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Joe's Library (Joe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75689615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Not completed yet</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Thu, 16 Jul 2026 20:06:57 +0900</lastBuildDate><image><title>Joe</title><url>https://image.aladin.co.kr/img/blog2/manage/profileimg.jpg</url><link>https://blog.aladin.co.kr/75689615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Joe</description></image><item><author>Joe</author><category>카테고리</category><title>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론을 읽고 -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론]</title><link>https://blog.aladin.co.kr/756896153/17377106</link><pubDate>Mon, 06 Jul 2026 17:3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56896153/17377106</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0619215&TPaperId=17377106"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1611/0/coveroff/8930619215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0619215&TPaperId=17377106"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론</a><br/>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곽강제 옮김 / 서광사 / 2012년 04월<br/></td></tr></table><br/>비트겐슈타인의 전기저작인 “논리철학 논고 (논리철학론)”을 일독하였다. 하이데거에
이르니 현란한 언어적 기원추적과 의미추적 그리고 적절한 의미부여를 위한 변형 등이 이루어지면서 마치 이러한 언어적인 처리방식 자체가 진리성을 담보로
하는 듯한 논지를 펼치는 듯하여 철학분야에서 언어가 가지는 역할과 그 한계를 한번은 제대로 따져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읽게 된 책이 이 책이다. 사실 오늘 날 모든 학문은 언어로 구성된 체계를 가진다. 특히나
문자언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 언어가 가지는 기능과 효용 그리고 한계를 진지하게 고찰을 해보아야 특정 학문의 특정 저자가 논하고 있는 그
내용이 적확한 것인지, 독자 의 오류가 생기고 있는지 저자 쪽의 오류가 생기고 있는지, 저자가 펼쳐나가는 논리의 오류인지 그 논리를 담아내고 있는 언어적 문제인지 아니면 한계로 인해서 생기는 오류인지
등을 파악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았다. 



사실 내 개인적으로는 고교 1학년때 수학 집합론을 배우면서 명제의
진리치들을 공부할 때 흥미가 생겨서 명제들의 진리치들을 가지고 논증을 하는 작업을 해본적이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옳다고 널리 인정되어지는 명제들을 가지고 내가 지금 증명하고자 하는 명제를 적용시켜보면(역시
옳다는 가설을 깔고 있는 상태로) 거의 내가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칸트식으로 이야기하면 이율배반이 적용되는 것이고 비트겐슈타인적으로 이야기하면 항진명제로 진리치를 구하게 되는
상황으로 가게 되는 형편인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 논리적 이유까지는 몰랐지만 직관적으로 이런 식의 접근으로는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일의 진리치를 객관적으로 구할 수 없다 라는 직관적인 판단이 서서 그 이후엔 그런 장난(?)은
그만두게 되었다. 



역설적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은 그 당시 프레게와 럿셀로 시작된 모든 언설을 명제화 시키고 그 명제의 진리치를
구하면 그 진리치의 조합으로 모든 언설과 그 언설들의 복합체들마저도 진리치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더욱 정밀화시키고 프레게와 럿셀이
노출했던 약점들을 보완시켜 “일반명제의 법칙”을 구하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첫 시작점에서 명제를 구성하는 제일 기본 단위인 이름이 반드시 “대상”을 지시해야한다고 지정한다는 점이다. “대상”은 소위 형식적 개념이라서 수학으로 치면 일종의 변수에 해당하므로
대상이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대상 자리에 세계내에 실재하는 특정한 것이 대입되어야 한다. 특정한
것이 지정되지 않은 상태인 명제는 일종의 명제함수가 되는 것이고 항상 변수의 자리에 세계내 실재하는 특정한 것이 대입되기를 기다리는 상태인 것이다. 논리적으로 옳다고 만들어진 명제는 명제 자체로는 항상 옳을 수밖에 없다. 그
명제는 변수자리에 세계내의 것이 대입되어 진리치를 따지게 되는 순간부터 현실에서 작동하고 진리치를 가지고 명제자체의 진리치를 가지고 또한 명제가
결합되었을 때 그런 복합명제의 진리치를 만들어 내게된다. 그런데 문제는 여태까지의 철학적 명제들은 변수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변수가 통용되지 않는 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런 철학적 명제들의 조합으로
