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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예전에 나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에서 정서적 교류와 소통이 동반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수 년 전부터 독서, 또는 무엇을 읽는다는 행위는 일방적인 소통이라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이 변화된 기반에는 인터넷을 통한 교류에서 내 글에 달린 댓글 내용의 괴리감, 하나의 대상(책이나 이슈)에 대한 사람들의 다른 의견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체험이 있다. 사람들은 내가 쓰려고 의도했던 내용에 반응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었고, 오해도 많이 했다. 나 또한 타인의 글에 그러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책이라는 대상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읽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 추측하여 참고한다. 그리고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써내려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저자의 의도를 살짝 고려하지만 결국 경험이나 가치관, 현 상황을 기반하여 내가 읽고 싶은 것들을 선택하여 해석하고 이해하고 감동한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친밀감 유전자를 덜 타고난 내가 책을 몰입하고 또 몰입할 수 있었던 거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는 일방적이기에 비난을 받지 않는다. 혹시 그 책의 내용이 나를 지나치게 자극한다면 책장을 덮으면 된다, 즉, 욕 먹지 않고 단절이 가능하다. 정서적 교감도 가능하지만 비난받을 두려움도 감내해야 하는 사람간의 교류와 다르다.

 

몇 년 동안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따뜻하고 통찰력이 깊고 전체 조망력이 있으며 타인의 마음을 잘 헤아릴 거라는 편견과 환상을 다행히 버릴 수 있었다. 그러니 마음이 훨씬 편안하다. 문득 오늘 읽었던 마립간님의 페이퍼가 생각난다. 기대를 내려놓으면 있는 그대로 교류하고 친밀감을 형성하며 상대를 수용하기가 훨씬 편안하다. 상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

 

 

1.

 

썰이 길었다.

 

인간은 주관적인 체험을 하는 존재이고,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른 존재이다, 라는 생각을 요네자와 호노부의 "야경"을 읽으면서 하게 되었다. "야경"이란 책은 1년 전 쯤에 애를 쓰면서 읽다가 삼분의 일도 못 읽고 내팽개친 책이다. 팔아버리려고 했으나, 나를 멈추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최근 들어 "왕과 서커스"를 읽고 등장인물이 연계된 "안녕, 요정"을 읽은 후에 예전에 실패했던 "야경"을 다시 읽어보자 싶었다.

 

실수를 숨기기 위해서라면 엉뚱한 짓도 서슴치 않는다. 서류함 자물쇠를 깜빡했을 때 혼자 순찰을 가겠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 073p, 야경, by 요네자와 호노부

 

아마 이 글귀가 나를 더욱 지치게 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일이 너무 많아서 소진되었을 때 나는 "빙과" 시리즈의 경쾌함을 기대하고 요네자와 호노부를 찾았었다. 그런데 그는 나의 기대를 깔끔하게 무너뜨렸다. 그때 만나고 있던 너무나 많은 이들이 코 앞의 실수를 숨기기 위하여, 별 상관 없는 사람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하여, 속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뻔한 친절을 놓치기 싫어서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훨씬 크고 장기적인 손실을 무시하고 단기적인 이익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고, 나는 그 행동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함께 버둥대며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내 자신이 너무나 소진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급박한 행동 이면에는 그들만의 엄청난 상처와 두려움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주목하고 이해해줄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책에서 그런 사람의 이면을 또 봐야 한다니, 완성도나 줄거리와 상관없이 혹평을 하면서 이 책을 던질 수 밖에.

 

나는 '일반적이지 않은 일'이 '일어날 리 없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배우지 않았던가? 어떤 일이든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런 모든 가능성을 고려 하다 보면 기우에 빠진다.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거의 있을 리 없는 일은 무시해야지 그러지 않으면 길을 다닐 수 없다. 하지만 ... 합리성보다 온정이 더 중요할 때도 있어. - 116p, 야경, by 요네자와 호노부

 

다시 만난 "야경"은 참으로 좋았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참으로 다양한 색채를 지닌 작가구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된다. 완성도가 깊이 있다.

 

 

 

 

 

 

 

 

 

 

 

 

 

 

 

 

2.

 

요네자와 호노부를 처음 접한 책은 "인사이트 밀" 이었는데, 오, 대박, 내 뒤통수를 제대로 치는 추리물이었다. 하지만 후속으로 나온 "덧없는 양들의 축전"은 대충 읽고 팔아버릴 만큼 신선한 맛이 없었다.

 

청춘물이라고 무시하다가, 진이 빠져서 코지 미스터리를 읽고 싶던 어느 날 "빙과"를 읽고, 시리즈인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 "쿠드랴프카의 차례", "멀리 돌아가는 히나", "두 사람의 거리 추정", 그리고 2017년에 출간되었지만 아직 읽지 못한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를 홀랑 읽어치우기 시작했다. 17년 동안 연재되고 있는 이 시리즈는 죽은 사람 하나 없는 소소한 추리가 상큼했고, "고전부" 소속의 고등학생 주인공들 간의 미묘한 감정 교류와 성장 스토리가 재미있다. 17년동안 일년 반이라는 기간의 고등학교 생활을 그려냈으니, 앞으로 17년간 더 이 시리즈를 보게 되는 걸까, 내 나이 70 다 될 때까지. 아이쿠.

 

 

 

 

 

 

 

 

 

이후 "소시민" 시리즈를 읽기 시작했는데,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 "여름철 한정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 (상하)"까지 출간되고 "겨울철 한정"은 아직 발매 전이다. 특이한 두 남녀 주인공이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변모하기 위해 애를 쓰는 이 시리즈는, 언제 두 사람이 제대로 탈을 벗느냐가 관건인데, 나는 크게 재미를 못 느끼고 있다. 그래서 팔아버릴까 싶은데, 코알라가 재미있다고 반대다. 

 

 

 

 

 

 

 

 

 

 

3.

 

"왕과 서커스"는 삼분의 일 정도 읽다가 후기를 슬쩍 들췄는데, "안녕, 요정"과 연결되어 있으나 읽지 않아도 무방하다고 쓰여있다. 맞다, 읽지 않아도 줄거리 전개는 아무 상관없다. 다만, 맛이 떨어진다. "안녕, 요정"은 고전부 시리즈에 넣으려고 구상했던 작품인데 이러저러한 사유로 다른 고등학생 주인공들로 구성하여 별개의 작품으로 나왔다. 특히 모리야와 다치아라이는 이후의 잡지 단편으로 다시 등장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십대 후반이 된 다치아라이가 "왕과 서커스"의 주인공이다.

 

"안녕, 요정"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일본으로 온 소녀 마야를 만나면서 시작한다. 이 작품은 뉴스에서 어렴풋하게 듣던 이름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내전, 사라예보의 총성들이 마야를 통해 현실화되고,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가 탄생하고 없어진 과정에 대해 알게되는 매력도 있다. 슬라브 민족이라는 이유로 6개의 국가가 합쳐서 탄생한 유고슬라비아가 결국 빈부 격차에 따른 민족 간의 분쟁을 넘어서지 못하고 다시 갈라지는 현실적인 배경이 있고, 이와 별개로 신생 국가에서 새로운 사회와 전통, 규칙을 세우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열정을 보이는 마야가 있다.

