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Joe's Library (Joe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5689615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Not completed yet</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ue, 03 Nov 2026 15:20:21 +0900</lastBuildDate><image><title>Joe</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5689615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Joe</description></image><item><author>Joe</author><category>카테고리</category><title>철학적 탐구를 읽고 - [철학적 탐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56896153/17594009</link><pubDate>Mon, 26 Oct 2026 16:0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56896153/1759400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334890&TPaperId=1759400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8355/51/coveroff/895733489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7334890&TPaperId=1759400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철학적 탐구</a><br/>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승종 옮김 / 아카넷 / 2016년 05월<br/></td></tr></table><br/>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
이어서 그의 마지막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적 탐구”를
완독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문제라는 병에 대한 치료는 사유와 삶의 양식이 변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철학이 가지는 엉터리 명제들이나 개념들은 언어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 발생했다고 생각한 그가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한 것을 제외한 부분에서 그 의미를 확정하기위해 진리함수적인
확인을 통해 검증해나가야 한다는 논지를 설파하지만, 책의 마지막에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므로 그걸 깨치게되면 논리철학논고에서 논의한 모든 내용들을 더 이상 참고할 수 없음을 알리고 이야기를 마치게된다. 



사실 진리함수적 접근은 대단히 객관적인 접근이며 이런 접근이 가능한 부분과 아닌 부분은 극명해진다. 하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 사용하는 많은 말과 문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그 진위를 가릴 수 없는 노릇이다. 어떻게 보면 사상적 전회에 가까운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사람이 사용하는 말과 문자가 실제 상황에서 어떤 맥락선상에서 사용되며 그 사용을 통해서 그 말과 문자가
의미를 획득한다는 이야기를 무려 660페이지에 달하는 책의 내용에서 끊임없는 자기질문과 답변 그리고
사고의 흐름을 통해 독자에게 다가간다. 사실 이 책은 비트겐슈타인이 출판을 목적으로 저술한 책이 아니라
일종의 “노트”같은 것으로 자신의 생각을 생각의 흐름이나
주제의 흐름에 따라 계속 쓰면서 스스로 고민하고 스스로 답하고 의문을 가지고 하는 책이라 처음에 읽으면 상당히 당황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600페이지 넘게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사고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언어를 부정확하게 통용해왔는지를 알게 된다. 일상생활에서도 그런데 추상적 개념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 분야에서 언어는 과연 어떤 역할을 하며 의미를 확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재미있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병폐를 고치기 위해 이 책을 구상하고 저술했지만 이 책에서는 심리철학 일부를 제외하곤 사실상 감각적인 표현이나 믿음이나
기대와 같은 다소 추상적인 언어를 다룬 것을 제외하곤 철학적 용어나 개념은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언어가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 속에서 사용함으로써 비로서 획득되어지는 것이기에 특정 단어나 어휘가 특정 의미로 고정되어 있다고
보지를 않는다. 그렇다면 철학이나 인문학에서는 그 언어적 적정성을 어떻게 담보할 수 있을까?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그 시점, 그 책의 안에서라도
저자가 의미하는 것과 독자가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간극을 최소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여기에
대해선 비트겐슈타인의 이야기가 더 이상 전개 되지않고 종료된다. 아마 불가능한 일에는 언급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었을 것 같다. 



