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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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혜 작가의 신작이라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은 <작은 땅의 야수들>로 톨스토이문학상을 수상하고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저자가 3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으로 다시 한번 김주혜 작가만의 매혹적인 이야기 세계에 폭 빠져들게 만든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파리의 세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 무용수의 삶은 단순한 성공의 서사를 넘어 예술과 인간 존재의 의미를 묻으며 깊은 울림을 가져다 준다. 가난과 결핍을 딛고 최고의 프리마 발레리나가 된 주인공의 삶의 여정은 눈부시도록 아름답지만 그 빛의 이면에 함께 따르는 짙은 그림자들은 깊은 공감을 사며 그녀의 이야기 자체에 매료되게 만든다.


이 책은 무대에서 모든 걸 잃고 떠났던 발레리나가 2년 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비행기 안에서부터 그녀는 과거의 기억과 마주하고, 도착 직후부터 이미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다시 만난 인물, 드미트리와의 재회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오래 묻혀 있던 갈등의 시작점처럼 보인다. 나탈리아는 그를 단순히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적처럼 여기는데, 도대체 이들 사이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책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먼저 떠나는 삶을 선택해 온 나탈리아가 결국 다시 돌아와 과거를 직면하고 선택의 갈림길에 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파리라는 도시들을 배경으로 발레 세계의 냉혹한 현실, 예술가로서의 욕망, 인간관계의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하며 전개된다.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추락한 후 마린스키의 ‘지젤’ 무대 제안을 받게 된 그녀는 망설이면서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무언가 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듯한 나탈리아의 이야기가 점점 궁금해지고, 서막부터 깊이 몰입하게 만든다.


책은 현재의 나탈리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며 시작되지만, 이야기는 그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진행된다. 과거의 이야기는 시간 순서대로 전개되는데, 1장은 나탈리아가 발레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다룬다. 아무도 그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나탈리아는 외롭고 고립된 환경 속에서 살았다. 그런 그가 발레를 배우겠다고 결심한 순간 역시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한 외로운 시작이었다. 바가노바 발레학교의 오디션을 앞두고 그녀의 엄마는 현실의 벽과 발레계의 냉혹함을 조목조목 설명하며 말렸지만, 결국 나탈리아의 의지를 꺾지 못한다. 오디션 현장에서 나탈리아는 이미 수년간 훈련을 받아온 다른 아이들 틈에 섞여 위축되지만 마지막 순간에 자신도 놀랄 만큼의 점프와 기량을 보여주며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그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심사위원조차 ‘발 모양이 안 좋다’는 평가를 내렸지만,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오디션을 통과한다. 500명의 지원자 중 최종 합격자는 단 두 명, 그 중 한 명이 바로 나탈리아였다. 이 책은 이렇게 단단한 현실을 배경으로 치열한 예술의 세계 속에서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현재의 나탈리아와 과거의 나탈리아가 교차되며 드러나는 이야기는 슬프고 아프면서도 계속해서 궁금증을 자극하여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들며 그녀의 선택과 여정을 자꾸만 응원하게 된다.