 

"하루 새끼 거르지 않고, 교육도 받고, 몸에 탈 난 곳도 없이 이렇게 살고 있지만, 이건 그냥 사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나가야 한다. 정말 그래야 한다. (..) 난 이대로도 살 수 있어. 생물이니까 먹고 자기만 하면 살 수 있어. 일본에 있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하지만 그래선 안 돼. 어떤 형태로 그게 가능할지 지금의 난 상상할 수 없어. 하지만 나도 어떤 형태로든 내 세계를 만들어야 해, 여기가 아닌 데로, 유고슬라비아로 데려가줘"

 

"지금은 안 됩니다. 관광에 목숨을 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 333p, 안녕, 요정, by 요네자와 호노부

 

정체된 일본 시스템에서 챗바퀴처럼 생활하는 모리야는 이상과 열정을 가진 마야를 동경하여 유고슬라비아로 데려가 달라고 한다. 그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한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마야는 '관광일 뿐' 이라고 일축한다. 일본에 남겨진 모리야는 행복하기만 한 인생 대신 동경하던 것을 이루기 위하여 유고슬라비아에서 어떤 개념과 어떤 개념으로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내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끝을 맺는다. (스포 때문에 구체 사항 생략함)

 

"왕과 서커스"에서 다치아라이가 기자로 등장한 것은 모리야의 영향이었던 것 같다. 모리야는 다치아라이가 차갑고 감정을 보이지 않는 여자 사람인 친구라고 여기고 있지만, 다치아라이는 모리야를 단지 남자 사람인 친구로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네팔에서 황태자가 왕과 왕비, 자신의 형제자매를 모두 총살하고 자살한 사건을 마주친다. 이 작품에서 그녀가 이 사건의 미스테리를 풀기를 기대하면서 읽으면 실망할 것이다. 그보다는 그녀가 기자로서 회의감을 극복하는 데 포인트가 있다. "안녕, 요정"은 정보를 수집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면, "왕과 서커스"는 정보를 발표하는 이유에 주안점이 있다.

 

만일 내게 기자로서 자부할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보도한 일이 아니라 이 사진을 보도하지 않았던 일이다. 그 기억을 떠올림으로써 아슬아슬하게나마 누군가의 비극을 서커스로 삼는 실수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믿는다. - 529p, 왕과 서커스,  by 요네자와 호노부

 

 

4.

 

 

 

 

 

 

 

 

 

 

우리는 늘 선택을 한다.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타인의 비극은 서커스처럼 흥미거리가 될 때가 많다. 또한 나는 선의로 행한 일인데 타인에게는 예기치 않은 고통으로 갈 때도 있다. 많은 것들이 양면성을 지닌다. 시급 7500원대가 장기적으로는 나아가야 할 길이지만, 단기적으로는 수많은 자영업 사장들이 고통을 받을 테고 그 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결국 타협점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눈 앞의 고통을 모면하기 위하여 미래를 위한 성장을 멈출 것인가, 선택의 문제이다. 미래를 생각하라면서 현재의 고통을 무조건 참아내라는 것 역시 폭력이 될 수 있다.

 

몇 명, 몇백 명이 제각각의 시점으로 전하는 글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알아간다. 완성에 다가간다는 것은, 내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인식하는 일이다. 만찬회에서 국왕과 왕비가 총을 맞을 때도 있다. 긍지 높은 군인이 밀매로 손을 더립히고, 온화한 승려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겁 많은 학생이 총 한 자루에 용기를 얻고, 기자가 길을 잃고 방황할 때도 있다. 이 세상은 그런 곳임을 깨달아 가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라면... 우리의 고통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거야?" "고통을 낳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할께." "조심?" - 518p, 왕과 서커스, by 요네자와 호노부

 

 

5.

 

호노부의 작품은 가볍고 싱그럽게 시작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깊이감이 더해지는 것 같다. 세상의 모순점, 통합하기 힘든 여러 사실들을 그러내면서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려는 인간들의 단상을 느낄 수 있다. 아직 "야경"을 다 읽지 못했지만, "석류" 라는 단편은 엘렉트라 컴플렉스를 떠올리게 하는 점에서 참신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결핍으로 인하여, 코 앞의 다정함에서 진실을 보지 못하고 환상을 꿈꾸는 걸까. 심리학을 공부할수록, 인지 치료나 행동 치료가 효과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실체도 구명하기 어려운 내적 소망과 결핍, 다양한 욕구(안전, 안정, 인정, 사랑, 소속감, 자유, 구현, 열정 등)를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거대한 내적 소망을 '무의식' 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낸 프로이트는 아이슈타인이나 하이젠베르크와 함께 파견된 우주인이 맞는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생각을 하며 페이퍼를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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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1-09 17: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글로 무언가를 표현할 땐 어떤 대상을 해석하고 느끼는 건 자유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 의견이 잘못되었으면 스스로 인정하고 글을 수정해야 합니다. 후자의 행위가 빠진 독서 행위는 일방적인 소통과 다름없어요. ^^

마녀고양이 2018-01-09 18:23   좋아요 2 | URL
명확한 잘못이라면 인정하고 수정하기가 쉬운데 회색지대가 워낙 많아서 어려움이 있어요.

저는 읽을 책을 선택하고 해석하는 자체가 일방적인 면이 있다고 느끼고, 제자신이 내향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책에 대한 토론을 좋아하지 않나 봐요. 틀림없이 양방향 소통으로 책을 나누시는 분들도 있겠지요?

서니데이 2018-01-09 2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한 페이퍼 안에서 여러 가지 내용이 있어서, 마고님이 말하시는 의미를 제가 맞게 읽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마주보면서 하는 말도 말의 내용 이외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 많다고 하는데, 글로 쓴 내용은 조금 더 주관적으로 읽게 되니까, 상대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잘 이해하는 것이 조금은 자신이 없을 때가 많아요.
그래서, 잘 모를 때는 한 번 더 듣고 물어보더라도 원래의 의미에 가까워지고 싶어요. 그래도 잘 모르는 점이 많지만요.
여기엔 없지만 저는 전에 요네자와 호노부의 <보틀넥>을 읽었는데, 그 책도 괜찮았던 것 같아요.
마고님, 오늘 바람도 많이 불고, 참 춥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마녀고양이 2018-01-09 21:27   좋아요 2 | URL
네, 서니데이님.
마주 볼 때도 상대의 말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해석할 때가 많고, 비언어적인 부분(표정이나 태도, 분위기 등)도 많은 표현을 하지요. 그래서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려면 많은 질문이 필요하고, 의도를 헤아리려는 정성이 필요해요. 하지만 책이나 글인 경우, 내가 누군가에게 그 글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일방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매체가 되지요. 그게 편한 면이 있기도 하구요. 책을 통하여, 사실은 자신을 투영하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보틀넥도 지니고 있는데 아직 읽지 못했어요. 그 책도 기대되네요.

눈이 왔어요. 참 춥습니다. 이미 독감으로 콜록... ㅠㅠ. 감기 조심하셔요.

서니데이 2018-01-09 21:35   좋아요 2 | URL
댓글 잘 읽었습니다. 조금 더 설명해주셔서 감사해요.^^
요즘 독감 유행이라고 하는데, 감기 걸리셔서 어쩌나요.
마고님, 감기 빨리 나으세요.;;

[그장소] 2018-01-11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인줄 알고 시작했는데 페이퍼 & 리스트 였네요!! 우와 ~ 전 이렇게 긴 글 못써요 . 개피곤하거든요 . ㅎㅎㅎ 그치만 ~ 마고님 좀 쩔어 !^^( 멋져!!)

마녀고양이 2018-01-11 10:15   좋아요 1 | URL
페이퍼가 길죠, 길어..........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제가 쓰고도 읽으려면 피곤해요.

[그장소] 2018-01-14 08:19   좋아요 0 | URL
ㅎㅎㅎ남의 글 읽는 건 재미있죠 . 제가 못써서 그렇지 .. 진짜 부러운 능력들이라는!!^^
 

0.

 

시간에 대한 작업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작업입니다. 단지 살아 있다는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그냥 걷기, 풀밭에 누워 구름 바라보기, 시냇물 감상하기, 소파나 침대에 파묻혀 탐정 소설을 읽으며 일요일 오후를 보내기..... 이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바쁘게 움직이던 일상에서 벗어나 잠깐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게으름을 허락한다는 사실만이 시간의 통제를 받으면서 정신이 삶을 경직시키는 일 없이 시간의 상대성을 되찾고 그 흐름을 느끼도록 해줍니다. - 38p, 다시 쓰는 내 인생의 리스트

 

 

1.