거대 철학담론의 논리적 진리성을 확보한다고 여겨왔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안의 실재하는 뭔가를 지칭하는 이름들로 구성되는 명제들로 일반법칙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 방안을 제시하였다. 다른 사람과는 다른 점은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명제들의 진리치들로 판단할 수 있는
대상들을 명확히 했다는 점이다. 칸트식으로 이야기하면 인간의 감성으로 시공간 속에서 파악되어지는 부분까지는
이런 진리함수의 세계에서 언어의 세계안에서 판단하는 것이 가능하나 순수이성의 영역과 같이 추상화, 일반화의
과정을 가져 개념화되는 부분을 명제의 변수로 넣을 수 없음을 확실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철학의
대부분은 헛소리이고 윤리나 미학의 영역은 언어로 말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라는 통찰을 이 책에서 하고 있다. 칸트의 경우는 우리가 만들어 낸 (순수이성에 의해) 개념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거나 실재한다고 확신할 수 없다고 논변하지만 그 개념을 현실에서 펼쳐나갈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그러한 개념들의 유용성과 필요성을 막지는 않았고 특히나 윤리적 측면에서의 개념들은 실천이성의 힘으로 펼쳐나가는 것을 강력히
권유하였다. 그에 비해 비트겐슈타인은 증명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논의들도 언어적 방법을
통해서는 도달할 수없는 부분이므로 침묵하라는 권유만 할 뿐이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이 윤리나 미학의 영역이
존재하지 않다거나 완전한 헛소리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지, 언어로
포착될 수 없고, 언어로 모든 논의를 풀어가는 철학의 영역이 아님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사실 이렇게 되면 모든 형이상학적 철학적 논의들 전체가 잘못된 전제 – 언어로
쌓아올릴 수 있는 영역이라는-위에 서있는 것이므로 일종의 헛소리가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존재”의 역사를
그 언어적 기원으로부터 유추하고 변이되는 양상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도출해내는 그런 과정은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로는 완벽한 헛소리라고 볼 수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제기한 실존적 물음과 그 답의 추구는 비록 세계에 실재하는 것을 지시하는 대상을 가지지 못할지라도
유효하고 단지 그가 제시한 답이라는 것 역시 어떻게 보면 괄호를 쳐두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제시된
답이라는 것을 현실에 맞춰가며 진리치를 찾아가는 과정을 가지면서 확인된 진리치에 한하여 유효한 명제, 의미있는
명제의 카테고리 속에 두고 활용하는 지혜를 가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언어의 한계가 명확하다고 하더라도
그 언어로 한계너머를 추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 가지는 특징인지라 어떻게 보면 칸트의 겸손한 결론과 – 실천이성의
실현으로 목적의 왕국을 이루자라는 – 하이데거의 실존적 결단과 같은 결론이 인간이 봉착한 막다른 길에
대한 숨통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1611/0/cover150/8930619215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6110023</link></image></item><item><author>Joe</author><category>카테고리</category><title>하이데거의 ˝현상학의 근본문제들˝을 읽고... - [현상학의 근본문제들 - 마르틴 하이데거 전집 제24권]</title><link>https://blog.aladin.co.kr/756896153/17313255</link><pubDate>Tue, 02 Jun 2026 15: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756896153/1731325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002343&TPaperId=1731325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noimg_off_b.gif"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1002343&TPaperId=1731325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현상학의 근본문제들 - 마르틴 하이데거 전집 제24권</a><br/>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 문예출판사 / 1994년 04월<br/></td></tr></table><br/>하이데거의 “현상학의 근본문제”를
일독하였다. 이 책은 하이데거 전기사상의 대표작인 “존재와
시간”에서 원래 저술하려고 하였으나 다 하지 못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한 강의록이었으나 결국은 미완성된
상태로 출간된 책이다. 특히나 이 책은 강의록의 형태라서 존재와 시간에 비해 하이데거의 생각의 중심과
펼쳐짐을 파악하기 쉬운 부분이 있고 첫 부분에서 현상학에 대한 간단한 요약과 그 뒤를 이은 일종의 존재론의 철학사를 통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펼쳐나갔던 논리의 핵심을 다소 쉽게 복습할 수 있다는 점은 강점이라고 생각이 든다.

