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세 먼지 걷힌 4월 주말에는 놀아야 하건만, 오후 내내 [수학자 Scythe]를 읽었다.




◆ Scythe ◆


뜻을 알더라도 실제 회화에서 발음했던 적도, 앞으로도 쓸 일 없어 보이는 단어이다. 그런데 닐 셔스터먼은 'scythe'를 무려 3부작 소설의 1권 제목으로 삼았다. "Scythe"는 사람의 생명을 인공적으로 앗아갈 수 있는 특권층(수확자들)을 은유함과 동시에 그들이 실제 물리적으로 동원하는 무기를 대유한다.

[수확자]는 작년에 읽었던 [Dry]에 비한다면, 덜 입체적이었다. [Dry]에서처럼 조숙하고 예민하면서도 제 앞가람 잘 하는 10대 소녀를 주인공 삼았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덜 사회비판적이고 더욱 미국적이라고 느꼈다. '(소설이) 미국적인 게 뭐냐?'라고 공격해 온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1) 장면 전환 빠르고 2) 폭력 수위 높아 자극적이며 3)'선택받은 자'의 아우라에 집중할 뿐, 평범한 사람들은 무개성 조연 집단 취급하는 할리우드 영화와 겹친다.(닐 셔스터먼은 영화화될 염두를 두고 원작을 집필했을까?)

그래도 1) 설정 자체의 참신성 2)캐릭터들의 어조까지 변별적으로 살려낸 이수현 번역가의 출중한 언어감각 3) 닐 셔스터먼 특유의 재미 전략 덕분에 즐거웠기에, 중간에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https://youtu.be/sA6xEszg5EM


저자의 인터뷰 영상을 살펴 보니, 닐 셔스터먼은 기존 디스토피아가 '세계가 어떻게 잘못 돌아가고 있는가?'에 집중했다면 다른 방향에서 상상의 실타래를 풀었다. 인간이 통제하지 못했던 문제들에서 해방된 미래. 전쟁, 질병, 가난, 심지어는 노화와 죽음까지 해결된 세상에서 인간은 '사망(+살인) 이전 시대'의 예술작품과 일상에 스며 있던 정서를 더는 이해하지 못한다. 이전 세대 필멸자들이 강렬한 생존욕구와 절실함과 짜릿한 충동을 느꼈다면, '자연적 죽음'이 '수확자들'이 의례적으로 수행하는 인위적 수거로 대체된 이후 사람들은 수확자에게 운명을 내맡긴다. 수확자들은 인구를 인위조절하기 위해, 다양한 살인 테크닉을 동원하여 사람들을 죽이는데 결코 이 행위를 '살인'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고결하고 신성한 의무라고 여기며 심지어 10계명까지 준수한다.

영화 [스타워즈]도, 소설 [Dune]도, [수확자]도 왜 그리 '선택받은 자'의 비범성에 집중하는지 모르겠다. 그래야 이야기가 술술 풀리기는 하겠지만, 특히나 [수확자]에서는 선택받은 집단으로서 '수확자들'과 그들에게 언제라도 '수확당할(=죽을)' 수 있는 사람들의 대비가 '사자 앞의 토끼들' 꼴로 묘사되고 있어서 배알을 뒤틀리게 하는 지점이 있다. 또한 특권층 '수확자들'의 정기모임인 콘클라베는 위엄과 정통성 있는 행사로 그려지는 반면, '음파교도'라는 소수자들의 종교는 희화화되었다고 느꼈다. 현대 미국소설을 몇 권 읽어본 적도 없는 게으른 독자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수확자]에서 닐 셔스터먼이 제기하는 화두 중 가장 흥미롭고, 저자의 통찰력에 공감했던 부분은 인간의 정치였다. 수확자 10계명, 수련과 시험, 자기성찰과 외부의 감시 등 다양한 규제 메커니즘을 설정해두었더라도, 사람의 생명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절대반지를 손가락에 낀 수확자들은 권력과 과시욕, 엘리티시즘에 취약하다. 취하지 않도록 고군분투하며, 연민, 생명존중, 공감 등 소위 인간적 정서를 다 활성화시키지만 그 안에서도 변종이 생긴다. 기술 발달 이전 시대의 자연적인 죽음을 인위적으로 조율한다면서, 어떻게 오감칠정 五感七情 느끼는 인간 수확자에게 절대반지를 맡길 수 있는가? 타락이 예견되어 있는데.... [수확자] 시리즈의 2권과 3권에서는 닐 셔스터먼의 통찰이 좀 더 정교해질지 기대 반 우려 반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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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4-11 0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저는 수확자를 수학자로
잘못 봤네요 이론...

그런데 Scythe(사이쓰~)는
서양판 저승사자들이 들고 다
니는 흉기가 아닌가요...
살발하네요 고저.

개인적으로 미쿡 소설가들은
모두 영화 판권을 겨냥해서
집필하지 않을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되면 좋고 안되고 그만~

얄라알라 2023-04-11 09:22   좋아요 1 | URL
저도 알면서도 발음은 자꾸 ˝수학자˝로 되더라고요.

