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플래트닝 Unflattening]

온라인 친구분의 책 곳간에서 소개받은 후, 시간차를 두고 두 번 읽었습니다.

매우 놀랍게도 저자 닉 수재니스(Nick Sousanis)는 이 만화 형식의 논문으로 컬럼비아 대학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생각하는 방식, 제도권에서 학문하고 학위로 인정하는 방식, 텍스트와 시각 우위로 위계 세우는 방식 등등에 도전하는 비주류의 시도가 'PhD dissertation'으로 인정받았다니, 솔직히 충격입니다. 그 과정에 관여하고 협업한 많은 이들의 유연성에도 감탄합니다. 




저자는 현재 샌프란시스코 주립대학교수이자 인정받는 예술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가 운영하는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https://spinweaveandcut.com/

닉 수제니스는, 이름뿐인 "융합"조차도 잘 팔리는 한국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언플래트닝" 융합을 보여줍니다. 번역자 배충효는 "Unflattening"을 "입체화"로 옮겼는데, 저는  "Unflattening"은 예측 가능하고 단조로운 평면성과 이분적 사고를 극복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용어는, 2차원 평면공간을 배경으로 한 소설 [플랫랜드 Flatland](1984)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 같습니다.



 











모든 작품이 그러하지만, [언플래트닝]은 특히나 더 직접 책장을 넘겨 보셔야 그 진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본문 외, "작가노트"와 "참고문헌"을 샅샅이 훑으며 행복했습니다.

세상 해석하는 방식이 독창적이고 다름을 밀어내지 않고 부드럽게 포용하는 어른을 만나면 항상, '당신은 어떤 환경에서, 무엇(누구)의 영향받으며 자랐나요?' 이 질문이 떠오릅니다. 쉬운 말로, '엄마아빠가 어떤 분이세요?'


그 궁금증이 [언플래트닝] "작가노트"를 읽으며 상당히  해소되었거든요. 작가노트에는 저자의 형아, 엄마, 아빠가, 등장한답니다. 저자의 아버지 역시 제도권 교육현장에서 혁신적 방식으로 교육하려 고군분투하셨던 분이고, 어머니도 평범하신 분은 아닐 겁니다. 닉 수제니스가 그린 배는, 부모님이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드신 카누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하니까요. 형아 존 수재니스 역시 어린이 닉에게 '원더랜드'급 상상력을 키워준 짝꿍입니다. 


[언플래트닝]

마지막에는 3페이지에 걸쳐 스케치가 담겨 있습니다. 본격 집필 전, 전체적인 구상을 했던 흔적인가 봅니다. 텍스트와 길게 나열된 인용에서 권위를 얻는 기존 방식과 얼마나 구별되게 박사 논문을 구상하고, 실물로 완성해냈는지 추정하게 해줍니다. 

이 소중한 책을 알게 해준 온라인 친구에게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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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12-15 1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도 읽고 싶네요!! 멋지다!! 마지막 올려주신 스케치는 우리 막내 생각이 나네요. 좀 과장해서.^^;;;

얄라알라 2022-12-15 23:24   좋아요 0 | URL
^^ 아! 라로님, 저는 라로님의 자제분께 ˝엄마아빠가 어떤 분이세요?˝ 묻지 않아도 되겠네요.
라로님께서 길러내신 어머니이시니까요.

전 그림을 안 그려봤고, 그래서 못 그리기 때문에 더욱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질투나게 부럽습니다^^;

서니데이 2022-12-15 18: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얄라알라님, 알라딘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축하합니다.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에도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얄라알라 2022-12-19 11:25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저는 북플마니아는 아니고, 서재의 달인에 뽑아주셨어요.
이렇게나 저렇게나 모두 감사드릴 일이지요. 덕분입니다. 서니데이님께서도 꾸준히 포스팅 쉼 없이 올리시는 와중에 이웃님들 살뜰하게 챙겨주셨으니 북플 마을을 따뜻하게 한 공로상도 받으셨음 좋겠네요^^

해피 월요일 보내세요

서곡 2022-12-15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 이 책 읽었어요 전자책으로 봤습니다 꼼꼼하게 읽지는 못 했는데 쓰신 글 참고해야겠습니다!