 

삼 일 간의 연휴,

첫 날은 일상적인 집 정리-즉, 빨래, 설거지, 물건 치우기와 무려 18개월만에 코알라를 미용실에 데려가서 내 머리 염색, 코알라 머리 커트 및 매직 퍼머, 한의원에서 코알라의 보약 짓기, 코알라와 오랜만의 외식을 했다. 두째 날은 친정 부모님이 꼬옥 내 생일과 남편 생일을 기념하여 식사를 하자고 하셔서, 실은 최근 내가 너무 바빠서 생일을 건너 뛰었기 때문에 함께 점심을 먹고, 오후 내내 열감기가 도져서 약 먹고 쿨쿨 자고 TV를 보았다. 오늘 셋째 날은 아침부터 쌓여 있던 갖가지 물건들, 옷과 책과 차 종류, 냉장고의 음식 등등을 정리하고 먼지를 훔치고, 알라딘에 중고 서적을 등록했다. 과감하게 일본 호러 장르물을 포기하기로 마음 먹은 날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후 세 시 반이다. 연휴가 끝나가는데,

 

밀린 보고서가 산적하다. 연휴만 보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던 보고서들인데, 하.나.도. 못 썼다.

 

지금 읽으려고 곁에 둔 도미니크 로로의 "작은 집을 예찬하다"가 아닌, 예전에 읽은 도미니크 로로의 "다시 쓰는 내 인생의 리스트"가 눈에 뛴다. 손을 뻗어 꺼내니 이미 붙여놓은 빼곡한 책 태그들.

 

 

 

2.

 

* 시간을 더 잘 활용하기 위해

 

- 한 주의 우선순위를 정하기

- 몇 개월 전에 또는 며칠 전에 검강 검진, 치과 등 병원 진료 및 미용실 방문을 계획하기

-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최대한의 정보를 수집하기

- 미리(한 주 또는 한 달) 목표를 정하기

- 확실한 리스트를 당일 소지하고 있기

- 일요일에 아무 것도 하지 않기 위해 일은 토요일에 끝내기

- 휴가 때는 늦잠을 자기

- 느긋하게 목욕하기 (음악, 촛불, 향초 등을 함께 즐길 것)

- 아침에 진짜 커피를 만들고 토스트를 굽고 신문을 읽기

- 미리 식단을 짜기

- 해야 할 일들을 재분류하기(장보기, 편지 쓰기, 전화하기, 외출...)

- 웃기

- 자연을 바라보기

- 적은 양의 술을 천천히 음미하기

- 그냥 걷기

- 미루지 않고 행동하기

- 가능한 한 적은 물건을 소유하기

- 진정한 친구들과 시간 보내기

- 혼자 운동하기(걷기, 달리기, 요가하기)

-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을 배우기

 

- 39~40p, 다시 쓰는 내 인생의 리스트

 

 

악토버라는 뮤지션의 "Romance" 라는 피아노 곡을 틀어놓고 새로 내린 네스카페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도미니크 로로"의 글귀를 옮겨 적는다. 해야 할 일들만 하는 것이 아닌, 생략해도 되지만 내게 여유를 주는 행위들을 요즘 너무 적게 한 것 같다고 살짝 반성한다. 크게 나무라지는 않는다, 열심히 달렸으니까. 글귀를 옮겨 적으며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시감, 이전에도 틀림없이 이 글을 알라딘 서재에 옮겨 적었다.

 

고전을 십 년만다 한 번씩 다시 읽으라는 조언에 동의한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기억력이 형편 없다면 일 년에 한 번씩 다시 읽어야 할 판이다. 경험만큼, 나이만큼, 책을 쓴 이의 마음이 다가온다. 그렇다면 이렇게 허겁지겁 책을 구매할 필요가 있을까? 결핍이다.

 

 

3.

 

*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상황 리스트

 

- 지나친 인맥

- 지나치게 많은 불필요한 물건들

- 지나치게 많은 선택 사항들

- 지나치게 많은 몸무게

- 지나치게 많은 방치

- 지나치게 많은 지키지 않은 약속들

- 지나치게 많은 망설임

- 지나치게 많은 집착

 

- 88p, 다시 쓰는 내 인생의 리스트

 

모두 나와 관련된 문구처럼 느껴진다. 올해는 세실 언니의 말처럼 "심플하게" 살아보려고 목표를 세운다. 우선 냉장고와 냉동실에 있는 식재료를 잘 활용하고 싶다. 그리고 건강검진의 경고를 무시하지 말고 매일 스트레칭과 가끔은 유산소 운동, 그리고 몸무게 조절을 해서 가벼워지고 싶다. 그래서 구매하고 못 입는 옷들, 예전에 입었으나 옷장 안쪽에 처박혀 있는, 혹시나 해서 버리지 못하는 옷들을 입고 싶다. 집에 소장한 수많은 책들을 읽고, 짧게나마 독후감이나 태그를 남기고 싶다. 보고서를 밀리지 않고 쓸만한 여유 시간을 확보하고 싶다.

 

억지로 숨을 들이셔서 여유를 만드는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여유로운 숨을 쉴 수 있는, 그래서 내가 내 자신인 채로 있는 것이 허락되는 시간과 공간을 가지려 한다.

 

 

4.

 

평온 속에서, 나는 정원과 숲의 멋을 생각한다. 분명 인간 세상에 작별을 고할 수 있으리라. (도연명)

- 211p, 작은 집을 예찬하다.

 

최근 작은 히터를 샀는데 따스하다.

어떤 물건보다 나를 흡족하게 만들어 만족스럽다.

 

단.순.한. 한 잔의 차.

 

알라딘 서재를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열댓 권 장편의 주인공처럼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자주 슬펐다. 더 어릴 때는 언제나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특별한 사람의 정의는, 아마, 겉으로는 용감하고 정의롭고 세상을 구하거나 매우 현명하거나 특별한 능력이 있는, 또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을 상상했지만, 실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내적 소망의 표현이었다. 그래서 SF, 판타지, 로맨스 소설이 좋았었다. 아직도 가끔은

 

드라마 "도깨비"를 보면서 저렇게 아름다운 피조물이 되지 못함을 슬퍼할 때가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에 나 자체로 충분해졌다. 예전에는 과거와 미래에 발을 담그고 살았다면, 이제는 현재의 단순함과 모호함과 흘러가는 시간의 슬픔을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다.

 

 

5.

 

오랜 습관으로 나는 가끔 헉헉 숨을 몰아쉬며 달려댄다. 그래도

또다른 오랜 친구인 "우울감"이 나에게 "이 방향이 아니야" 라고 알려줄 때 귀를 기울이고 멈출 줄 알게 되었다.

 

그렇구나,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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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의 열번째 책(단품)을 주문했고, 집에 날아오는 택배에는 열 권을 담을 수 있는 시리즈 박스와 문장집이 함께 들어있었다. 기뻤다. 오늘 보니 열 권 시리즈가 99,000원으로 가격 인하 행사 중이고, 그동안 한 권씩 구매한 사람은 호구냐는 불만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시리즈가 6권에서 멈춰 있는 아쉬움을 겪은 이후로 힘든 출판사 사정에도 일단 열 권을 낸다는 독자와의 약속을 지켜준 자체가 나는 고맙다. 앞선 페이퍼에서도 종종 언급했지만, 시리즈 물은 주인공들의 변화를 함께 하면서 같이 삶을 살아가는 친밀감을 갖게 하여 특별히 좋아한다. 마치 잘 아는 사람처럼,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진다. 나는 긴 인연을 존중한다.

 

S&M 시리즈에서 날카롭고 세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던 사이카와가 다소 둥글어지고 현명해지며 사람에게 다가서는 느낌이 기뻤고,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자신을 내보이던 모에가 그 사람을 통해서 자신만의 세상을 벗어나는 과정이 예쁘다. 또한 공대를 졸업하고 이후 심리학을 공부한 나는, 시스템과 관련된 용어 및 트릭과 심리학이 버물어진 스토리가 좋다. (그러나 이 시리즈는 다소 오타쿠적인 면이 있어서, 호불호가 갈릴 듯하다.)