소설에서는 ˝살인˝이나 ˝자살˝이라는 용어는 마치 구시대의 부끄러운 무엇인양 쓰지 않고
대신 ˝수확˝ ˝자기를 거둔다˝라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레삭매냐님 합리적 의심 굉장히 합리적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받았던 인상이 마치 영화 속성 과외 받는 느낌이기도 했겠군요 ㅎ

감은빛 2023-04-11 1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수학자라고 읽고, 수학이랑은 안 친한 관계로 이 글을 건너뛰려고 했는데, 수확자였군요. ㅎㅎ
 


벚꽃 흐드러지게 피고 꽃 이파리 날렸던 4월 첫 주말, 남도로 통하는 고속도로마다 승합차며 대형버스가 즐비하다. 추돌사고로 인한 교통정체도 3건이나 경험했다. 광활한 대륙도 아니건만, 왕복 10시간 30분을 꼬박 안전벨트를 메고 있었다. 남도 여행길에 읽을거리 2권 챙기길 자~알 했다. 특히 [어슐러 K. 르 귄의 말]은 탁월한 선택. 

 



책 선배님들이 별 다섯 ★★★★★ 꽉 채워 칭송한 인터뷰집이다. 사실, 인터뷰집은 읽을 땐 재미있어도 묵직하게 가라앉는 문장이 많지 않아서 피하는 장르였다. 어슐러 K. 르 귄 역시 서문 제목을 "인터뷰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로 달았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인터뷰어는 출판사 홍보팀에서 책에 관해 쓴 보도자료를 읽고 오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발췌 문장까지 갖춰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그 발췌 문장을 크게 읽고 나서 진지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 여기에서 하신 말씀에 대해 더 이야기해주시죠."

그런 인터뷰어들은 책을 한 권 쓴 유명인들과는 잘 맞는다. 그 유명인이 실제로 그 책을 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터뷰어도 실제로 읽지 않았으니까.


9쪽


하긴,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인터뷰이 이름조차 제대로 몰라 실시간 방송에서 실수를 하는 D급 인터뷰어를 본 적 있는데, 숱한 인터뷰 요청을 받아왔을 문학계 거장은 어떠할까? 다행히 어슐러 K. 르 귄은'데이비드 네이먼David Naimon'이라는 A급 인터뷰어를 만나 "배드민턴 경기와 같은 좋은 인터뷰"를 생의 말미에 진행했음은 그 자신에게도, 팬들에게도 큰 축복이다. 게다가, 그 인터뷰집을, 무려 13권 째 르 귄의 저작을 번역하고 서신까지 주고 받았던 이수현이 우리 말로 옮겼다는 점에서 한국 독자들에게 행운이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사이 물 흐르듯 이뤄지는 언어의 즉흥연주, 교감이 경청으로 화답 받는 찐케미 인터뷰의 정석을 보여주는 [어슐러 K. 르 귄의 말]. 평생 이심전심 해온 지피지기일지라도 친구의 깊은 생각을 이처럼 유연하게 끌어내긴 어려울 텐데... 인터뷰어 데이비드 네이먼이 어려서부터 어슐러 K. 르 귄을 읽으며 만남을 상상해 왔기에 가능한 케미가 아닐까 한다.

저는 제가 쓰는 글의 소리를 들어요...몸 안에서 글이 울리면, 스스로가 쓰는 글을 들으면 올바른 리듬을 들을 수 있고, 그러면 문장이 깔끔하게 이어지는 데 도움이 됩니다. (18)



이야기는 갈등을 다룬다고,

플롯을 갈등에 바탕을 둬야만 한다고 말하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심각하게 제한하는 거예요.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인 선언이기도 하죠. 삶은 갈등이고, 그러니 이야기에서 정말 중요한 건 갈등뿐이라고 말이에요.

(41)


[왜 미국인은 드래건을 두려워하는가?]였고, 딱 집어서 모든 판타지를 상상력이 많이 들어간 모든 소설을 단지 오늘의 주식시장을 다루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이들용이라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폄하하는 미국인의 경향에 대해 슨 글이었어요. 삶에 대해 즉각적인 이득만 따지는 태도죠.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을 어디까지 대변할 수 있는가? 제 아버지는 인류학자였고 이 질문과 정면으로 부딪혔어요. 이해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동의 없는 가져다 쓰기가 되어 버리는가? (116)

우리는 다른 존재의 마음을 상상할 수 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상대를 멋대로 이용하지 않도록, 매 걸음을 아주아주아주 조심해야죠. (118)


무엇보다 나는 [어슐러 K. 르 귄의 말]을 통해 이수현 번역가를 다시 만나 즐거웠다. 젊은 시절 미모가 대단했던 르 귄 만큼이나 유난히 또렷하고 까만 눈동자가 아름다웠던 이수현님. 진중하고 사려깊은 성품을 반영하는 저음의 음성과 밝은 표정, 오랜 세월이 지나 활자로 다시 만난 이수현은 여전히 사차원 재치와 지적인 매력을 글로 품고 있었다. 어슐러 K. 르 귄(1929년 출생)과 이메일 서신을 주고 받가가, 작가가 루즈벨트 대통령 재임 기간의 사람임을 인식하고는 "내 마음속의 유교인이 깨어나서, 평생 그를 어슐러라고 부르기는 불가능해져버렸고!"(140)라고 적다니! 사차원 매력이 여전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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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3-04-05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매우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처음에 어스시 이야기로 시작해서 구할 수 있는 작품은 닥치는 대로 구해서 읽었어요. 여타 다른 판타지나 SF와 다른 잔잔함과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톨킨과 함께 판타지와 SF를 고전적인 의미에서 ‘문학‘의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린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인터뷰집이라서 아직 안 구했는데 저도 조만간 책 주문할 때 구해야겠습니다. 자동차여행은 비행기와는 다른 과정의 묘미가 있어 저도 좋아합니다. 바깥 경치도 살피면서 음악도 듣고 노래도 하고 뭔가 이것도 행공처럼 명상하는 느낌일 때가 있어요. 즐거우셨겠습니다

얄라알라 2023-04-06 12:07   좋아요 1 | URL
transient님께서는 이미 친숙하시고 좋아하시는 작가이시군요
전 그 유명한 인류학자의 따님이라는 데 먼저 호기심을 느껴서 읽게 되었는데, 사실 본격적 작품은 아직 접해보지 못해서 천천히 시작하려 합니다. transient님 서재에 가면 좋은 정보가 많겠는걸요?^^ 미리 감사드립니다

레삭매냐 2023-04-05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거리여행에는 고저 책과
함께 하시는 모습, 아주
부럽습니다.