사실상 이 책의 첫째 부분에서는 일종의 존재론의 철학사를 기술해 나간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존재”의 개념이 훗설의 현상학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철학의 전통으로부터 중세시대의 스콜라 철학을 거쳐 칸트에 이르기까지 논의되어온 부족한(은폐되어온) 존재개념을 자신의 현존재 분석에 의한 기초존재론으로 탈은폐시키면서 완성하고자 함을 보이기 위해 이 책의 거의
절반에 걸쳐 아주 자세히 분석하면서 사실상 자신의 존재론을 펼쳐나간다. 결국 책을 곰곰히 읽다보면 알게
되는 것은 하이데거가 현상학적 방법으로 파악해낸 자신의 “존재론”의
토대 위에서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는 존재론들이 “현상학적 존재론”에
비해 모자란 점들을 파헤쳐나가는 작업에 가깝다는 것이다. 마치 각 시대별 존재론의 부족한 양상을 각
존재론에 내재한 논리나 구조의 부족이나 결함으로 인해 하이데거 자신의 존재론이 완성되어져 온 것처럼 이야기 하나 사실은 현상학적 작업의 결과 나온
존재론의 틀속에서 각 시대별 존재론을 비교분석하여 해체해 나가는 정교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라는 사람은 뭔가 솔직한 편은 아닌듯한 인상이 강하게 받았다. 



두번째 부분이 사실상 제일 중요한 부분인데 존재와 시간에서 멈춘 다음 부분인 시간과 존재에 대한 내용들이 나온다. 사실상 하이데거는 훗설의 현상학적 방법을 사람자체에 맞추고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에 집중적으로 탐색하고 밝혀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훗설은 현상학적 환원이후 밝혀지는 것이 “현상학적
실체” – 소위 의식내부의 실체라고 생각하는 반면 하이데거는 단순히 의식내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계-내-존재로 실재 자체이며 의식과 실재는 애시당초 하나로
묶여있는 것 – 하이데거가 정의하는 “존재”-라는 측면에서 차이가 난다. 이점에서는 훗설은 데카르트-칸트계열을 따른다고 볼 수 있고 하이데거는 셸링-헤겔 계열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내 견해이다. 소위 정신적인 것이 곧 물질적인 것이다라고 하는 테제는 독일 낭만주의를
관통하는 부분이며 사실상 독특한 부분이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생각은 셸링의 정신과 자연의 상호교통과
치환가능성과도 다르고 헤겔의 의식이 변증법적 운동에 의하여 대상(물질)을
관통하여 그 본질을 꿰뚫고 귀환하여 새로운 존재가 된다는 생각과도 다르다. 칸트나 훗설의 의식철학처럼
물자체나 대상자체에 궁극적으로 이르지 못한다는 생각보다는 더 나아가고 헤겔처럼 물자체나 대상자체와 합일하여 그 본질을 획득하여 귀환한다는 생각까지는
동의하지 않는 그 중간 어디에 머물러 있다. 하이데거의 지평개념등을 고려해보면 현상학적 환원과정이 변증법적으로
수행되어 가면서 존재를 확장해나간다는 것이 그 기본적인 바탕이다고 생각이 든다. &nbsp;의식의 지향이 그 시발점이 되지만 이미 주어진 세계와 이미 하나의 짝으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그것이 사실상 “존재”를 구성한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는 의식-실재의 커플링이 기본전제가 되어있는 것이 제일 특징이다. 마치 빛의 파동-입자의 이중성격이나 양자역학의 불확정성과 같은 묘한
부분이 있어서 아주 매력적이고 쉽게 반박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나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과 현상학적 근본개념을 읽으면서 든 가장 큰 기쁨은 이 사람의 책은 철학이 드디어
논리와 말의 잔치에서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삶의 지침을 주는 그런 철학의 발걸음을 뗀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었다. 하이데거가 진행한 현존재 분석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어떻게 세상에 나와있고 반응하고 살아가고 있는가? 정말 제대로 살고는 있는가? 제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런 내용을 철학이라는 학문안에서
철학적 용어로 우리를 설득하는 사람이 하이데거이다. 그런데 이 두 책을 곰곰히 읽어보면 과연 하이데거의
논의가 엄밀한 철학적 논증을 거쳤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나의 평가는 하이데거가 시도한 것은 철학이었고
또한 자신도 자신의 책이 철학책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결국은 “철학적 인간학”의 영역에 가깝다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현존재는 결국 “인간”을 말한다. 하이데거가 추구한 것은 현존재를 분석하여 현존재가 구성하는
존재론을 파악한 뒤 모든 것에 적용되는 일반존재론을 도출해 나가거나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현상학의 근본문제는 현존재의 존재론을 전개하지만 현존재의 일반성을 여전히 도출해내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끝이 난다. 현존재의 일반성을 이끌어내는 마지막 단계로 설정한 것이 “시간성”인데 하이데거는 이 시간성을 유일한 가능조건으로 설정해버림으로써
