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허기사회 - 한국인은 지금 어떤 마음이 고픈가 ㅣ 아케이드 프로젝트 Arcade Project 2
주창윤 지음 / 글항아리 / 2013년 5월
평점 :
‘정서적
허기(emotional hunger)’라는 용어를 알고 나서는,
오래된 초콜렛 탐닉 습성을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되었다. 초콜렛으로 달래려는 것은 생리적인 배고픔이 아니라, 바로 정서적 공허나 갈망이라는 각도에서. 탐식증 환자들을 치료하던
정신의학자 로저 굴드가 탐식의 기저에 도사린 ‘무기력증’을
지적하면서 제기한 개념이 바로 ‘정서적 식욕(emotional
eating)’이었다. 주창윤 교수가 우리 시대 한국 사회에서 진단해낸 증상 역시
‘빈 밥그릇의 허기(p.10),’ 정서적 허기처럼 채워지지
않고 더 큰 허기를 야기한다.
‘한국인은
지금 어떤 마음이 고픈가’라는 비유적 부제를 단 <허기사회>는 학술 무브먼트
‘아케이드 프로젝트’ 시리즈의 두번째 권이다.
‘박사논문은 쓴 자와 커미티 멤버들만 읽는다’라는 농담이 나올만큼, 상아탑 내에서만 생산될 뿐 대중에게는 거의 노출될 기회도,
공론화될 기회도 없는 수천 수만편의 논문들.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은 소프트한 감성의 제목을 단 편집서나 번역서로 출간되어
대중을 달래준다. 정작 인문학 출판사들은 이런 타협에서 문사철의 결기가 흐려짐을 통감한다. 그래서 나온 학술무브먼트가 바로
‘아케이드 프로젝트.’ <허기사회>를 읽고 나니, 이 총서 시리즈가 세 자리 수로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주창윤은
2012년 발표했던「좌절한 시대의 정서적 허기: 윌리엄스 정서의 구조 비판적 개념의 적용」이라는 학술논문를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취지에 부합하게
공론화의 가능성을 열도록 다듬었다.
저자는 우리 시대 한국 사회의 성원들이 공유하는 상호주관적인 마음들, 정서에
주목한다. 정서가 ‘문화의 패턴’ 파악에 유효한 단서라면서. 그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 결핍이 초래하는 관계적 결핍의 현상들(p13)”,
즉 “빈 밥그릇의 허기”를 사회과학자의 눈으로 분석한다. 그가 파악한 허기 사회의 구성물은
‘퇴행적 위로’, ‘나르시시즘의 과잉,’ 속물성에 대한 분노’ 이다. 각 구성물은
<허기사회>의 각 챕터를
이룬다. 학술용어와 다양한 학자들의 논의까지 끌여들여 소개하고 있는 고밀도의 사회과학서이지만, 흥미롭게 술술 읽힌다. 글항아리 출판사의 세련된 편집도 가독성을
높이는데 한 몫했다.
학술논문도 대중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편집으로 다가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페이지들.
각 챕터를 간단히 소개해보자. 1장 ‘퇴행적 위로’는, 잘
팔리는 문화적 코드로서의 ‘힐링’이나 ‘스낵컬처’가 대중에게 정서적 위로만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위장된, 퇴행적 위로라고 본다. 탈역사와 탈정치의
매커니즘이 작동하여 주체성을 사회와 역사안에서 찾는 대신, 나약하기에 위로받아야 하는 개인만을
남기기에.
2장에서는
‘모방 욕망’을 자극하여 희생양을 만들고 이상적 자아와
일상적 자아를 분열시키는 ‘나르시시즘의 과잉’을
이야기한다. 인류학에서 많이 논의되는 르네 지라르의 희생제의 개념을 타진요(타블로의 학력을 의심한 이들), 슈퍼스타 K등 친숙한 예로 흥미롭게 분석해놓았다.
‘속물성에
대한 분노’라는 소제목을 단 3장에서 주창윤이 이야기하는
분노는 개인의 심리적 반응이라기보나는 ‘집합적 문화 반응’이다. 김홍중이 ‘속물지배 snobocracy’라 규정한 MB정권 시대는 정의의 기억을 소환시켰다. 대중의 ‘나꼼수’ 열광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된다.
마지막 4장은 ‘배제와
과잉’으로 허기사회의 맥락을 밝힌다. 둘다 어려운
관념어이지만, 이 시대 한국 사회의 비극적 호모 사케르였던 ‘용산참사 희생자,’’ 쌍용차 노조원’
‘MB정권의 4대강 사업과정에서 사망한 인부’들을 하나씩 언급하면 그 추상은 분노할 현실이 된다. 주창윤의
해석에 따르면 이들은 ‘규율사회의 제도들을 유지하는 데 방해되는 생명이므로 배제(p.74)’되었다. 권력으로부터,
그리고 대중으로부터.......
우리 사회의 과잉상태는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혁명과 떼놓고 설명할 수가 없다. 데이비드가 진단하듯 현대
사회는 ‘과잉연결 (overconnected)
상태’에 놓여있다. 과잉연결은 아이러니하게도
관계의 결핍을 동시에 의미하며, 우리 시대 우울증,
자살, 퇴행을 낳는다. 주창윤은 4장에서 수 페이지를 할애하여 한병철의 <피로사회>의 논의를 자신의 논의와 변별시키는데, 이 지점은 <피로 사회>를 읽어본 후에 다시 음미해야겠다.
이 분야 문외한의 일반독자로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파트는 바로 에필로그의 ‘게릴라되기.’ 주창윤은 사냥꾼의 시대에는 모두가 사냥꾼이라는
바우만의 주장을 살짝 틀어서, ‘노련한 일부 사냥꾼들만이 사냥꾼의 대열에서 행복을 맛본다(p.93)’며 그 대열에서 이탈한 이들이 어떻게 게릴라 전법을 구사할 수 있는지를 호기롭게 이야기한다. 게릴라가 되려면 ‘권력의 허위를 무너뜨리는 게릴라 담론을 생산(p.97)’할 소명을
다해야 한다. 어렵지 않다. ‘나꼼수’ ‘잡년행진’ ‘토크콘서트’
‘촛불시위’를 떠올려보라.
<허기사회>의 마지막에서 주창윤이 허기사회의 “지독히도 아름다운”대안으로 제시한 ‘눈부처의 상생’은 솔직히 생뚱맞게 관념적으로 들린다. 사회과학자로라기보다는
1986년 시단에 등단한 시인으로서의 주창윤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눈부처 주체는 불의와 세계의 부조리에 저항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면서도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주체(p.102)를 말한다.
내가 세상을 너무 까칠하게 보는 걸까? 눈부처의 상생이 참으로 멀리있는 신전처럼
느껴진다. 신성할만큼 아름다운 대안이지만 감히 접근하기가 어려운.....아무도 남을 돌봐주지 않는 사냥꾼의 시대, 그래도 눈부처의
상생을 꿈꾸는 눈부처 주창윤. 적어도 그의
<허기사회>가 게릴라 담론 생산의 밑거름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