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동네 버스 정류장에서 회색빛 새를 마주친 아침은 어쩐지 행복해진다.

자신의 짝지와 삐이이이익- 주고 받는 그 녀석의 노래는 참으로 시끄럽지만 가끔 청아하다. 나는 이 수수한 회색 새가 참 좋다. 풍성한 머리 깃털과 동그란 등날개를 보면 마음이 그저 흐믓해지고 만다. 그런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이 색의 이름은 "직박구리"다.

나에게 그리 이쁘게 들렸던 울음소리가 누구에게는 "시끄럽고 쫓아내야 할" 새로 인식되는 듯하다.

 

 

2.

 

문득,

 

한 아이의 엄마가 생각난다.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하는 좋은 엄마였다. 그런데 본인은 자신의 부족한 면만 바라보느라, 그리고 자신의 연장선으로 간주하는 자녀의 부족한 면만 바라보느라 걱정하고 염려하고 위축되고 자신 없어하고, 결국 자신과 자신의 아이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분이었다. 그 분은 "자신의 긍정적인 강점 바라보기"와 "스스로 안아주기"를 나와 연습 중이다.

 

나에게 직박구리는 "수수하지만 우아한, 행복한 하루를 안겨주는" 새이다.

 

 

3.

 

우리 동네는 인구 100만의 대도시에 속해 있지만, 우리 딸, 딸의 친구들, 딸의 학교에 부임한 선생님들까지 농촌으로 인식하는 마을이다. 8000 세대 가까운 아파트 주위는 모두 논밭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마을 버스가 그 논밭을 지나서 지하철까지 우리를 실어나른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가운데 공터에 초등학교 두 개, 중학교 하나, 고등학교 하나가 있고, 거기에 얕은 언덕과 산책 코스와 다수의 가게들이 있는 형태이다. 코알라는 한 동네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처 고등학교로 거의 유사한 친구들과 주욱 올라가고 있다. 교통, 매우 불편하다. 시에 속해있지만 아이들, 다소 수수하다. 그런데 우리 가족이 이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맑은 공기와 자전거를 타고 농촌 길을 달릴 수 있는 주변 환경 때문이다. (음, 경제적 문제도 있긴 하지만.)

 

서울이나 다른 대도시의 긴 하루를 보낸 후 마을 버스 또는 단 하나의 서울행 버스를 타고 아파트 후문 정류장에 내리면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쉰다. 아, 콧망울 가득 들어오는 맑은 공기, 집에 왔구나 싶은 안도감. 비가 오는 날은 더욱 좋다. 탁탁 떨어지는 우산 위의 빗방울과 함께 촉촉한 나무 내음과 풀 내음이 가득 나에게 달려온다. 그 시간의 나는 참, 행복하다.

 

 

4.

 

그런 우리 동네의 학교들 사이에 도서관이 생겼다. 와우, 동네가 조성된지 14년만에 드디어!

잇몸 치료를 한 어느 평일 오후, 마취약에 취한 나는 멍한 얼굴로 어슬렁 어슬렁 걷다가 도서관에 우연히 도착했다. 친구들과 학교 과제를 하기 위해 며칠 전에 들렀던 코알라의 말대로 깔끔하다. 삼 층 계단으로 올라서니, 새로 생긴 도서관이라 아직 책이 빡빡하지는 않지만 아담한 서고에 듬성듬성 빈 앉을 자리, 평일이라 조용하고 사람도 없고 햇볕은 쨍하고.

 

 

 

 

 

책장을 훑다가 우연히 "파리의 심리학 카페" 라는 책을 뽑고,

창가의 빈 자리에 앉아서 따가운 겨울 햇살을 피하기 위해 롤 커튼을 내린 후 편안하게 읽어 내린다.

 

여유가, 마음 깊이 생겨난다. 그리고

행복하다 라는 정서.

 

 

 

5.

 

책에 좋은 구절이 많아서

핸드폰에 여러 구절을 옮겨 입력한다.

 

누구에게나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메뉴판이 있는 식당이 아니라 코스 요리가 나오는 식당이라 할 수 있지요. 진정한 불행은 불행한 사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 좋은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불운한 일은 생길 수 있지만 불행에 머무는 것은 우리의 선택일 뿐이니까요. - 42p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은 과거로 돌아가 모든 일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게 아닙니다. 적절한 거리를 두고 아픈 기억을 떠나보내는 것이지요. 그럼으로써 고통스럽던 과거가 더 이상 현재의 삶에 침입하여 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겁니다. - 53p

 

우울감이란 더 이상 익숙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고 낡은 자아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으로, 성장을 향한 신호탄입니다. - 108p

 

책만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의 부드러운 공기를 마시며 

의무감 없이 오로지 하고 싶기 때문에

어떤 지식이나 지혜를 얻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지.