이 책에는 문장이 너무 좋고 공감되어 자꾸만 멈추게 되는 장면이 곳곳에 존재하는 게 큰 매력이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대목 역시 그러하다. 나탈리아는 살아오며 수많은 사람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고 함께 웃고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은 기억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몇 달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만큼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했지만, 결국 이별 뒤에는 그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반대로 몇몇 사람들은 머리와 가슴 깊은 곳에 오랜 시간 남아 있는 존재로 평생 떠나지 않을 것처럼 자리를 잡는다. 그들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마음의 한 부분처럼 깊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나탈리아는 어린 시절 친구들을 종종 떠올리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다. 이제는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지나간 기억이자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음을 실감하는 것이다. 어쩜 그 감정들을 이리도 잘 표현하고 있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렇듯 김주혜 작가의 작품이 인상적인 이유는 단단한 이야기 구성과 매력적인 인물의 설정 뿐만 아니라 문장에 있다고 본다. 단순히 서사를 전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섬세한 감정묘사와 통찰이 차곡차곡 쌓인 문장들이 오래 마음에 남게 되는 것이다. 공감되거나 되새기고 싶은 표현들이 곳곳에 배치돼 있으니 이야기의 길이나 복잡성과 무관하게 우리는 문장 그 자체에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난 후 나탈리아 레오노바가 바가노바 발레학교 오디션에 합격한 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성장하며 결국 세계적인 발레단에 입단하게 되는 과정의 이야기를 아주 촘촘하게 담고 있다. 무대에 모든 것을 바친 그는 프리마 발레리나로 정점에 오르지만 한순간의 사고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무대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이후 나탈리아는 어린 시절 꿈을 키우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다시 춤을 출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한 상태에서 그는 상처를 직면하고 재기를 위한 고통스러운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리허설실에서의 긴장감, 동료 예술가들과의 충돌과 연대, 과거의 관계들 속에서 그는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인간으로서의 존엄 사이에서 깊은 내적 싸움을 이어간다. 그렇게 이 책의 이야기는 단순한 복귀 여정을 담는 것을 뛰어 넘어 예술의 의미와 예술가로 산다는 것에 대해 묻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나탈리아는 다시 무대 위로 돌아올 수 있을까? 그 답이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확인해보기를 추천해본다.


어린 시절 자신을 떠난 아버지와 냉담한 어머니의 시선 속에서 자란 나탈리아는 일찍이 삶은 사랑이나 행복이 아닌 불안과 슬픔, 상실로 채워진 것임을 깨달았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먼저 떠나는 삶을 선택해온 그녀에게 절박함은 곧 생존의 방식이었다. 책 속에서 나탈리아가 새로운 안정과 풍요를 경험하게 되는 순간 오히려 불안이 싹트는 장면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호화로운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붓을 드는 화가는 없다는 인식 아래, 그녀는 예술의 진정한 원동력이 고통과 긴장 속에 있다고 믿는다. “절박함은 내 평생의 항상성이었다”는 고백처럼 나탈리아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도 자신의 전부를 예술에 내던지며 버텨왔다.


그리고 소설 전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새’의 이미지는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하고 있다. 새는 자유의 상징인 동시에 절박함과 귀환, 생존의 본능을 나타낸다. 주인공은 정점에서 추락했음에도 다시 무대를 향해 날아오른다. “아무리 멀리 날아가는 새도 결국엔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문장처럼, 나탈리아는 결국 예술이 시작된 바로 그 도시, 그 무대로 되돌아온다. 그곳이 고통의 장소인 동시에, 유일하게 자신을 온전히 증명할 수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상과 현실, 예술과 생존 사이에서 끊임없이 균형을 찾아가려는 한 인간의 고구분투를 정밀하게 따라가고 있다. 간절할수록 더 깊은 상처를 감내해야 했던 삶, 창작이라는 긴장 상태에 자신을 밀어 넣으며 끝까지 버티고자 했던 발레리나의 이야기는 뭉클한 감동과 깊은 울림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렇게 이 책은 우리에게 예술을 통해 삶의 본질을 묻는다. 예술가의 고통과 구원, 인간의 존엄과 연민 그리고 삶에서 진정으로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발레리나의 무대 복귀 이야기를 넘어 위기의 시대 속에서 우리가 끝내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스스로 되돌아보게 만든다. 결국 이 책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김주혜 작가의 답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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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막에서 삶을 배웠다 - 고비사막 250km를 달리며 배운 나를 사랑하는 법
방주희 지음 / 마음연결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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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 자체에 끌려 읽게 된 책이다. 사막과 삶이라는 두 단어의 조합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과연 그 안에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 책은 평범하게 살던 저자가 고비사막 마라톤 250km에 도전하면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도전과 성장, 그리고 삶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저자는 사막이라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 매일같이 마라톤 풀코스에 해당하는 거리를 달리며 신체적 고통은 물론 정신적 한계와도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페이스를 찾아가고 남과 비교하지 않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이러한 저자의 여정은 책을 읽는 우리에게도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아가는 태도가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만든다. 


