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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을 살다
아서 프랭크 지음, 메이 옮김 / 봄날의책 / 2017년 7월
평점 :
아픈 몸을 살다 At the Will of
the Body
책 덕후들의 온라인 서재를 기웃거리다 셀프추천 받은 책, <아픈 몸을 살다>. 편집자가
제목 참 잘 뽑았다하며 읽기 시작했다. 원제는 "At the Will of the Body." 한국 나이로 73인 노학자(Arthur W.
Frank 1946~)는 캐나다 캘러리 대학의 명예교수로서 여전히 형형한 눈빛으로 강연과 저술활동을 한다. 상승 곡선만 탔을 것 같은 그 인생
주기의 39에서 그는 심장마비를 경험했다. 철인 삼종경기에 출전할만큼 운동을 게을리 하지 않던 그였다. "그저 지나가는 사고(incident:
발병, 사고)"처럼 여겼던 심장마비에 비해, 암은 극적인 통증을 수반하며 요란하게 다가왔다. 3번의 집중 항암치료 후, 일상으로 복귀한 그는
아픈 사람들이 자기 질병(illness)를 이야기할 기회도, 사회가 그 이야기를 들어줄 귀가 되어주지도 않는다는 현실 인식하에 혼자의 어깨
위에나마 총대를 멘다.질환이 아닌 "질병을 이해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시작점들을 제공 (14)"해주며. 그렇게 해서 <아픈 몸을
살다>가 세상의 아픈 몸을 살며, 필연으로 죽을 몸을 가진 세상의 독자들과 만났다.
그의 지인과
간호사조차 "cancer"라는 질환(disease)명을 차마 입밖에 내기 어려운 오염어인양 CA라고 돌려 말했듯, 많은 이들에게 "암에 걸렸다"
내지는 "암환자"라는 지위는 삶의 위기이자 재앙일뿐이다. 그런데 아서 프랑크는 사뭇 다른 해석을 제안한다. 그에게 질병은
'오명(stigma)'나 위기가 아니라, 위험과 기회 사이의
균형(227)"이다. 아픈 이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선언'이 아니다. <아픈 몸을 살다>를 읽다보면,
저자 아서 프랑크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균형잡히고 성찰적인지를 그 유려한 문장을 통해서 느끼게 된다. 그는 '그래야만 한다(아파도 삶을 긍정하면
희망이 보인다. 아픈 이에게 최선의 숙제는 오로지 병을 물리치는 것이다 등)'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훈계를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 스스로가 실제
성찰하는 삶을 살면서 아픈(언제라도 아플 수 있는) 몸을 긍정하기에 울림이 크다.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여성학 전공자의 '옮긴이의
말'이나, 다른 추천의 글도 좋지만 아서 프랑크의 경지에 이른 문장을 읽다보면 상대적으로 군더더기로 느껴진다. 아서 프랑크는 어쩜 이렇게
간명하면서도 울림 있는 글을 쓸수 있을까? 그것도 40대 중반이라는 이르다면 이를 나이에?
아서 프랑크는 저명한
의료사회학자이건만, <아픈 몸을 살다>를 애초의 목적에 충실히 집필하였기에 현학적 멋부림을 전혀 하지 않았다. 독자는 그의 문장을
읽다보면 마치 경건한 기도문을 듣거나 가까운 이의 일기장을 몰래 보는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혹은 저자에게 감정이입되어 환자(a
patient)이기에 의료진과 최상의 거래를 하기 위해 '말 그대로 인내해야(patient)'하는 처량함도 느껴볼 것이다. "넌 다른 거
생각말고 그저 병이나 빨리 나아"라든지, "네가 암에 걸리기 쉬운 성격을 가졌으니 이제부터라도 고쳐봐"라는 식, 악어의 눈물같은 위로에는 부아가
치밀수도 있다.
이처럼 아서 프랑크는 아픈 몸을
사는 실존을 담담히 이야기하면서, '질환'에만 집중하여 사람을 잊는 생의학의 차가운 단면을 고발하고 있다. 고발이라고 하기엔, 그가 의료계와
의료인들에게 마찬가지의 감사도 전하지만. 비록 본문에서는 수전 손택(Susan
Sontag)나 아서 클라인만 (Arthur Kleinman), 로버트 머피(Robert Murphy)를 본격 사회학 논문에서처럼 인용하지는
않지만, <아픈 몸을 살다>는 내가 지난 몇 년간 읽어온 질병서사물 중 압도적으로 우아하면서 밀도 높은 글이다. 빌려 읽었는데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