 

 

 

 

6.

 

2016년 올 한해가 간다.

개인적으로는 얻은 것이 많은 한 해 였고,

수십 년 동안 뚫린 마음의 한 구멍을 많이 채워넣었던 한 해 였다.

 

"나 자신" 하나만으로 온전할 수 있음을 느끼는 해 이기도 했다. 그래서

주위 사람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함께 시간을 공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해 이기도 하다.

 

또한 대한민국의 국민임이 자랑스러워지는 해 이기도 했다. 뿌리에 대한 자부심은 나를 채운다.

 

 

7.

 

소소한 것이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하자.

중고로 샀던 스티븐 킹의 "미스터 메르세데스"가 의외로 재미있어서 행복한 며칠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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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12-28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동네에도 그렇게 우는 새가 있는데 정말 직박구리인 줄도 모르겠군요.
마고님 사는 동네가 어디길래...? 가끔 그런 동네가 그립기도 해서 말이죠.
우리 동네는 건물이 다닥다닥인지라....

마고님, 올해도 수고 많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고 행복한 일들만 가득하길 빌어요.^^

마녀고양이 2016-12-28 10:42   좋아요 1 | URL
경기도 변두리의 새로 개발된 도시에는 이런 곳들이 있어요.
그런데 교통이 엄청 불편하죠. ^^

스텔라 언니도 올해 수고 많으셨고,
새해에 즐겁고 행복한 일 가득하세요.

꿈꾸는섬 2016-12-27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동네에도 직박구리가 살아요.
전 그 새소리가 좋더라구요.
행복이 담긴 소소한 일상이야기, 올 한 해 얻은 게 더 많았다는 것, 제가 다 흐뭇하고 좋네요. 깨끗한 도서관까지요.^^

마녀고양이 2016-12-28 10:43   좋아요 2 | URL
우리나라에 직박구리가 텃새라네요. 요즘 더 많아졌대요.
저도 그 새소리가 참 좋아요.

꿈섬님도 요즘 바쁘시다면서요? ^^
새해에 즐겁고 행복한 일 가득하세요.

서니데이 2016-12-27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새, 가끔 저희집 베란다에 나타나서 엄마의 사랑하는 다육식물을 한번씩 맛보고 가는 새랑 비슷한데요.^^ 비둘기보다는 작은 것 같은데, 날씨가 따뜻하면 자주 날아와요.
도서관이 가까이에 생겼다는 소식 부럽습니다.
마고님 벌써 연말이 되었어요. 행복한 화요일 되세요.^^

마녀고양이 2016-12-28 10:44   좋아요 1 | URL
오오, 그 녀석이 다육식물도 맛보고 간대요? 비둘기보다 작고 수수하게 생겼어요.
눈도 더 반짝거리고....

도서관이 가까이 생겨서 참 좋은데, 마음만큼 자주 가지는 못하네요. ^^
서니데이님도 행복한 날 되셔요.

cyrus 2016-12-27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동네마다 ‘작은도서관‘이 많이 생겼어요. 정말 좋은 현상인데 이러면 책을 사는 일이 점점 줄어들어요. 요즘은 신간보다는 절판본 사 모으는 일에 푹 빠졌어요.

내년에도 마고님과 코알라 양에게 행복한 일이 많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마녀고양이 2016-12-28 10:45   좋아요 1 | URL
작은 도서관이 생겨서 참 좋아요.
저는 책을 너무 많이 사다보니, 현재 자중해야 하는지라.... 글쎄 0.1% 안에 들더라구요. ㅠㅠ
절판본, 발견했을 때 너무 신나고 귀히 여겨지겠네요.

사이러스님도 내년에 좋은 일, 행복한 일 가득하세요. ^^

감은빛 2016-12-28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네에 생긴 도서관 좋네요!
한때 작은 도서관 운영위원도 했었는데,
요즘은 통 도서관 가볼 여유가 안 생기네요.

저 책 중고서점에서 낚아와서 책탑 위에 올려져 있는데,
과연 언제 읽을까요? ㅠㅠ

마녀고양이 2016-12-30 15:05   좋아요 0 | URL
아하하, 저도 그렇게 못 읽은 책이 너무나 많아서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
동네의 도서관 앞을 지나갈 때면 괜시리 뿌듯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