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사람들마다의 해석이 천차만별 다르다는 면에서 영화 곡성은 멋진 영화다. 훌륭하게 사람들의 내적 투사을 이끌어 내어 자신을 투영하게 만든다. 삶과 죽음, 선과 악, 신과 악마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주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소설에서 종종 등장하는 주제이지만, 한국 영화계에서 분명 색다른 충격을 안겨준 것처럼 보인다.

 

나는 이 영화를 인간이 어떻게 유혹에 무너지는가와 연관된 인간 역사의 에피소드 변주 중 하나로 해석하였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이후, 의심과 두려움(공포),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화는 저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꾸준히 반복되는 주제이다. 호랑이처럼 강한 발톱과 힘을 가진 것도 아니고, 토끼처럼 빠른 발을 가진 것도 아니며, 원숭이처럼 나무를 잘 타는 것도 아니고, 새처럼 날아다닐 수도 없으며, 물고기처럼 헤엄을 잘 칠 수도 없이 오직 사유할 수 있고 도구를 활용할 수 있는 이점으로 진화해 온 인간에게, 동굴 밖 세상은 수많은 시험을 거쳐야 하는 위험한 장소이다. 우리는 당연히 의심해야 하고, 당연히 반성해야 하며, 당연히 예측하려고 애써야만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고, 우리의 선조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그런데 신화나 종교는,

 

무조건 믿으라 한다. 이는 참으로 모순적인데

 

환웅의 말에 따라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받아 삼칠일 동안 햇볕을 보지 않고 버텨낸 웅녀를 보면서, 중간에 포기한 호랑이가 훨씬 인간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의심하고 포기한 호랑이가 너무나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종교나 신화는 인간의 본성과 거리가 있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강요하면서 충성을 맹세시키고 그 아래에는 강력한 통제의 의도가 숨어있다고 느낀다.

 

맹목적으로 믿으라, 의심하지 말아라.

 

이는 곡성에서 신을 대변하는 무명-이름 없는 자-가 인간에게 외치는 말이다.

 

 

1.

 

시험에 걸려 드느냐,

생존이라는 미끼를 걸어 낚시를 던지고 어떤 물고기가 잡히는지는 물고기의 선택에 따른다.

 

이름 없는 자가 지키는 마을에 "외지인"이 나타나서 낚시 줄을 드리운다. 이에 일광-하나의 빛-이라는 유혹이 나타나서 교묘하게 판을 흔든다. 저기 있는 악은 자명하다, 거기 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여기 반짝이는 빛은 희망의 빛인지, 타락의 빛인지 혼란스럽다. 일광의 말과 무명의 말이 일치하지 않을 때, 무명이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이해시켜주지 않으며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할 때 더욱 그렇다.

 

짧게 한 컷 나오는 신부님은,

악마가 흔드는 미끼를 초연하게 무시한다. 그는 의심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는 시험을 통과한다. 그러나 주인공 종구와 수련 신부는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공포에 다다르며 미끼를 문다.

 

선택은 온전히 물고기의 책임이다. 불공평하다. 불공정하다.

 

 

2.

 

인간에게 있어 공포의 영향은 상상을 초월한다.

 

나를 밀어내고 내 몸 속에 들어와 살고 있는 누군가에 대해 이해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내 몸속으로 들어온 그 누군가는 원래의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은 끝에 결국 빈 껍질만 남겨 두었다. 차라리 죽여주기를 바랐지만 내 바람은 묵살되었다. 난 자비라는 감정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오래 전에 잊었다. 그날 이후, 나는 죽음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미 오래 전 그 음험하고 불결한 방에서 죽었지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살아남았다. 아니 내 대신 걷고 말하는 누군가가 다시 태어났다. - 8p, 마리오네트의 고백, by 카린 지에벨

 

