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적인 도시 - 뉴욕 걸어본다 3
박상미 지음 / 난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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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을 말해주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반복해서, 생각해서 하다보면 결국 하나의 태도, 삶에 임하는 태도가 되는 것이다. 땅을 밟는 것이, 길을 걸으며 들꽃을 꺾는 것이 좋은 사람은 많이 걸을 것이다. 많이 걷다 보면 걷는 것은 그가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태도요, 방법론이 된다. 자동차는 조금 덜 타고 조금 더 걺는 삶, 두 다리를 써서 생각하는 삶._142p



지극히 사적인 글이었다. 한국을 떠나 뉴욕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뉴욕이 '사적인 도시'가 되었다고 말하는 저자의 삶이 책을 통해 드러난 것만 같았다. 아니, 이 책이 저자의 삶이었다. 2005년부터 2010년도까지의 글만 발췌되어 출간되었지만 그 몇 년의 생활에서 전체적인 삶을 가늠해본다. 저자는 작가의 말에서 뉴욕은 자기만의 '사적인' 도시라고 했다. 책을 읽고서 그 말에 공감했다. 사적인 도시에서 보여주는 사적인 삶은, 작가 본인이 아니고선 결코 이해할 수도 없으리라. 나는 저자에게 스치는 풍경 중 하나이거나 어쩌면 아주 먼 곳에 있는 보이지도 않을 흐릿한 별일지도 모르니. 그러니 내가 이 책을 읽고 작가의 삶을 모두 안다곤 할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볼 수는 있었다. 이해하는 게 아니라, 보는 책. 내용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를 알았다. 그렇기에 내 감상 또한, 사적일 수밖에 없다. 사적인 글과 사적인 감상. 어딘지 모르게 잘 어울리는 조합인 것도 같다.


<나의 사적인 도시>.제목이 매력적이다. '뉴욕'이란 도시를 다룬 책이라는 것보다, 그저 제목 하나에 끌렸다. 그래서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사적'이라는 것에도 많이 고민을 했다. 사적이라는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꺼내 보이는 게 아닌 혼자 소유하는 것으로도 족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나의 사적인 도시>에서 작가에게 뉴욕이 그랬다. 뉴욕의 갤러리, 사진전, 많은 그림과 사진, 조형물을 보고 생각을 하고 감상을 글로 남긴 것. 그것이 작가 혼자 전유한 '사적'인 게 아닐는지. 그렇기에 이해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책으로 나온 순간, 그것은 저자만의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여전히 그것은 저자만이 가진 '사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지극히 사적인 세상. 슥 들이밀어 지켜볼 순 있겠으나 오직 그뿐인 공간. 그렇기에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왠지 저자는 슥 들이밀어도 개의치 않고는 자기만의 사적인 것을 계속 품어갈 것만 같았다.


이 책에 나온 수많은 예술가의 이름을 나는 모두 알지 못한다. 미술이나 사진, 혹은 영화와 같은 쪽은 무지하기 짝이 없다. 솔직히 책에 대해서도 그다지 많은 것을 알지 못했다. 숱한 작가의 이름이 나왔다가 사라졌는데도, 그 어떤 이름에서도 나는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이 책은 거의 99%, 내가 모르는 세계로 꽉 차 있다. 모르기 때문에 이 책이 지극히 '사적'이라고 감상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이 책을 읽고 자기 자신과 비슷하게 한 생각을 보며 반가워할 수도 있다. 내가 느낀 사적은 진정 저자 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분위기'였다. 내가 저자처럼 많은 예술가를 알고 작품을 보고 감상을 해도 이렇게까지 애정을 품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애정과 관심, 그리고 충분히 누릴 줄 아는 여유. 완숙한 아름다움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푸른 창공에서 사뿐하게 내려앉은 고고한 학처럼 고요하면서도 끝없이 움직이는 동적인 세상. 그것은 박상미란 사람이 보는 세상이기에 지극히 사적일 수밖에 없다.


모르는 세계. 낯선 세계로 들어서는 것은 언제나 두려움이 동반된다. 에드워드 호퍼란 이름을 보고 그의 작품을 찾아 보았다. 솔직히 그림을 볼 줄 몰라서 눈으로 대충 담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런 것처럼, 어느 순간 마음에 잔상으로 남는 순간이 있다. 이 책을 다 읽고서 많은 예술가들 중에서 유난히 에드워드 호퍼가 기억에 남은 것은 그가 그린 그림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저자가 말한 것 때문이다. 어떤 책은 때론 문장 때문에 읽기도 한다.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그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문장들이 훗날 어떤 식으로 발현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사적인 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은 알 수 있다. 고요하게 잠기기보단 끝없이 흘러가는 물결처럼, 조금씩 느리게 나를 채워가리라 생각한다. 이해하는 것이 아닌 받아들임. 책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준 책이다. 조용히 숨을 죽인 채, 그의 세상을 지켜보라. 보는 것이 때론 상대를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고 말해주듯.


