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의뢰: 너만 아는 비밀 창비교육 성장소설 14
김성민 지음 / 창비교육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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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가제본 서평단에 당첨되어 조금 일찍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제4회 창비교육 성장소설 대상 수상작으로 혼자 해결하기 어렵거나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의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며 주인공이 다양한 사건을 겪고 성장해 나가는 과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학교, 사회, 친구 관계 등 청소년이 마주한 현실적인 고민을 생생하면서도 진지하게 담아내어 많은 공감과 울림을 줄 수 있을 듯 하다.


이 책은 자정이 되면 새로운 사건이 게시되는 비밀스러운 온라인 공간, ‘오늘의 의뢰’ 사이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이곳에서는 ‘혼자 해결하기 어렵거나, 누구에겐 말할 수 없는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는 대가로 기회를 준다. 바로 의뢰를 성실히 수행한 사람만이 다음 의뢰를 등록할 자격을 얻는 것이다. 반대로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 그 사람은 영원히 사이트 이용이 금지된다. 이 규칙은 마치 게임처럼 보이는 시스템에 현실성을 더하며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리고 이야기는 어느 날 밤, 한 학생이 올린 충격적인 의뢰로 시작된다. 대상은 명문고 전교 1등 이진성이라는 아이다. 그 아이의 중간고사 시험을 망치게 해달라는 의뢰가 게시되자 익명의 이용자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지 치열한 논의를 펼친다. 결국 ‘LOVEX’라는 아이디의 누군가가 임무를 수락하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그렇게 제시되는 ‘오늘의 의뢰’는 단순한 문제나 어려움의 해결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마주한 경쟁, 질투, 외면당한 감정들이 교묘하게 얽혀 있어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더한다. 특히 사이트의 규칙은 이용자들에게 일종의 도덕적 책임과 위험을 동시에 부여하며 독자에게도 ‘정의란 무엇인가’, ‘누가 진짜 피해자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진행된다. 주인공 해민 모녀가 사는 다세대 주택의 2층에 어느 날 새로운 가족이 이사 온다. 바로 같은 학교로 전학 올 예정이라는 중학생 ‘강도경’과 그의 어머니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반찬을 들고 2층에 올라간 해민은 뜻밖의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도경이의 고함과 어머니의 흐느낌, 그리고 처음 듣는 남자의 낮고 거친 목소리. 반찬을 전하러 갔다가 얼떨결에 도경과 마주친 해민은, 더욱 서먹한 관계가 되고 만다. 그날 이후 해민은 자꾸만 도경과의 어색했던 순간과 그날 들은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린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도경이 강제전학을 왔다는 소문까지 돌기 시작한다. 표면적으로는 조용하고 모범적인 도경, 하지만 뭔가 감춰진 사연이 있는 듯한 그의 모습은 해민의 호기심과 걱정을 동시에 자극한다. 이처럼 이야기는 해민과 도경, 두 인물이 어색한 첫 만남과 함께 점차 서로의 삶에 엮이게 되며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상처와 비밀을 안고 살아가는 또래의 진심을 어떻게 마주하게 되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해민과 도경의 서툴고 풋풋한 교감과 대비되며 눈길을 끄는 인물이 있다. 바로 속 깊고 야심이 넘치는 아이, 소정이다. 단정한 옷차림과 차분한 태도, 매사에 신중한 판단력으로 또래들 사이에서도 모범적인 이미지가 강한 소정은 전학 온 도경을 처음 본 순간부터 괜찮은 아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도경이 곤란한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줬을 때, 이 친구와 친해져도 괜찮겠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소정에게 ‘진짜 친구’란 아무하고나 쉽게 맺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정은 스스로를 완벽에 가깝게 관리하며 살아온 인물이다. 시험 성적, 동아리 활동, 인간관계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고, 선생님께는 모범적인 학생, 친구들에게는 매력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해왔다. 어릴 때부터 ‘어른스럽고 영특하다’는 칭찬을 들으며 자란 그는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그 속에서 인정받는 삶에 익숙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국제중 입시 실패라는 아픈 기억이 있고, 그 이후로는 더욱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하루 한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 애쓴다. 