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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오리진 - 전2권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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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과학과 종교는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두 개의 언어일 뿐이야. - 25p, 1권

 

댄 브라운의 책은 거의 다 읽은 사람으로 신작 '오리진'이 나온다고 했을 때 열광하며 잽싸게 살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신과 과학 그리고 미래에 대한 대담한 질문" 이라는 책 뒤의 부제는 내 호기심을 부채질하면서 밀려있는 책들 사이에서 제일 먼저 손이 가도록 하는 동기 부여에 충분했다.

 

역시 댄 브라운의 명성에 걸맞게 책의 소재는 흥미로왔고, 흐름은 매끄럽게 빨랐다. 특히 죽은 미래과학자의 연구 발표를 통하여 댄 브라운이 인간 세상의 기원과 미래에 대해 어떤 답을 내놓을지 매우 궁금해서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실은 이런 종류의 낚시(!)는 베르나르 베르베르 때도 매번 당하고 있다. "신"이라는 소설 6권 엔딩을 읽고 벽에 던져버린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정도로 나의 실망은 매우 컸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바람은 정말 어이가 없다. 그도 나와 같은 인간일테니 비슷하거나 조금 나은 한계를 지니고 있을 것이 자명하건만 늘 이런 종류의 열광은 버리지 못하고 반복하고 반복한다. '실존'이라는 개념에서 본다면 우리는 결코 내가 태어나기 전과 후의 세계를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지만 내 마음은 한결같은 호기심을 지닌다. 인간이라는 종족이 지닌 장점이겠지 싶다. 

 

이것이 우리 뇌의 기본 프로그램입니다. 에드먼드가 말했다.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어디로 이끌리는지를 정확하게 대변합니다. 혼돈에 반대하고, 질서를 선호하죠. (..) 여러분은 우리의 근원(origin)과 우리의 운명(destiny)을 물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질문에 컴퓨터는 이런 답을 내놓겠지요. 데이터가 부족해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없음. 별 도움이 안 되죠. 커시가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정직한 대답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이 작은 생물학적 컴퓨터(인간의 뇌)를 향해 똑같이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라고 물으면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아담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하느님, 진흙으로 최초의 인간을 빚어내는 프로메테우스, 자신의 다양한 신체 부위를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는 브라흐마. (..) 인간의 뇌한테는 어떤 대답이든 내놓는 것이 아무 대답도 안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우리는 데이터 부족이라는 반응에 극도의 불안을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의 뇌는 적어도 질서의 환상을 제시할 수 있는 데이터를 창안하죠. 그 결과 무수한 철학과 신화와 종교가 등장해 마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질서와 구조가 실재한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 134~136p, 1권    

 

어느 책(일반 과학 서적이었는데)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다음 진화는 무기물이 대상일 거라는 가설을 읽은 기억이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유기물에 의한 진화, 인류의 대체들을 두려워했고, 이로 인해 진화의 대상은 당연히 유기물 생물이라는 암묵적인 기본 개념을 세워왔다. 하지만 발전하는 AI를 보고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수많은 SF 소설과 영화를 보며 "정말 이럴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물스물 기어들어오기 시작한다. 현재도 당연하게 노트북으로 글을 쓰고 옆에 놓인 스마트폰을 홀끔 보며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마시고 스탠드에 불을 켜면서 우리가 만든 움직이는 대상들을 우습게 여긴다. 

 

판타지나 SF, 스릴러의 매력은 내가 직접 마주하는 현실의 한계에서 벗어나 가능성의 세계를 탐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상상이 현실로 될 때를 종종 목격하게 된다.

 

우주학자들은 과거나 미래의 어떤 주어진 시간, 즉 T에 우주가 어떻게 팽창하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근사한 공식을 찾아냈어요. 하지만 빅뱅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 즉 T가 0인 시점을 돌아보려하면 계산은 온통 엉망진탕이 되지요. 무한한 열과 무한한 밀도를 지닌 신비한 작은 알갱이 하나를 설명해야 하는 형국이니까요. (..) 랭던의 엄격한 물리학 교수 하나는 '우주의 기원'이라는 자신의 강좌를 들으러 온 철학 전공자들에게 넌더리가 난 나머지 강의실 문에 다음과 같은 쪽지를 붙였다.

 

내 강의실에서 T>0.

T=0와 관련된 모든 질문은 종교학과를 찾아갈 것.