직업을 컴퓨터 다루기에서 인간 대하기로 바꾼 이후, "정서"의 영향력에 종종 충격을 받게 된다. 인간이라는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상드라는 그동안 철저히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녀는 파트릭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영혼은 파트릭에게 철저하게 장악되어 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그의 명령을 따르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하는 듯했다. - 227p, 마리오네트의 고백, by 카린 지에벨

 

이겨내야지, 죽을 힘을 다 하면 이겨낼 수 있어, 제 정신이야, 미친 것 아니야,

도저히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낯선 타인에 의해 강간을 당할 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불쑥 올라 온 어린 시절에 대들었다가 매 맞은 공포로 인해 얼어붙고 그대로 끌려간다. 차라리 공부를 안 하면 될 것인데, 어린 시절 시험지에 틀린 갯수대로 혼났던 공포로 인해 죽으려고 한다. 해결되지 않은 공포, 즉 트라우마란 이렇게 무섭다. 죽음에 대한 공포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에게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든다.

 

 

3.  

 

곡성에서 들이미는 공포는 살아남아야 하는 인간에게 불공평한 시험이다.

낚시밥을 무는 물고기의 탓을 하니, 억울하다.

 

(감독의 세계관이나 어떤 의도이기도 하겠지만 사회 시스템 전반에 불공평한 시험이 만연하다.)

 

 

4.

 

인간은 생존의 상황에서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한다,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얼어붙거나. Fight, Flight, Frozen.

 

어떤 이들의 인생은 이야기처럼 흘러가는 것 같다. 내 인생에는 마침표와 출발이 많았다. 트라우마가 그렇다. 줄거리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다. (...) 갑자기 일어나고, 삶이 다시 이어진다. 그 누구도 각오하라고 알려줄 수 없다. - 31p, 몸은 기억한다 에서 제시카 스턴의 거부:테러의 기억 인용구, by 베셀 반 데어 콜크

 

최근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뇌 과학과 진화심리학 분야는 트라우마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인간의 뇌는 일정 수준 이상의 자극을 경험하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기억 처리 과정을 끊어버리고 그때의 자극은 고스란히 해마에 남게 된다. 마음이 아예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호하고자 잊어버리기도 하고 묻어버리기도 하고 망상이나 꿈의 형태로 변형시키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결함이다. 그것을 "악의"로 변형시키는 것은 정말 불공정하다.

 

성폭력 희생자, 전투 군인, 성추행을 당한 어린이 대부분은 자신이 경험한 일을 생각하면 너무 불안해서 그 일을 마음 속에서 밀어내려고 하고,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간다. 공포의 기억, 나약함과 취약함이 맞닥뜨려야 했던 수치심을 안고 정상적인 기능을 유지하려면 실로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누구나 트라우마를 이겨 내고 싶어 하지만, 뇌에서 우리의 생존을 담당하는 부분(이성적 사고를 담당하는 저 아래 깊숙한 부분)은 사실을 부인하는 능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 정신적 외상을 입은 경험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위험을 암시하는 실낱같은 단서만 주어지면 다시 활성화되고, 뇌 회로를 뒤흔들며 방대한 양의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시킨다. 이로 인해 불쾌한 감정은 신체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고 충동적이고 공격적인 행동을 촉발시킨다. - 24p,  몸은 기억한다, by 베셀 반 데어 콜크

 

생존과 관련된 부분은 트라우마 이전의 본능적인 부분, 변연계에 저장되어 트라우마보다 더욱 극심한 반응을 야기한다. 이러한 인간의 공포와 두려움이 어쩌면 무조건적인 믿음과 진실, 선이라고 정의된 어떤 것을 이상화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현실이 아닌 인간의 소망이 아닐까.  

 

 

5.

 

모리 히로시의 "F" 시리즈를 좋아해서

출간될 때마다 사모으고 있다. 휴가를 맞이해서 마음 편하게 몇 달 전에 출간된, 출간되자마자 환호하면서 구매한 책을 이제야 읽는 중이다. 내가 이 책에 매료된 까닭은 이공계 출신의 작가가 이공계 교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상에 접근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 거야. 차고 벽에 바깥 풍경이 비쳐 있었어. 그것도 위아래가 거꾸로.