얄라알라 2022-12-19 11:24   좋아요 1 | URL
네, 서곡님께서도 이미 접하셨군요. 전반부에 참신함에 ˝홀리듯˝ 읽다가, 후반부는 약간 김이 빠지는 느낌을 두 번 리딩할 때마다 느꼈지만, 그래도 놀랍고도 놀라운 시도라 평가하고 싶어요^^

다음에 또 읽으신다니 좋습니다요^^

겨울호랑이 2022-12-15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얄라얄라님 2022 서재의 달인과 북플마니아 선정 축하드려요. 항상 좋은 글과 따뜻한 답글로 지난 한 해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한 연말연시 보내시고,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

얄라알라 2022-12-19 11:23   좋아요 1 | URL
^^ 겨울 호랑이님, 서재를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추운 겨울 실감하게 하는 날씨인데 건강 유의하시고
내년에도 자주 서재 들락날락 하겠습니다. ^^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transient-guest 2022-12-16 0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22년 선정을 축하드립니다. 논문을 만화형식으로 출간하고 학위를 받았다니 꿈처럼 들리네요. 세상이 계속 바뀌고 있다는 걸 실감합니다.

얄라알라 2022-12-19 11:2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transient님,
저 책에 담긴 활자를 타이핑 하면 A4 몇 페이지나 나올까? 생각하며 읽었는데, 짧은 글에 이처럼 심오한 생각들을 녹여냈다는 게, 그 작업을 혼자 했다는게 참 놀라웠어요.

지도교수와 커미티의 개방성에도 놀랐고요^^

transient님도 축하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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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자마 파티에 동생들을 초대했더니, 짐채만한 메이크업 박스를 들고 왔서 놀랬더라는 지인의 말에 함께 웃었다.

좋아하는 건, 무거워도 무겁지 않은 법이다. 

2리터 생수 6개 묶음에 휘청하는 엄마가, 12kg 아가를 가뿐하게 안아 올리듯, 

나는 책 더미를 안아 들고 산에 오른다. 

무겁지 않다(고 세뇌한다). 하긴 맥주 6캔이었던들, 안 무겁다 했겠지? 

*



브루노 라투르 [실험실 생활: 과학적 사실의 구성]

레슬리 컨 [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 등등.

이번에 초대한 책들은 하나같이 가볍지 않다. 

[바디 멀티플]이 가장 반가운 책이지만, 산을 내려오도록 어떤 책부터 읽을지 마음을 정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Born into my grandmother]

[우리는 셀크남]

[아기가 태어나면]

[How to prevent the next pandemic]

을 이미 나란히 읽고 있기 때문이다....

책 욕심도 독이 될 수 있다고 빨간 버섯이 혀를 멜롱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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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7-25 1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좋아하는건 무거워도 무겁지않자요 공감합니다 ㅎㅎ 앗 숲모기도 조심하세요 알라님 진짜 독하더라고요 ㅠㅠ

얄라알라 2022-07-26 16:58   좋아요 2 | URL
아. 맞아요. 숲 모기가 바지를 뚫고 들어온다고 최근 알라딘 서재 댓글에서 보았어요. 신발도 뚫고 들어오죠~

좋아하는 건 무거워도 무겁지 않고
좋아하는 책은 종일 봐도 피곤하지 않고...