책은 고비 사막 250km 마라톤을 완주한 한 사람의 기록이지만 단순한 도전기를 넘어 삶의 본질과 태도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작가는 처음부터 큰 목표를 세운 것도 특별한 체력이나 운동 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고 고백한다. 단지 자신을 믿고 한 번쯤 달려보고 싶었고, 그런 마음이 출발점이 되었다. 저자는 과거 오랜 시간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던 경험이 있었고 병원을 오가며 일상을 유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이후 조금씩 회복하면서 걷고 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점차 삶에 대한 태도도 바뀌었다고 한다. 움직임 속에서 자신의 내면이 회복되는 경험은 이 책의 핵심이자 출발점이라 생각된다.


마라톤에 도전하는 과정은 단순한 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막이라는 낯선 환경 속에서 날씨, 거리, 고통, 불확실함을 견뎌야 했고 그 모든 순간마다 스스로를 다시 다잡아야 했다. 특히 주변의 걱정과 현실적인 여건 속에서도 그 도전을 이어간 선택은 단지 하나의 도전 이상으로 삶의 우선순위와 방향을 다시 점검하게 만든 계기였다.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성취 자체보다 그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해냈다는 결과보다는 매일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자신만의 속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생각으로 스스로를 이끌었는 지가 더 깊이 있게 다가온다. 그리고 저자는 누구에게나 각자의 사막이 있다고 말한다. 길이 보이지 않거나 방향을 잃는 순간이 있지만 멈추지 않고 걷다 보면 결국 자신만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 여정을 진솔하게 담아내며 도전을 준비하며 머뭇거리는 우리 모두에게 실질적인 용기와 방향을 제시하며 큰 울림을 남긴다.

이 책에서 인상 깊은 부분 중 하나는 사막 마라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가족의 존재이다. 저자는 매주 주말마다 40~50km씩 훈련을 이어가며 점차 체력을 끌어올렸고 훈련 강도를 높이기 위해 평지에서 산길로 코스를 바꾸며 준비에 집중했다. 단순히 훈련 거리나 강도가 인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 옆을 지켜주고 때로는 걱정하며 함께해 준 가족들의 모습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무더운 날, 훈련 중 뒤따라온 남편과 딸은 힘들어 보이는 저자를 향해 “그만하라”고 외치면서도 끝까지 함께했고 중간에 달리며 동행하거나 조용히 기다리며 응원했다. 큰 반응을 보이지 않던 아들도 훈련 중간 지점에 아이스커피를 들고 나타났고 저자가 좋아하는 빵을 챙겨 오기도 했다. 말로는 무심한 듯하지만 행동으로 응원과 관심을 표현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뭉클한 감동을 준다. 그렇기에 훈련 중 저자는 자신을 지탱하는 것이 단지 다리의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반복되는 훈련 속에서 진짜 에너지가 되어준 것은 바로 곁을 지켜주고 응원해 주는 가족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단단하게 받치고 있는 것은 다리가 아니라 가족이었다고 말하고 이 문장이 큰 울림을 전하는 듯하다. 과정의 힘 그리고 함께하는 존재가 얼마나 큰 동력이 되는지를 실감하게 만든다.