저도 언젠가 남도에 가보고
싶네요. 기차 타보고 싶은데
말이죠 ^^

한 번역가가 한 작가를 줄창
번역하는 것, 찬성합니다.

얄라알라 2023-04-06 12:06   좋아요 1 | URL
˝고저˝ 부럽습니다...라고 말씀해주시는 레삭매냐님의 언어감각 덕분에 왠지 제가 이틀 여행에 책 읽기 자알 한 듯 으쓱해집니다.

이수현 작가님, 최근에 닐 셔스터먼 신작도 (꽤 두꺼운데) 다 번역해주셔서 읽으려 대기중입니다.

레삭매냐님께서는 기차도 좋아하시네요^^ 기차타고 동해 여행도 해보고 싶어집니다

감은빛 2023-04-11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왕복 10시간 반이라!
저도 동해 바다로 여행 다녀온 지 일주일 밖에 안 지났는데,
또 어딘가로 놀러가고 싶네요.
바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화요일이네요.
 


[분노와 애정], 원제 [ Mother Reader: Essential Writings on Motherhood]

한국어판 표지는 숙성된 와인의 여유로움을 환기시킨다면, 원서 표지는 수험용 참고서인양 딱딱해 보여서 의외였다. 대화 중 이 책, [분노와 애정]을 추천하던 지인의 시선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는데, 순간이었지만 눈빛에 복합적 감정이 스쳤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엄마됨의 기록이라는데 제목이 어쩌다가 [분노와 애정] 일까? "넘치는 애정"이 아니고 말야? 묻는 동시에 답이 뻔해 보였다. 분노의 대상이 무엇일지.......


표면적으로는,

밤 잠 설치게 하며 엄마 몸의 하얀 영양액을 요구하는 아가의 울음소리, 삶의 궤적을 기록할 15분을 오롯이 빼내기 어렵게 분절되는 엄마됨의 시간감각, 혹은 출산 후에도 바로 사라지지 않는 임신선이나 제왕절개수술의 꿰맨 흔적처럼 몸의 변화에 대한 분노이겠다. 엉뚱한 위장 표적이다. 분노의 표적을 정밀 분석할 여유가 없는 엄마들이 쉽게 떠올리는 표면상의 이유일 뿐, 사실 분노는 더 깊은 데, 잘 드러나지 않기에 흔들기 쉽지도 않은 저 깊은 데를 향한다. 게다가 화학성분 최소화한 비누로 씻은 아기의 피부는 얼마나 달콤한지, 분노는 순수한 애정 그리고 기쁨과 얽혀서 체로 걸러지지도, 쉽사리 분리되지도 않는다. "and 접속사"가 필요한 까닭이다.

그러니 [분노와 애정]이라는 제목은 합당하다



[분노와 애정]에 수록된 16편을 마음 가는(호기심 크게 느낀) 순서대로 읽었다.

  • 도리스 레싱 Doris Lessing, 소설가

  • 마거릿 미드 Magaret Mead, 인류학자

  • 실비아 플라스 Sylvia Plath, 시인

  • 에이드리언 리치 Adrienne Rich, 시인.

4편까지 읽던 중 갑자기, 흉내 내고 싶어졌다.

*****************

도리스 레싱 Doris Lessing


[다섯째 아이 The Fifth Child]의 작가 도리스 레싱의 자서전 <Under My Skin>(1994)에서 발췌한 글이다. 그녀는 모국 영국의 식민지였던 남아프리카 남로디지아(현 짐바브웨)에서 자랐고, 마찬가지로 백인이자 파견공무원이었던 남편과 남로디지아에서 신혼살림을 꾸렸다. 도리스 레싱은 피부색이 어두운 현지인들을 '하녀, 하인'으로 부려먹으며 앙칼지게 소리 지르는 백인 부인이 되기엔 많이 깨어 있었으며, 당대(20세기 중반) 시대정신이었다는 "출산 넘어 또 출산, 즉 겹출산"을 운명으로 수용하기에는 너무도 자기중심적이었다. 자서전에서 그녀는 오만의 수준으로 자존감을 드높인인다.


