔쳤을 것이다. 그런 걸 다 훔쳐 가나? 헌책방에 팔면 얼마나 받는다고 고3 수험생 책을 훔치나?

그러고 보니, 내가 봉사하는 도서관에서도 "분실"이라는 이름 하, 꾸준히 책이 사라진다. 아주 간혹이지만 막 나온 따끈따끈한 소설책 세트가 사라질 때도 있다. "책도둑은 도둑이 아녀.... 허허허..." 하며 넘어가는 분도 있지만, 나로서는 분개만 할 뿐 결코 용서가 안 된다.

별걸 다 훔쳐 가는 세상.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ransient-guest 2024-02-13 0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둑은 도둑이죠...액수나 종류에 상관 없이...
 

재미 삼아 꼬마들에게 "나를 잘 관찰하면 알 수 있었을 틈새 비밀 5가지"를 퀴즈 형식으로 만들어 서로 맞추기 놀이를 제안했다. 놀랍게도 한 친구가 꽤나 세상물정에 밝은 눈을 드러냈다. 그 아이가 낸 퀴즈의 한 문항은 다음과 같다.



Q]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돈은?

A] 땀 흘려 번 돈


솔직히 "땀 흘려 돈 벌다"라는 말을 어렸을 때 관용적 표현으로 배웠지 현실 일상 대화에서 들어본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만큼 "땀 한 방울 안 흘리고도 폭격받는 돈 (횡재)"라는 상상이 표준이 된 세상인지라 "땀 흘려 번 돈"이라면 왠지 덜 친숙하다.

그 친구에게 물었다. "너한테 왜 땀 흘려 번 돈이 중요하니?" "어떻게 하면 땀 흘려 돈을 버는 거니?" 어린이는 동네에서 빈병 주워다 팔면 번 돈이 아까워 저절로 절약이 될 것같다는 꽤 어른스러운 답변을 내 놓았다.


신용카드는커녕 본인 계좌도 없어 보이는 어린 친구가 "땀 흘려 번 돈"의 소중함을 믿는 게 신선해서 이후 내내 그 문구가 귓속에 울렸다. 그러던 차 마침 독특한 책을 보았다.

[밥 춤]




일을 긍정하는 활기찬 이미지의 일러스트레이션이 가득한 그림책이었다. 공사장에서 무거운 모래를 나르는 일꾼도, 구두를 닦는 일꾼도, 밥상을 머리에 이고 배달하는 일꾼도 모두 일이 너무나 즐겁다는 듯 폴짝팔짝 발레 춤추듯 일하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땀 흘리는 일의 소중함을 평가절하하는 세상에서 그 응원의 메시지가 좋아서 한참 일러스트레이션을 구경했다. 동시에 짠하고 서글픈 마음도 올라왔으니 그렇다면 나는 정녕 "땀 흘리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셈인가? "땀 흘리는 일"의 가치는 10년 후, 20년 후 어린이들 사이에서 어떻게 이야기될까? "땀 흘리는 일"을 모티브로 미래에도 그림책이 나올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무리 사회가 급변해도 중심추처럼 자리에서 크게 안 벗어나주었으면 좋겠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곡 2024-01-01 0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얄라얄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얄라알라 2024-01-01 13:57   좋아요 1 | URL
서곡님, 2024년에도 좋은 글 꾸준히 올려주실테지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눈호강도 하고 배워갑니다.

서곡님 새해복 많이 받으시어요

루피닷 2024-01-01 0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얄라알라 2024-01-01 13:56   좋아요 2 | URL
루피닷님 프사 넘 멋있어요^^ 새해에 딱 어울리는 사진이네요.

감사합니다. 루피닷님께서도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cyrus 2024-01-01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하면서 번 돈의 소중함을 어른이 되기 전에 일찍 알면 좋아요 ㅎ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얄라알라 2024-01-01 13:56   좋아요 0 | URL
오! cyrus님 전 정말 저 Q&A를 첨 듣고 놀라서 열흘이 다 되어가도록 계속 그 말이 불쑥불쑥 떠올라요.
제가 왜 그 말에 놀라는지 돌이켜보면
저는 이렇게 어른이 되도록 돈을 어떤 맘으로 대하고 어떻게 모아야할지( ㅋㅋ) 생각하지 않고 무대책 살아왔기 때문인가봐요.
cyrus님 말씀에 동감입니다.
어른이 되기 전에 일찍 아는게 필요했어요 ㅎ

새해복 많이 받으시고, cyrus님의 2024년, 풍성하고 따스한 깃털이 많아지는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래픽 노블 [샐리 존스의 전설]을 무척 좋아하고 여기저기 많이 추천해왔기에 덩달아 "산하" 출판사에 호감이 크다.



 "산하세계문학" 시리즈 중에서도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갔다]는 예전부터 읽고 싶었다. 어린 친구들에게 선물하려고 십여 권을 한 번에 주문하려다 구하기 어려워 포기했던 적도 있다.


12월 31일 연말 모임 장소로 이동하는 짬짬 비는 시간에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갔다]를 드디어 다 읽었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여성은 자신의 삶보다 가족 구조나 타인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요구(강요) 받습니다. 때문에 여성이 원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답니다. 가난한 여성이나 대도시 밖에서 사는 여성은 더욱 그렇지요.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는 여성이 자신을 위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쉼 없이 추구하는 과정을 잘 보여 줍니다.. 



이라며 추천한 그림책이다. 실존 인물을 모델 삼고 있다. 그리고 쓴 작가 사라 룬드베리는 "외롭고 힘든 길을 씩씩하게 걸어간 베타 한손을 생각하며"라며 첫문장을 시작했다.


Photograph of the Swedish artist Berta Hansson (1910-1994)


 

스웨덴 화가인 베타 한손은 어린이의 교육이 권리로 인식되기보다 어린이, 특히 가난한 농가의 소녀는 노동력으로 인식되던 시대에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폐결핵을 앓는 어머니 외에는 베타 한손의 예술가적 재능과 관심, 영민함을 높이 사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 미술 시간에 복사기로 찍어낸 모범적 당근 색칠하기를 거부하고 "우리 집 당근들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요. 제가 심은 당근을 그려도 되나요""라고 질문하는 베타 한손에게 담임 선생님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선을 벗어나지 않게 색칠해라)"라고 근엄하게 지시한다. 우유를 짜고 상을 차리고 동생을 먹이고 집안 청소를 하느라 바쁜 베타 한손의 마음 한편에는 늘 다른 세계가 있었다.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해 답답한 베타 한손에게는 남들에게는 온통 아담과 하느님만 보이는 그림에서 하와가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등 뒤에 하와가 있다.

자기가 만들어질 차례를,

자기도 눈에 보이기를,

생명을 얻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도 가끔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갔다] 본문




중앙에 서지 못한 배경이지만 중심으로 나갈 열망을 충분히 키웠고 준비까지 하는 하와처럼, 어린 소녀는 내면의 뜨거움을 따라 집 밖으로 나갔다. 매우 도발적이나 조용한 방식의 저항을 통해서. 아빠와 마을 아저씨들이 일을 마치고 와서 드실 점심 식사를 일부러 새카맣게 태우는 동안 꿈쩍 않고 책만 읽으면서 무언의 시위를 했다. 지금부터 100년 전, 가난하고 작은 여자아이의 꿈이나 재능, 열망 따위에는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을 시대에 그렇게 해서 알을 깨고 나온 베타 한손은 용감했다.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