그런 소정에게 해민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태도도 없고, 적당히 맞춰가는 듯한 자세로도 칭찬을 받는 해민이에게 은근한 불편함과 경쟁심을 느낀다. 세상은 결코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관대하지 않다는 걸 너무 잘 알기에 언젠가는 큰 좌절을 겪을 것이라며 냉정하게 예견하기도 한다. 이런 소정의 모습은 실제 교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지극히 현실적인 또래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야기에 대한 깊은 몰입을 이끈다. 이처럼 소정은 단순한 조연이 아니라 이야기의 긴장과 균형을 만들어 주는 입체적인 캐릭터로서 중심 인물들과 대비되는 매력을 발산한다. 소정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쳤을 법한 또래의 시선과 감정에 공감하게 되며 이야기 속으로 더욱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책 속 ‘오늘의 의뢰’는 단순한 익명 채팅방이 아니라 이곳에 올라오는 사연과 의뢰는 현실 속 억울함, 분노,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감정들이 생생하게 담고 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문구점에서 도둑으로 오해 받은 일화를 올리며 분노를 토로한다. 자신을 무시한 점원과 사장을 응징해 달라며 누군가 문구점 유리창을 깨뜨려 달라는 의뢰를 남긴다. 곧 채팅방의 이용자들은 의뢰의 정당성을 논의하기보다는 유리창을 어떻게 깨뜨릴지 구체적인 실행 방법을 논의하며 사건은 점점 현실로 향한다. 이 장면은 독자들에게 학생이라는 이유로 억울한 오해를 받았다는 감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 분노가 불법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를 생각하게 만든다. 누군가의 억울함을 해결해 주겠다는 명분 아래 이루어지는 ‘대리 복수’는 과연 정의일까, 또 다른 폭력일까? 이렇듯 ‘오늘의 의뢰’는 스릴감과 긴장감을 주는 동시에 공감과 판단 사이의 경계를 성찰하게 만든다. 문제를 해결한다는 명목으로 감정과 정의가 왜곡되는 과정을 통해 이 책은 청소년뿐만 아니라 모든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이 책은 또래 간의 갈등이나 학교생활을 넘어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침묵의 폭력과 그 이면에 자리한 사회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겉으로는 평범한 청소년의 일상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관계의 균열과 감정의 깊은 흐름, 그리고 익명성이 빚어낸 위험한 선택들이 촘촘히 얽혀 있다. 그리고 ‘해결’이라는 말이 본래 지닌 의미조차 의심하게 되는 이야기 속에서 해민과 도경은 각각의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기에 성장의 과정은 때로 느리고 불완전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마주해야 하는 감정과 책임이 있다는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된다. 결국 이 책은 빠르고 손쉬운 선택을 부추기는 오늘의 사회에서, 진짜 ‘해결’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단단하게 쌓아 올린 이야기 구조와 현실을 비추는 날카로운 시선은 이 책을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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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몸속에는 사각형이 살고 있어
권기덕 지음, 도원 그림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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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이 책에 담긴 동시들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동시에서 창의력과 상상력이 어떻게 현실과 결합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권기덕 시인은 초등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의 일상 속에서 길어 올린 관찰과 발상을 바탕으로 하여 시 속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나아간다. 제목에서 보이듯 사과 속에 사각형이 산다는 말처럼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상상을 출발점으로 삼아 익숙한 사물 속에 숨은 또 다른 형태와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이 책 속에 담긴 53편의 시 속에는 교실 풍경, 장난감, 이별, 멍하니 떠오른 생각, 상상의 친구 등 아이들의 하루가 유쾌하게 담겨져 있다. 논리와 규범의 경계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발상은 똑같은 일상도 새롭게 보이게 하고 사물과 감정에 새로운 이름과 모양을 부여하며 동시의 세계에 폭 빠져들게 만든다.