나는 프랭크의 예쁘고 영리한 새 아내였고 프랭크는 그런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나 또한 사람들이 나와 활기 넘치는 내 아기를 보고 감탄하는 것이 좋았다(21)

*

존이 태어난 지 9개월이 되어 곧 두 발로 서려고 했을 때, 우리는 둘째를 낳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내가 이러한 삶에 머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진지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파리나 런던에서의 자유로운 삶을 꿈꿀 뿐이어싸. 난 이곳에 속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몰랐을 것이다. 나는 누가 봐도 모든 걸 잘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여성은 누구였는가? 티거는, 밝고, 저돌적이고, 재미있고, 유능하고,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었다. (23)

*

나는 유모차에 존을 태우고 몇 시간이나, 몇 시간이나 걸었다. 그런 느낌이었다. 총명한 젊은 여성이 하루 종일 작은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만큼 지루한 일은 없다. 나는 유모차를 밀면서 머릿속으로 시를 썼다. (24)


[마가렛 미드 Margaret Mead]



미국 우표로 발행되었을 만큼 명사였던 마가렛 미드는 인류학자로서의 냉철한 분석력과 시적 감수성을 사회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데도 활용했다. 특히, 20세기 초 중반 당대 학계에서는 주변부의 소재였던 아동기 및 양육법의 비교문화적 연구를 선구적으로 수행했다. 그녀의 글 "할머니가 되어"에서도 인류학자로서 습관화된 거리두기 태도가 잘 드러난다.


직접 아기를 낳았을 때 나는 내가 편견을 갖고 어린 아이들을 관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정하면서도 객관적인 시각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대신, 나는 아이들 하나하나가 내 아이보다 나이가 많은지 적은지, 몸집이 더 큰지 작은지, 더 얌전한지, 똑똑한지, 능숙한지를 판단했다. 곤란했다. 아이를 낳음으로써 엄마에 대해 상당히 많이 배웠다고 느꼈지만 어떤 면에서는 덜 객관적인 관찰자가 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70)

*

하지만 나 자신을 아동기를 연구하는 전문가가 아닌 그저 한 명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내 딸과 손녀가 어린이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에 미친 영향을 상당히 달리 묘사되어야 한다. 나는 상쇄해야 할 편견이 아니라, 특별하고 아마도 언젠가는 사라질 민감함을 얻었다.(70)

[분노와 애정]_ 마가렛 미드 편


뼛 속까지 인류학자인 미드는 손녀 세반 마가릿이 태어나자, '할머니됨'의 경험과 감정을 역시나 인류학적으로 해석한다.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생물학적 후손의 탄생에 관여하는 것이 낯설다(66)" 라는 문장에서 나는 이 할머니에게 다시 한번 존경심을 느낀다. 개인적 에피소드조차도 더 큰 맥락 속에 위치시켜 해석하려는 체화된 직업 정신! 마가렛 미드는 자신의 행위가 아닌, 딸의 출산 행위를 통해 자신의 지위가 바뀜(즉 할머니가 됨)을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한다. 익숙함 공식을 뒤틀어 새롭게 보는 인류학자의 천진함을 미드에게서 엿본다.

나머지 14편의 에세이에 대해서는.....일기장 기록을 대신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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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1 0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3-02-25 2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좀 특별하게 느껴지는 글이네요.
출산후 느낌이 분노까지는 아니지만 아주 처음부터 확 애정을 느끼지는 못했던것 같아요.;; 그래서 죄의식을 느꼈던듯요.^^

얄라알라 2023-02-26 00:04   좋아요 1 | URL
역시나, 그레이스님 예리하심!!^^

저는 도리스레싱의 [다섯째 아이], 좀 더 이해되었어요.
실제 도리스 레싱이 두 아이들 놔두고 떠나잖아요..
저 에세이를 읽고 소설도 더 잘 이해되더라고요
 

2023년 2월 키워드로 [밝은 밤]을 남긴다. 사진의 배열 순서가, 이 소설과 나의 인연 변화를 보여준다. 처음엔 실수로 [긴긴밤]을 읽었다. 독서모임 책제목을 "베스트셀러 & 밤"이라는 조합으로 기억했다 벌인 실수였다. 다른 참여자가 테이블 위에 [밝은 밤]을 꺼내놓는 걸 보자, 나는 과장된 높은 음색으로 헤헤거렸다. 미안하다 못해 당혹스러웠기에...



.'덤벙덤벙' 실수 때문에 독서 모임이 한 주 미뤄진 미안함을 상쇄하고자, 아니 너무 재미있어서 차오르는 사심으로 [밝은 밤]을 한 번 그리고 두 번 읽었다. 한국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세대를 거쳐 이어지는 가족 파노라마를 그렸다는 점에서 이민진의 [파친코]와 비교하는 리뷰도 보았다. 하지만, 메뉴판만 비슷할 뿐 속맛이 상당히 다르다고 느꼈다. [파친코]에는 댕기 머리에 한복 자락 나부끼는 주인공이 등장하건만 [밝은 밤]에 비한다면 치킨 스튜를 더한 퓨전 육개장 맛을 낸다. 도리어 [밝은 밤]에서는 청국장 냄새를 맡았다. 역사적 서사는 생략된 채 주로 인물 간 관계 및 심리 묘사에 초점을 두는 데도 말이다. 오해는 피했으면 한다. 나는 [파친코]의 열혈 팬이며, 맛이란 본래 맛보는 사람마다의 미뢰 밀도에 따라 편차가 크니까. [밝은 밤]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속내, 고구마 3개는 꾸역꾸역 삼킨 듯 답답한 속내를 꾹꾹 눌러두거나 역으로 화산분출시키는 방식이 묘하게도 "한국적"이라고 느꼈다.



