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랫바닥은 모양이 고르지는 않지만 편편한 돌들을 퍼즐 조각처럼 맞추어 깔았다. 암염소 가죽과 골풀로 만든 돗자리, 버드나무로 짠 몇 가지 가구, ‘버지니아호‘에서 건져온 식기류와 각등들, 망원경, 긴 칼그리고 벽에 걸어놓은 소총 한 자루는 로빈슨이 오랫동안잊고 있었던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그는
‘버지니아호‘에서 가져온 몇 개의 상자 속에 들어 있던 옷들-그중 어떤 것은 상당히 멋있었다-도 모조리 꺼냈다.
그 뒤로 그는 저녁마다 옛날식 짧은 바지에 모자를 쓰고 긴양말과 구두를 갖춰 신은 다음에 식사를 하는 습관을 갖게되었다.
- P41

시간은 그럭저럭 흘러갔지만, 로빈슨은 점점 더 자신의 하루 일과를 잘 계획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진흙탕 속에 다시 떨어져 짐승처럼 살게 될까 봐 늘 두려웠다.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오롯이 한 명의 인간으로 남아 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나쁜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그가 생각해낼 수 있는 일이라곤 노동과 규칙 그리고 섬에 있는 모든 자원을 샅샅이 조사하는 일뿐이었다.
그의 달력에 따라 1,000일째 되던 날, 로빈슨은 ‘스페란차성‘에 법령을 공포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예복으로 갈아입고, 서서 글을 쓸 수 있도록 고안하여 만든 책상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버지니아호‘에서 찾아낸, 바닷물에 글자가 지워졌지만 상태가 가장 괜찮은 책들 가운데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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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조너스는
"전 벌써 노인의 집에서 여러 번 그런 일을 했어요. 노인들은 젊은 시절을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요. 그 얘길 듣는 건 다른것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이었어요."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냐. 그런 게 아니다. 네게 전달하는 건 나의 과거나어린 시절 이야기가 아니란다."
남자는 몸을 뒤로 젖혀서 의자에 머리를 댄 후 한숨을 한 차례 내쉬더니 말했다.
"네게 전달하려는 건 세계 전체의 기억이야. 네가 있기 전,
아니 내가 있기 전, 그리고 내 스승님이 있기 전, 그리고 그 스승님의 스승님도 있기 전 세대의 이야기야."
조너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세계 전체라고요? 이해가 안 돼요. 선생님 말씀은 단지 우리를 뜻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마을도 아니고요. 다른 어떤곳을 말씀하고 계신 건가요?"
조너스는 마음속으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포착하려고 노력하다가 다시 말했다.
"죄송한데요, 선생님. 잘 이해가 가지 않아요. 머리가 나빠서 그런가봐요 - P133

그런가 봐요. ‘세계 전체‘나 ‘스승님도 있기 전 세대‘ 라고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전단지 우리만 있다고현재만 있다고 생각했어요."
"더 많은 것이 있단다. 이곳도 다른 어떤 곳도 모두 넘어서는 옛날 아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이 있다. 처음 기억보유자로 선출되었을 때 나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 그리고 이 방에서 혼자 그 전부를 반복해서 다시 경험한단다. 그게지혜가 생기는 방법이야. 우리가 미래를 만들어 가는 방법이기도 하고."
남자는 잠시 말을 그치고 심호흡을 했다.
"나는 지금껏 그 무게를 홀로 져 왔단다."
갑자기 조너스는 남자가 엄청나게 염려되었다.
"그건 마치..………."
설명에 적당한 단어들을 생각하는 듯 남자가 말을 중단했다.
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다.
"썰매를 타고서 수북이 쌓인 눈을 뚫고 내리막길을 달리는것과 같았어.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어. 속도감, 살을 에듯 맑은공기. 하지만 썰매 날에 눈이 달라붙으면 서서히 속도가 느려지지.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면 힘껏 밀어야 하고・・・・・・ "
- P133

조너스는 지혜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조너스를 매료시킨것은 바로 색깔들이었다.
‘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는 없나요? 왜 색깔들이 사라졌나요?"
기억 전달자가 어깨를 한 차례 으쓱해 보였다.
"우리들이 그쪽을 선택했어, ‘늘 같음 상태‘로 가는 길을 택했지 내가 있기도 전에, 이 시대보다도 전에, 옛날 아주 오랜옛날에 말이야. 우리가 햇볕을 포기하고 차이를 없앴을 때 색깔역시 사라져 버렸지."
그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있었지. 하지만 동-시에 많은 것들은 포기해야 했단다."
조너스는 아주 격렬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요!"
기억전달자는 조너스가 단호한 반응을 보이자 조금 놀란듯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주 빨리 그런 결론에 도달했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는데, 어쩌면 너는 나보다 훨씬 빨리 지혜를 얻을지도 모르겠다." - P163