여기서 부터는 언어학의 영역으로 접어들 것 같다. 소쉬르는 기호는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기호체계내부의 차이에 의해 의미가 결정된다고 본다. “사과”를 우리가 알고 있는 사과를 가리킬 수 있지만 사회내부에서 약속만 된다면 배나 복숭아를 가르킨다고 해도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사과, 배,
복숭아 등등이 계속 지시되어 있는 일련의 자의성에 근거한 사회성이 확보되어버리면 이것들은 과일이라는 체계 안에서 각각의 차이를 가지고
지시하게 되므로 어느정도 의미가 고정되는 상황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라는 단어는 아들이 엄마에게 엄마 앞에 있는 사과를 보면서 “사과”라고 외치면 사과를 건네달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아들이 어려서 말을 배우는 단계라면 사과를 지시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상황이 대단히 복합적인 양상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할 때 최소한 한국내부에 있는 사람들
안 에서라도 동일한 의미를 획득하는가? 정치적 입장에 따라 (사회)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절차적)민주주의, (경제)민주주의…… 등등
많은 함의를 가질 것이다. 심지어는 한 분파안에서도 또 갈린 의미들을 생성해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이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획득하는가? 결국 그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결의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고 보아진다. 그래서 연륜이
있는 사람들은 정치가들이나 사회활동가들의 말을 보지 않고 그가 살아온 행동의 궤적과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성향을 본다. 이런 것을 보지 않고는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존재”라는
용어는 여러 철학자들이 사용하고 있지만 그 철학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
말을 사용하는 철학자가 속해 있는 시대가 함의하는 내용과 더불어 그 철학자가 과거의 단어로부터 차이를 만들어 형성한 부분까지 고려해야하며 심지어는
그런 용어가 실제의 문장에서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어지는지 그리고 최종적으로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 사용되면서 그 의미를 획득하는지 까지를 보아야
최소한 그 시점에서의 의미를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제일 근본적인 부분은 비트겐슈타인이 처음에 제기했던 이야기 –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하라 -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비록
우리는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앞으로도 끊임없이 말하고 표현하고 의미를 획득하려고 노력하겠지만 그 한계에 대한 인식만은 항상 뇌리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다음 책은 뭘 읽어 볼까 생각 중인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내려가기보다는 일단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있다고
설파한 라캉의 에크리와 텍스트의 내부에서 텍스트 자체의 논리로 해체하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를 공부하면서 현대철학을 계속 더듬어 가볼까 한다. 기본적으로 “현상학”, “정신분석학” 이 두 분야는 자칫하면 종교와 신화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좋은 분야라고 생각한다. 라캉의 저서는 기본적으로 정신분석학 임상에 기본을 둔 책이고 자신도 임상가로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사람이지만, 사실 정신분석학 분야에서는 이단아 취급을 받으며 임상적 치료 부분에서는 극히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욕망의
철학과 맞물려 신비화되어 있는 부분도 있어서 원저를 읽으면서 그 진위를 한번 확인해 볼까 한다.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8355/51/cover150/895733489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3555149</link></image></item><item><author>Joe</author><category>카테고리</category><title>일반언어학 강의를 읽고 - [일반언어학 강의]</title><link>https://blog.aladin.co.kr/756896153/17543619</link><pubDate>Tue, 29 Sep 2026 16: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56896153/17543619</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6826973&TPaperId=17543619"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0705/73/coveroff/8976826973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6826973&TPaperId=17543619"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일반언어학 강의</a><br/>페르디낭 드 소쉬르 지음, 김현권 옮김 / 그린비 / 2022년 12월<br/></td></tr></table><br/>특히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언어를 통해 의미를 전달받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특히나 문학이나 예술 비평 그리고 철학의 경우는 다루어지는 언어가 무척이나 추상적이며 지적이거나 아름답거나 심지어는 구성되는 단어나
문구가 살아있거나 실재하는 실체처럼 느끼거나 심지어 확신을 가지기도 하는 상황을 자신도 모르게 겪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점에서 특히 철학의 경우 언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며 이런 언어로 집을 지은 철학은 어떤 의미를 가지며
그로인한 한계는 무엇인가하는 의문을 가지고 묻고 답하는 시간들을 가지는 것 같다. 철학적 관점에서 언어에
접근한 사람 중 제일 영향력이 큰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본다면 언어 그 자체의 관점에서 접근한 사람 중에는 페르디낭 소쉬르이 그 선구자이자
아직도 영향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강의를 제자들이 취합하여 만든 일종의 강의노트가 “일반언어학 강의”이다. 이
책은 언어학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프랑스 구조주의를 태동시킨 책이기도 하다. 소쉬르의 용어 중 제일
중요한 용어는 아마 랑그, 빠롤, 시니피앙, 시니피에 정도일 것이다. 놀랍게도 나 역시 이 용어를 40년도 더 전에 고교 1학년 국어 참고서에서 접해 본 적이 있다. 교과서에 나온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흥미로웠던 경험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그 용어를 확립한 저자의 책을
읽게 되어 감개 역시 무량하였다. 



소쉬르의 언어이론의 토대는 일단 언어의 자의성이다. 모든 단어나 문법구조
등은 자의적이고 각각이 기호적인 것이라 단독으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문장구조안의 배치나 차이에 따라 결정되어진다 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이렇게 개인적으로 철저히 자의적인 부분이 사회에서 상호소통을 통해 사회성을 획득해야만 언어가 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자의성과 사회성이 결합되어야만 최소한 언어로 이해할 수 있는 형태가 되고 통용이 된다는 것이 그 기본원리이다. 



단어가 기호로 존재하는 것을 시니피앙(기표)이라고 하고 그 대응하는 의미를 시니피에(기의)라고 하는데 이 결합자체가 철저히 자의적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과를 한글로 사과, 애플, 링고 등등 어느 것이로나
결합해서 사용할 수 있지만 우리사회에서는 사과(기표)라는
단어로 그 의미(시니피에)를 표현한다는 의미가 된다. 소쉬르는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같은 역사적 시기에서 발생하는 언어적 변화나 규칙들(공시언어학)과 과거로부터 지금 이 시기까지 지나오면서 발생, 변화하는 언어적 변화등(통시언어학)을
구분하면서 이러한 통시적, 공시적 언어영역들 역시 자의성을 그 기본으로 하면서 사회성을 통해 확립되어
가는 과정들을 논리적으로 전개해간다. 공시 언어학에서는 통합관계와 연합관계를 통해서 통시언어학에서는
음성진화와 유추 등을 통해서 그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통합관계는 단어의 형성에서도 사용되고 문장에서도
이용된다. 