이 책의 시 중 제일 먼저 기억에 남는 시는 <발가락 엄지척>이다. 이 시는 일상의 작은 해프닝 속에서 웃음과 따뜻함을 함께 길어 올리고 있다. 체육 시간의 유연성 측정 도중 양말을 뚫고 속 튀어나온 발가락을 시인은 '엄지 척!'이라고 표현한다. 단순히 구멍 난 양말이라는 결함을 지적하는 대신, 그것을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바꾸어 부르는 발상은 아이들 특유의 자유로운 시선과 유머를 잘 보여준다. 발가락 하나에도 칭찬을 덧입히는 시인의 언어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하고 인정하고 따뜻한 시선을 전해주어 참 좋다.


이 책의 표제작인 <사과의 말>은 사과라는 단어가 가진 두가지 의미, 과일과 용서를 시적 상상력으로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시인은 사과 속에 '사각형'이라는 독특한 이미지를 통해 겉으로 보이지 않는 마음 속의 모서리와 상처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서리들은 아픔에 머물지 않고 화자의 손끝에서 달콤한 행복으로 변해 친구들과 나누는 '사과의 말'이 된다. "모서리 때문에 아프지 않냐고요?, 각진 마음이 생기지 않았냐고요?"와 같은 물음은 결점이나 어색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아이들의 시선을 보여준다. 시 속에서 반복되는 '사각사각'이라는 소리는 사과를 베어무는 순간의 청각적 즐거움이자 모난 마음이 조금씩 풀려가는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 시는 평범한 사물과 익숙한 행위를 조금 다르게 바라보는 발상과 언어유희의 즐거움을 결합하여 감정의 깊이를 넓히고 있다. 그 속에어는 아이들 특유의 솔직함과 유연함이 담겨 있으며 어른에게도 마음의 모서리를 품는 법을 전하며 이 시를 읽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콩의 비밀>은 작은 콩에 상상력을 불어 넣어 그 크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펼쳐보인다. 시 속의 콩들은 '작다고 쉽게 볼' 수 없는 존재들이다. 외눈박이 괴물로 변하는 쥐눈이콩, 작두처럼 날카로운 작두콩, 비둘기 떼처럼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비둘기콩, 제비처럼 날쌘 제비콩, 호랑이 무늬의 호랑이콩, 그리고 해골섬 출신의 무시무시한 킹콩까지의 나열은 현실의 이름과 상상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결합하여 기발한 유머를 만들어낸다.


마지막에 이르러 '콩당콩닥/콩닥/콩!'이라는 리듬감 있는 의성어가 등장하여 단순한 콩의 나열이 하난의 이야기적 긴장으로 변하게 만든다. 이는 단순히 재미를 주는 의성어가 아니라 콩이 가진 낯선 가능성과 예측 불가의 가능성을 동시에 느끼게 만든다. 이 시는 평범한 사물에 다양한 캐릭터와 서사를 입히는 언어놀이의 힘을 잘 보여주는 시이다. 그 속에는 어린이 특유의 발랄함과 호기심, 그리고 일상 속 사물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가 담겨져 있다. 읽다보면 작은 콩 하나에도 그 안에 어떤 비밀이 감추어져 있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곧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얼마나 넓고 자유로운지를 깨닫게 한다.


결국 이 책은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상상력의 문을 열어준다. 시인은 현실과 환상을 자유롭게 오가며 각자의 마음 속 모서리와 상처를 부드럽게 감싸는 언어를 건넨다. 그렇기에 이 책은 부족함과 어색함마저도 우리만의 빛나는 개성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랑과 긍정의 말로 나누자고 따뜻하게 격려한다. 결국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상상은 마음을 둥글게 만들고 그 둥근 마음은 누구에게나 달콤한 행복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우리 마음껏 상상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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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냠냠 창비 아기책
송선옥 지음 / 창비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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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그림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책이다. 자기를 인식하고 세계를 탐색하고자 하는 아기를 위한 그림책으로 그 과정 속 이야기를 유쾌하고 따뜻하게 담아내어 읽고 또 읽을 수록 더 좋아진다. 커다랗고 빨간 사과를 혼자 다 먹고 싶어하는 애벌레의 감정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아이가 느끼는 초조함과 실망 그리고 결국 자기 몫을 받아 만족해하는 기쁨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저자는 섬세한 그림과 이야기를 통해 아기의 자율성과 감정을 존중하면서도 양육자와 아기 사이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내고 있다. 위치 개념과 감각 표현, 있다/없다와 같은 기초 인지 구조까지 담아 아기 발달을 돕는 요소들이 책 곳곳에 녹아 있으며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된 보드북 형태로 제작되어 아기가 스스로 책장을 넘기며 안전하고 즐겁게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어 더욱 좋다.


