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자 윤여일, 1990년대론






1. 90년대 규정
■ 단수가 아닌 복수plurality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이질적.시간성들이 교차하고 혼재하고 갈등.
■ 90년대 언제부터?
: 1987년, 1991년에 주목! 
: 대비법, 단절론의 유행_ 1980s 대항문화 vs. 1990s 문화주의
: 1999년 밀레니엄 신드롬

2. 문학
■1980s 군부정부의.언론기본법으로 비판언론탄압받고 잡지 폐간됨.
■ ˝문학동네˝ 1994 창간, ‘투사-사상가-선각자로서 작가‘에서 시장의 관심을 받는작가로
■ 문단권력논쟁
: 문언유착_ 조선일보와 문학동네
: 크게 보면 비단 문학계 뿐 아니라.학계, 문화계, 정치권, 언론계 등 여러 영역.내.권력의 문제

04. 사상
■1980년대 ‘불온서적‘ 사회과학서
■ 포스트모더니즘.등장
■지적.주체성의 문제, 탈식민화
■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분기하는.사상계: 키워드는#타자#욕망#감각#몸#해체#개성#개별자

05. 문화
■ 소비대중문화의 출현과 확산
: 대중문화지의.범람.그.자체가.특징적인.대중문화현상


『비평과 전망』은 창간 이후 출판자본을 갖춘 대표적 문학지 문학과 사회」, 「창작과 비평」, 「문학동네』와 그 편집위원들을 ‘문단권력‘으로 지목해 줄기차게 비판했다. 이들만이 아니라민음사, 실천문학사, 세계사 등이 발간하는 당시 문학지는 주식회사인 출판사와 공생관계에 있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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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9-30 2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90년대가 정말 잡지의 르네상스
시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은 잡지라는 매체가 존재하는
지도 모르겠네요.

문단권력의 특징 중의 하나는 자신
들은 절대 권력이 아니라고 부인하
는 게 아니겠습니다. 아이러니입니다.
 

[몽실언니]를 도돌이표로 반복해 읽으면서, 불과 70여 년 전 우리 사회에서 쓰이던 어휘, 정서, 인간관계의 스킬 등에 크게 이질감을 느끼는 스스로를 반성했다. 물질문화의 변화 속도에 비해 정서적 측면의 변화속도는 당연히 더 느릴 것이라 생각해왔는데, 내가 [몽실언니] 인물들의 정서적 반응과 인간관계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두려움도 느꼈다. 21세기, 2~3배 빠르게 재생하기의 속도로 내달리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 앞으로 나 역시 이해받지 못하고 변화를 파악하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이 크다.

권정생 선생님의 책을 한 권 더 찾아 읽었다. 일부러 6*25 전쟁을 배경 삼은 작품으로 골랐다. 추천사에 반가운 존함이 보인다. "보리" 윤구병 선생님(사장님^^)께서 출판사 식구분들께 권정생 선생님 작품을 그림책으로 내보자고 제안하시어 세상에 나온 책이다.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작가 권정생을 이런 방식으로 추모하고 애정 하시는 윤구병 선생님의 마음이 각별하게 느껴졌다. (아쉽게도 이 책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권정생 선생님께서 영면하셨다고 한다)


영혼이 되어 산천을 떠도는 어린이 곰이와 북군 병사의 전쟁 회상담이 담담하게 펼쳐지기에 더욱 처연하게 아픔이 전해지는 이야기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일러스트레이터 이담 작가님의 그림으로 그 정서가 더 진하게 피어오른다.

우리는 못나게시리 그 오누이끼리 싸운 거야. 호랑이한테 서로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누나는 동생을 호랑이에게 떼다밀고 동생은 누나를 떼다밀고........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아저씬 누구랑 전쟁을 하셨어요?

곰이가 물었습니다.

-국군하고 싸웠지.

-국군은 어떤 사람들이었어요?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야.

-어느 나라를 지키는 사람인데요?

-이름만 다르지 나하고 똑같은 사람이야.

-똑같다니요?

-다 같은 단군 할아버지의 자손들이니까.....

- ........