달자와 함께 이야기하거나 기억을 전달받으면서 시간을 함께보냈지만, 조너스는 아직까지 책 가운데 단 한권도 펼쳐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저기 제목을 읽으면서 조너스는 그 책들에 몇십 세기에 걸친 인류의 지식 전체가 담겨 있음을 알게됐다. 그리고 언젠가 시간이 흐르면 그 모두가 자기 책이 된다.
는 것도 알았다.
"만일 제가 아내를 얻고 아이들을 키우게 되면 책을 숨겨야하나요?"
기억전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책을 배우자와 공유하는 건 허용되지 않는다. 그게 옳은 일이란다. 다른 힘든 일도 있지. 새로운 기억 보유자는 자신이 받는 훈련에 관해 이야기할 수 없다는 규칙을 기억하고 있지?"
조너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었다. 그 규칙은 조너스가 지켜야 하는 규칙들 중에서 가장 당혹스러웠다.
"훈련이 끝나서 공식 기억 보유자가 되면 완전히 새로운 규척들이 주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지켜 온 규칙들이다. 새로운 기억 보유자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에게도 내 일에 대해말할 수 없지. 이런 규칙도 지금 너에게는 그리 놀라운 게 아닐거다. 그 새로운 기억 보유자가 바로 너다.
15 - P175

모든 것이 새로웠다. ‘늘같은 상태‘와 예측 생활에서 벗어난 후, 조너스는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나타나는 신기한 풍경에 압도되었다. 조너스는 자전거 속도를 늦추었다. 야생의 꽃들을 경이감을 품고 바라보고, 근처에서 낯선 새가 지저귀는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람이 나뭇잎들을 흔드는 것도 즐겼다. 지난 열두 해 동안 마을에서 살면서 조너스는 한순간도 이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행복감을 느껴본적이 없었다.
- P289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동시에 절망스러운 감정도 생겼다.
그중 가장 무서운 것은 굶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경작지가 끝났기 때문에 먹을 것을 발견하기가 아주 힘들었다.
마지막 경작 지대에서 모은 감자나 당근 같은 형편없는 먹을거리들조차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이제 두 사람은 늘 굶주렸다.
조너스는 개울가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물고기를 잡으려했지만 헛일이었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물속에 돌을 던졌지만이 방법 역시 별 소용이 없을 것은 이미 잘 알았다. 결국 절망에 사로잡힌 채 임시변통으로 그물을 만들었다. 가브리엘의담요에 달린 술을 구부러진 막대기에 묶은 것이었다.
수없는 시도 끝에, 그물에 퍼덕이는 은빛 물고기 두 마리가걸렸다. 조너스는 날카로운 돌로 물고기를 잘라 그 살을 가브리엘과 함께 나눠 먹었다. 두 사람은 산딸기 열매도 먹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새를 잡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밤이 되자 가브리엘이 조너스 곁에서 잠들었다. 그러나 조너스는 배고픔 때문에 잠들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매일 집집마다 먹을 게 배달되던 마을 생활이 스쳐지나갔다. - P290

뒤쪽에서도, 엄청나게 큰 시공간을 가로질러, 조너스가 떠나온 곳으로부터도 음악 소리가 들려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아마 그 소리는 단지 메아리일 터였다. - P301

면 조너스는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청소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너스가 사는 마을은 결코 평범한곳이 아닙니다.
이 마을은 사랑이나 우정과 같은 인간적인 감정에 따르는어떠한 종류의 고통도 없는 완벽한 행복에 이르기 위하여, 개인의 선택에 따르는 어떠한 종류의 잘못도 있을 수 없는 완전한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피부색이나 언어와 같은 차이에 따르는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없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여 분란의 소지를 모두 제거해 버린 곳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하루 종일 마을에서 정해 준 대로 살아야 하며, 저녁 자리에서는 그날 살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숨김없이이야기하여 순화해야 하고 아침에는 간밤에 꾸었던 꿈을 이야기하여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교정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직업도 마을 원로들이 열두 살 생일날에 정해 주고, 그대로 평생살아야 합니다. 물론 배우자를 얻을 때에도 신청을 하면 심사해서 적절한 사람을 골라 줍니다. 아이들도 사랑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신청하면 산모가 낳은 아이들 중에서 배급해 줍니다. 또한 스피커를 통하여 마을 사람들은 끊임없이감시당하며, 명령을 따르지 않고 세 번 이상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면 ‘임무해제‘당하면 마을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 P304