 

 

 

6.

 

Somewhere over the rainbow-

음악이 바뀌었다.

 

영어 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페이퍼의 뜬금없는 이 종결 문구는 뭘까. ^^)

 

 

 

 

추신.

 

새해에는, 장기적으로든 단기적으로든, 심리의 극한에 내몰린, 내가 만나는 이들 중의 상당수와 관련하여,

인간의 강인함과 나약함을 정리하고 소화하여 담담하게 써내려 갈 수 있는 한 해가 되기 바란다.

 

어린 시절의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폭력(육체적, 언어적, 성적) 및 방임(유기)을 겪은 사람들이

어떤 심리 흐름으로 얼마나 큰 고통을 겪을 수 있는지에 대해 적어 보고 싶다, 슬픔과 용기와 희망과 함께.

최선을 다하여 고통 속에서 싸우고 있는 그들 곁에서 기다리고 버텨줄 수 있는 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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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1-01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저도 단순하고 심플해지고 싶어요. 마고님의 페이퍼를 통해서 하고 싶은 것에 하나 더 추가해야겠어요.
마고님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마녀고양이 2017-01-01 17:32   좋아요 1 | URL
우리 함께 단순하고 심플한 삶을 살아요. 안 그래도
타의로 충분히 복잡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요.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보슬비 2017-01-02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 한해 많이 다짐하고 다짐하여 심플하게 살기로 노력해야겠어요.

마녀고양이 2017-01-02 17:31   좋아요 0 | URL
심플하게! 저도 다시 한번 다짐해요~ ^^

후애(厚愛) 2017-01-02 0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일들만 가득한 한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녀고양이 2017-01-02 17:32   좋아요 0 | URL
후애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 더욱 따스하고 예쁜 페이퍼 기대합니다. ^^

cyrus 2017-01-02 14: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을 복잡하게 만드는 상황 리스트‘를 보면서 작년에 북플 때문에 심적으로 피곤했던 이유를 알았어요. 지나친 인맥, 지나치게 많은 집착. 이게 제일 큰 원인이었어요.

마녀고양이 2017-01-02 17:33   좋아요 0 | URL
그랬구나... 너무 많은 인맥으로 인해 힘들듯 하네요.
사이러스님의 서재에 가보면, 정말 많은 분들이 방문하니까요. 이슈거리도 많고.

그런데 지나치게 많은 집착은 무엇에 대한 것이었는지 궁금해지네요.
여하튼, 이유를 알았다니 제 페이퍼가 도움된 것 같아서 기쁘네요. ^^

cyrus 2017-01-02 20:03   좋아요 0 | URL
글 한 편 잘 써야겠다는 집착, 북플이 더 나은 플랫폼으로 개선되길 바라는 집착. 뭐 이런 것들입니다. ㅎㅎㅎ

마녀고양이 2017-01-02 21:10   좋아요 0 | URL
아하, 그러셨구나~ 멋진 집착이네요.

양철나무꾼 2017-01-02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기다렸는데 앤 라이스가 나왔군.
축하하오~^^

마녀고양이 2017-01-02 21:10   좋아요 0 | URL
영 메시아 말고 또 나왔어?
실은 영 메시아가 나온 것도 몰라뜸, 지금 장바구니~ 쪼옥~

2017-01-06 2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06 23: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7-01-26 14: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고님, 즐거운 설연휴 보내세요.
새해엔 소망하시는 일 이루는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녀고양이 2017-02-14 11:19   좋아요 1 | URL
답 늦었어요~
새해에는 무지무지 즐거운 일 가득하셔요. ^^
 

1.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회색빛 새를 마주친 아침은 어쩐지 행복해진다.

자신의 짝지와 삐이이이익- 주고 받는 그 녀석의 노래는 참으로 시끄럽지만 가끔 청아하다. 나는 이 수수한 회색 새가 참 좋다. 풍성한 머리 깃털과 동그란 등날개를 보면 마음이 그저 흐믓해지고 만다. 그런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 색의 이름은 "직박구리"다.

나에게 그리 이쁘게 들렸던 울음소리가 누구에게는 "시끄럽고 쫓아내야 할" 새로 인식되는 듯하다.

 

 

2.

 

문득,

 

한 아이의 엄마가 생각난다.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좋은 엄마였다. 그런데 본인은 자신의 부족한 면만 바라보느라, 그리고 자신의 연장선으로 간주하는 자녀의 부족한 면만 바라보느라 걱정하고 염려하고 위축되고 자신 없어하고, 결국 자신과 자신의 아이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분이었다. 그 분은 "자신의 긍정적인 강점 바라보기"와 "스스로 안아주기"를 나와 연습 중이다.

 

나에게 직박구리는 "수수하지만 우아한, 행복한 하루를 안겨주는" 새이다.

 

 

3.

 

우리 동네는 인구 100만의 대도시에 속해 있지만, 우리 딸, 딸의 친구들, 딸의 학교에 부임한 선생님들까지 농촌으로 인식하는 마을이다. 8000 세대 가까운 아파트 주위는 모두 논밭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을 버스가 그 논밭을 지나서 지하철까지 우리를 실어나른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가운데 공터에 초등학교 두 개, 중학교 하나, 고등학교 하나가 있고, 거기에 얕은 언덕과 산책 코스와 다수의 가게들이 있는 형태이다. 코알라는 한 동네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처 고등학교로 거의 유사한 친구들과 주욱 올라가고 있다. 교통, 매우 불편하다. 시에 속해있지만 아이들, 다소 수수하다. 그런데 우리 가족이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맑은 공기와 자전거를 타고 농촌 길을 달릴 수 있는 주변 환경 때문이다. (음, 경제적 문제도 있긴 하지만.)

 

서울이나 다른 대도시의 긴 하루를 보낸 후 마을 버스 또는 단 하나의 서울행 버스를 타고 아파트 후문 정류장에 내리면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쉰다. 아, 콧망울 가득 들어오는 맑은 공기, 집에 왔구나 싶은 안도감. 비가 오는 날은 더욱 좋다. 탁탁 떨어지는 우산 위의 빗방울과 함께 촉촉한 나무 내음과 풀 내음이 가득 나에게 달려온다. 그 시간의 나는 참, 행복하다.

 

 

4.

 

그런 우리 동네의 학교들 사이에 도서관이 생겼다. 와우, 동네가 조성된지 14년만에 드디어!

잇몸 치료를 한 어느 평일 오후, 마취약에 취한 나는 멍한 얼굴로 어슬렁 어슬렁 걷다가 도서관에 우연히 도착했다. 친구들과 학교 과제를 하기 위해 며칠 전에 들렀던 코알라의 말대로 깔끔하다. 삼 층 계단으로 올라서니, 새로 생긴 도서관이라 아직 책이 빡빡하지는 않지만 아담한 서고에 듬성듬성 빈 앉을 자리, 평일이라 조용하고 사람도 없고 햇볕은 쨍하고.

 

 

 

 

 

책장을 훑다가 우연히 "파리의 심리학 카페" 라는 책을 뽑고,

창가의 빈 자리에 앉아서 따가운 겨울 햇살을 피하기 위해 롤 커튼을 내린 후 편안하게 읽어 내린다.

 

여유가, 마음 깊이 생겨난다. 그리고

행복하다 라는 정서.

 

 

 

5.

 

책에 좋은 구절이 많아서

핸드폰에 여러 구절을 옮겨 입력한다.