반짝이는 햇빛 아래 숨겨 있는 그림자처럼, 나는 이 책을 그림자처럼 읽었다. 드러내는 게 아닌 숨기면서 이 책을 조심스럽게 탐닉했다. 날숨에 집중하는 때가 있다고 말하는 작가처럼, 숨김에 집중하며 읽었다. 그것이 내가 사적인 세계를 존중하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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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은
오현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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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공막(鞏膜)이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나는 공막을 보면서 그런 고민에 빠진다. 사전에서 보면 공막은 눈이 둥그런 형체를 유지할 수 있도록 눈을 감싸는 흰색의 질긴 섬유조직이라고 정의한다. 눈을 둥그런 형태로 유지할 수 있도록 눈을 보호해주는 조직이라니. 막상 상상을 해보니 공막의 인생과 닮지 않았나 생각하게 된다.


염나라의 재상 공막. 미궁의 주인 공막.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을 죽이고 수없이 많은 자객을 불러들이고 수없이 많은 거짓말과 수없이 많은 음모와 진실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남자. 그의 발 아래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무수히 많지만 그를 위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들 그가 죽으면 파리처럼 달라붙을 역겨운 인간들뿐이다. 공막은 점점 더 고독해지고 오직 고독만을 위해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과의 거리를 유지한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옆으로 오지 못하도록 살생을 하고 사람을 증오하고 의심하고 미워하며 제 생을 유지해간다.


나는 그의 '고독'에 집중했다. 공막을 죽이려고 한 황보정과 황보명도 아니고, 복수를 꿈꾸려고 책만 읽는 남자도 아니고, 얼굴이 없는 자객도 아니고 구덩이에 쥐에게 파먹힌 자객의 아내도 아니고 공막에게 빌붙어 사는 의붓아들도 아니고, 혀가 잘린 벙어리 이야기꾼 심연도 아닌, 오직 공막에게만 집중했다. 그의 말, 행동, 심리에 집중했다. 때론 어떤 이야기는 한 인물에 의해 좌우되기도 한다. 오직 그 인물 하나를 위해 책을 읽게 된다. 나에게 <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은>이 그랬다. 그가 어떤 죄를 지었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더라도 나는 오직 공막 한 사람에게 집중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은 예감을 느꼈고 이미 공막에게 사로잡혀 있어서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모두가 웃고 있다.  우는 자는 나 하나다. 모두가 한통속이다. 나는 고아야.

_119p


모두가 웃고 있다, 란 말보다 우는 자는 나 하나다, 란 말보다 모두가 한통속이다, 란 말보다 "나는 고아야"라는 말 한 마디에 마음이 휘청댄다. 나는 오직 이 대사 하나를 읽기 위해 공막을 읽어본 게 아닌가 싶었다. 공막이 제 스스로 "나는 고아야"라고 말하기를 기다려왔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꾼이 신명나게 떠드는 와중에도 내가 집중하려고 무수히 애를 쓰는 중에 갑자기 숨겨있던 '고독'이 제 스스로 기지개를 켜면서 존재를 활짝 드러낸 것만 같았다. 어느 날, 갑작스레 피어난 한 송이 꽃처럼. 공막이 자기 발을 베어무는 귀신에게 말을 걸어도, 자기를 음해하려는 자들을 죽이고, 괴롭히고 그래도 "나는 고아야"라는 말보다는 직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자기의 고독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온 까닭이 이 말 한 마디에 숨겨 있는 것만 같아 나는 책을 뜯어보았다.


왜, 그는, 고독을, 택했을까.

태고적부터 내려온 질문처럼 나는 고민에 빠져 있다. 그는 언제라도 미궁 밖으로 나올 수 있지만 그는 미궁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미궁 밖에 자객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미궁 밖에 자기를 위하는 사람이 없어서인 것 같았다. 미궁 밖은 '고독'이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는 곳이다. 그는 그나마 덜 고독한 곳에서 자신의 숨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는 왜 살아가는가. 그건 자신만이 고독을 유일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는 이유, 그것은 희망차거나 낙천적이지 않아도 이유를 부여한다. 그가 피를 숱하게 묻히면서도 살아가는 이유, 오직 고독을 위해서였다. 고독을 위해 바치는 레퀴엠이라고나 해야 할까. 조금 유치한 표현이지만 고독 그 자체가 공막인 것처럼, 공막 그 자체가 고독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고독을 알리기 위해 처절하게 살아온 것 같았다. "나는 고아야"와 비슷한 맥락이다. 미궁이라는 거대한, 들어올 수는 있지만 나갈 수는 없는 장소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 혼자 숨어 사람을 끌어들이지만 어느 누구도 나갈 수 없어 오직 죽음으로만 바깥으로 나가는 곳. 공막은 오직 죽음으로만 자신의 고독을 말하고 있다 생각했다.