책의 이야기는 작은 애벌레 한마리가 빨간 사과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애벌레는 "동그란 사과 내가 다 먹을 거야"를 외치며 사과 위를 이리저리 누비고 있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레 이제 막 사과를 먹으려고 하는 순간.. 커다란 손을 가진 아빠가 와 사과 한 조각을 먹어버린다. 그리고 또 다른 조각은 엄마에게.. 그리고 또 다른 조각은 누나에게 가버리고야 만다. 


이제 딱 한조각 남안 사과 드디어 애벌레도 사과를 한 입 크게 베어물려고 하는 순간 또 누군가 사과 한조각을 가지고 가버리고야 만다. 마지막 조각의 사과까지 놓쳐버린 애벌레는 과연 사과를 먹을 수 있었을까? 애벌레의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보길 추천해본다.


이 책은 단순한 이야기 속에 아기의 자율성과 감정, 감각과 인지 발달을 조화롭게 담아낸 세심한 그림책이다. 사과를 향한 애벌레의 애정 어린 집착과 실망, 그리고 결국 한 조각을 받아 들고 만족해하는 모습은 모든 것을 다 갖지 않아도 정서적으로 충분히 충족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따뜻하게 전하고 있다. 특히 너무나 귀엽고 생동감 넘치는 애벌레의 움직임과 소리 표현은 아기의 오감을 자극하며 ‘나의 것’을 이해하고 표현하려는 시기의 아이들에게 딱 맞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보는 이의 마음까지 포근하게 감싸는 이 책은 아기에게는 첫 그림책으로 읽고 또 읽으며 양육자에게는 함께 웃고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선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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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완벽한 무인도
박해수 지음, 영서 그림 / 토닥스토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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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표지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나의 완벽한 무인도>라는 제목과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며 홀로 앉아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담은 표지를 보니 왠지 마음이 일렁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띠지 속 문장 "나로 살고 싶어서, 홀로 그곳으로 향했다"라는 문장은 이 책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과연 무엇인지 무척이나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 책은 누구나 한번쯤은 꿈꾸는 자발적인 고립, 사회의 소음에서 벗어나 '나'라는 존재에만 집중하는 삶, 그런 상상 속 세계를 현실로 가져와 진정성 있는 서사로 담고 있다. 그렇게 이 책은 단순한 힐링 소설을 넘어 매일 마주하는 하루의 압박에서 벗어나고픈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과 위로를 선사한다. 주인공 차지안은 일상의 소모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다가 불쑥 무임도를 향한다. 그곳에서 만난 바닷가 마을에서의 조력자들과 만남, 스스로의 손으로 이루어낸 자급자족의 삶과 계절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여정의 이야기가 매우 섬세하게 그려지고 있다. <삼시세끼>의 따뜻한 식탁을 떠올리게 하는 요리 장면과 <리틀 포레스트>처럼 사계절의 변화를 온전하게 느끼게 하는 풍경의 묘사는 이 책 자체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들게 만들며 다정한 쉼표의 시간을 선사한다.