그레이스 2022-07-25 11: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빨간 버섯, 왠지 무섭네요! ㅎㅎ
제가 첫아이 안고 있는것 보시고 쌀 한자루 주고 가져가라하면 가져가겠냐고... 자식이니까 안고 가는거지! 하신 엄마 말씀이 생각 납니다.
책 더미와 맥주...ㅋㅋ

얄라알라 2022-07-26 16:59   좋아요 2 | URL
쌀 한자루 들라면 들겠냐...ㅋㅋ
이 말씀 아주 귀에 윙윙, 많이 들어본 기분인데요^^

복날 보양식보다는 맥주가 땡깁니다

그레이스님 시원한 오후 보내시고 계시길
 


유토피안 미래를 보여주는 영화, 뭐가 있을까요? 0.001%의 '호모 데우스'가 화성을 식민화하고 99.999 % 호모 사피엔스들은 [메트릭스]의 배양기 안에서, 스크린을 두드리며 도파민을 얻는 미래? 왜 온통 음울한 상상뿐일까요? 영화나 소설뿐만 아닙니다. 어린이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환경 교육' 과잉 부작용인지, 지구적 재앙과 멸망을 숙명으로 믿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청소년에게 "재활용자원분리배출" 협조를 구하면, '(분리배출 하나 마나) 어차피 쓰레기 되는데 왜 해요?' 하는 회의적인 역질문을 듣습니다. 비록 아이들이 예의를 갖춰 말하지만, 마치 '어른들만 아는 진실이 아닙니다. 어른들이 이미 더럽혀놓았으면서, 우리에게 분리 배출 교육은 왜 시켜요? 어차피 뒤엉켜 다 쓰레기로 처분되는 걸 어른들은 이미 알잖아요?'라고 항의하는 것 같아 뜨끔했던 적도 있습니다. 아마도 신문 기사나 환경 교육 등을 통해, 어린이들이 음울한 미래관과 어른에 대한 불신을 다져온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최근 "20대"만 가입할 수 있다는 글쓰기 모임에 "실수로" 가입했다는 40대 활동가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은 환경 문제로 인한 스트레스와 불안감 면에서 20대와 40대 사이 세대 차이를 느꼈다고 합니다. 20대가 훨씬 더 암울한 미래를 상상하고 피해의식과 무력감을 크게 느낀다는 뜻입니다. 그 추정이 설득력 있다면, '왜 그럴까? 젊은이들이 왜 미래를 더 어둡게 생각할까? 환경의 측면에서, 어떤 미래를 상상할까? 암울한 상상이 지배적이라면 누가 그 마음을 다독여주어야 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우연히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그림책을 만났습니다. [The Extraordinary Gardener]라는 제목 그대로, 표지에 아름다운 꽃나무가 그득합니다. 화초에 물 주는 꼬마가 주인공이고요. 대단한 반전이나 특별한 에피소드 없어도 이 그림책에 제 마음이 끌린 이유가 있습니다. 주인공 꼬마, Joe는 항상 초록의 미래를 꿈꿉니다. 상상 밖으로 나와 작은 실천도 하며, 변화를 기다리는 여유도 있습니다.





그랬더니, 상상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바로 "Joe's world grew from ordinary to extraordinary!"랍니다! 상상만으로는 임박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희망 한 스푼의 영혼 부스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왕이면 함께 상상해서, 희망의 집합적 힘이 얼마나 큰지 함께 경험하고 싶어집니다. 오랜만에 그림책 포스팅을 올리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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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라이프 2022-06-03 18: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얄라님 ^.^ 오랜만에 얄라님 글에 댓글을 남기게 되네요. 아마 많은 분들은 이대로 개발 논리에 함몰되어 탄소를 무분별하게 배출하다보면 지구 환경이 과연 어떻게 될지 장담 못하다는 점은 다들 인지하고 계실텐데요. 자본주의가 막대한 소비를 바탕으로 존속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환경 이슈에 대한 다국적 기업의 이익이 상충되고 그런 결과로 도쿄 의정서라든지 파리 기후 협약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죠. 지금도 태평양에 거대한 쓰레기 섬이 나날이 확장하고 있는데, 사실 우리는 후손들의 미래를 담보 맡아서 살고 있는 거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미국 같은 경우는 의회나 정치인들이 환경론자들과 기후전문가들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은 다국적 기업의 이해관계가를 몹시도 중요하게 고려하는 나라라서 반환경 로비에도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연유로 현재의 세태 반영이 미래의 환경에 대한 거의 대부분의 작품과 논저에 반영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한편으론 인류가 자본주의를 제대로 개선하지 못하는 이유에는 이익논리에 너무나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자본주의와 환경문제는 거의 모든 주제에서 맞물려 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얄라알라 2022-06-03 18:20   좋아요 3 | URL
베터라이프님^^ 반갑습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은 까페에서 1회용기 쓰지 않기 등 다양한 노력이 강도 높게(?) 이뤄지고, 실제 분리배출 국민협조도 잘 이뤄지고 있다고 들었어요. 다만 국토면적 대비 배출하는 쓰레기 양이 어마무시인지라,
베터라이프님께서 일깨워주시는 대로 글로벌 차원에서의 얽힘 문제도 무시할 수 없고 심각하지만
당장 이 땅에서 발생되는 쓰레기도 참 걱정이네요.