- 다만 나는 북쪽에서 살았고, 그들은 남쪽에 살았다는 것밖에 다른 게 없었어.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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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책 읽은 지 며칠 지났거나 실물 책이 옆에 없을 때, 리뷰 쓰기 망설여집니다. 기억에 의존해서 작가나 작품을 곡해한 리뷰를 남길까 봐 두려운 거죠. 소설 장르가 더욱 그러한데, [소금 아이]가 지금 제게 그런 망설임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읽은 지는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제가 이희영 작가를 오해한 글을 쓰게 될까 조바심이 나기 때문이겠죠. [소금 아이]를 읽기 전 '맑음'이었던 제 기분은 소설을 다 읽은 후 급격히 심란해졌습니다. 방어할 틈도 없이 명치를 세게 가격 당한 기분이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책 읽기 전만 해도 발랄해 보였던 작가의 실물 사진조차 음험해 보였습니다. 솔직히 무서웠죠. 동시에 작가에게 미안했습니다. 첩보원을 주인공 삼은 소설을 썼다거나 살인자의 수법을 자세히 묘사했다고 작가가 그 인물들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독자로서 당연한 상식이죠. 하지만, 이희영 작가의 [페인트]에 이어 [소금 아이]를 나란히 읽은 제게는 두 작품의 기저에 흐르는 음울함을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청소년을 주 대상 삼은 두 소설이 생소할 분들을 위해 가볍게 소개 드리자면, [페인트]는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저출산 한국 정부가 입양아를 키우면 월급제로 돈도 주고 연금도 주는 제도를 운용한다는 설정으로 전개됩니다. 당연히 입양되는 아이들은 입양자들 대다수가 돈 때문에 자신을 데려간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가족애愛가 아닌 '너 좋고 나 좋고' 전략으로서 모르는 타인과 맺어집니다. 부모에게 버려진 주인공 Janu301은 자신의 뿌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1월, January에 버려졌기에 자신의 이름이 제누라는 것만 알뿐. 흥미롭게도 소설 [페인트]의 어느 페이지에서도 Janu301은 부모에 대한 애증이나 그리움을 전혀 내비치지 않습니다. 자칫 소시오패스처럼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자기 앞가림을 잘하면서 독립적으로 성장하지요.


Janu301 ● 李水

이희영의 최신작 [소금 아이]에서도 주인공 "이수"는 아버지를 모릅니다. 아버지를 궁금해하지도 않죠. 게다가 출생의 비밀이란 게 얼마나 허접한지 듣고 나서는 차라리 귀를 막아버리고 싶을 정도였죠. 주민센터에서 출산장려금이라도 탈 심산으로 신생아 등록을 하러 갔던 어머니가 마침 보았던 달력에서 "수요일의 水"자를 보았기 때문에 이름이 "이수"가 되었죠. 이수는 부모에 대한 어떠한 기대도 원망도 애증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페인트] 중반부에서 주인공 제누는 자식을 해하는 권력욕에 취한 원숭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 자식이 커서 자기 자리를 위협할까 두려워하는 원숭이지요. [소금 아이]에서 아래 세대의 주인공인 이수는 처단의 방식으로 단죄합니다. 작가는 피와 피비린내가 난무하는 이 청소년 소설 [소금 아이]를 자신의 노트북 폴더에만 고이 모셔놓으려 했었답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유년기가 '회색, 그중에서도 검은색이 많이 섞인 회색'이었고 그런 유년기를 자식에게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아 노력했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페인트]와 [소금 아이]를 나란히 읽다 보니, 작가가 빵 부스러기 흘리는 헨젤처럼 소설이라는 분신을 통해 상처를 조금씩 드러내고 흘림으로써 자신을 치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잘못 이해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미리 작가에게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읽기엔 정서적으로 거리감이 있었지만 작가가 치열하게 써 내려간 [소금 아이]가 분명, 저며진 심장이 소금으로 절여진 청소년들에게 공감해 주는 목소리로 다가갈 거란 확신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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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냅킨에 메모하며 책 읽는 습관을 후회한다. 분명 한 2~3년 전 [농경의 배신(Against the Grain)]을 냅킨을 알뜰하게 활용해 빼곡하게 요약하였건만 온라인과 오프라인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책에 우선 순위를 두는 나로서는 당첨 번호 일치한 복권을 잃어버린 심정으로 아쉽다. 메모를 소홀히 다룬 내 자신에게 화가 난다. 그렇다고 [농경의 배신]을 다시 정리하기에는 꾀가 나는지라 기억에 남는 부분만 기록해놓기로 한다.