 

- 288~289p, 1권

 

나는 이 책에서 바로 위의 두 줄을 읽으면서 가장 매력을 느꼈다. 간단하지만 명료하고 깊은 메시지. 아름답다.

여전히 신의 존재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없다. 조심스러워진다. 

 

수학의 정확성, 물리학의 신뢰성, 우주의 대칭성을 목격할 때마다 나는 차가운 과학이 아니라 살아 있는 발자국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곳에 숨어 있는 더 큰 어떤 힘의 그림자라고나 할까요. 암브라는 랭던의 말에 실린 힘을 느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교수님처럼 생각하면 좋겠네요. 암브라가 말했다. 마치 우리가 신을 두고 싸우는 느낌이에요. 모두가 저마다 다른 형태의 진실을 품고 있고요. - 314~315p, 2권

 

친애하는 주인공 랭던 박사와 신부 암브라의 대화는 댄 브라운의 결론을 대변하는 느낌이다.

그러게, 이렇게 큰 그림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그렇게 싸울 필요도 없지 않은가. 인간 사회의 곳곳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투쟁, 전쟁들은 정말 신앙과 진실의 문제일까, 아니면 결국 '돈'과 '권력'의 문제일까. 슬그머니 후자라고 결론짓는 내 자신을 바라본다. 힘을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결국 반복일 뿐이다. 그래서 책 속의 미래과학자 에드먼드 커시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볼 수 있는 과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세상의 진실을 규명하고자 했으나, 자신의 언어에 힘을 갖기 위해 결국 힘을 동원하는 부조리하고 불명확하고 일관성이 부족한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리뷰를 쓰면서 돌이켜보면 이 책은 참으로 풍성한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그러나 막상 책장을 덮었을 때는 아무런 감동도 없고 뒤에 남는 여운도 없다. 이유를 곰곰히 따져보면, 책 자체가 너무 담백하고 지나치게 스토리 중심으로 흘러가서 인간의 정서를 크게 자극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이번 작품에서는 주인공 랭던 교수가 그다지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국내 영화의 모든 장르에서 가족애나 인간적인 슬픔을 조금씩 담아내는 것은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성공의 필수 요인 같기도 하다. ㅎ. 이 부분으로 인해 별 하나 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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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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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에게 7살 난 딸아이를 잃은 부모에게서 이 이야기는 시작한다. 내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선택할 때는 보통 머리가 복잡하여 아무 생각없이 읽을 추리 소설이 필요할 때, 페이지가 팔랑팔랑 넘어가는 책이 필요할 때, 그러면서도 재미와 흥미가 어느 정도는 보장되는 책을 찾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번 책은 읽는 내내 마음이 심란했다. 심지어 테그를 네 군데 붙이기도 했다. 마음이 심란하고,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 남는다는 것은 내 마음에서 어떤 이슈와 마주한다는 의미이다.

 

이 책은 "사형 제도 - 국가의 이름을 빌어 제도권(또는 사회적으로 다수가 합의한) 하에서 이루어지는 살인"에 대해 논한다.

 

타인에게 아이를 잃은 어떤 모는 유족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서, 그리고 "사람을 죽이면 사형에 처한다 - 이 판단의 최대 장점은 그 범인은 이제 누구도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213p)" 라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강하게 살인자는 모두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아이를 죽인 어떤 부는 그 죄를 자백하지는 못하지만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희생하고 타인을 구하면서 살아간다. 스스로 아이를 죽인 어떤 모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평생 스스로를 조금씩 죽음으로 내몬다. 타인에게 딸아이를 잃은 어떤 부는 딸아이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살인자의 사형을 원하면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재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절실하게 깨닫지 않았을까? 사형을 형벌로 여기지 않고 주어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아무런 반성이 없이, 유족에게 미안한 마음도 없이, 다만 사형이 집행될 기다린다는 것... (202p)" 라는 양가적인 마음을 보인다.

 

처벌을 원하는 이유는

대상이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깨닫고 양심에 의해 괴로움을 절절하게 느끼기 바라서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처벌이 자신의 잘못과 "퉁" 쳐진다면 그 처벌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가.