사람은 인생의 침잠기에 울림이 큰 작품을 쓰는 걸까? ***, ****, 장영희 선생님, 올리버 색스의 글을 읽으며 그런 궁금증을 품었더랬다. 최은영 작가 역시 [밝은 밤]을 쓰던 시기가 성인기의 가장 어려운 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 시간의 절반 동안은 글을 쓰지 못했고 나머지 시간 동안 [밝은 밤]을 썼다. 그 시기의 나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누가 툭 치면 쏟아져내릴 물주머니 같은 것이었는데, 이 소설을 쓰는 일은 그런 내가 다시 내 몸을 얻고, 내 마음을 얻어 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_[밝은 밤] 작가의 말 中




그 힘들었다는 시기에, 심지어 마감기한이 세금 고지서처럼 따박따박 날아오는 연재소설을 써냈다니 최은영 작가의 필력도 필력이거니와 정신력에 놀라운 마음이 든다. 작가는 "삼천이(주인공 '지연'의 증조할머니)"라는 인물의 힘에 끌려 작품을 시작했다지만, 정작 주인공인 "지연"과 가까웠다고 했다. 또한 소설 속 인물, 지연이를 통해 힘을 얻어다고 고마워 한다. 지연은 천문학 분야 박사이자 연구원이다. 자녀 없이 이혼한 30대이며, 일부러 속초 어디매쯤 '희령'에 산다. 내가 행간을 통해 엿 본 지연은 잘 웃지 않고 생기 없고 과묵한 사람일 것 같지만, 예의가 참 바르다. 지연은 '희령'에 얻은 아파트에서 멋쟁이 이웃주민의 호의를 받았는데, 알고 보니 친할머니셨다. 두 사람은 피를 나눈 혈연관계이지만, 처음엔 서로 존대하고 깍듯이 예의를 지킨다. 그러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지연의 엄마인 미선과 할머니는 오랜 기간 연락을 끊고 살았기 때문이다.



할머니 댁에 초대받은 지연은 자신이 증조할머니 '삼천이'와 무척 닮은 외모와 성정을 지녔다는 말을 듣자, 호기심이 생긴다. 할머니를 통해, 고조할머니, 증조할머니, 그리고 증조할머니와 할머니의 절친 이야기를 듣는다. 증조할머니와 할머니는 모두 위선적이고 가부장적인 남자와 결혼하여 일생이 고단했다. 예를 들어, 양민 출신 증조할아버지는 '백정의 딸'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증조할머니를 '구원'이라도 하듯 데려가 결혼을 했으나 정작 아내의 당당한 기백을 보고 '원래 양민이었던 것처럼 군다'라고 미워한다. 속이 참으로 좁다. 할머니의 남편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6*25 전쟁 전 결혼했는데도에 피난 내려왔다가 한참 어린 어린 소녀를 아내 삼는다. 뻔뻔한 중혼의 피해자가 된 소녀가 바로 지연의 할머니이다.


나는 작가 최은영의 삶도, 인간관도 모른다. 다만 [밝은 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새비 아저씨'라는 이상화된 단독자를 빼놓고는 죄다 찌질하다는 점은 안다. 그들은 위선적이고, 이기적이며,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제 위엄으로 착각한다. 과연 [밝은밤]에 후한 독자평을 주었던 이들 중 남성은 어느 비율일까 궁금할 지경이다. 왜 작가는 '남성'에게 특화된 냉소적 시선을 갖게 되었는지도 궁금하다. 작가는 대 놓고 그 "F," "F(eminism)"를 언급하진 않았다. 하지만, [밝은 밤]은 (콕 집어) 여성의 힘, 위선과 폭력에 저항하고 전복하려는 여성 연대, 세대를 거쳐 내려오는 신화적 DNA, 말의 주술성을 보여준다. 많은 여성 분들이 서로서로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대여기한이 끝나가 [밝은 밤]을 다른 예비 독자분들께 돌려드려야 할 때가 오니, [밝은 밤]의 명문들을 남겨야겠다.




핏줄을 통해 흐른다. 세대에서 세대로 주술적이기까지 한 氣가

증조모가 할머니를 보며 엄마라고 불렀을 때, 할머니는 고조모가 증조모에게 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47


참을 수 없이 찌질한...작가는 왜 남성을 찌질하게 그렸을까?

그는 순교자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었다. 가진 모든 것을, 목숨까지도 버려 천주에 대한 사랑을 지키려 했던 그들의 이야기에 감화를 받았다. 그는 증조모를 알게 되면서, 그녀가 사는 모습을 보고서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를 했다.

그 결과로 그는 평생을 억울함과 울화와 죄책감을 안고 살아야 했다. 자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부모를 떠날 때만 해도 몰랐던 것이다. 아니, 그는 평생 몰랐다. 자기가 얼마나 작은 손해에도 예민하고 속이 좁은 삶인지, 자신은 부모를 떠날 만큼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저 충동일 뿐이었다. 떠나고 싶은 충동. (61)

*

아내에게 속은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그저 자기 할 일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양민이었던 것처럼 굴었다. 백정인 주제에 말이다...늘 고개를 빳빳이 드는 모습에 그는 옅은 노여움을 느꼈다. 그런 일로 노여워했다는 걸 인정하려 하지는 않았지만.(62)

**

지연의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어디 서방 앞에서!

- 내가 당신한테 도망가자 했기까, 내가 당신 부모 저버리라 했시까, 내가 당신보고 혼인하자 했시까. 기런데 왜 내를 일평생 입 닥치고 살게 했시까? 내 죄가 뭐인데, 백정네 딸로 태어난 게 죄라면 내 죄를 죄로 두지 기랬어요...

- 내레 너가 아무리 말썽을 부려도 널 단 한 번도 친 적 없다.

-기게 지금 자랑입니까?

이중결혼한 사위를 두둔하고 오히려, 남자 마음을 잡지 못했다며 딸을 비난하는 남편에게 증조할머니의 반격


밟으면 꿈틀. 당하지만 않는다.