저자가 완주한 고비 사막 250km 마라톤은 얼핏 보면 현실과는 거리가 먼 아주 비현실적인 도전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책 속에 담긴 여정은 과장 없이 담담하고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그 길이 결코 우리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렇기에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이 더 깊어진다. 출발을 앞두고 저자는 돌돌 말아둔 침낭을 꾹꾹 눌러 배낭에 넣고 슬리핑 패드를 겹겹이 접어 단단히 묶으며 출발 준비를 한다. 손에 익지 않은 동작에 스스로도 불안함을 느끼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마음으로 신발끈을 다시 조여 매며 출발선에 선다. 완벽하지 않은 준비, 예측할 수 없는 환경, 그리고 그 속에서 시작을 감행해야 하는 현실을 담은 이 장면은 사막 한복판의 특별한 레이스이면서 동시에 우리 모두가 살아가며 맞닥뜨리는 삶의 출발점과도 닮아 있다. 무언가를 시작할 때 완전한 확신을 갖기는 어렵다. 조건이 갖춰지기를 기다리다 보면 정작 출발선에 서지 못하는 순간도 많다. 하지만 이 여정은 완벽하지 않아도 시작할 수 있어야 하며, 때로는 그 ‘불완전함을 견디며 나아가는 용기’가야말로 삶에서 가장 필요한 태도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마라톤 완주보다 더 큰 의미를 전하고, 우리 각자의 현실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저자에게 있어 85등이라는 숫자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끝까지 부상 없이 완주하는 것이 목표였고, 그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걸어갔다. 자신을 믿는 마음과 단순하고도 분명한 한 걸음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여정이었다. 결과적으로 저자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막을 걸어 결승선을 통과했고 그 과정이 전하는 울림은 단순한 성취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이 책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삶의 진정한 의미와 성장은 남과의 경쟁이나 순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며 자기만의 속도로 꾸준히 걸어가는 과정에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고비 사막이라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 저자는 예상치 못한 고비를 하나하나 극복해나가며 내면의 단단함을 만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남을 의식하지 않고, 비교하지 않으며 자신만의 리듬을 지켜나가는 자세가 결국 인생에서도 가장 중요한 태도임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이 책은 완벽한 준비가 아니어도 괜찮고, 빠르지 않아도 멈추지 않으면 된다고 말한다. 꾸준히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자유라는 결승선에 도달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지금 인생이라는 각자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묵직한 용기와 희망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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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슬의 바다 - 백은별 소설
백은별 지음 / 바른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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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한부>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백은별 작가의 신작이라서 읽게 된 책이다. 이 책에서도 저자 특유의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체로 청소년기의 복잡한 감정과 사회적 이슈를 함께 담아내고 있다. 초능력을 지닌 소녀 윤슬과 평범한 소년 바다의 사랑이라는 판타지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청춘의 아픔, 그리고 희망을 진솔하게 담아내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 책은 “좋아해”라는 짧은 고백으로 시작된다. 감정적으로는 평범하고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는 한 문장이지만 곧이어 드러나는 현실은 전혀 다르다. 감성적인 회상과 달리 이야기는 예기치 못한 사고와 무거운 죄책감으로 전환되며 독자를 단숨에 몰입하게 만든다. 처음엔 사랑에 빠졌던 순간을 되새기는 시점으로 전개되지만 과거의 감정이 따뜻할수록 현재의 상황은 더욱 냉혹하게 대비된다. 초여름 밤의 풋풋한 설렘에서 병상에 누운 상대를 바라보는 공포감과 죄책감까지. 이 책의 짧은 도입만으로도 감정의 급격한 진폭을 보여준다. 주인공 윤슬은 그렇게 과거의 아름다움을 붙잡은 채 현재의 무력함과 마주하고 있다. "내 시간은 움직이지 않았다"는 문장은 단순한 표현이지만 정지된 감정과 흐르지 않는 일상, 그리고 죄책감에 대한 감정을 더욱 공감하게 만든다. 단순한 로맨스의 틀을 빌리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주제는 훨씬 더 복합적인 듯하다. 과연 이들에겐 어떤 이야기가 있는 걸까? 첫 장면부터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주인공 윤슬은 시간을 멈추는 능력을 가진 고등학생 1학년이다. 어느 날 방치된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2학년 선배 바다는 바이올린 연주에 능하지만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조용한 학생이다. 윤슬은 그와 처음 나눈 대화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시간을 멈추게 되고 그날 이후 매일같이 도서관을 찾으며 그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선배, 우리 이름부터가 운명 같지 않아요?”라는 윤슬의 말에 “애냐. 운명 같은 걸 믿게.”라고 말한다. 이처럼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 자연스럽고 섬세한 대사들이 인물 간의 미묘한 감정을 잘 드러내며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윤슬의 적극적인 감정 표현과 바다의 점진적인 변화는 두 사람이 전혀 다른 배경을 지녔음에도 점차 서로의 세계에 스며들어 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는 단순한 연애 서사를 넘어 초능력자를 배척하는 사회와 개인의 정체성, 책임, 선택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일 년 전, 강력한 초능력자의 출현 이후 사회는 초능력자를 공공의 위협으로 간주하게 된다. 초능력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누구든지 연구소로 끌려가 실험과 고문 끝에 생명을 잃게 되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두려움과 혐오로 초능력자를 배척한다. 윤슬은 시간을 멈추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악용 가능성이 높은 이 능력은 사회에서 특히 위험하게 여겨진다. 그런 윤슬의 비밀을 알게 된 바다는 고민에 빠진다. 그는 초능력자를 대상으로 실험하는 연구원을 부모로 두고 있으며, 과거에도 부모의 일로 인해 소중한 친구를 잃은 경험이 있다. 윤슬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준 순간 바다는 혼란스러웠고, 그녀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는 다시는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과연 바다는 윤슬을 지킬 수 있을까? 그리고 바다와 윤슬,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들의 뒷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통해 확인해보길 추천해본다.