 

누구에게나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메뉴판이 있는 식당이 아니라 코스 요리가 나오는 식당이라 할 수 있지요. 진정한 불행은 불행한 사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 좋은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불운한 일은 생길 수 있지만 불행에 머무는 것은 우리의 선택일 뿐이니까요. - 42p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 모든 일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게 아닙니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아픈 기억을 떠나보내는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고통스럽던 과거가 더 이상 현재의 삶에 침입하여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겁니다. - 53p

 

우울감이란 더 이상 익숙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낡은 자아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으로, 성장을 향한 신호탄입니다. - 108p

 

책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의 부드러운 공기를 마시며 

의무감 없이 오로지 하고 싶기 때문에

어떤 지식이나 지혜를 얻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지.

 

 

 

 

6.

 

2016년 올 한해가 간다.

개인적으로는 얻은 것이 많은 한 해 였고,

수십 년 동안 뚫린 마음의 한 구멍을 많이 채워넣었던 한 해 였다.

 

"나 자신" 하나만으로 온전할 수 있음을 느끼는 해 이기도 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함께 시간을 공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해 이기도 하다.

 

또한 대한민국의 국민임이 자랑스러워지는 해 이기도 했다. 뿌리에 대한 자부심은 나를 채운다.

 

 

7.

 

소소한 것이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자.

중고로 샀던 스티븐 킹의 "미스터 메르세데스"가 의외로 재미있어서 행복한 며칠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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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12-2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동네에도 그렇게 우는 새가 있는데 정말 직박구리인 줄도 모르겠군요.
마고님 사는 동네가 어디길래...? 가끔 그런 동네가 그립기도 해서 말이죠.
우리 동네는 건물이 다닥다닥인지라....

마고님, 올해도 수고 많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고 행복한 일들만 가득하길 빌어요.^^

마녀고양이 2016-12-28 10:42   좋아요 1 | URL
경기도 변두리의 새로 개발된 도시에는 이런 곳들이 있어요.
그런데 교통이 엄청 불편하죠. ^^

스텔라 언니도 올해 수고 많으셨고,
새해에 즐겁고 행복한 일 가득하세요.

꿈꾸는섬 2016-12-27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동네에도 직박구리가 살아요.
전 그 새소리가 좋더라구요.
행복이 담긴 소소한 일상이야기, 올 한 해 얻은 게 더 많았다는 것, 제가 다 흐뭇하고 좋네요. 깨끗한 도서관까지요.^^

마녀고양이 2016-12-28 10:43   좋아요 2 | URL
우리나라에 직박구리가 텃새라네요. 요즘 더 많아졌대요.
저도 그 새소리가 참 좋아요.

꿈섬님도 요즘 바쁘시다면서요? ^^
새해에 즐겁고 행복한 일 가득하세요.

서니데이 2016-12-27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새, 가끔 저희집 베란다에 나타나서 엄마의 사랑하는 다육식물을 한번씩 맛보고 가는 새랑 비슷한데요.^^ 비둘기보다는 작은 것 같은데, 날씨가 따뜻하면 자주 날아와요.
도서관이 가까이에 생겼다는 소식 부럽습니다.
마고님 벌써 연말이 되었어요. 행복한 화요일 되세요.^^

마녀고양이 2016-12-28 10:44   좋아요 1 | URL
오오, 그 녀석이 다육식물도 맛보고 간대요? 비둘기보다 작고 수수하게 생겼어요.
눈도 더 반짝거리고....

도서관이 가까이 생겨서 참 좋은데, 마음만큼 자주 가지는 못하네요. ^^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날 되셔요.

cyrus 2016-12-27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동네마다 ‘작은도서관‘이 많이 생겼어요. 정말 좋은 현상인데 이러면 책을 사는 일이 점점 줄어들어요. 요즘은 신간보다는 절판본 사 모으는 일에 푹 빠졌어요.

내년에도 마고님과 코알라 양에게 행복한 일이 많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마녀고양이 2016-12-28 10:45   좋아요 1 | URL
작은 도서관이 생겨서 참 좋아요.
저는 책을 너무 많이 사다보니, 현재 자중해야 하는지라.... 글쎄 0.1% 안에 들더라구요. ㅠㅠ
절판본, 발견했을 때 너무 신나고 귀히 여겨지겠네요.

사이러스님도 내년에 좋은 일, 행복한 일 가득하세요. ^^

감은빛 2016-12-28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네에 생긴 도서관 좋네요!
한때 작은 도서관 운영위원도 했었는데,
요즘은 통 도서관 가볼 여유가 안 생기네요.

저 책 중고서점에서 낚아와서 책탑 위에 올려져 있는데,
과연 언제 읽을까요? ㅠㅠ

마녀고양이 2016-12-30 15:05   좋아요 0 | URL
아하하, 저도 그렇게 못 읽은 책이 너무나 많아서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
동네의 도서관 앞을 지나갈 때면 괜시리 뿌듯하답니다.
 

 

0.

 

사람들마다의 해석이 천차만별 다르다는 면에서 영화 곡성은 멋진 영화다. 훌륭하게 사람들의 내적 투사을 이끌어 내어 자신을 투영하게 만든다. 삶과 죽음, 선과 악, 신과 악마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주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주제이지만, 한국 영화계에서 분명 색다른 충격을 안겨준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영화를 인간이 어떻게 유혹에 무너지는가와 연관된 인간 역사의 에피소드 변주 중 하나로 해석하였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이후, 의심과 두려움(공포),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화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꾸준히 반복되는 주제이다. 호랑이처럼 강한 발톱과 힘을 가진 것도 아니고, 토끼처럼 빠른 발을 가진 것도 아니며,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타는 것도 아니고, 새처럼 날아다닐 수도 없으며, 물고기처럼 헤엄을 잘 칠 수도 없이 오직 사유할 수 있고 도구를 활용할 수 있는 이점으로 진화해 온 인간에게, 동굴 밖 세상은 수많은 시험을 거쳐야 하는 위험한 장소이다. 우리는 당연히 의심해야 하고, 당연히 반성해야 하며, 당연히 예측하려고 애써야만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고, 우리의 선조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런데 신화나 종교는,

 

무조건 믿으라 한다. 이는 참으로 모순적인데

 

환웅의 말에 따라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받아 삼칠일 동안 햇볕을 보지 않고 버텨낸 웅녀를 보면서, 중간에 포기한 호랑이가 훨씬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의심하고 포기한 호랑이가 너무나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종교나 신화는 인간의 본성과 거리가 있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강요하면서 충성을 맹세시키고 그 아래에는 강력한 통제의 의도가 숨어있다고 느낀다.

 

맹목적으로 믿으라, 의심하지 말아라.

 

이는 곡성에서 신을 대변하는 무명-이름 없는 자-가 인간에게 외치는 말이다.

 

 

1.

 

시험에 걸려 드느냐,

생존이라는 미끼를 걸어 낚시를 던지고 어떤 물고기가 잡히는지는 물고기의 선택에 따른다.

 

이름 없는 자가 지키는 마을에 "외지인"이 나타나서 낚시 줄을 드리운다. 이에 일광-하나의 빛-이라는 유혹이 나타나서 교묘하게 판을 흔든다. 저기 있는 악은 자명하다, 거기 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여기 반짝이는 빛은 희망의 빛인지, 타락의 빛인지 혼란스럽다. 일광의 말과 무명의 말이 일치하지 않을 때, 무명이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이해시켜주지 않으며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할 때 더욱 그렇다.

 

짧게 한 컷 나오는 신부님은,

악마가 흔드는 미끼를 초연하게 무시한다. 그는 의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시험을 통과한다. 그러나 주인공 종구와 수련 신부는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공포에 다다르며 미끼를 문다.

 

선택은 온전히 물고기의 책임이다. 불공평하다. 불공정하다.

 

 

2.