서럽다. 문득 생각하다가 삼천이 너가 했던 말이 생각났댔어. 방앗간 사장이 내한테 뭐라 지랄한 적 있지 않간. 내가 빨리빨리 일을 못한다구 몰아붙였던 적이 있었더랬잖아. 내가 집에 가는 길에 서럽다, 서럽다 하니 삼천이 너가 그랬지. 서럽다는 기 무슨 말이간. 슬프믄 슬프고 화가 나믄 화가 나지, 서럽다는 기 뭐야. 나 기 말 싫구만. 너레 화가 나믄 화가 난다구 말을 하라요...섧다, 섧다, 하면서 화도 한 번 내보지 못하고 속병 드는 건 아니라고. (127)

증조할머니 삼천이에게, 삼천이의 친구 새비아줌마가 쓴 편지


여성끼리(만) 연대와 위로

'지도 학생 모임에서 지연씨가 왜 이 전공을 택했는지 이야기하면서 눈을 빛내던게 기억나요. 그 때 내가 많이 지쳐있었거든. 지금 지연씨 나이 정도였을 거예요. 만사가 지겹고 재미가 없었는데, 어린 친구가 왜 이 공부를 택했는지 밝게 이야기하던 모습이 맘에 남았어요.'

...

팀장을 데려다주고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어린 팀장의 얼굴을 상상해봤다. 예의바르고 말을 가려 하고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잘 얘기하지 않는 그녀가 내게 틈을 보인 순간이었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말이 위안이 되어서 나는 조금 놀랐다. 잠자리에 누워서야 어쩌면 그것이 그녀 방식의 위로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 후, 의기소침과 우울을 겪던 지연이 상사에게 위로 받은 대목.

이십대 초반 지하철을 타고 왕복 세 시간 거리를 오가며 통학하던 때가 떠올랐다. 항상 피곤했고 지하철에서는 대개 잠들어 있었다..'학생, 그러지 말고 나한테 기대.' 그런 말을 하며 자기 어깨를 내어주던 여자들이 있었다. 그 때의 나는 그 마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

내 어깨에 기댄 여자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잇었다. 청명한 오후였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이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딸아! 중력(ㄱㅂㅈㅈ 끄는 힘)을 피해 멀리 날아라!

'조국을 빛낸 해외 동포' 시리즈는 1988년 여름부터 1993년 여름까지 방영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었다. '암호학자 김희자 박사' 편은 1992년 9월 28일에 방송됐다.

...

김희자 박사에게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가라고 했던 새비 아주머니의 말을 나는 종종 생각했다. 그 말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뜻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다른 차원으로 가기를 바랐던 마음이었겠지. 본인이 느꼈던 현실의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딸이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던 새비 아주머니의 마음을 나는 오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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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2-13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넘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밝은밤 계속 피해 다녔는데..
자꾸 올라오는 리뷰보고도 미루고 있었는데 정말 당장 읽고 싶게 만드셨어요~~^^
최고~~!!!

여기선 땡투를 못하네요 ㅠㅠ

얄라알라 2023-02-14 09:13   좋아요 0 | URL
은하수님, 혹시 손에 잡으시면 그 자리에서 다 읽으시게 될지도 몰라요^^ 이름은 상대적으로 평이했는데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는, 이 책이 왜 베스트셀러인지 알 것 같았어요^^즐거운 책읽기 하시기를.

페크pek0501 2023-02-13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과 인용을 곁들이며 풀어 쓰신 리뷰, 반찬 많은 밥상을 받은 듯 푸짐하게 느껴집니다.
두 번이나 읽으셨다니 저도 꼭 읽어야 할 책 같습니다. 검색해 보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얄라알라 2023-02-14 09:14   좋아요 0 | URL
발레로 다져진, 몸 가벼우신 페크님에게는 많은 반찬이 필요 없으시겠지만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요새는 소설을 두 번씩 다시 읽는 ˝좋은˝ 습관이 생겼어요. 작가를 더 잘 알고 싶다보니 절로 그런 습관이 생기네요.(물론 별 5 소설만 ㅋ)

좋은 아침 시작하시어요. 페크님

반유행열반인 2023-02-13 1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어쩌다 실수로 두 권 읽게 되었으니 이득 아닙니까 ㅋㅋ두 권 다 읽은 (그러고 하나는 엄청 깐ㅋㅋㅋ)책이라 반갑네요.

얄라알라 2023-02-14 09:15   좋아요 1 | URL
ㅋㅋㅋ역시나, 내가 좋아하는 열반인님 스톼~일의 농담 ㅋ 네네,
덤벙거리는 덕분에 따블로 읽었네요 ㅎㅎ
 
완벽한 아이 -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
모드 쥘리앵 지음, 윤진 옮김 / 복복서가 / 2020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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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

완벽한 아이 (모드 쥘리앵)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재미있게 읽고 재확인한 지혜가 있습니다.

'책 덕후들의 리뷰가 뜨거울 땐 다 이유가 있다, 미루지 말고, 바로 읽어라.'