[침묵의 봄] 읽고, 제가 레이첼 칼슨 세대와 달리, 어쩌면 새 소리에 둔감하다, 아예 새소리 등 청각적 풍요에 대한 경험과 기대 자체가 없다는 것을 느꼈거든요.
꼬마들의 반응을 보면서 제 낮은 기대치보다, 더욱 낮은 기대치를 보았어요.


베터라이프님 서재 놀러가면 좋은 책 추천 받을 게 많을 텐데, 고르려면 고민이 되겠죠?^^

베터라이프 2022-06-03 18: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쓴 리뷰 책들은 아주 재미없는 것들이네요 ^^; 재미없는 사람이 쓰는 재미없는 리뷰이니 뭔가 환상적인 콜라보 같네요 ㅠㅠ 항상 얄라님의 글을 잘 보고 있습니다. ^^

바람돌이 2022-06-04 13: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문제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찾아나가려고 할 때 생기는 문제가 이런 것들이죠. 저는 역사를 가르치다 보니 근현대사를 가르치면서 이런 자괴감을 많이 느껴요. 우리나라는 왜 이래요? 하는..... 그래서 최근 몇년간은 그런 자괴감이 아니라 변화의 가능성과 실제를 보여주기 위한 노력들을 많이 기울이는 편이고요. 어떤 문제에서든 문제를 집어내는 것이 변화의 노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지로 가는 게 너무 쉬운 길인듯싶기도 하고요.

얄라알라 2022-06-04 14:59   좋아요 1 | URL
아...다른 영역에서도 비슷한 ‘체념, 자포자기 우울의 정서‘를 느끼시고 계시는 군요.

비단 어린이들뿐 아니라, 제 자신도 그런 하락의 정서를 자주 느끼는 것 같아요. 방금, 쪽글 하나를 올리고, 스크롤 내리다가 바람돌이님께서 주신 댓글 읽었거든요. 방금 쓴 제 글도, ‘어쩔 수 없지‘의 톤이었던 지라, 반성하면서도....‘그럼 어떤 게 필요한 걸까?‘ 고민하게 됩니다.

바람돌이님 행복한 토요일 보내시기를

감은빛 2022-06-05 0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쩌면 이미 늦었을 거라는 생각이 자주 들어요. 제가 학생들에게 환경교육을 시작한 때가 이미 10년 전이었어요. 초등학교 때 저에게 기후변화 강의를 들었던 제 큰 딸은 이제 고등학생이구요.

최근 2년동안은 코로나 때문에 학교로 강의하러 가질 못해서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하지만, 마지막 학교 강의를 했던 2019년에는 청소년들에게 열심히 노력하면 바꿀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도 속으로는 매우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너희들의 미래는 훨씬 더 심각하고 어둡고 무서울거야. 미안해.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기후학자들이 말하는 티핑 포인트는 곧 다가오거나 벌써 지난 것은 아닌가 싶어요.
 