그러자 슬퍼졌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가 한없이 슬퍼졌다. "나는 고아야"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폭발하듯, 거대해졌다. 그렇기에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고독을 달래기 위해, 고독을 위로하기 위해, 고독이 고독으로 존재하기 위해. 의붓아들이 심연에게 "이 미궁의 일을 이야기책으로 만들라"라고 한 부탁도 따지고 보면 고독을 위해서였다. 미궁에 제 스스로를 가둬버린 공막을 위한 것. 심연은 유일하게 공막을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야기를 통해서, 이야기를 위해서.


사실 읽고 나서 이 글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고독한 자였다. 복수에 사로잡힌 정이나, 정을 위해 복수를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명이나, 복수 그 자체를 책에서 찾는 남자나, 이야기를 쓰는 심연이나, 모두 고독한 자였다. 고독을 끊어내려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의붓아들이 심연과 밤이 되면 팥죽을 나눠먹는 것처럼. 공막은 실패했다. 세번째 첩이 사랑한 남자를 변방으로 몰아내면서부터, 관계 맺기를 실패했다. 어쩌면 그 실패가 그를 고독하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는 관계를 나누지 않았을까. 난 오직 의붓아들만이 그를 받아들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그는 공막처럼 되기를 소망한 남자였다. 공막처럼 고독해지길 바랐다. 단순히 의붓아들이라는 관계로서가 아니라 그 뭔가 뜨거운 것을, 짙은 핏빛을 자아내는 팥죽처럼, 진득하면서도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이어지길 바랐다. 고독을 이해하기 위해 고독이 되길 자처한 남자도 고독하지 않나.


우리는 모두 고독하다.

나는 '우리'라는 단어를 쓰면서 고독을 강조하고 싶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라고 하지만 혼자인 것과 고독한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난 공막을 보면서 "고립무원孤立無援"이란 단어가 계속 생각이 났다. 바람이 고요하게 부는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 빛살 하나 들지 않는 컴컴한 어둠만이 가득한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사람. 그는 원한다면 들판을 나갈 수도 있지만 그곳에 있길 자처한다. 고독을 바라는 자만이 오직 고독을 알 수 있으리란 기분이 들었다. 왠지 그런 고독을 갖고 싶어졌다.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죽고 나면 다 사라져버릴 부질없는 삶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누구든 자신만의 이야기, 들려줄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면 의미 없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 나는 그 믿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_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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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5-03 09: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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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 - 신경림 - 다니카와 슌타로 대시집(對詩集)
신경림.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 예담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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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란 책을 알게 된 것은 신경림 시인의 이름도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의 이름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아쉽고 운명이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를 알기 전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의 <20억 광년의 고독>이란 시를 읽었다. 바로 직전이었다. 트위터를 훑어보던 중 먼저 <20억 광년의 고독>이 먼저 보였고 그 바로 위에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란 책을 보았다.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도 어느 누군가가 쓴 시라고 생각해서 검색창에 검색어를 입력했다. 그러다 보니 위즈덤 하우스에서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의 책 소개를 하는 페이지와 함께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글을 발견했다.


대시對詩,

"둘이서 짓는 시"를 일본에서는 "대시"라고 부른댔다. 그것이 무척 색다르고 호기심을 자아냈다. 마치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정자 안에 둘러 앉아 서로 시를 주고받았다고 하는 풍경이 떠올랐다. 혹은 서로 시를 적은 걸 서편으로 보내 주고받은 장면도. 사극에서 자주 보았던 것만 같은 그런 풍경이. 스쳐지나가는 풍경과 함께 한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신경림 시인과 일본에서 빼놀을 수 없는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시를 주고받았다니 꼭 읽고 싶단 생각을 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를 지닌 두 시인이 품은 생각도 궁금했다. 책이 왔을 때 대시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두 시인이 서로 쓴 시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가는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한 대목에서 숨이 덜컥 멈추었다.