 "약자의 무기 Weapons of the Weak"로 널리 알려진 제임스 스캇은 국가와 국가권력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정치인류학자이다. 그는 20년 이상 대학원에서 농경사회, 특히 길들임(domestication)과 초기 국가의 농경구조를 가르쳐 왔다.  2011년, 계기가 생겨서 자신의 강의 노트를 뒤 엎을 수준으로 강의자료를 업데이트를 한다. 제임스 스캇은 세계적 대학자이면서 겸손하게도 고고학, 역학, 인구학, 환경역사학, 생물학 등 여러 분야의 최신논의를 학생의 자세로 공부하여 그 결과를 독자에게 압축해준다. 이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정착과 농경'에 관한 표준서사를 폐기,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거의 전 세계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워온 바로 서사, 이동하는 수렵채집민에 비해 정착생활을 했던 농경민이 더 진보했으며, 농경이 우월하다는 주장은 신화에 불과하다는 것. 이 주장은 농업혁명이야 말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기(sham)라고 했던 제러드 다이아몬드를 떠올리게 한다. 



[농경의 배신]을 본격 읽기 전, 예비독자로서 아래 진술 중 어떤 생각에 동의하는지 자가체크해 보아도 재미있겠다 


1-1. 수렵채집, 목축, 화전, 농경 생계양식은 진화적 발달 순서에 따른다. 

1-2. 그렇지 않다. 인간은 중첩된 복수적 생계양식을 구사하는 억척 재주꾼이다.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언제나 활에는 시위를 두 줄 걸어두는 법이다."라는 속담을 떠올려보라! 


2-1. 이동하며(떠돌며) 사는 노마드는 정착하여 발전을 이루는 정주민에 비해 야만적이다. 정주 욕구는 인간의 보편 욕구이다. 

2-2. 뻔한 진보 서사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은 어쩔 수 없이 내몰리다 보니, 정주하고 농경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1. 만물의 영장, 인간은 농업혁명과 함께 동물과 곡물을 길들였다. 

3-2. 일방향의 표현이라 동의하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인간은 대상을 길들였고 길들임을 당했다. 또한 단지 동물과 곡물뿐 아니라 사람을 길들였다. 노예, 특히 재생산 능력이 있는 가임기 여성 노예를 생각해보라.


4-1. 인간은 국가체계 안에서 더 안전할 수 있다. 소속을 원한다. 

4-2. 과연 모든 인간이 그럴까? 그래왔을까? 도무스 domus에 묶이는 것을 거부하는 존재들은 항상 있게 마련이다. '국가 없는 사람들'의 실례를 찾아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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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3-08-04 2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얄라님이 이렇게 아날로그 매니아(?)셨는지 몰랐네요! ㅋ 왠지 철저하게 파일작업하고 분류해서 백업도 하실 것 같은데 말이죠!! 저는 예전에 파일 다 날아가고 나서는 한동인 머리뜯다가 어느 순간 차라리 시원하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ㅋㅋ 계속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느니 차라리 다시 새롭게 시작하자... 이렇게 되었습니다^^;;

얄라알라 2023-08-04 21:30   좋아요 2 | URL
^^ 네네, 초란공님 ˝아날로그 마니아‘라고 하셔도 어울릴지도 모르겠어요. 예전에 [이퀼리브리엄]이란 영화를 봤는데, 저 같은 사람들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아날로그로 살고 있더라고요 ㅎㅎ

이 책은 너무 재밌고 참신해서 엄청 열심히 메모했는데 속상했어요 ㅎㅎㅎ
초란공님처럼 ‘시원하다는 꺠달음‘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지만, 찾는 건 꺠끗하게 포기했습니다

어딘가 비슷한 류의 책, 고고학이나 고생물학 책에 끼어 있을 것도 같은데 ㅎㅎ

공통점을 느끼니 좋네요 초란공님^^
 

몇 년 만에 다시 읽는 책인데,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 '헉!' 반응. 

이번에도 똑 같은 반응을 했던지라, 수 년 전 독서 경험이 생생하게 떠오른다....드라마로 치면, 순항 전개하다가, 막 내리지 않고 캐릭터들 저녁 식사 중 대화나누는 장면으로 작품 끝. 7장 "야만인들의 황금시대" 뒤에 제임스 스캇이 좀 더 정리한 마무리 글을 써줄 거라 생각했는데, 이 태도는 떡을 만들어주었더니 입에 넣어달라는 학생의 태도와 다르지 않기에, 내가 직접 정리하며 복습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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