이 책은 초능력을 이유로 차별받는 소녀와 그녀를 지키려는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다름’을 향한 사회의 배제와 두려움을 직시하게 만든다.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 청소년기의 불안정한 감정과 관계 속에서의 갈등, 그리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두 인물은 서로를 통해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외면받는 존재로 머무르지 않기 위해 함께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그들의 선택은 완벽하진 않지만 서로의 세계를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태도 속에서 작은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결말은 모든 문제가 명확히 해결되지 않은 채 마무리되었다. 그래서 일부에게는 다소 아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청소년 작가이기 때문에 미숙한 결말을 썼다기 보다 청소년 작가이기에 오히려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태도를 담은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완벽한 결론 대신 성장과 이해, 그리고 다름을 인정하는 세상에 대한 물음을 남긴다. 그래서 오히려 독특한 결말이 더 긴 여운을 남기며 우리에게 더 깊은 고민을 이끌어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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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나들이 문해력 편 - 단어 한 끗 차이로 글의 수준이 달라지는 우리말 나들이
MBC 아나운서국 엮음, 박연희 글 / 창비교육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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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해력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요즘, '우리말 나들이 문해력 편'이라는 제목에 끌려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문해력은 단순히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을 넘어, 다양한 정보를 해석하고 자신의 생각과 연결해 표현하는 고차원적 사고 과정이다. 특히 디지털 정보가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는 문해력이 곧 판단력이며, 소통 능력이자 경쟁력이다. 이 책은 바로 그 문해력의 본질에 주목하며,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표현 속 숨은 오류를 짚어준다. ‘기지개를 키다’와 ‘켜다’, ‘고난이도의 문제’와 ‘고난도의 문제’처럼 단어 하나의 미묘한 차이가 어떻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생생한 예시와 함께 설명해주고 있다. 문해력을 높이고자 한다면 이 책을 통해 말과 글의 쓰임을 바로잡으며 실생활에서 문해력을 효과적으로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SNS에 글을 올리고, 이메일로 업무를 처리하며,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한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자주 쓰는 표현이라 해도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언어 습관은 때로는 본의 아니게 상대를 불편하게 하거나, 자신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충 써도 뜻만 통하면 된다는 생각은 오히려 오해와 갈등을 부르고, 그 사람의 이미지와 평판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이 책은 우리말을 바르게 쓰는 것이 단지 아나운서나 글을 쓰는 사람들만의 몫이 아니라 누구나 갖추어야 할 중요한 사회적 역량임을 강조한다. 정확한 언어 사용은 곧 개인의 경쟁력이며 더 나아가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밑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은 1997년부터 방송된 MBC의 장수 프로그램 <우리말 나들이> 중 최근 10년 간의 방송 내용 가운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사례들을 가려 뽑아 엮은 것이다.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표현을 통해 우리말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쓸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으며, 실생활에서 문해력을 높이고 신뢰감 있는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책은 총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겉보기엔 비슷하지만 의미는 전혀 달라 자주 혼동되는 표현들을 다룬다. 일상에서 무심코 사용하는 잘못된 말이 어떻게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로 보여주며, 표현 간의 미묘한 차이를 명확히 짚어준다. 2장에서는 습관처럼 굳어진 잘못된 표현들을 모아,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오류를 바로잡고 언어 사용의 정확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마지막 3장에서는 문해력과 문장력을 함께 향상시킬 수 있는 표현들을 소개해, 독자의 실질적인 표현력과 소통 능력 향상에 기여하고자 한다. 그리고 각 장에는 ‘우리말 여겨보기’ 코너가 함께 구성되어 있어 내용을 읽으며 생기는 궁금증을 해소하고, 우리말의 깊이와 폭을 넓힐 수 있도록 했다. 또한 SNS, 이메일 등 일상적인 소통 매체에서 자주 나타나는 언어 오류를 구체적인 예문과 함께 설명해 실제 생활에 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실용성을 더했다.