22년 5월 23일, 하루를 꼬박 [관통당한 몸]을 읽으며 보냈다. 4-5시간 집중하면 완독할 두께였는데, 늦은 밤에서야 작가 에필로그에 이르렀다. 두 가지를 깨달았다.

*

첫째, 나는 (관련 자격증 및 학위도 없거니와) 상담 관련한 일에 부적격자일 것이다. [관통당한 몸]을 읽어나갈수록 타인의 고통이 전해져서, 가슴은 뻐근해지고 머리가 뜨거워졌다. 잠시 책 읽기를 멈추고 셀프 마사지와 심호흡 하기를 수 차례. '활자'라는 성긴 체로 걸러낸 증언을 읽기만 해도 가슴이 뻐근해오는데, 몸으로 기억하는 당사자들은 어떻게 견뎠을까? 아니나 다를까 많은 생존자(혹은 희생자)와 그 가족은 심적 고통으로 인해 건강을 잃거나 제2의 죽음을 호소했다.

*

두 번째 깨달음. [관통당한 몸]을 먼저 읽은 친구분들의 충고를 새겨 들었어야 했다. 그분들은 내게 호흡 조절해가며 읽으라 충고했다. 하지만 욕심을 앞세웠던 나는, [관통당한 몸]을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예민한 손끝을 통해 '타인의 고통'이 심장까지 타고 올라왔다. 맑은 공기가 필요했다. 산에 올랐다. 읽다가 힘들어지면 하늘 한 번 올려 보기를 반복하며 오후를 채웠다.

 


5월 24일.

다음 날 꿈에서도 나는 [관통당한 몸]을 두고 사람들들과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대학 구내식당의 백색 소음을 배경으로한 채, 나는 탁자 맞은편편 상대들에게 "문제는 젠더 폭력이잖아요!"라고 쏘아 붙였다. 꿈에서 깨자마자 바로 자기 검열한다. 아니다. 젠더 폭력 이상이다. 전시 강간은 본질적으로 "인간 존엄을 모욕하는, 인간에 대한 폭력"이다.


Cortona Rape of the Sabine Women

Pietro da Cortona,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크리스티나 램(Christina Lamb)은 30여년 차 분쟁지역 전문 기자이다. 그녀는 전쟁이란 이름 아래 행해지는 "느린 살인"(강간 폭력)은 극악해지는데 왜 근절책은커녕 현황 파악조차 더디게 이뤄지는지 파헤치고 싶어했다. 그래서 쓴 책이 <관통당한 몸>이다. 이 책에는 인간 존엄을 구이용 새처럼 꼬챙이로 관통하고, 찢고, 태우는 '호모 사피엔스'의 야만적 시도가 생생히 그려진다. 동시에, 그런 비인간화에 저항하며 '사람'으로 다시 일어서고, 다음 세대나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저항도 보여준다. 저항의 장엄함을, 크리스티나 램은 겸손하게 뒤로 물러나 묘사하지만, 실은 그 자신이야말로 용감한 저항 자기장의 중추이다.

 

Európa Pont,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램은 비인간성을 파헤치는 자신의 직업을 거리두기하며 성찰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일을 하거나 그런 이야기를 지어낼까 생각했다. 혹시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 무엇이 진짜인지 더는 알지 못하는 것일까?...그리고 우리는 어떤가. 조금 더, 조금 더 끔찍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어떤 괴물을 키우도록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닌가? 포위됐던 콩고 동부에서 막 구출되어 비행기에 가득 태워진 벨기에 수녀들에게, '여기에 강간당했고 영어 할 줄 아시는 분 계세요?'라고 외쳤다는 그 텔레비전 리포터와 우리는 정말 다를까? (114쪽)  

"우리(전쟁지역 기자)는 정말 다를까?"

