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어거지로 쑤셔 넣어야 할 지식이 너무 많아서 책이라면 꼴도 보기 싫었다. 이후 한 번 멀어진 책은 내게로 잘 다가오지 않았다. 그 이유 중에는 노안도 한 몫 했다. 원래 있던 난시에 노안까지 오니 책을 보면 머리가 아프고 집중이 어려우며 피곤한 날은 눈 앞이 부옇다. 알라딘에서 오래 알았던 언니가 이제는 노안으로 피곤하여 블러그 활동을 못 하겠다고 할 때는 그다지 와닿지 않고 서운함만 가득하더니, 이제 내 차례가 되니 도돌이표처럼 나도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사람이 그렇다. 타인이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줄 때,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길이라고 흘려듣다가 나중에 똑같은 일을 당하고 나서야 지혜를 나누어준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아무튼
책이나 알라딘 서재 글쓰기 대신 반려식물에 빠져 있는 중이다.
워낙 정 붙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관심이 있을 때의 몰입력도 상당한 편이다. 덕분에 우리 집은 온실이나 화원을 연상시킬 정도로 엄청난 식물들이 여기저기 있다. 집에서 동물 키우기를 싫어하여 대신 반려식물을 반기던 옆지기는 이제 자리가 없다고, 그만하라고 하소연한다. 거기다
우연히 아파트 재활용품 쓰레기장에 버려진 식물을 보게 된 것이 더 큰 집착의 시작이었다.
버려진 식물을 냉큼, 매우 즐겁게 짚으로 가져와서 새 흙과 다른 동의 재활용품 쓰레기장에서 주워 온 화분에 심었다. 잘 자란다. 그렇게 한 번 눈을 뜨고 나니, 매주 버려진 식물이 보인다. 버려지는 반려동물이 워낙 많아서 무책임하고 잔인하다고 했더니, 버려지는 반려식물은 더더욱 많다. 어느 집이 이사했다 싶으면 영락없이 버려진 식물들이나 나뒹구는 화분이 있다. 오늘은 뿌리채 뽑혀서 버려진 녹보수를 보았다. 대체 화분은 어디 간 건지, 녹보수 외에도 대란이나 이름 모를 다른 화초들도 뿌리가 뽑혀서 화단에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나뒹굴고 있다. 이렇게 버려진 식물들을 구제하다 보니 집안이 더욱 북적인다. 결국 1미터가 훨씬 넘는 녹보수는 데려오기를 포기했다, 누군가 데려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며 뒤로 물러난다.
스스로 너무 과하다 싶다. 버려진 모든 식물을 구할 수는 없다.
이런 현실과의 타협 속에서 약간의 혼란과 갈등, 죄책감에 이어 슬픔이 살짝 어린다.
함께 사는 삶,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