1장의 '비슷하게 생겼지만 뜻이 달라 헷갈리는 표현'에서는 ‘고역’, ‘곤욕’, ‘곤혹’처럼 모양은 비슷하지만 의미는 뚜렷이 다른 표현들을 소개한다. '고역'은 몹시 힘들고 고되어 견디기 어려운 일을, '곤욕'은 심한 모욕이나 참기 힘든 상황을, ‘곤혹’은 곤란한 일을 당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를 뜻한다. 예문을 보면 확실히 그 뜻을 구분할 수 있다. “더운 날에 밖에서 마스크를 쓰는 건 곤욕이야.”는 표현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곤욕’은 ‘모욕’이나 ‘참기 힘든 상황’일 때 쓰는 말이므로 이 문장에서는 적절하지 않다. 이럴 때는 ‘고역이야’로 바꾸는 것이 올바르다.


반면 “면접에서 또 떨어져 곤욕스러웠다.”, “면접관에게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아 곤혹을 느꼈다.”와 같은 문장은 각각의 단어 뜻에 맞게 잘 쓰인 사례다. 이처럼 ‘고역’, ‘곤욕’, ‘곤혹’은 표기와 발음이 비슷하지만, 의미와 쓰임은 명확히 구분되므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각각 내용의 마지막 부분에는 OX 퀴즈가 수록되어 있어, 앞에서 익힌 내용을 다시 점검하고 스스로 문해력을 확인할 수 있도록 구성된 점도 실용적이다.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실제 생활에 적용 가능한 언어 감각을 기를 수 있도록 돕는 구성이 돋보인다.


2장에서는 우리가 평소에 무심코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잘못된 표현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일깨워준다. 예를 들어, '겨땀과 결땀' 중 어느 표현이 맞는지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이 둘 다 바르지 않고, 정확한 표준어는 ‘곁땀’이다. ‘곁’은 겨드랑이를 뜻하는 고유어 표현으로, 곁땀은 곧 ‘겨드랑이에서 나는 땀’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겨땀’이라는 말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인다. 실제 SNS에서 해시태그를 비교해보면, #겨땀은 수천 개가 넘는 반면, #곁땀은 그에 비해 현저히 적다. 이런 예는 우리가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비표준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또 하나 주의할 점은, ‘곁땀’과 관련하여 잘못 쓰이는 표현으로 ‘결땀내’가 있다. 이는 체취, 특히 겨드랑이에서 나는 불쾌한 냄새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곤 하지만, 정확한 표현은 ‘암내’이다. ‘곁땀’은 단순히 땀 그 자체를 의미하고, 불쾌한 냄새를 뜻할 때는 ‘암내’를 써야 한다. 이처럼 비슷하게 들리지만 의미와 쓰임이 다른 표현을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문해력 향상의 첫걸음이다.