자녀 양육부터 사회적 상황, 법적 처벌까지 이 이슈는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나는 사형에 대해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못한다. 혹시라도 나 역시 실수하여 잘못이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을 경우나, 또는 범죄자까지 내몰린 상황이 사회적인 보살핌의 부족 때문이고 그 책임의 일부분을 사회 구성원인 나도 함께 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조바심이 있어서, 그래서 엄청난 흉악범에게도 강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렇다고 너무나 무서운 짓을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어느 정도 수용하는 마음으로 함께 살 자신도 없으니 사형시키면 안 된다고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고 계속 어영부영, 어영부영, 책임 회피 중이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아는 사람의 자녀가 청소년기에 조현병이 있어서 매우 폭력적이었다. 때로는 부모나 자신의 여동생에게 칼을 들이대면서 날뛸 정도로. 나는 너무나 힘든 상황은 알겠지만 그 자녀를 끝까지 책임지고 지켜주고 보살펴야 할 사람들이 결국 가족이라고 위로하고 격려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조현병에 걸린 이 아이는 어디로 가야 하나. 조현병에 걸린 이 아이 역시 외롭고 춥고 소외감을 느끼지만 자신의 충동을 어떻게 조절할 수 없는데. 이런 내 모습을 다시 한 번 직면하게 해 준 책이 히가시고 게이고의 "공허한 십자가"이며 책의 말미를 덮은 지금 복잡한 마음이 생겨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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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16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권력에 의한 사형 집행 사례 때문에 정당한 법적 절차를 따른 사형제가 정착되지 못했어요. 범죄자 교화, 무기징역은 한계가 있어요. 교도소에 생활하는 범죄자들이 호의호식하고, 음란물을 몰래 반입합니다. 범죄자들은 알아요. 자신들은 절대로 사형당하지 않을 거라고요. 사형제 도입에 대해 정부와 사회가 한번 생각해봐야 할 시점입니다. 또 어물쩍하게 넘어가면 범죄 처벌 강화에 도움되지 않습니다.

마녀고양이 2017-11-16 16:24   좋아요 3 | URL
사형 제도를 강화하여 흉악 범죄가 줄어든다면 고려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범죄가 일어나게 되는 동기나 생활 환경을 함께 살펴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어서, 사형 제도만 따로 떨어뜨려서 생각하기는 주저됩니다.

이번 여중생의 초등학생 살인 사건의 경우에도 강력한 처벌도 필요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아이들이 어째서 그런 극단적인 행위까지 갔으며, 그런 행동을 하고도 가책이 없는 괴물로 성장했는가에 대해 지나치게 개인의 문제(즉, 가해자와 그 부모들)로만 파악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사회가 이런 문제가 일어나는데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가, 거기에서 나 자신은 자유로운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제 견해가 유가족에게는 또다른 상처가 될 수도 있어서 피력하기 조심스럽긴 합니다. ㅠㅠ
 
기억술사 3 - 진실된 고백
오리가미 교야 지음, 유가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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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의 경험을 배우고 이를 통하여 세상의 정답을 배울 수 있다고 기대한 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책이라는 대상을 통해 삶에서 자신, 타인, 그리고 세계에 대해 지녔던 감정과 사고들, 특히 대면하기 불편하거나 아직 중요한 문제로 걸려있는, 또는 삶에 있어 중요시 여기는 가치관을 투사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내게 있어 전이의 중간 대상이다.

아기가 젖내 나는 이불이나 자기를 보호하는 토끼 인형을 중간 대상으로 삼아 미지의 세계로 나아갈 용기를 내듯이 나도 책을 중간 대상으로 삼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으로 나아간다. 기억하는 한 내가 살아오고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삶은 오직 한 번이기에 이 길은 늘 새롭고 두렵고 조심스럽고 신기하며 가슴이 두근거린다.  

 

예전에는 누군가가 제발 가야할 길의 정답을 알려주면 하는 소망이 절실할 정도로 잠재된 불안이 크고 스스로에 대해 믿지 못했다면, 이제는 내 느낌이 가장 중요하고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믿을 만큼 강해진 부분이 참으로 기쁘다.

 

 

1.

 

기억술사 시리즈는 가볍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담겨진 함의는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동일한 이유로 SF, 판타지 물을 좋아한다.)

 

1권에서 흥미를 유발하고 2권에서 징검다리로 약간 지루했다면 3권은 제대로 된 맺음을 보여 주었고, 특히 3권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들려주는 것 같은 예쁜 에피소드로 채워진다.