반론가능한 논리가 되어버린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영역에 시간을 순차적으로 설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는 미래의 뭔가를 꿈꾸면서 과거부터 해오면서 축적된 것을 가지고 현재를 미래-과거가 함께 투영되어
살아간다. 이 경우 인간에게는 지금 이 시점에 과거-현재-미래가 중첩되어 나타나는 것이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이런
시간의 양상이 인가에게 나타남을 철학의 분야에서 이야기한 철학자가 없다. 그 점에서 하이데거는 탁월하다. 이렇게 현존재(인간)에게
나타나는 시간의 양상을 시간성이라고 한다. 분명 이 부분은 우리에게 나타나는 양상이다. 그런데 이 시간성이 유일한 존재의 가능조건이 된다면 현존재가 시간성을 형성하지 못하는 상황이면 현존재의 존재가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도 된다. 시간성을 살아내는 사람은 일단 기본적인 인간의 생리학적 기능이 정상이어야
하고, 진정한 시간성을 살아나가려면 본래적 자신을 파악하고 살아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본래적 자아란 일상성에 묻히지 않고 시간성을 항상 몸속에 체득하며 지금 이 순간 자신을 진정한 자신에 투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 여기서 만일 선천적 중증 정신지체 장애환자나 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사람들은
기본적인 뇌기능이 이러한 시간성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불가능할 것이다. 본래적 자아를 회복하지
못하는 일상적인 사람들의 경우는 자신도 모르게 시간성의 영향을 받고는 있으나 활용도 못하고 묻혀있는 상황이고 심지어는 평생동안 그럴 수도 있다. 시간성이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하나의 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유일조건이 되는 순간 여러가지 문제가 생긴다. 전자의 예의 경우 일단 실재적으로는 존재하나 하이데거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론의 “존재”는 실증적인 분야의 존재를 포함하는 상위개념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모순되게 된다.
전자와 후자의 예 모두의 경우 하이데거식의 논의가 일방적으로 흐르면 나찌즘적인 양상으로 갈 수 있다.
시간성이 작동하지 않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이란 나찌즘적으로 보면 “사람구실을 못하는
사람”이 된다. 이런 경우 그 존재가 인정되지 못하면 말살하고자하는
의도가 생길 수도 있는 것이 된다. 하이데거가 나찌즘과 연관된 많은 이야기들이 떠돌고 실제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언급들을 보면 이런 위험성이 내재되어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에서 시도했던 자신만의 존재론이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현상학적 존재론을 결코 넘어설
수 없었던 이유와 그 한계를 현상학적 근본문제를 읽으면서 알개되었다. 하이데거는 지나치게 신비화 되어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제대로 뜯어서 읽어보면 그 한계와 단점은 드러난다. 하이데거가 시간성을 현존재 가능조건의 유일조건으로 내건 것은 아마도 일반 존재론으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에 시도한
것으로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시간성을 이렇게 해서 일반 존재론의 기능조건으로 확장하는 것이 포기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첫째는 현존재 유일 가능조건이 만족되지 못함을 깨달았을 것으로 생각이 들고 둘째는 현존재 존재론 자체가 현상학적 방법의 선상에서
전개된 것인 데 이런 존재론의 내용을 그대로 가지고 현상학적 방법론을 넘어서는 아이디어로 현존재를 제외한 나머지 존재들까지 확장된 일반존재론으로
넘어갈 수 없음을 알게 되어서가 아닐까 한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론은 철학적 인간론으로서 받아들이며 실제 살아가는데 응용하면 무척이나 도움이 된다. 그러나 철학으로서 받아들이면 위에서 이야기한 문제들이 야기되는 부분들이 있고 그 부작용도 실제 역사상에서 확인된
바가 있으니 조심해야 할 것으로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딱 “존재와 시간”을 읽되 그 책에서 하이데거가 끊임없이 드러내는 야심
– 현존재 분석을 통한 현존재 존재론의 파악과 일반 존재론의 완성-에
대해선 어느정도 무시하고 현존재 분석에서 드러나는 “사람이 세상을 파악하고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방법과
그 특징 그리고 지나친 일상성에서 탈출하여 본래적 자신을 찾아나가는 방법으로서의 “기투”를 파악하고 이러한 기투는 과거-현재-미래가 역동적으로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진다는 것 정도를 알게된다면 복잡다단한 세상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br>]]></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img/noimg_150_b.gif</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1381</link></image></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