4월이다. 잊지 못할 시간이 오고 있다. 넘치는 바닷물을 볼 적이면 저절로 떠오르는 풍경. 우리는 그날 노란 리본을 매달았다. 결코 잊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시간이 흐르면 인간의 기억은 흘러가는 것인지 어느 순간 잊었던 것도 같다. 잊지 말자 스스로 다짐했는데. 이 시를 읽으면서 그날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았고 1년이 흘렀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 내가 느끼는 것을 두 시인도 절감하겠구나 싶었다.


남쪽 바다에서 들려오는 비통한 소식

몇 백 명 아이들이 깊은 물 속

배에 갇혀 나오지 못한다는

온 나라가 눈물과 분노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도 나는

고작 떨어져 깔린 꽃잎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

_신경림


숨 쉴 식(息) 자는 스스로 자(自)와 마음 심(心) 자

일본어 '이키(息, 숨)'는 '이키루(生きる, 살다)'와 같은 음

소리 내지 못하는 ㄴ말하지 못하는 숨이 막히는 괴로움을

상상력으로조차 나누지 가질 수 없는 괴로움

시 쓸 여지도 없다

_다니카와 슌타로


밤새껏 물속에서 허우적대다가

눈을 뜨니 솜이불이 가시덤불처럼 따갑다

아랑곳없이 아침햇살이 눈부신 앞뜰에는

목련이 지고 작약이 피고

이렇게 봄은 가고 있는데

_신경림


신문에서 눈을 떼고 텔레비전 소리도 끄고

뜰에 있는 단풍나무의 어린잎을 바라봅니다

사람의 손이 닿지 못하는 것을 외경(畏敬)하는 것과

사람의 손이 닿은 것을 무서워하는 것

외경심을 잃어버릴 때 공포가 생긴다

_다니카와 슌타로



이렇게 이어지는 대시가 얼마나 두 시인이 고통스러워했는지 알게 해준다. 가끔 시인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최근에, 어느 시인의 시가 내 마음을 울렸는데 신경림 시인과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의 시를 읽으니 다시금 그 시를 읽을 때의 기분을 느꼈다. 사람이 시처럼 살 수만 있다면 그 차디찬 바다에 가라앉은 아이들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시처럼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 풍경을 보고 있는 시인이 적은 시를 읽는다지만 그것을 모두 내 안에 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코 닿을 수 없는 풍경 같다. 다만 언뜻언뜻 그 풍경이 보일 때면 감히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모두 시처럼 살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하는 헛된 바람을.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가장 아름다운 것 같은데, 그것을 시인들은 늘 말하는 것 같은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것 같은 외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시는 언제나 고독한 것이라고. 마치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이 적은 <20억 광년의 고독>처럼 말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그래서 모두가 서로를 찾는다/우주는 조금씩 팽창하고 있다/그래서 모두가 불안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인지 가늠도 되지 않는 그 까마득한 고독 속에서 인간은 서로를 보지 못해 상처를 주고 있다. 조금만 가까웠다면 우리가 조금 더 많이 팽창해서 서로에게 닿았다면 그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시 다음에는, 신경림 시인과 다니카와 슌타로가 서로 꼽은 대표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시도, 참 좋다. 시 다음에 두 시인이 도쿄와 파주에서 나눈 대담이 있는데 두 시인이 모두 서로 닮았다고 하는 부분이 있다. 서로 꼽은 시를 보니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것도 그렇고, 서로 전쟁을 겪은 것도 그렇고,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것도 그렇고. 같은 풍경을 본 게 있던 탓에 둘은 닮은 것일까. 잘 모르겠다. 신경림 시인이 시는 "평범하게 살아가면서 생활 속"에서 시의 소재를 찾는다고 했다. 그런 생활을 면밀히 바라본 시인들이라면 같은 풍경을 바라볼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특히 포엠과 포에지에 대해 말한 부분은 인상이 깊었다. 포에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는데 포엠 그 자체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해서 조금 마음이 아팠다. 내가 그래도 두 시인들의 얼굴을 볼 낯이 없는 게, 나도 지금보다 어릴 때엔 시가 어렵다는 이유로 멀리 했기 때문이다. 어렵단 이유로, 더 안 보게 되었던 것 같다. 학교 다닐 때엔 시가 까다롭고 시 안에 담긴 의미를 모두 암기해야 했던 탓에 멀어졌지만 나이가 들어선 어렵단 이유로 안 보았다. 봐서 뭐할까, 하는 생각도 있었고. 그렇지만 조금 더 나이가 들어 시를 하나씩 느리게 읽다 보니 시가 얼마나 삶에 밀접해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알리고 싶단 생각도 들었다. 시인이 알려준 것들, 가령 꽃 한 송이를 보아도 시를 읽었을 때와 시를 읽기 전이 달랐다. 내가 그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된 것도 시를 읽은 덕분이다. 나는 이렇게 시인에게 빚을 지고 있어서,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 서평단이 되었을 때 조금 많이 부끄러웠다.