3장에서는 문해력과 문장력을 함께 높일 수 있는 표현들을 소개한다. 우리가 자주 쓰면서도 정확한 의미를 잘 모르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짚어주며, 실생활 속 소통 능력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중점을 둔다. 예를 들어, ‘구설에 오르다’라는 표현이 있다. 많은 사람이 이를 ‘구설수에 오르다’로 잘못 사용하는데, 이 둘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구설’은 시비하거나 헐뜯는 말을 뜻하며, 누군가의 입에 오르내리는 부정적인 평판을 의미한다. 반면, ‘구설수’는 그러한 구설에 휘말리게 되는 운수, 즉 운명적인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따라서 “괜한 구설수에 오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라는 표현은 어법상 어색하며 올바르게는 “괜한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라고 써야 맞다. ‘구설수에 오르다’는 말은 표현상의 오류이므로 주의가 필요하다. 이와 함께 책에서는 ‘회자되다’라는 표현도 함께 소개하며 이해를 돕는다. ‘회자’는 ‘회와 구운 고기처럼 입에 자주 오르내리다’는 뜻으로, 좋은 일이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된다고 할 때처럼 긍정적인 의미로만 사용된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회(回)’를 잘못 해석해 ‘지난 일을 되풀이해 말하다’는 의미로 오해하기도 한다. 이처럼 단어의 뿌리를 제대로 아는 것이 문해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책은 단순히 우리말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 그치지 않고, 말과 글을 통해 더 나은 이해와 소통을 실현하도록 이끄는 실천적인 언어 사용을 안내한다. 단어 하나, 표현 하나의 선택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 지를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주며 문해력이 단순한 읽기 능력이 아닌 비판적 사고와 사회적 소통 능력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우리가 쓰는 말이 곧 우리의 정체성이며, 올바른 언어 사용이 개인의 성장과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 기반이 된다는 메시지를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을 꼼꼼하게 읽고 실제로 사용해 봄으로써 우리는 우리말의 섬세한 뉘앙스를 다시금 되새기고 실생활에서 더 정확하고 품격 있는 언어 생활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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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어둠
조승리 지음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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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린 어둠'이라는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감성이 아닌 분명히 무언가를 견뎌낸 이야기일 것 같았다. 실제로 이 책은 2025년 6월 출간된 조승리 작가의 첫 연작소설집으로 실명을 앞둔 청소년기를 살아가는 네 명의 화자를 중심으로 구성된 네 편의 연작소설과 창작기를 다룬 에세이 한 편이 담겨 있다.


각 화자는 시각의 상실이라는 공통된 경험을 기반으로 관계의 붕괴, 미래에 대한 불안, 자존감의 흔들림 등을 겪는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개인적 고통에 머물지 않는다. 장애로 인해 드러나는 가족 내 갈등, 사회적 단절, 특수학교나 제도 안의 문제 등 구조적 현실까지 폭넓게 조망한다는 점이 두드러진다. 서사는 픽션이지만 실제 경험에서 출발했기에 현실성이 강하며 에세이처럼 솔직하고 생생하다. 장애를 둘러싼 다양한 맥락을 섬세하게 포착하면서도 인물들이 ‘살아내야 한다’는 의지를 놓지 않는 점에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듯하다. 마지막에 실린 자전적 에세이, <소설가가 되었다>에서는 저자가 안마사로 일하던 시절부터 다시 글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이 글은 앞선 소설들을 하나의 서사로 묶는 동시에 이 책의 현실적 기반을 분명히 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어 더 깊은 울림을 남긴다.