 

"친구 사이란 어려워서 말이야. 어른이 되면 더욱 어려워지지. 일이나 인간 관계 같은 다양한 굴레가 늘어나면 단지 좋아해서 같이 있을 수 있는 관계가 적어져. (39p)" 라는 문구를 읽으며, "단지 좋아서 있을 수 있는 관계" 라는 단어 하나 하나가 마음에 확 꽂힌다. 필요에 의해서, 편의에 의해서 맺는 관계가 아닌 만났을 때 단지 좋아서 시간을 소비하는 관계를 가진 사람은 참으로 소중한 것을 가졌다. 내 외로움 때문에, 왁자지껄한 인간 관계가 좋아서, 내가 인기 있는 느낌을 쫓아서가 아닌 단지 "그 사람"이 좋아서 갖는 관계가 얼마나 드문가. 특히 나처럼 예민하고 비판적이고 성취 지향적인 사람에게는 더욱.

 

그리고 딸아이를 떠올렸다.

 

 

2.

 

기억술사는 지우고 싶은 기억만 깨끗하게 지워주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을 지우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신경 쓰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시시한 실패의 기억. 어른이 된 지금이라면 별것 아니라고 웃어넘길 수 있지만 어렸기 때문에 고스란히 상처가 되어버린 사건. 자신의 마음 속에서만 일어난 일. 오로지 자신의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일이라면 자신만 그것을 잊어버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 67p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의 상당수는 빠르게 기억을 잊어버리는 방법을 찾고 싶어한다. 떠올리면 너무 괴로우니까. 너무 무서우니까. 너무 창피하니까. 너무 슬프니까. 너무 화가 나니까. 그래서 빠른 해결책을 찾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해결책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은 아마도, 그 사람과의 새로운 시작이다. 

 

 

3.

 

잊어버린 게 아니었어. 잊고 싶었을 뿐이야.

처음 만났을 때 실수한 것도, 심한 말을 해서 미움을 받은 것도,

전부 없던 일로 하고 싶어서. - 149p

 

실은 간단하다.

용기의 문제다.

 

간접적으로 빙빙 돌리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없던 것처럼 꾸미거나, 더 자신만만하게 보이거나, 무의식적으로 눌러버리거나, 상대가 좋아할 만한 행동만 하는 등의 수많은 방어적 대처 행동 대신 그저 속마음을 보여주면 된다, 정말 원하는 것을 말하면 된다. 가장 간단하고 가장 솔직한 방법, "미안했어, 사실은 너와 가깝게 지내고 싶었어." "너에게 이런 기대를 했고 서운했어." "실은 그 서운한 마음 안에는 정말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라는 고백하면 되는데, 나의 속살을 드러냈을 때 받을 상처가 너무나 두려워서 피하고 도망가고 대안을 모색한다. 그리고 기억술사에게 기억을 지워달라고 스스로 포기한다.

 

 

4.

 

진짜 자신의 모습을 다 드러내고도 받아들여지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억을 지워버리면 그 기회조차 사라져버리는 거니까. - 252p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모른다. 그리고

기억이야말로 나와 너의 관계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란다.

내가 가끔 꺼내어보는 과거의 사람들에 대한 기억, 지나갔지만 소중한, 지금의 나를 어떤 형태로든 이루고 있는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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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7-05-13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소개 얼마전에 읽었는데 호러라는 말에 아직 읽지 못했지만, 소재가 괜찮은 것 같았어요.
마고님 좋은밤되세요.^^

마녀고양이 2017-09-23 17:0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너무 오랜만에 답글 달아서 죄송하네요.
잘 지내시나요? 페이퍼를 쓸 때는 봄이었는데 벌써 가을이네요.

2017-09-23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7-09-24 11:29   좋아요 1 | URL
이렇게 띄엄띄엄한데도 저를 떠올려주셔서 기뻐요.
서니데이님은 참 다정한 분이네요. ^^

cyrus 2017-05-15 1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표지는 라이트노벨스럽군요. ㅎㅎㅎ

오랜만에 뵙습니다. 코알라 양도 잘 지내죠? ^^

마녀고양이 2017-09-23 17:02   좋아요 0 | URL
글도 라이트노벨스러워요. ㅎㅎ
사이러스님, 진짜 오랜만에 뵙네요.
코알라는 현재 자신의 사춘기와 청소년기를 건너는 중이랍니다. ^^
사이러스님은 어떠신가요?

cyrus 2017-09-24 10:12   좋아요 0 | URL
저도 잘 살고 있습니다. 제 일상은 단순해요. 일하고, 책 읽고, 글 쓰기. 이게 전부예요. ^^

마녀고양이 2017-09-24 11:29   좋아요 0 | URL
단순한 삶이 가장 알차고 행복한 삶이 아닐까요?
일하고, 책 읽고, 글 쓰고, 책 제목 같네요.
 