 

인간에게 있어 공포의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를 밀어내고 내 몸 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 누군가에 대해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내 몸속으로 들어온 그 누군가는 원래의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은 끝에 결국 빈 껍질만 남겨 두었다. 차라리 죽여주기를 바랐지만 내 바람은 묵살되었다. 난 자비라는 감정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오래 전에 잊었다. 그날 이후, 나는 죽음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미 오래 전 그 음험하고 불결한 방에서 죽었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살아남았다. 아니 내 대신 걷고 말하는 누군가가 다시 태어났다. - 8p, 마리오네트의 고백, by 카린 지에벨

 

직업을 컴퓨터 다루기에서 인간 대하기로 바꾼 이후, "정서"의 영향력에 종종 충격을 받게 된다. 인간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상드라는 그동안 철저히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파트릭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영혼은 파트릭에게 철저하게 장악되어 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그의 명령을 따르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하는 듯했다. - 227p, 마리오네트의 고백, by 카린 지에벨

 

이겨내야지, 죽을 힘을 다 하면 이겨낼 수 있어, 제 정신이야, 미친 것 아니야,

도저히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낯선 타인에 의해 강간을 당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불쑥 올라 온 어린 시절에 대들었다가 매 맞은 공포로 인해 얼어붙고 그대로 끌려간다. 차라리 공부를 안 하면 될 것인데, 어린 시절 시험지에 틀린 갯수대로 혼났던 공포로 인해 죽으려고 한다. 해결되지 않은 공포, 즉 트라우마란 이렇게 무섭다. 죽음에 대한 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에게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든다.

 

 

3.  

 

곡성에서 들이미는 공포는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에게 불공평한 시험이다.

낚시밥을 무는 물고기의 탓을 하니, 억울하다.

 

(감독의 세계관이나 어떤 의도이기도 하겠지만 사회 시스템 전반에 불공평한 시험이 만연하다.)

 

 

4.

 

인간은 생존의 상황에서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얼어붙거나. Fight, Flight, Frozen.

 

어떤 이들의 인생은 이야기처럼 흘러가는 것 같다. 내 인생에는 마침표와 출발이 많았다. 트라우마가 그렇다. 줄거리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다. (...) 갑자기 일어나고, 삶이 다시 이어진다. 그 누구도 각오하라고 알려줄 수 없다. - 31p, 몸은 기억한다 에서 제시카 스턴의 거부:테러의 기억 인용구, by 베셀 반 데어 콜크

 

최근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뇌 과학과 진화심리학 분야는 트라우마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간의 뇌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극을 경험하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기억 처리 과정을 끊어버리고 그때의 자극은 고스란히 해마에 남게 된다. 마음이 아예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호하고자 잊어버리기도 하고 묻어버리기도 하고 망상이나 꿈의 형태로 변형시키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결함이다. 그것을 "악의"로 변형시키는 것은 정말 불공정하다.

 

성폭력 희생자, 전투 군인, 성추행을 당한 어린이 대부분은 자신이 경험한 일을 생각하면 너무 불안해서 그 일을 마음 속에서 밀어내려고 하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공포의 기억, 나약함과 취약함이 맞닥뜨려야 했던 수치심을 안고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하려면 실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누구나 트라우마를 이겨 내고 싶어 하지만, 뇌에서 우리의 생존을 담당하는 부분(이성적 사고를 담당하는 저 아래 깊숙한 부분)은 사실을 부인하는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 정신적 외상을 입은 경험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위험을 암시하는 실낱같은 단서만 주어지면 다시 활성화되고, 뇌 회로를 뒤흔들며 방대한 양의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시킨다. 이로 인해 불쾌한 감정은 신체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고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촉발시킨다. - 24p,  몸은 기억한다, by 베셀 반 데어 콜크

 

생존과 관련된 부분은 트라우마 이전의 본능적인 부분, 변연계에 저장되어 트라우마보다 더욱 극심한 반응을 야기한다. 이러한 인간의 공포와 두려움이 어쩌면 무조건적인 믿음과 진실, 선이라고 정의된 어떤 것을 이상화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현실이 아닌 인간의 소망이 아닐까.  

 

 

5.

 

모리 히로시의 "F" 시리즈를 좋아해서

출간될 때마다 사모으고 있다. 휴가를 맞이해서 마음 편하게 몇 달 전에 출간된, 출간되자마자 환호하면서 구매한 책을 이제야 읽는 중이다. 내가 이 책에 매료된 까닭은 이공계 출신의 작가가 이공계 교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상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 거야. 차고 벽에 바깥 풍경이 비쳐 있었어. 그것도 위아래가 거꾸로.

모에는 순간 생각한다. 그리고 금세 알아차렸다.

아아, 바늘구멍 사진기 원리죠?

그래, 우편함의 틈새에서 새어든 빛이 반대쪽 차고 벽에 바깥 풍경을 거꾸로 새긴 거지. 차고 자체가 커다란 카메라가 됐고, 나는 그 안에 있었어. 재미있긴 했지만 무서웠다. 왜냐면 이유를 알 수 없잖아. 그때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지.

마법이라고 생각했나요?

아니, 내가 모르는 법칙이라고 생각했어. 사이카와는 빙긋 웃는다. 지금도 뭔가 이상한 일과 맞닥뜨리면 내가 모르는 법칙이라고 생각해려 해. 이 세상에 아무도 모르는 법칙이 있을지도 모른다.

멋진 이야기네요.  - 264p, 환혹의 죽음과 용도(F 시리즈 6권), by 모리 히로시

 

어제 이 문구를 읽는 순간 즐거웠다.

오늘 이 페이퍼를 쓰고 있는 동기이기도 하다.

세상을, 두려움과 의심과 공포가 아닌, 아무도 모르는 법칙을 발견하는 과정으로 살아가고 싶다.

 

 

6.

 

동시에 자각한다.

나는 세상과 타인과 이해를 넘어선 무엇을 많이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무서워하는구나. 간절한 바람은 늘 핵심적인 불안과 맞닿아 있다. 안전함을 갈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싶다.

 

영화 곡성을 연달아 두 번 보았다. 크게 재미있지 않았으나 

감독의 의도에 호기심이 일었다.

 

인간의 공포는 진화론적으로 자연스러운 부분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것을 진화론적으로, 그저 우연의 산물로, 공룡이나 곤충과 유사한 발달 과정으로 이해하기에는, 허무함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람들은 의미에 매달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존주의는 현재에 충실하게 만들지만,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한 공허함을 뿌리치지 못하며, 스스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빅터 프랭클의 말을 긍정하면서도 내면 깊숙히 주어진 자유와 책임에 불안하다. 그리하여 종교, 어느 편이 선이고 어느 편이 악인지를 누군가가 정의해 준 추상적 표상이 인간을 도리어 안심시켜 주는지도 모르겠다. 불안정 애착을 지닌 사람과 종교를 연관시킨 수많은 연구 논문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강화된다. 그래서 나는

 

범심론자와 불가지론 사이를 헤매고 있는 상태이다.   

역시 곡성은 고민을 던져 주는 멋진 영화다.

 

 

 

 

 

 

 

 

 

 

 

7.

 

빠진 부분은 어떤 형태로 보충된다.

결락과 보완을 되풀이하면서, 기억은 수정되어 간다.

그것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 37p, 도불의 연회 상권, by 교고쿠 나쓰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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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7-28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역시 마고님은 제가 모르는 책을 참 많이 알아요.
전 저 F 시리즈 오늘 첨 알아요.
이공계 교수 내세웠다니까 진짜 나두 궁금하네.
모을 정도라니. 저도 기회되면 함 읽고 볼게요.^^

마녀고양이 2016-07-29 09:52   좋아요 0 | URL
F 시리즈는 추리소설이예요,
언니가 좋아하실지 잘 모르겠어요.. ㅋㅋ
저는 장르 소설을 워낙 많이 모아서, 살짝 걱정이.

그래도 제 글을 읽고 그 책을 읽어봐주시겠다는 마음, 잘 받았습니다~~~~

땡순사랑 2019-02-08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댓글 쓰고 아직 블로그에 머물러 있는데 곡성 역시 정말 큰 충격을 준 영화였어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 글 잘 읽었습니다.^^
 

0.