책의 시작은 주인공 차지안이 저녁거리를 찾아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집 앞에 묻어둔 항아리에서 김치를 꺼내 돌아가던 길,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 지안은 노을에 이끌려 섬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그곳에서 마주한 주홍빛 하늘과 갈매기들의 날갯짓, 파도의 움직임은 자연이 주는 위안과 경이로움을 고스란히 전한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지안은 수첩을 펼쳐 하루를 정리하며 그동안의 삶을 돌아본다. 무인도에 정착하게 된 계기와, 생선과 해초, 나무 등을 채취해 스스로 자립해온 기록들이 담겨 있다. 과거 도시에선 당연했던 휴대폰, 이어폰, 태블릿 같은 문명의 기기들은 이제 가방 속으로 사라졌고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바다를 오가며 유리 거울로 안부를 전하는 도문항의 ‘현주 언니’일 뿐이다. 혼자 살아가는 무인도 생활은 고독하지만 그 고요 속에서 느끼는 편안함과 때때로 찾아오는 깊은 행복은 이곳 삶의 진정한 가치이다. 도시의 소음은 더 이상 기억 속에 머무르지 않고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 어느덧 주인공에게 가장 잘 맞는 옷처럼 다가온다. 지안이 홀로 무인도에서 지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인도의 삶에 대한 충만한 그녀의 행복들이 문득 지난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든다.


처음 무인도에 방치된 집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지안은 현주 언니의 도움으로 혼자 무인도에서 살게 된다. 도시에서 상처와 피로를 안고 온 그녀는 섬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자립의 삶을 시작한다. 가장 먼저 지안은 바다에 들어가 물질을 배우며 해산물을 채취한다. 특히 문어와의 첫 만남과 교감하는 장면은 무척이나 인상 깊다. 무릎에서 피가 나는 지안을 바라보던 문어가 자신의 다리로 지안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장면은 이 책을 더욱 따스하게 만든다. 그리고 밤이 되면 지안은 바닷가를 거닐며 꼬마물떼새의 울음, 파도 소리, 모래의 감촉에 귀를 기울인다. 고요한 자연의 소리는 도시의 소음과 달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게 하는 위로가 된다.


지안은 점차 섬에 익숙해지며 텃밭을 일구고 제철 식재료로 요리하며 사계절의 흐름에 맞춰 살아간다. 계절의 변화는 배경을 넘어 지안의 감정과 연결되어 봄의 따스함, 여름의 흔들림, 가을의 고요, 겨울의 냉기 속에서 내면의 힘과 평온을 쌓아간다. 처음에는 불안에 휩싸였던 지안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연과 교감하며 점차 내면의 힘을 되찾고,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만의 리듬으로 살아가게 된다.


책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지안이 스스로 마련해 먹는 음식의 과정이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깊은 감정의 울림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도시에서는 대충 때우기 바빴던 끼니가 무인도에서는 하루의 중심이자 가장 진지한 일이 된다.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손질하고, 요리하는 모든 과정은 오롯이 자신을 위해 시간을 들이는 행위이며 그것이 곧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는 치유의 시간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 나오는 지안이 음식을 장만하는 모든 장면들은 시선을 잡아 끈다. 특히 기억에 남은 지안이 우연히 낚은 송어를 훈제 요리로 완성해가는 장면은 그 상징적인 순간이라고 본다. 지안은 짙은 연기와 힘겨운 불 조절 속에서도 몇 시간을 들여 송어를 정성껏 요리한다. 그리고 그날 밤, 가족이 등장하는 따뜻한 꿈을 꾼다. 먹는다는 행위가 기억과 감정, 회복을 불러오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읽는 내내 가장 공감되었던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나 역시 음식에 아주 많은 공을 들이는 사람이라 지안의 그 마음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누군가를 위한 식사가 아니라 지안의 자신만을 위해 공을 들이는 식사는 지안의 힘들었던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데 가장 큰 힘이 되었다고 본다. 그렇게 이 책은 자급자족의 삶을 담담히 그려내면서도 그 안에 담긴 감정의 층위와 자기 회복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 중심이 되는 지안의 따뜻한 식사들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도 함께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듯하다.