도불의 연회 : 연회의 준비 - 하 도불의 연회
교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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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는 실제의 시간 속에, 과거라는 허구의 시간이 통으로 들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11p, 상권

 

나처럼 그저 빈둥빈둥 억양 없는 생활을 보내는 자유업의 경우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부자유가 있어야만 자유가 있는 법. 구속 없는 해방은 있을 수 없는 노릇이라, 타율적 지배를 받지 않는 몸인 이상 자유를 획득하려면 모든 일을 자율에 맡길 수 밖에 없다. 그 경우 스스로에게 가해지는 중압은 압도적이다. 자유업이란 이름 뿐이다. - 21p, 상권

 

분명히 아주 약간만 균열이 가도 일상의 표면을 찢고 넘쳐날 것이다. 그 사실을 모두가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다. 어디에선가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적어도 이 세상의 어둠은 남의 일입니다, 허풍입니다, 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이리라. - 28p, 상권

 

하지만 빠진 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보충된다.

결락과 보완을 되풀이하면서, 기억은 수정되어 간다.

그것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 36p, 상권

 

일본인도 중국에서 악귀나 나찰 같은 짓을 저질렀지요. 아무리 전쟁이라고 해도 보통은 할 수 없는 짓입니다. 하지만 국체를 믿고 저질러 버렸어요. 꼭 그것만은 아니라고 해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부분은 있습니다. 의심하고 있었다면 그런 무도한 짓은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도 자신들의 정의를 믿고 원자폭탄을 떨어뜨렸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쨌든 그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건 진실이었던 겁니다-- - 107p, 상권

 

이 세계는 모두 진실입니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것으로 되는 겁니다. 사람은 항상, 진실의 한 가운데에 있어요. 하지만 사람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지요. 왜냐하면,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세상을 재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자아라는 좁은 거푸집에 세상을 끼워 넣으려고 하니까 알 수 없는 게 나오는 겁니다. 모든 것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 시점에서 세계는 당신 거예요. 하지만 자신을 지키면서 세계를 알려고 한다면 --- 모든 수수께끼를 해명하려고 한다면 --- 그때는 자신이라는 그릇을 세계와 같은 크기로, 무한히 넓혀야 하지요. 이건 어려운 일이에요, 그러니까 ---- 진실을 향수하기 위해서 자아가 방해된다면, 그런 시시한 건 버려 버리는 편이 훨씬 편하답니다. - 138p, 상권

 

시간은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도 깨끗하게 떠나야 한다고, 아케미는 생각한다. 죽어서 나중에까지 뭔가 남기려는 것은 욕심이다. - 178p, 상권

 

소중한 것. 흔들리지 않는 무언가. 버릴 수 없는 것.

그런 무게나 단단함이나 크기를 가진, 무언가 훌륭한 것이 보통은 누구 안에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크면 클수록 그 사람은 행복할 테고,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안심이 되고,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안정되어 있는 걸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 제거되어 버린다면. 크면 클수록 구멍이 커진다. 단단하면 단단할수록 상처는 깊어진다.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안정감은 사라진다. 그리고---

 

내 경우는 어떨까.

그렇다, 내 경우는 처음부터 그런 확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마음에는 항상 구멍이 뚤려 있다. 내 머리는 텅 비어 있고, 나는 늘 부유하고 있다. 마음이 뻥 뚫리는 것이다. - 382p, 상권

 

인생에서 결론이니 결과니 하는 것은, 실은 통과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쯤에서 매듭을 지어 둘까 하는, 뭐 표시 정도의 것이겠지요. 인생에는 매듭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종착은 없어요. - 386p, 상권

 

돈만 내면 이 자그마한 남자는---,

--- 나도 구해 줄까.

속을 뿐이라고 해도---.