 .물음표로 끝낸 저자의 질문에, 독자로서 감히 "다르다"라고 대신 답하고 싶다. 5월 23일을 오롯이[관통당한 몸]에 헌신하고도 그 날 밤 꿈, 또 다음날에도 "그들의 전쟁터Their Battlefield"에서 연약한 유기체 과녁이 된 여성(Our Bodies)을 생각하는 까닭은, 크리스티나 램의 균형잡힌 시선 덕분이다. 30여 년간 현장에서 숱한 사람들을 만나고 참상을 목격하고, 글로써 증언해온 램의 인공위성 시야는 "관통당한 몸"을 여러 층위에서 생각하게 해주었다. 실로, 성숙한 저널리스트요, 신뢰 가는 인격이다 .



램의 인공위성 시야는 독자에게 여러 갈래 생각을 유도한다.

"관통"의 주체와 객체/ "몸"의 개별성과 복수성 / 가해자와 피해자, 다시 피해자와 생존자 / 인간(성)과 비인간(성) / 생명의 밭으로서 재생산력 vs 파괴의 과녁이 된 재생산력 / 구호단체(구호자)의 위선과 선의 / '피(혈통)의 순수성' 신화가 빚어내는 야누스 효과/ 무지한 대중과 각성된 활동가는 한 끗 차이 / 오명 씌우기와 이름의 정치학 / 어머니 그리고 할머니의 연대 / 채굴할 실물 자원지도와 강간 고위험 지역 지도의 겹침 등등


상당한 메모를 했건만 말끔한 정리가 어려운 이유는 [관통당한 몸]을 읽은 정서적 충격 때문이라고 변명하겠다. 이 혼란스러운 마음- 인간의 잔혹함에 대한 역겨움과 동시에 인간 회복력에의 경이, 폭력 앞에서 본능적 공포와 불안 반응,복수심,그리고 복수심의 과녁을 돌려 생산적 힘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교육받은 목소리 등- 이 정리되면, [관통당한 몸] 리뷰를 다시 쓰겠노라, 숙제를 남긴다.


글을 마치며 짧게 내 '분노의 대상' 변화를 돌아본다. [관통당한 몸] 초반부에는 여성의 몸을 전쟁터 삼는 개별 가해자들에게 복수심을 느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 램의 목소리리를 따라가다 보니, 바둑판 위 개별 돌들에 분노를 집중해서는 바둑판을 읽을 수 없다는 걸 이내 깨달았다. 예를 들어 저자는 두 차례나 "머리에 꽃을 꽂은 여인"에 현혹되어, 로힝야 사람들을 "천천히 태우는 제노사이드(106쪽)"을 외면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Foreign and Commonwealth Office, OGL v1.0OGL v1.0, via Wikimedia Commons


또한, 램은 보스니아 내전 당시 강간 당했던 여성들이 목숨을 걸고 증언을 한들, 그들에게 전해졌어야 할 기부금은 "학회와 호텔 숙박비"(209쪽)로 유용되고, 약자를 도우러 파견되었다는 인도주의적 단체 직원들이 현지 여성들에게 저질러온 역겨운 성범죄를 폭로한다. 


 

[관통당한 몸]을 읽고 나니, 칸 영화제에서 출현한 "Stop Raping Us" 시위자를 다룬 기사가 곱게 보이지 않는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온 몸으로 절규하는 시위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위선적이어서 싫다. 라스베가스 누드 쇼 구경하듯 희롱하는 시선으로 훑는 턱시도, 그 옆에는 '내 몸이 아닌 그들의 몸에나 일어날 예외적 사건'이라는 거리두는 화이트 드레스.

위선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기에, 뜨끔하고 아프다. 그렇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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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5-23 15: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엄청 두껍던데 하루만에 읽으셨다니 대단하십니다~!!
중간에 얄라님 특유의 넵킨 메모 사진은 멋지고, 마지막 사진은 너무 고통이 느껴지네요 ㅜㅜ

얄라알라 2022-05-23 16:56   좋아요 4 | URL
ㅎㅎ 그러게요. 저 점심도 커피와 쿠키로 때웠어요. 이 책 읽다가 ㅋ


2022-05-23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persona 2022-05-23 15: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꿈에서조차 분노하고 계셨군요. ㅠㅠ 개뱔 돌들이 집중하다간 바둑판을 읽을 수 없다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저역시 돌에만 집중해 개별적으로 분노하느라 판을 못 읽는 사람인 거 같아요. ㅠㅠ