지르면 ‘임무 해제‘ 당하여 마을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통제당하는 대신에 마을 사람들은 어떠한 모험도, 위험도 없는 편안하고 즐거운 삶(작가는 이를 ‘늘같은 상태(Sameness)‘로 표현하고 있습니다.)을 보장받습니다. 작가는 뉴베리상 수상 연설에서 이 마을을 "친숙하고, 편
"안하고, 안전한 세계" 그러니까 "폭력도, 가난도, 편견도, 불의도 없는세계"라고 한 바 있습니다. 이쯤 되면 누구나 한 번쯤살아보고 싶은 세상이 아닐까요?
가슴 두근거리는 수많은 밤이 지난 후 열두 살 기념식에서조너스가 받은 직위는 ‘기억 보유자(Receiver)‘라는 낯선 일이었습니다. 이 직위는 마을에서 가장 영예로운 직위로 늘 같음 상태‘ 이전의 기억(인류 역사 전체)을 머릿속에 품고 있다.
가, ‘늘 같음 상태‘가 깨지는 돌발적인 상황이 벌어지면 그 기억들로부터 얻은 지혜를 통하여 마을 원로들에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게 일입니다. 노인들의 집 근처에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조너스는 ‘기억전달자(Giver)‘로부터 하나씩 기억을 전해 받습니다. 사랑, 고통, 즐거움, 공포, 굶주림 등과 같이 마을사람들은 전혀 느끼지 못하는 온갖 감정들이 기억을 통하여조너스에게 밀물처럼 밀려듭니다. 그러자 조너스의 마음속에서 마을 생활에 대한 견딜수 없는 회의가 생겨나 마침내 그는 마을을 떠나기로 합니다. - P305

조너스가 사는 곳에서는 장애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임무 해제‘ 당하여
‘다른 세계‘로 갑니다. 또 쌍둥이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쌍둥이 중에서 몸무게가 낮은 아기는 ‘임무 해제‘ 당하여 다른 세계‘로 가기 때문입니다. ‘노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들어 병들거나 기력이 쇠하면 기념식을 치른 후 ‘임무 해제 당합니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소설 속의 이런 장면들이 각각 장애인 문제, 신체 조건에 따른 차별 문제, 안락사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아챘을 겁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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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는 누가 먼저 느낌을 얘기할까?"
아버지가 저녁 식사를 마친 자리에서 물었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가족이 모두 모여서 그날 받은 특별한 느낌을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보내야 한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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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반양장) - 제12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9
이희영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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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묻자
"바깥에서 지내보니까, 친부모 밑에서 자라는 애들도 우리랑 별반 다르지 않더라. 부모와 남보다 못하게 지내는 경우도 있고 의견충돌도 잦고 부모에게 바라는 거라고는 제발 아침마다 잔소리 좀하지 마라,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VR룸에서 보낼 수 있게 해 줘라, 친구하고 비교 좀 하지 마라, 몰래 멀티워치 좀 살펴보지 마라,
뭐 이 정도거든. 한마디로 부모에게 특별히 기대할 게 없단 거지.
그런 부모들이 프리 포스터로 왔다고 생각해봐. 누가 페인트를 하겠냐? 바로 안녕이지."
노아의 막을 듣고 보니 우리가 부모를 선택한다는 것은 부모기 - P183

"어른으로서 이런 말, 부끄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계급으로 나뉘어 있고, 엄연한 차별이 존재한다.
힘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연약한 존재들을 짓밟지. 특권 의식을 누리려는 거다. 힘 있는 자들만이 아니다. 힘이 약한 사람들도 그런특권 의식을 지니고 있어. 자신도 약하면서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들을 짓밟는 거다. 가난한 나라에서 이민 온 사람들, 누구나 기피하는 일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차가운 시선 등이 다 여기에포함된다. 친부모 밑에서 자란 이들은 국가의 보살핌 속에서 자란너희들에게 묘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 너는 영리하고 매력적인 아이다. 누구라도 너를 보면 호감이 생길 거야. 그러나 네가 NC 출신임을 밝히는 즉시 사람들은 너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거다.
그건 제누, 너도 잘 알잖아. 이곳에서 부모를 만나지 못한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 어떤 불이익을 당하고 차별 속에서 살아가는지."
- P193

모른다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모르기 때문에 배울 수 있고, 모르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으니까. 삶이란 결국 몰랐던 것을 끊임없이 깨달아 가는 과정이고 그것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긴 여행 아닐까? - P196