이 책은 자발적인 고립을 통해 진짜 ‘나’와 마주하게 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고 있다. 주인공 지안은 타인의 시선과 사회적 역할에서 벗어나 무인도에 홀로 정착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을 시작한다. 낯선 섬에서의 생활은 단순한 생존이 아닌 삶의 리듬을 다시 세우고 자신을 돌보는 시간으로 채워진다. 텃밭을 가꾸고 바다에 나가 해산물을 채취하고, 계절에 따라 식탁을 차리며 지안은 자연과 교감하는 고요한 일상 속에서 점차 단단해진다. 이 책의 핵심은 고독이 단절이 아니라 회복과 치유, 성장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다.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스스로를 위한 하루를 묵묵히 쌓아가며, 지안은 삶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경험에서 깊은 자긍심을 느낀다. 그리고 지안은 처음으로 자신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다정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렇기에 결국, 이 책은 나로 살아가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게 만든다. 계절의 빛과 소리, 혼자 차리는 식사, 손끝에서 다시 세워지는 삶의 감각들이 독자에게도 삶의 속도를 다시 정리할 용기와 스스로를 돌보는 방식을 조용히 생각하게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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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뉴스로 출근하는 여자 - 빨래골 여자아이가 동대문 옷가게 알바에서 뉴스룸 앵커가 되기까지
한민용 지음 / 이야기장수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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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과 이 책의 저자를 소개하는 띠지 속 문구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대한민국 뉴스 역사상 최연소 여성 메인앵커, JTBC <뉴스룸> 최초의 여성 메인 앵커'라는 수식이 붙은 저자의 스스로 꿈을 향해 매일을 다르게 살아온 한 사람의 궤적을 담고 있다. 이 책의 서사는 빨래골이라는 투박한 이름의 시골 마을에서 자라난 소녀가 동대문 골목을 누비며 학비를 벌던 시간을 지나 뉴스의 최전선에서 시대의 목소리를 전하기까지 여전히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그 여정을 진솔하게 따라가고 있다.


저자 한민용은 어린 시절 텔레비전 속 앵커를 보고 기자라는 직업을 마음에 품었다고 한다. 고등학생의 나이에 홀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방학마다 한국에 돌아와 옷가게와 맥주 판매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졸업 후 언론고시 스터디에서조차 연달아 탈락하였고 기대할 만한 자원이 되지 않는다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그녀는 꿈을 향한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국정농단, 대통령 탄핵과 같은 격동의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뉴스룸에서 카메라를 응시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오늘도 그는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전할 수 있을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앵커'라는 이름보다 더 넓은 삶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다.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꿈을 쫓아 나아가는 저자의 모습은 깊은 울림을 남기며 읽는 내내 저자와 함께 울고 웃으며 그의 여정을 응원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책의 이야기는 한 청년이 저자에게 보낸 이메일 한 통에서 출발한다. ‘어릴 적부터 앵커가 되고 싶었지만, 꿈을 좇는 건 돈도 들고 욕심 같았다’는 그의 말은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저자는 바로 그와 같은 생각을 품었던 소녀였다. 빨래골이라는 이름의 시골 마을에서 자랐고, 물 좋기로 소문났던 그곳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외부의 편견을 겪으며 자란 그녀는 언젠가 역사 속 장면들 한가운데 서 있기를 꿈꿨다. 고등학생 시절, TV 속 9·11 보도를 보고 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저자는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방학마다 귀국해 동대문 옷가게, 맥주 판매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마련했다. 졸업 후 언론사 문을 두드렸지만 해외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언론고시 스터디조차 들어가지 못하고 연이어 탈락했다. 그 시절 자신은 그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로 여겨졌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이야기는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로 이제껏 겉으로 저자를 지칭했던 화려한 수식어와는 너무나 다른 그녀의 삶이다. 진솔하다 못해 너무나 솔직한 저자의 이야기는 자꾸만 책 속으로 더욱더 빠져들게 만든다.