얄라알라 2022-05-23 16:55   좋아요 4 | URL
그리스 신화, 우리가 명작이라고 배워온 많은 그림 속, 지나온 인간의 시간 속에 유사한 폭력이 얼마나 지독하게 계속되어 온걸까 생각하면....
그냥 막 심장이 아파요.

persona님, 무슨 그런 겸손한 말씀을요.
저는 분노도, 공감할 수 있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연대 무기라 생각해요. 같이 분노해요^^

singri 2022-05-23 16:1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아직 끝이 안났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더 힘들어요 흑 😭

얄라알라 2022-05-23 16:54   좋아요 3 | URL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크리스티나 램의 얼굴을 찾아보았어요.
제가 상상했던 굳어있고, 직선형의 표정이 아니라, 온화한 곡선형의 표정이라
작가의 정신적 단련됨과 내공을 짐작했지요.

저는 책 읽는 내내 인상을 얼마나 썼던지....

제가 아직 갈길이 멉니다. singri님, 힘내서 꼬옥 꼬옥 완독하시길 응원드려요

거리의화가 2022-05-23 16: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얄라알라님의 마음 이해할 것 같아요 본문 보면서 저절로 주먹이 쥐어지는ㅠㅠ 개인을 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시스템을 개선하고 바꾸지 않는 한 분노로만 그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됩니다 읽느라 고생하셨어요!

얄라알라 2022-05-23 16:52   좋아요 3 | URL
예, 거리의 화가님

저는 무엇보다도, 콩고의 영유아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상상조차 불경한지라 제 심장을 제가 어쩌지 못하겠더라고요.

HIV/ADIS 관련해서 영유아강간을 (그 ‘낙후된‘ 지역 ‘도덕관념‘ 떨어지는 사람들의) ˝cleansing myth˝때문이라는 식으로 개인 가해자를 비난하는 논리가 있잖아요? 하지만, 콩고에서 영유아가 집중 당하는 지역이 왜 하필 희소한 자원 밀집분포지와 겹치는지, 너무나 분노해서 지금도 자판을 두드리기가 힘들지경입니다...

coolcat329 2022-05-23 18:1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미리보기로 읽다가 중단했습니다. 힘든 책이에요 ㅠㅠ

얄라알라 2022-05-24 10:54   좋아요 3 | URL
먼저 읽으신 분들께서 다들 쉬엄 쉬엄, 힘드셔서 호흡 고르고 읽으셨던 이유를 알겠더라고요

coolcat님 그래도 꼭 이책 완독하시기를 응원드립니다!

페크pek0501 2022-05-24 16: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보기 힘든 게 있더라고요. 이런 책 완독은 무지 힘들 것 같습니다.
마음을 잘 다스리며 읽어야 할 듯요. 몰랐다가 밝혀지는 진실 중에는 잔인한 것이 많은 법이죠.

얄라알라 2022-05-25 13:08   좋아요 3 | URL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요즘 <고잔동 일기>, <가장 외로운 선택>...마음이 무거워지는 책들을 읽게 되네요.
그래도, 피하지 말고 저자분들께 감사한 마음으로 읽으려합니다

청아 2022-06-03 21: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얄라알라님 이 페이퍼를 이제야 읽었습니다.ㅠ.ㅠ
우크라이나에서 전시강간이 일어나고 있다는 기사를
보면서 이 책이 생각나곤했어요.
읽는 것 자체가 힘든 책이지만 고통받은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그런 연대와 귀기울임이
작게나마 치유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특히 마지막 사진과 문장...너무 공감됩니다!!
수고하셨어요ㅠ.ㅠ

mini74 2022-06-04 12: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알라님 고생많으셨어요. 너의 몸은 전쟁터란 바바라크루거의 문장이 생각났어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