그래서 이번에는 [완벽한 아이]를 읽었습니다. '아이 child'만 일부러 찾아다닌 건 아니고요, 이 책 역시 최근 몇 년 이웃님들 서재에 자주 올라왔거든요. 역시나! 재미있었습니다. 토요일 오후부터 잠들기 전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완벽한 아이 (The Only Girl in the World)]는 회고록입니다. 소설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읽는 내내, 1인칭 시점에서 회고하는 '모드 쥘리앵'이 가공의 인물이라고 착각이 들었고, 차라리 그러기를 바랐습니다. 그 정도로, 그녀가 견뎌 낸 유년기는 가혹했습니다. 20세기 유럽, 그것도 프랑스라는 문명국가에서 한 아이가 18년이나 감금된 채 가스라이팅 당하고, 정서적이고 육체적 학대까지 감내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소설이라면 마음이 덜 불편할 텐데, '모드 쥘리앵'은 실존인물입니다. 책 표지에 빨간 두건을 쓴 아가가 바로 쥘리앙입니다. 암울해집니다. 그 가혹한 18년을 견뎌낸 아이는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다행히 모드 쥘리앵은 정신의학을 공부한 후, 현재 심리치료사로 활동 중입니다. 자신처럼 학대 받고 가스라이팅 당해 어둠의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했던)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18년 삶을 축약한 [완벽한 아이]를 빠르게 이해하는 데, 다음 두 단어가 유용합니다.

"식인귀" 그리고 "초인"

먼저, 식인귀. 저자 '모드 쥘리앵'은 이 책을 어머니께 바칩니다. 그런데 수식어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식인귀의 첫 희생자였던

나의 어머니에게


식인귀? 

네, 실은 모드 쥘리앵의 아버지를 칭하는 말입니다. 실존 인물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던 모드 디디에를 구글 검색하면 거구의 풍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딸과는 무려 56살이나 나이차가 나는 이 남자는, 완벽한 아이, 즉 초인의 길러내기 위해 위해 말 그대로 씨앗부터 사 왔습니다. 이 남자는 6살밖에 안 된 여자아이를 가난한 광부 아빠에게서 사 온 후(말이 좋아 잘 키워주고 교육도 시키겠다는 제안이지, 현대판 씨받이와 다를 바 없는 발상이기에 소름이 돋습니다), 6살 소녀를 22년간 착실히 기르다가 어느 시점에서 자식을 생산하게 합니다. 계획된 것입니다. 어린 모드 쥘리앵조차도 가족관계의 기형성을 인식합니다.

***

아버지는 정말 내 아버지일까, 어쩌면 어머니의 아버지가 아닐까.

[완벽한 아이] 44쪽


모드 쥘리앵의 어머니 역시, 딸에게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입니다. 이렇게 어린 시절을 회상합니다.


어느 날 큰언니 앙리에트가 네 아버지를 데려왔어. 처음 본 내 눈에는 아주 크고 무서운 어른이었지...네 아버지가 처음 찾아왔을 때 난 여섯 살이었어. 지금 네 나이지. 네 아버지에게 나도 너 못지 않게 중요한 존재라는 걸 알아두렴. [완벽한 아이] 45쪽


****

같은 남성을 아버지로 둔 어머니로서 딸을 제대로 사랑하기 어려웠던 걸까요? 질투였을까요? 공포감 때문이었을까요? 어머니는 딸이 겪는 고행의 설계자는 아닐지언정, 집행자 역할에 무척 충실합니다. 외부 세계와 단절시켜 학교도 보내지 않고 엄격한 가정 교육을 시키는 아버지의 조력자가 됩니다. 쥘리앵의 아버지는 특전사 훈련인 양 신체적 극한 상황을 견뎌내고 욕구들조차(수면욕, 맛있는 음식을 먹고, 따뜻한 물로 씻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싶은 욕망)도 억누릅니다. 피우던 담배를 쥘리앵의 허벅지에 대고 끄는 가학적인 음악 선생님을 아예 가정 교사로 들이지를 않나, 말 그대로 물에 집어 던져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수영을 스스로 깨치도록 유도합니다. 쥐떼가 찍찍 거리는 어두운 지하실에 가둬 놓거나, 전기 울타리를 손으로 쥔 채 포커 페이스로 고통을 참으며 공포를 극복하도록 훈련합니다. 최악은, 이 모든 부조리한 훈육과 학대가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초인,' '멈추지 않고 땅을 파내려가는 나사송곳' 되는 과정이라고 어린 소녀를 가스라이팅한 것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아이]에는 "초인"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자신의 존재 이유가, "인내를 통해 승리하는 나사송곳이 되"(93) 는 것으로 세뇌 당했던 쥘리앵은 그렇게 초인으로 길러집니다. 가스라이팅 당한 나머지, 자신의 아버지가 환생을 거듭하며 피타고라스에게서 배웠고, 템플기사단의 갑옷을 입고 십자군전쟁에도 참가하는 등 기적의 인물이라고 믿었죠. 그래서, '아버지 - 어머니 - 자신' 3인으로 구성된 기괴한 컬트 집단에서 별반 반항 하지 않고 컸던 것입니다. 과연 딸을 세상에 둘도 없는 초인으로 강화시키려는 아버지의 계획은 성공했을까요? 

****

모드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이 대목이 의미심장합니다. 


여름이다. 우리는 베란다에서 점심을 먹는다. 오래된 네델란드 치즈를 잘라야 하는데 굳어서 잘 안된다. 어머니가 화를 내며 치즈와 칼을 빼앗아가다 손을 벤다. 어머니가 나 때문에 다쳤다고 화를 낸다. 아버지는 "정신 버쩍 나게 혼내줘야겠다"라고 고함을 친다. 그 순간 나는 고함소리에 진저리가 난다. 칼을 집어 들어 치즈 도마 위에 놓인 다른 쪽 손에 힘껏 내리꽂는다... 내 손에는 여전히 칼이 박혀 있다. 아버지가 진다. 아버지가 졌다. 어머니에게 소리친다. "위스키 가져와. 그 손 상처에 반창고도 붙이고."