내 유년은 회색이었다. 흰색과 검은색 중에서 검은색이 더 많이섞인 잿빛 회색. 나의 아이에게는 이런 색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노력한다.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 사랑한다. 그저 사랑한다.
꾸준히 말할 수밖에. 나는 나 자신에게도 종종 "괜찮아."라고 말해준다. 실수하고 실패하고 틀리고 더디 가도, 고개를 끄덕인다. 누군가 내게 왜 청소년소설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바로 이런 이유를들고 싶다. 유년 시절의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라고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하면 돼. 괜찮아, 잘될 거야.
소설 속에 나오는 것처럼 내 안에도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있다. 그 아이와 놀아 주는 일이 나에겐 글쓰기다. 무엇을 얻고 싶은욕심은 없고 단지과정을 오로시 즐길수 있는것이기뻐서 쓴다 - P199

부모가 된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자신이 바라는 아이로만들려는 욕심보다 아이와의 시간을 즐기는 마음이 먼저다. 부모는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되어 가는 것이다. 아이를 가르치려 들지 말고 아이와 함께 놀고 즐기면 된다. 글쓰기가 늘 즐겁지만은않듯 근래 들어 아이와의 관계가 삐걱거릴 때가 잦았다. 하지만 맑은 날만 계속되면 세상은 사막으로 변한다.
올해 열두 살이 된 나의 아이도 안다. 엄마가 노트북 앞에 앉으면 완전히 다른 인격체가 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가급적 말을 걸면안 된다는 사실을 아이가 내게 ‘15점‘을 준대도 나는 후한 점수라고 생각한다.
나는 좋은 부모일까? 반성에서 시작한 소설이었는데, 정작 글을쓰는 동안에 아이에게 소홀한 엄마가 되어 있었다. 아이가 이 글을읽으면 뭐라고 할지 걱정이다. 나를 각각 아내, 엄마로 둔 우리 집의 두 사람은 애초에 나에게 살림과 육아를 기대하지 않는다. 외조와 내조를 병행하는 남편과 자기 할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아이가 아니었다면, 매일 방에 틀어박혀 몇 시간이고 키보드만 두드리는 호사(?)는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미안하고, 많이 고맙다.
언젠가 선생님은 "이야기는 찾아온다."라고 말씀하셨다. 나의경우 "나는 참 부모 자격이 없구나." 하는 푸념 속에서 제누와 아키노아가 찾아왔다 - P200

나보다 더 능력 있는 사람에게 갔다면 훨씬근사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을 텐데, 안타깝고 미안하다. 이것은 내가 나의 아이에게 느끼는 미안함과 같은 것이다. 더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더 행복했을 텐데.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신할수 있다. 나를 찾아온 이 생명들을 나는 세상 누구보다 사랑한다.
부족한 글을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분들과 청소년심사단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말과 글에도 생명이 있다고 가르쳐 주신 선생님,
오랜 글동무들께도 고개를 숙인다. 작품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끝까지 격려해 주신 정민교 편집자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
이야기를 다듬어 가는 동안 놀라울 정도로 많은 공부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어 주신 당신께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사를 전한다. 당신의 가슴속에도 자라지 못한 아이가 있다. 그 아이에게 한번 말을 걸어 보길 바란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게될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가끔은 스스로에게 괜찮아, 잘하고 있어,
진심으로 격려해 주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당신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니까.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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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그것으
"과학 시간에 마찰에 대해 배운 적이 있어요. 마찰은 서로 접촉하는 물질들 사이에 작용하는 힘인데, 언제나 운동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만 생겨난대요."
"미안, 나 그쪽은 약해.‘
하나가 항복하듯 두 손을 들었다.
"사람의 마음과 마음 사이에도 분명 마찰이 있을 거예요."
너무 가까우면 부딪치는 가족처럼 말이다.
"마찰의 원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가급적 적게 부딪치겠지?"
"이론과 현실은 엄연히 다를 텐데요?"
나와 하나가 동시에 웃었다. 바람이 불어와 우리 둘의 머리를 형클어뜨렸다. 하나의 미소는 편안해 보였고, 자신의 글을 쓰려고 마음먹은 삶 또한 당당하게 보였다.
"저처럼 다 큰 아이와 사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 P161

"우리가 꼭 부모가 되어야 할까? 그냥 친구가 되면 안 될까? 십대들에게는 부모보다 친구가 더 소중하잖아. 부모에게 할 수 없는말을 친구에게는 하잖아."
하나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나와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친구들은 모두 고등학교 때 만난 애들이야. 우리는 작은 일에도 곧잘 흥분하는 십 대였고 별일아닌 것에도 웃고 떠드는 아이들이었지. 지금은 표정만 봐도 애가 또 무슨 일이 있구나, 단번에 알아차리지만 친해지기 전까지의그 서먹함은 잊을 수가 없어. 시간이 지나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되고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친해졌지. 물론 다툼도 있었어. 실망도했고, 절교까지 생각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결국 세상에서 서로를가장 잘 아는 친구들이 되었어."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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