 

나는 추리 소설 광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추리 소설을 정말 사랑했다. 셜록 홈즈의 파이프 담배로부터 시작하여, 섬세하고 매력적이면서도 신출귀몰했던 뤼팽을 섭렵했다가 엘러리 퀸의 젊고 명석하고 다소 잘난 척하는 추리에 홀딱 넘어갔다. 지금처럼 인터넷으로 책을 검색할 수 있지도 않았다. 또한 부모님이 책을 많이 읽는 집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집에 비치된 문고판 책을 최소 서너번을 반복해서 읽었고, 빈약한 학교 도서관을 넘어서 집에서 40분을 걸어가야 했던 구 도서관을 헤맸었다. 현재 수십 권을 가지고 있는 애거서 크리스티로 넘어간 것은 그 이후의 일이다. 얼마 전

 

메그레 반장과 신참내기 르루와 형사가 나오는 "누런 개"를 읽는데, 실은 메그레 반장 시리즈 20권을 1권부터 섭렵 중이다, 두번째 페이지의 "왜냐하면 취객과, 바람이 벗기려 드는 외투와, 보도를 따라 굴러가는 모자 사이에 우스꽝스러운 씨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성냥 열 개가 헛되이 꺼져 버린다." 라는 문구를 거의 외울 정도로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 어디서 싶은데, 어린 시절 문고판에 있던 책이구나, 하면서 느껴지는 아득한 향수.

 

그때 읽은 책과 지금 읽는 책의 차이는 크게 없었다, 어린이 문고판답게 등장인물의 성 매매는 생략되었지만, 그 외의 이야기 흐름과 묘사, 번역은 기억과 다르지 않았다. 반가왔다.

 

 

1.

 

미국과 유럽 추리 소설에서 일본 추리 소설로 넘어온 것은 기껏해야 15년 정도 되었다. 추리 소설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온다 리쿠 작품에 미치면서 시작된 것 같다. 이후 히가시노 게이고에 살짝 발을 담궜다가 미미 여사에게 홀랑 빠졌있는 상태이다. 한국 추리 소설은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린 나이에 김홍신 작가의 인간 시장 1권을 읽다가 그 난잡하고 지저분한 어른들의 이야기에 질려서 한동안 시도해보지 않았고 사실 시도해 볼 대상도 없었다. 책 대여점의 영향 때문인지 쉽게 써내는 느낌의 장르물로 한국 추리 소설이 치부되는 경향에, 마음이 쉽게 내키지 않았었는데,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이라는 너무나 혹하는 제목으로 인해 살짝 흔들리고 고민하는 상황이 생겼고, 몇 년 후 장용민 작가의 "불로의 인형" "궁극의 아이"를 읽으면서 많이 발전했구나 싶었다. 동시에 아직은 안 끌리네- 라는 느낌, 우리나라 고유의 느낌보다는 외국 SF 판타지에 한국 이름만 씌운 느낌도 들고, 글쎄, 갸우뚱, 글쎄..... 라는 생각을 했지만

 

이때 벌써 한국 추리 및 SF 소설의 수준을 업그레이드 평가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최근 읽은 안창근 작가의 "사람이 악마다"는 꽤 괜찮았다.

 

 

2.

 

한국 추리 소설의 발전이 무엇보다 반가왔다.

외국 소설만 섭렵해대면서도,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는 내 맘을 섬세하게 알아줄 작가를 원했다. 미미 여사의 에도 시리즈를 읽으면서 자신들의 뿌리를 잘 잡고 있음에 정말 부러웠다. 한국 TV 드라마에서 뱀파이어의 등장을 볼 때, 우리 신화에는 무엇인가 없을까 궁금했고 허전했다. 한때는 우리 신화 책들을 잔뜩 사다가 섭렵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로 인해, 남북의 잘림으로 인해, 너무나 빠른 서구화로 인해 발목 어딘가가 뭉터기로 잘려버린 느낌이 내게는 늘 있었고, 이는 어린 시절 불안정 애착으로 인한 허기를 더욱 강화시키는 느낌으로, 수관 중간부터 갑자기 솟아오른 나무 그림에 단단하고 안정된 뿌리와 땅을 덧붙여 그리고 싶은 욕구를 만든다.

 

그 시절 한집에 사는 아이들은 네 집 내 집 가릴 것 없이 같이 섞여 자랐다. 한집에 여러 가구가 벌집처럼 모여 살다보니 오늘날과 같은 사생활 보장은 꿈도 못 꿨다. 어른들은 외출할 때면 서로 옆방에 스스럼없이 아이를 맡겼고, 맡겨진 아이는 때 되면 밥 얻어 먹어가며 그 집 아이와 뒹굴고 놀았다. 집이라기보다는 마치 단체 합숙소 같았다고나 할까. 그럼 여기까지 열두 명인데, 별채 다른 방에 사는 신혼부부까지 합하면 총 열네 명이 된다. - 39p

 

"이런 젠장! 도대체 그 집에서 몇 명이 살았던 거야? 게딱지만한 집에?"

"몰랐어? 그게 바로 1980년대의 미스터리야." - 35p, 라일락 붉게 피던 집, by 송시우

 

 

그러던 중에 만난 송시우 작가의 책,

이 문구를 읽으면서 나 역시 응답하라 시리즈를 볼 때처럼 그때를 더듬는다. 맞벌이 나가면 텅 빈 집에 학원 뺑뺑이를 다니면서 방임된 아이들의 부적응을 자주 만나게 되는 내 직업 상, 그 시절에 서로 아이를 돌봐주고 어딘가 밥을 얻어먹으러 갈 곳이 있고 이웃과 살을 부비며 살던 시간들이라면 아이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지 않고 서로 아끼면서 성장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랬나, 거기가 문제인가 싶은.

 

2016년 드라마의 서브 여주인공 느낌, 즉 매력적이고 능력있고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이고 멋진 남친도 있는,을 지닌 소설 주인공 현수빈도 그랬던 것 같다. 현실에서 누구보다 잘 나가던 그녀가 자신의 유년 시절 찾기 칼럼을 진행하면서 빠져들고 몰입하고 더 알고자 달려든다.

 

칼럼을 준비하면서 수빈은 툭하면 감상에 빠지게 되었다. 추억의 사건들은 이미 지나가버렸으니 안전했고, 멀리 떨어져 있으니 아름다웠다. 기억을 짜 맞추다보면 어느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많은 양의 추억이 울컥 밀려들 때가 있다. 남에게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치면서 누구보다 수빈 자신이 성공에 매진하고 있었다. 자신의 평판과 가치가 떨어지지 않을까 신경 쓰며 늘 바쁘게 지내느라 때론 피로마저 잊었다. 경쟁하고 성공하는 일과는 관련 없었던 시절로 회귀하는 시간은 아늑했다. - 43p, 라일락 붉게 피던 집, by 송시우

 

 

3.

 

그리고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번드르르한 허울을 하나씩 벗긴다. 화려한 명동의 뒷거리, 수많은 노숙자와 초라하고 영세한 상가들과 전당포나 사채업자, 고리대금처럼. 그 자리를 일구던 특색있고 창의적인 소상인을 밀어내고 대기업의 프렌차이즈 점만 즐비한 홍대 번화가 거리처럼. 수백 일, 수천 일을 농성해도 당연한 권리조차 찾지 못 하는 슬픈 이들과 쇼핑을 위해 방문한 관광객이 공존하는 넓고 탁 트인 광화문 거리처럼.

 

흥미진진하고 빠른 흐름을 타고, 소설은 우리 사회의 문제에 맞닿는다.

그래서 참 좋았다.

 

수빈은 다시금 안전한 과거가 주는 보드라운 느낌에 빠지고 싶었다. 불길하고 수상한 현재는 오늘만 잠시 묻어놔도 되지 않을까. - 230p 라고 수빈은 착각한다. 우리 사회가 그렇듯이 현재만 괜찮은 척을 한다면, 과거에는 문제가 없었던 듯이 회상한다. 과거의 토대 위에 현재의 역사가 세워진다는 것을 망각하고, 그냥 묻어두고 장미빛으로 떠올린다, 그때가 좋았어.... 대체 뭐가!