...

불편한 무언가가 마음을 들쑤신다. 조금 전 내가 위스키를 부을 때 아버지의 이글거리던 눈 속에서 보인 어던 것 때문이다. 그 희미한 그림자...그것은 자부심이었다...지금 나는 오히려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 게 아닐까? 힘, 용기, 결단, 위력...아버지가 바라는 이런 것들을 실천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스스로 무얼 하는지도 모른 채 아버지의 정신적 지령에 복종하는 불쌍한 꼭두각시일 뿐일까?


태산같이 꿈쩍도 안할 것 같던 아버지와의 기싸움에서 이겼다는 기쁨도 잠시, 딸은 자신의 이런 반항적 행동 역시 '아버지가 설계한 작품의 일부가 아닐까? 자신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을까?' 회의합니다. 

실제, 18년 만에 모드 쥘리앵은 그 집에서 나올 수 있었으나, 진정한 해방은 아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억눌렸던 고통들이 신체화되어 기절과 공황발작이라는 형태로 새롭게 쥘리앵을 잠식합니다. 



다행히 어린 시절, 동물과의 교감, 음악과 책이 소녀가 무너지지 않게 지탱해 주었듯, 20대의 모드 쥘리앙은 '머리 고치는 의사'가 되겠다는 유년기의 꿈을 안정제 삼아 공황발작과 공포를 다스리게 됩니다. 자신을 일으켜 도움으로서 남을 돕는 사람으로 우뚝 섰지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모드 쥘리앵의 회고록, [완벽한 아이]를 읽을 수 있는 것이고요. "무엇으로도 가둘 수 없었던" 소녀, 모드 쥘리앵의 어깨에 따뜻한 손은 살포시 얹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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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3-01-29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엠마 도너휴 책이나 제이시 두가드 책이 생각이 나네요. ㅠㅠ 에고 읽기 힘드셨겠어요. 칼 이야기는 너무 끔찍해요. ㅠㅠ

얄라알라 2023-01-29 23:04   좋아요 2 | URL
엠마 도너휴 / 제이시 두가드....


바로 찾아볼게요. 감사드려요 Persona님,
네 읽기 힘들었어요. 동시에 너무나 재미있었어요. 정신과 몸을 억압해도 틈새를 비집고 밖으로 나오려하는 아이의 모습이 행간에 있어서...‘칼‘ 에피소드는 끔찍한 동시에, 벗어나고 뒤돌아 봤더니 자신이 여전히 그 미로 안에 갇혀 있는 겹겹의 가위처럼 느껴져서 무서웠어요

얄라알라 2023-01-29 23:07   좋아요 2 | URL
세상에나....제이시 두가드 역시 실존 인물이네요...힘들어서 <도둑맞은 인생>은 못 읽겠네요^^;;

persona 2023-01-29 23:20   좋아요 2 | URL
엠마 도너휴 책 <룸Room>도 프리츨 사건의 희생자에게 직접 인터뷰해서 쓴 소설이라 거의 실화예요. 둘다 읽다가 다 못 읽었답니다. ㅠㅠ 그런 실화라니 너무 끔찍하죠. ㅠㅠ

초란공 2023-01-29 2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실제 피해자가 쓴 글이라는 말씀이네요. 생각만 해도 소름돋습니다. 소설이나 영화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 같아요. ㅜㅜ

얄라알라 2023-02-01 01:56   좋아요 0 | URL
[미녀와 야수]였던가요? 영화 보다, 주인공 엠마가 야수의 성에서 답답할 때, 도서관에서 미소를 찾는 장면에서 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터졌었는데 [완벽한 아이]의 모드 쥘리앵 역시, 책과 음악, 동물친구들과의 교감이 정신의 줄을 잡게 해주었어요....

초란공님 말씀처럼 소름 돋는 이야기 속에서 희망이 보이는 부분이었네요...

오히려 실제 영화로, 영상으로는 이 이야기를 도저히 못 볼 것 같습니다 T T

호우 2023-01-30 0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는 동안 많이 힘들 거 같아요. 그런데 읽어보고 싶기도 하네요. <룸>은 영화로 봤는데 소설은 더 심각하겠죠? 대개 영상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수위 조절을 하는지 글이 더 쎄더라고요.

얄라알라 2023-02-01 01:57   좋아요 1 | URL
저자 모드 쥘리앵이, 일기를 쓰지도 않았고, 아빠가 원하는대로 빡빡한 스케줄대로 살다보면 일기 쓸 시간도 없었을 텐데, 어린시절을 저렇게 상세히 기억하고 묘사할 수 있다는 점도 놀랍더라고요...

호우님께서 말씀하셨듯, 힘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가 이런 잔혹한 이야기에 찐한 호기심을 느낀다는 자체가 죄스럽기도 했어요. 동시에...

그레이스 2023-01-30 17: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하구요.

얄라알라 2023-02-01 01:58   좋아요 1 | URL
네, 그레이스님, 분명 논픽션인걸 알면서도
제가 읽으면서 자주 소설이라고 상상하고 있더라고요

고양이라디오 2023-01-31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화라니... 참 현실은 무섭고 대단합니다.

얄라알라 2023-02-01 02:00   좋아요 1 | URL
고양이라디오님 말씀을 들으니, 사실 멀리 196-70년대 프랑스의 예가 아니라
지금 이 사회에서도 많은 예가 있을텐데...

그 생각 하니, 씁쓸하고 맥이 빠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