“나는 너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라는
문장속에 “나는” “너에게”
“가르침을” “받는다” 형태로 나열되면서 발화와
의미를 획득한다. 심지어 “나는”은 “나””는”으로 각각의 발음을 가능한 최소단위로 또 나누어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통합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단어를 구성하지도 문장을 구성하지도 못하게 된다. 여기서 이 문장을 듣거나
볼 때 우리는 “가르침”이라는 단어를 목도하면서 “배움” “교육” 등의 단어와의
연관성이나 교체가능성을 검토하게 되는데(물론 이런 의미적인 것 말고 어근이 같은 단어 등도 고려대상이
된다) 이를 연합관계라고 한다. 소위 문법으로 이야기하는
형태론과 통사론은 통합관계를 다루게 되고 어휘론은 연합관계를 다루게 되는데 사실상 이 두 가지는 같이 가기 때문에 구분하기 힘든 경우도 많다. 음성변화는 음성교체, 모음교체 등을 통해 진행되며 유추는 일종의
모방으로 음성교체, 모음교체 등으로 변화한 다른 단어들을 보고 그 규칙성에 맞추어서 유추해서 바꾸어
나가는 것을 말한다. &nbsp;&nbsp;&nbsp;&nbsp;



일반적인 언어의 특징과 규칙을 과학적 탐구의 결과들로 정립해 나간 저서로 읽다가 보면 정교한 퍼즐을 맞추어 나가는
느낌마저 주는 역저임에 틀림없다. 예시로 든 것들이 대부분 프랑스어라 이 부분은 좀 어려웠는데 라틴어나
독일어 예시들은 그래도 이해하기가 나은 정도이다. 하지만 대부분 예시를 꼼꼼히 읽어보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게 번역이 되어있어 큰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언어의 인종적
차이나 어족과 민족적 차이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 없다는 부분도 펼쳐 나감으로써 언어는 언어일뿐 인종적, 지리적, 민족적 우월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점도 흥미로웠다. 



소쉬르의 언어학을 읽다 보면 우리가 평소에 접하는 단어들은 자의적으로 구성된 기호이지 뚜렷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고 문장 역시 통합적 관계에서 순서의 배치를 통해 의미를 생성하고, 이렇게
생성된 문장 역시 핵심단어들이 연합적 관계에 의해 대치되거나 변화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 언어적 행위 자체가 상당히 불완전한 토대위에 서있음을 알게 되고 이런 언어적 행위를 통해 우리가 과연 영원불멸의
진리를 설파할 수 있는 건가하는 의문을 가지게&nbsp;
한다. 



소쉬르의 언어학을 공부해보면 결국 통합관계와 연합관계가 제일 중요한 테마인데 이건 한 단어, 한 문장안에서 각각의 음소나 단어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그로 인해 언어적 기능을 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기에 각 개별 요소들이 의미와 기능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이런 관계들의 형식 – 구조-가 중요함을 전면으로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소쉬르가 프랑스
구조주의의 선구자가 되고 레비스트로스가 문화인류학에서 그 방법론을 가져옴으로써 구조주의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소쉬르는 중요한 이론가이다.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언어적 전통과 관습 그리고 그 변화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기에 확립되어
있는 촘촘한 언어 내부의 관계들을 분석하고 종합함으로써 언어에 대한 정의를 한다는 점에서 그 당시 새롭고 혁신적인 것이었고, 오늘날 이런 학문의 방법은 거의 대부분의 인문, 사회과학적 연구방법의
기본이 되어있는 것 같다. 물론 구조만 분석되었다고 우리가 그 구조의 개체들을 충분히 이해하거나 응용할
수는 없지만 구조분석이 되지 않으면 대단히 허약한 기반아래에 놓이게 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는 기표와 기의의 형태로 마치 일대일 대응이 가능한 것으로 상정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라캉을 통해서도 배우고 비트겐슈타인을 통해서도 배웠다. 하지만 우리가 언어를 사용할 때는 일반적으로는
기표와 기의가 대응한다고 가정하고 진행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고 특정 상황이나 추상적 논의들로 들어갈 때 이 대응관계가 의문시되면서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도 전기 철학에서는 소쉬르에 가까웠다면 후기철학에서는 언어게임으로 전화하여
상황과 맥락 그리고 언어사용행위의 결과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을 설파한다. 지금 읽고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에서 이 부분을 아주 집요하게 파고들고 있음을 매일매일 느끼고 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효용과 그 한계가 무언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분간 공부를 좀더 해보아야 겠다. 인지과학적 관점이긴
하지만 언어의 창조와 진화에 대한 책 “진화하는 언어” 를
읽어볼 생각이다.<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0705/73/cover150/8976826973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07057306</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