계속되는 탈락과 좌절 앞에서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와 같은 말로 자신을 위로하지 않는 저자의 시선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실패가 때로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게 만드는 깊은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고백한다. 무릎만 까지면 다행이지만, 뼈가 부러지고, 영영 뛸 수 없게 되는 실패도 분명 존재한다고 말하며 스스로는 그런 실패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러나 포기는 없었다. 오히려 계속되는 실패 앞에서 '그럼 삼류로 가면 되지'라는 결심은 홧김에 내린 선택이었지만 저자를 다음 단계로 끌어올린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일류’ 언론사에 가지 않아도 좋았다. 중요한 건 어디서든 자신만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결국 저자는 작은 경제 전문 언론사에 지원해 첫 기자 생활을 시작하였고, 그 선택은 훗날 뉴스룸 앵커로 이어지는 여정의 첫 단추가 되었다. 넘어짐이 곧 배움이 된다는 말보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끝까지 버텨보려는 저자의 의지가 더 크게 다가오는 대목이다. 그리고 그 단단한 선택들이 지금의 그녀를 만들어냈다고 본다.


책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주는 부분은 저자가 수습기자로서 세월호 참사 현장 팽목항에 있었던 시간을 담담하게 기록한 대목이다. 처음에는 전원 구조 오보에 안도했지만 곧 사실이 아님을 알고 무거운 죄책감에 휩싸인다. 그 후 현장에서 마주한 유가족들은 울지 않았다. 저자는 ‘울면 아이를 놓는 걸 인정하는 것 같아서’일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그리고 저자는 자식처럼 키운 조카를 찾는 삼촌과 함께 시신 안치소에 동행하며 죽음을 목격하는 무게를 마주하게 된다. 삼촌은 아이의 옷과 손 사진을 확인하고 주저앉아 오열했고 저자는 옆에서 그저 등을 두드려주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끝내 눈물을 흘리지 못한 자신이 너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서울로 복귀한 뒤 집에 돌아와 무심코 280mm, 아디다스, 검은색의 동생의 운동화를 마주한 순간, 저자는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팽목항에서 들은 신발로 아이를 찾는다는 말과 겹쳐지며, 비로소 감정이 터져버린 순간이었고 이 장면에서 나 역시 많은 눈물이 나왔다. 이는 기자로서의 기록을 넘어 사람으로서의 감정과 책임, 죄책감, 슬픔을 껴안는 법을 배워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지금의 저자를 만든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책의 마지막을 덮으며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에필로그의 글들이다. 특히 임신한 몸으로도 끝까지 앵커석을 지킨 저자의 이야기는 더욱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여전히 낯선 ‘배부른 여자 앵커’의 모습 앞에 불편해 할 사람들을 걱정하면서도 결국 재킷을 풀고 불룩한 배를 드러낸 채 뉴스를 전한 그녀의 모습은 묵묵하고도 용기 있는 선택이었고 앞으로도 이러한 선택이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로 변하길 바래본다. 과거엔 감춰야 했던 여성의 몸, 배부른 채로 뉴스를 전한 여성 앵커의 모습은 분명 낯설었지만, 그 낯섦을 밀어낸 건 시청자의 따뜻한 시선과 격려였다니 이 얼마나 다해인가. 그 응원은 하나의 파문이 되어 더 많은 여성, 더 다양한 사람이 자기다운 모습으로 뉴스 앞에 설 수 있는 흐름을 만들어갈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이 책은 단지 뉴스와 시대를 기록한 기자의 이야기를 넘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에게 누구라도 자신의 이야기를 잘 쓸 있다는 확신을 전하는 책이다. 무리해서 견디라고 하지 않고 조급해하지 말라고 다정하게 건네며 이야기의 다음 장이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이어질 것임을 깨닫게 만든다. 그리고 저자 이제 ‘앵커’라는 타이틀을 흘려보내고 두 생명을 품은 새로운 이야기로 나아가려 한다. 두려움과 막막함 속에서 그녀도 또 다른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처럼 나 역시 저자의 그 다음 이야기가 지금의 이야기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즐거우며 따스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나도 또 다른 나만의 이야기를 이어갈 용기를 저자에게서 얻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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