책의 표제작인 〈나의 어린 어둠〉은 주인공 ‘성희’와 엄마와 남동생이 살아가는 농촌의 일상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장마철 새벽, 처마를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깬 성희는 눅눅한 이불을 덮은 채 눈을 뜨고 '눈앞이 어둑하다'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날씨 묘사를 넘어 성희의 시야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음을 암시듯 하다. 습기 가득한 공기, 흙탕물 냄새, 젖은 운동화와 양말, 비로 망가진 자전거 등 이어지는 장면들은 장마철 농촌의 습하고 무거운 정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성희가 처한 환경적,신체적 불편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성희는 고장 난 자전거 대신 젖은 길을 걸어 통학하고, 방과 후엔 어머니를 도와 고추밭에서 고된 수확 노동에 나선다. 반복되는 작업과 끝이 보이지 않는 밭고랑 앞에서 성희는 좌절하고 울음을 터뜨리지만, 결국 다시 일어나 가족을 위해 움직인다. 첫 장면부터 느껴지는 어둑하고 눅눅한 분위기와 너무나 사실적이며 생생한 성희의 모습들은 자꾸만 이야기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시간이 흘러 성희는 중학생이 된다. 키가 부쩍 자라고 교복이 작아질 만큼 빠르게 성장하지만 그에 비례해 일상의 어려움도 늘어난다. 중학교는 자전거 통학이 어려운 거리였고, 매일 향제리까지 자전거를 타고 나가 시내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학교생활 속에서도 점차 이상한 변화들이 나타난다.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고, 하키부에 뽑혀진 이후에 적응을 하는 듯 했으나 공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해 반복적으로 다친다. 자전거를 타다 자주 넘어지고, 해가 지기 시작하면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증상도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에 불안을 느낀 성희는 안경을 맞추러 간 시내 안경원에서 단순한 시력 문제 이상일 수 있다는 경고를 듣는다. 안경사의 권유로 혼자 서울의 안과를 찾아가 정밀 검사를 받은 성희는 결국 의사에게서 머지않아 시력을 모두 잃게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진단을 받는다. 보호자 없이 진료실에 들어선 어린 성희는 처음에는 아무런 감정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멍했지만, 진료실 문을 나서며 비로소 눈물을 쏟아낸다. 간호사가 건넸던 티슈의 의미를 그제야 이해하며 현실을 받아들이는 첫 순간의 좌절을 온몸으로 겪는다. 이 장면은 어린 성희가 실명의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장면으로 작품 전체에 흐르는 '어린 어둠'이라는 주제를 가장 또렷하게 드러내며 자꾸만 먹먹하게 만든다.


성희가 혼자 감당하기엔 벅찼던 그 사실은 곧 어머니에게도 알려지게 되고 두 사람은 병원을 함께 다니기 시작한다. 이후 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슬픔과 아픔만을 담고 있지 않다. 집에 오는 길에 너무 울어 눈이 벌겋게 부은 채로서로를 바라보며 억지 웃음을 짓는 모녀의 장면은 읽는 이의 가슴을 울컥하게 만든다. 그렇게 ‘아픔’이라는 사실을 함께 나누는 일만으로도, 이들은 서로에게 조금씩 위로가 되어간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세 번째 병원을 다녀온 날이다. 성희도 엄마도 병원에서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대신 호박 부침개를 개걸스럽게 먹으며, 자전거 이야기를 꺼내고,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 대화 속에는 더 이상 시력이나 병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대신, 그저 평범한 엄마와 딸의 하루가 있다. 모녀는 그렇게 ‘눈’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로 시시덕거리며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다.


이 짧은 이야기의 을림은 단순히 시력을 잃는다는 고통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무엇을 잃었는 가보다 잃은 후에도 어떻게 살아가려 하는가에 질문을 던진다.그리고 고통이 전부가 아니고 위로가 특별한 말에서만 오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만든다. 부침개를 나눠 먹으며 웃는 대화, 허물없는 농담, 그리고 끝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 그거만 충분하지 않을까.


책은 실명이라는 개인의 상실을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어둠에만 머무르지 않고 삶의 새로운 감각을 찾아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시력을 잃어가는 인물들이 겪는 두려움, 관계의 균열, 사회로부터의 거리감은 감각의 문제를 넘어 존재 전체를 흔드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책의 인물들은 주저앉지 않는다. 불완전한 몸과 조건 속에서도 삶을 다시 조율하고, 관계를 새로 맺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된다.


저자는 픽션과 자전을 넘나들며, 고통의 경험을 단지 고발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응시한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서 발견되는 사소한 기쁨들, 빗속 자전거, 갓 부친 부침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건네는 농담을 통해 어둠 속에서도 분명 살아가는 감각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이 책은 결국 지금 당신은 어떤 어둠을 지나고 있으며, 그 안에서 무엇을 살아내고 있는가를 묻는다. 그 질문에 답을 구하며 이 책을 읽다보면 이 책의 이야기가 단지 소설이나 에세이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로 확장되고 우리 역시 그렇게 책 속 인물들처럼 새로운 시작의 용기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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