 

 

4.

 

내가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때로는 심심풀이 땅콩으로 머리 풀기의 느낌과 당했어, 생각지도 못했어 라는 놀라운 감탄의 힐링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똑바로 직면하기에는 어려운 현실을 다소 놀이처럼, 가볍게, 그러나 잊지 않고 바라보게 해 준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그저 징징대면서 하소연 하는 사람을, 문제를 이해하고나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고 그저 힘들다고만 하는 사람을 보면 도리어 화가 나는 내 성격과도 맞닿아 있다. 추리 소설은 해결을 하려고 뛰어 다닌다, 비록 완전한 해결이나 해피 엔딩이 아닐지라도 삶에 능동적이다. 그래서 송시우 작가의 다음 장편인 "달리는 조사관"은 더욱 좋았다.

 

실은 "달리는 조사관"을 읽고 나서야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을 읽기로 결정했다. 라일락-의 좋은 평가를 읽고 먼저 구매는 했는데, "마냥 아름다왔던 라일락 하우스의 추억은 모두 진실일까?" 라는 책 뒤편의 소개에서 혹시 끈적할까봐, 그냥 징징대기만 할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달리는 조사관은 참으로 경쾌했으며, 트릭도 신선해서 안심이 됐다.

 

 

 

 

 

 

 

 

 

 

 

 

 

 

 

 

 

5.

 

인권증진위원회의 에피소드를 한 권의 소설로 모은 작품이다.

 

권력을 가진 국가기구를 호랑이나 사자에 비유한다면 국가인권기구는 승냥이라고. 호랑이나 사자에 맞서 싸워 이길 수는 없지만 호랑이나 사자가 힘을 남용하여 누군가의 인권을 침해하는지 안 하는지, 그 작고 날랜 몸으로 재빠르게 다니며 살펴보는 짐승. 호랑이나 사자를 끊임없이 신경 쓰이게 하는 존재. 죽일 수는 없지만 물어뜯을 수는 있는 작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감시자. 호랑이나 사자, 곰, 표범과 재규어 같은 강자들이 지배하는 정글에 승냥이 한 마리는 있어야지. 그들이 힘을 정해진 규칙대로 쓰도록 말이야. 하지만 착각하면 안 돼. 승냥이가 호랑이와 사자의 탈을 쓰고 그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 320p, 달리는 조사관

 

이 소설은

우리 사회의 기관에 대한 불신을 대변하기도 한다. 또는 가진 자에 대한 불신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진 역할에 충실하려고 애를 쓴다.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줄타기를 한다.

 

때로는 무조건 가진 자의 편이 되어 권력을 휘두르는 어떤 이처럼,

아니면 반대로 지나치게 없는 편이 되어 어떤 것은 눈감아 주는 어떤 이처럼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불합리하고 모순점이 많으며 아직도 시스템 정착이 제대로 되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참으로 힘든 지점이다.

 

그러면서도 재미를 놓치지 않는 점이 송시우 작가의 탁월한 점으로 느껴졌다.

 

 

6.

 

얼마 전에

어떤 잡지에서 장르 소설을 비하했다고 크게 이슈가 된 적이 있다. 그때

아직도 한국의 정통 작가들이나 비평가들은 장르 소설을 수준 낮게 여기고 있다고, 그런 잠재 의식이 나타난 거라고, 이는 우리나라에 일본의 히가시고 게이고나 미미 여사처럼 사회 의식을 지니면서 재미를 추구하는 장르 소설 작가가 없기 때문이라고,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중간 지점이 없어서 그렇다고 평한 글을 읽었다. 그래서 나는

 

송시우 작가가 반갑다.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참 기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추신.

 

혹시 송시우 작가님이 이 페이퍼를 읽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지만,

읽으신다면 등장인물의 이름 말이예요, 특히 성 말이예요, 좀 더 보편적인 성을 써주시면 안 될까요? 로맨스 소설의 특별 남주를 연상시키는 이름이나 성 말구요. (로맨스 소설 비하 아닙니다, 저도 십이삼 년 전까지만 해도 엄청 읽었으니까요. 분위기 때문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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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6-14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세요. 마녀님의 그 열정!
추리소설 안 읽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저에게
마녀님의 이 페이퍼가 도전이 되네요.
송시우 작가 자도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지내시죠?^^

마녀고양이 2016-06-14 13:38   좋아요 0 | URL
스텔라 언니, 좋아하는 분야가 다를 뿐
언니의 열정도 많은 부분에서 봤구먼, 새삼스럽게...

송시우 작가가 글을 참 잘 쓰더라구요.
그리고 한국 작가라서 더 팔이 굽는 것 같기도 하고.

잘 지내시죠? 저는 잘 지냅니다. ^^

2016-06-14 1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4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립간 2016-06-14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여러번 서재에서 언급했는데, 추리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수학 방정식을 푸는 것과 동일한 사고입니다.

마녀고양이 2016-06-14 22:59   좋아요 1 | URL
수학 방정식일 때도 있고,
삶의 경험일 때도 있고,

제겐 여하튼 떼놓을 수 없는 무엇입니다.

carmencat 2016-06-14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송시우 작가의 추리소설 너무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한국현실과 착 달라붙어 있는 추리소설이라, 이게 진짜 한국 추리소설의 맛이구나- 감탄하며 읽었어요ㅎㅎㅎ

마녀고양이 2016-06-14 23:00   좋아요 0 | URL
님께서도 그렇게 느끼셨군요.
아우, 저만 그런 게 아니라서 반갑습니다.
한국현실과 착 달라붙는다는 표현, 딱 그렇습니다. ㅎㅎㅎ

cyrus 2016-06-14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리소설을 읽으면 독자는 왓슨이 되는 것 같아요. 저도 그래요. 소설 속 탐정처럼 사건을 해결하지 못해도 나중에 결말에 사건의 진실을 알고 나면, ‘뭐야! 이거였어. 시시하잖아’라고 생각해요. ^^

마녀고양이 2016-06-14 23:01   좋아요 0 | URL
왓슨이 될 때는 행복하더라구요.
하두 읽으니까 상당수의 추리 소설을 중간 정도 읽으면
때로는 첫 부분부터 빤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이 꽤 있어요. 캐릭터가 매력적이라든가, 또다른 매력이 없다면, 결국 내려 놓게 되는 책들도 많구요.

제가 해결하지 못 할 때가 참으로 좋습니다. ㅋㅋ

보슬비 2016-06-15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때 추리소설 좋아했었는데, 지금도 간간히 읽지만 제가 더 좋아하는 장르는 판타지라는것을 알았어요. 그래도 일반소설보다는 장르소설(판타지,SF,추리,로맨스)쪽이 더 재미있어서 좋아요.^^

마녀고양이 2016-06-19 15:49   좋아요 0 | URL
저도 판타지 엄청 좋아해요.
저희가 읽는 소설 중에 겹치는 것들이 꽤 많던데. ^^.
재미있어요! ㅋㅋ

보슬비 2016-06-21 15:10   좋아요 0 | URL
겹치는거 좋아요~~~ ^----^

마녀고양이 2016-06-21 15:11   좋아요 0 | URL
헙, 방금 보슬비님 생일 축하드리고 왔는데
보슬비님은 여기서 댓글 달고 계셨네요. 쪼옥~~~~

보슬비 2016-06-21 15:34   좋아요 0 | URL
저도 쪽~~~♥♥♥
신랑 질투하려나? ㅎㅎ

2016-06-16 1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19 1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집 2016-07-06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시우 작가 검색하다 마고님 페이퍼까지 왔네요.~

마녀고양이 2016-07-08 09:20   좋아요 0 | URL
아하하~~~~ 기억의집님도 송시우 작가 검색 중이예요?
저도 한참 검색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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