끝까지 속여 준다면---. -416p, 상권

 

 

논리에는 인정도 용서도 없다. 구부러지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슬품이나 재미도 없다. 있는 것은 선택의 여자기 없는 과정을 축적하는 기쁨과 정합성을 가진 결론에 다다랐을 때의 기쁨뿐이다. 한 치의 틈도 없다. 멋지다----고 생각한다. 현실은 그런 아름다운 형태로 결실을 맺을 수 없다. 현실의 세계는 불안정하고 비합리적이고 엉성하다. 논리나 개념 같은 것은 요컨대 경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개 순수한 사색에서 도출되는, 비경험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생활에 바싹 붙어 있는 것은 아니다. - 20p, 하권

 

그래, 믿고 있던 것을 믿을 수 없게 되면, 그 구멍을 메우듯이 다른 걸 믿는 거지. 또 속이는 놈들이 계속해서 나오거든. 그러니까 어디까지 가도 속게 되는 구조지. - 153p, 하권; 가끔은 내 직업이 약장수 같다는 생각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의사, 한의사, 최면술사, 점쟁이를 거쳐 내게 오기도 하고, 정답을 달라고 바싹 고개를 내밀었다가 한 방에 해결되는 특효약이 없음에 실망하며 떠나가기도 한다. 그것이 인생인데 말이다.

 

이제 괴멸적으로 나는 망가져 있었다.

이제 나라는 일인칭을 쓸 수 있을 만한 나는, 내 안에 남아 있지 않다. 나는 줄줄 녹아 털구멍을 통해서 비어져 나와, 배수구를 통해 흘러가고 말았다. 지금쯤은 구정물에 섞여 어디까지가 나인지 알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행복하다. - 267p, 하권; 문득 "자아"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이들은 내게 묻는다, 자기의 "자아"가 정상적이냐고. 그런 분들은 대부분 자아가 단단한 땅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자아"라는 것이 풀썩 꺼지는, 얇은 살얼음 위에서 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일을 할 수록 영유아기와 유년기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사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필요하게 과잉된 환상이 사라지는 것 뿐이다. - 278p, 하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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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밑줄 긋기를 하고 나니, 더욱 더 이 작품을 팔아버리기는 커녕 교고쿠 나쓰히코의 백귀야행 시리즈를 홀랑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이 굳어진다. 이로써, 읽고 싶은 목록이 더 추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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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8-0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더운 날입니다.
마고님 즐겁고 시원한 하루 보내세요.^^

마녀고양이 2016-08-05 10:00   좋아요 1 | URL
정말 더운 날이네요.
건강 챙기시고 즐거운 하루 되셔요. ^^

후애(厚愛) 2016-08-01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고님 즐겁고 행복한 8월 되시길 바랍니다.^^
늘 건강하시고, 더위조심하셔요~~

마녀고양이 2016-08-05 10:00   좋아요 1 | URL
후애님도 즐겁고 행복한 8월 되셔요.
너무 너무 덥네요... 에공
 
앨리스 죽이기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 / 검은숲 / 2015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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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소장하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라고 쓰다가 멈칫한다. 실은 꽤 흥미롭고 재미있었으며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감탄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덕분에 루이스 캐럴의 스나크 사냥을 인터넷에서 열심히 검색했고 스나크 사냥을 구매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으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나라의 앨리스보다 더 함축적인 은유로 점철되어 있다는 평가에 나의 한계를 떠올리고 바로 포기했다. 앨리스 죽이기는 이상한나라(혹은 거울나라)와 현실세계를 아바타라라는 패턴으로 연결시킨다. 즉, 나비가 내 꿈을 꾸는지, 내가 나비 꿈을 꾸는지의 변주이다. 아바타라란 원래 힌두교에서 세상의 특정한 죄악을 물리치기 위해 신이 인간이나 동물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며, 컴퓨터에서 자신의 분신으로 형상화되는 아바타이기도 하다. 원작 앨리스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등장 인물들은 끝없는 말장난을 해대어 사람을 질리게 만들고, 원작처럼 크게 세련되게 느껴지지도 않으며, 호러 전공의 작가답게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엽기 호러 살인 묘사가 나타나서 사람을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역자가 우려한 것처럼 내가 이 책을 소장하지 않겠다고 결정한다면, 바로 이런 잔혹성 때문일 거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잠자리의 날개를 쥐어 뜯는 것처럼 잔혹 동화는 순진한 얼굴로 태연한 멸절을 행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뛰어 넘을만큼 전체적인 구성과 마지막의 트릭이 매혹적이며, 무엇보다 이상한 나라의 붉은 왕이 꾸는 꿈이란 표현이 무상함과 허전함, 제어할 수 없는 외부의 힘으로 흔들거리는 삶과 닮아있어 마음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이 리뷰를 마치는 지금도 소장 여부는 결정이 어렵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추리와 잔혹 동화를 좋아하시는 분께는 양심의 가책없이 일독을 권할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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