모에는 순간 생각한다. 그리고 금세 알아차렸다.

아아, 바늘구멍 사진기 원리죠?

그래, 우편함의 틈새에서 새어든 빛이 반대쪽 차고 벽에 바깥 풍경을 거꾸로 새긴 거지. 차고 자체가 커다란 카메라가 됐고, 나는 그 안에 있었어. 재미있긴 했지만 무서웠다. 왜냐면 이유를 알 수 없잖아. 그때는 아직 이해할 수 없었지.

마법이라고 생각했나요?

아니, 내가 모르는 법칙이라고 생각했어. 사이카와는 빙긋 웃는다. 지금도 뭔가 이상한 일과 맞닥뜨리면 내가 모르는 법칙이라고 생각해려 해. 이 세상에 아무도 모르는 법칙이 있을지도 모른다.

멋진 이야기네요.  - 264p, 환혹의 죽음과 용도(F 시리즈 6권), by 모리 히로시

 

어제 이 문구를 읽는 순간 즐거웠다.

오늘 이 페이퍼를 쓰고 있는 동기이기도 하다.

세상을, 두려움과 의심과 공포가 아닌, 아무도 모르는 법칙을 발견하는 과정으로 살아가고 싶다.

 

 

6.

 

동시에 자각한다.

나는 세상과 타인과 이해를 넘어선 무엇을 많이 두려워하고 의심하고 무서워하는구나. 간절한 바람은 늘 핵심적인 불안과 맞닿아 있다. 안전함을 갈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싶다.

 

영화 곡성을 연달아 두 번 보았다. 크게 재미있지 않았으나 

감독의 의도에 호기심이 일었다.

 

인간의 공포는 진화론적으로 자연스러운 부분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것을 진화론적으로, 그저 우연의 산물로, 공룡이나 곤충과 유사한 발달 과정으로 이해하기에는, 허무함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람들은 의미에 매달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실존주의는 현재에 충실하게 만들지만, 인간의 존재 의미에 대한 공허함을 뿌리치지 못하며, 스스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빅터 프랭클의 말을 긍정하면서도 내면 깊숙히 주어진 자유와 책임에 불안하다. 그리하여 종교, 어느 편이 선이고 어느 편이 악인지를 누군가가 정의해 준 추상적 표상이 인간을 도리어 안심시켜 주는지도 모르겠다. 불안정 애착을 지닌 사람과 종교를 연관시킨 수많은 연구 논문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강화된다. 그래서 나는

 

범심론자와 불가지론 사이를 헤매고 있는 상태이다.   

역시 곡성은 고민을 던져 주는 멋진 영화다.

 

 

 

 

 

 

 

 

 

 

 

7.

 

빠진 부분은 어떤 형태로 보충된다.

결락과 보완을 되풀이하면서, 기억은 수정되어 간다.

그것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 37p, 도불의 연회 상권, by 교고쿠 나쓰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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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07-28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역시 마고님은 제가 모르는 책을 참 많이 알아요.
전 저 F 시리즈 오늘 첨 알아요.
이공계 교수 내세웠다니까 진짜 나두 궁금하네.
모을 정도라니. 저도 기회되면 함 읽고 볼게요.^^

마녀고양이 2016-07-29 09:52   좋아요 0 | URL
F 시리즈는 추리소설이예요,
언니가 좋아하실지 잘 모르겠어요.. ㅋㅋ
저는 장르 소설을 워낙 많이 모아서, 살짝 걱정이.

그래도 제 글을 읽고 그 책을 읽어봐주시겠다는 마음, 잘 받았습니다~~~~

땡순사랑 2019-02-08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댓글 쓰고 아직 블로그에 머물러 있는데 곡성 역시 정말 큰 충격을 준 영화였어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