대담을 지나면 두 시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신경림 시인의 어린 시절은 생소했다. 일제 시대를 직접 겪은 분의 일화를 그분의 글로 보니 낯설면서도 무언가 따끔따끔했다. 우리나라를 우리나라라 알지 못했구나, 왕은 순종이 아니라 천황으로 알고 있었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고 나니 일본이 패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나도,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 일본의 역사를 우리나라 역사로 오해하고 있겠구나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광복을 하고서 바로 먼저 배웠다는 것이 한글이었다는 것도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니카와 슌타로 시인의 이야기는 꽤 귀엽단 생각을 했다. 특히 아버지가 아들을 보면서 적은 에세이는 뭉클했다. 마지막에 시인이 된 계기에 대해서는 숙연해졌다.


아, 두 시인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본 듯한 인상을 준 책이다.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란 제목에서처럼, 두 시인이 별이 되어 내 안에 스며들었다. 아름답고 애틋하고 뭉클하고 가슴 떨리고, 도저히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두 시인의 풍경이 아주 잠깐 펼쳐졌다가 사라진 기분이다. 그것을 아쉽다고는 하지 않으련다. 나는 언제라도 두 시인이 쓴 시에서 다시 그 풍경을 볼 수 있을 거라 믿고 있으니까. 아직 시인의 세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들어서지도 못했지만 읽다 보면 조금씩 나에게도 펼쳐지리라 믿는다. 밤하늘의 별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환해지듯, 시인의 세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더 환해지란 것을 믿는다.


좋은 시간이었다. 두 시인분들께 감사드립니다.



 


* 위즈덤하우스로부터 제공을 받아서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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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시장
김성중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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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어느 문 앞에 서 있다. 당신은 그 문을 열지 말지 고민하고 있다. 그 문을 열면 분명 지금껏 보지 못했을 세상이 펼쳐질 테지만 당신에게 혹독한 시련을 안겨줄 수 있다. 만약 그 문을 열지 않는다면 당신은 지금처럼 편안한 생활에 안주하며 살아갈 수 있다.


때론 환상이란 지독한 독처럼 번져 삶에 치명적이 될 수가 있다. 하지만 환상이 없다면 삶은 퍽퍽할 것이다. 잘 굴러가던 톱니바퀴가 어느 날 멈춰버릴 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환상은 윤활유처럼 퍽퍽한 삶을 부드럽게 이어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당신은 망설일 수밖에 없다. 한 방울의 독이란 때론 모든 것을 앗아갈 만큼 잔혹하기도 하니까.


자, 이제 당신은 선택을 할 때가 왔다. 그 문을 열 것인가, 아니면 그만둘 것인가. 이런, 애처로운 눈으로 나를 보지 마라. 나는 그대에게 정보를 줄 수 있지만 그대 대신 들어갈 수는 없다. 좋아, 이렇게 하자. 지금부터 내가 그 문 너머에 보았던 것을 당신에게 말해주겠다.


그 문 너머에 존재하는 세상은 대략 이렇다.

기억을 팔아 물고기의 비늘을 구입하여 물건을 살 수 있는 <국경시장>, 짧은 생이지만 천재가 될 수 있게 해주는 <쿠문>, 커다란 곰이 되어버릴 수 있는 공간 <관념 잼>, 서로 반대를 향해 달려가던 두 소녀 <에바와 아그네스>. 인간의 언어를 알게 된 킹코브라 여왕, <동족>, 불멸이 되기 위해 필멸로 들어선 <필멸>, 흐려지는 꿈처럼 사라져버린 <나무 힘줄 피아노>, 거짓말에 관한 <한 방울의 죄>.


당신의 얼굴이 환해진다. 두려움이 사그러진 듯 떨림도 멎었다. 하지만 당신은 선뜻 문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첫페이지를 넘기면 드넓은 세상이 펼쳐지는데 당신은 그것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두려움은 언제나 산재한다. 그렇다고 그 두려움에 먹히지 마라. 환상이란 당신에게 슬픔과 분노, 좌절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찰나의 달콤함을 누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문지기인 내가 당신의 두려움을 없애줄 수는 없다.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듯 문을 여는 것도 오로지 당신의 몫이다. 하지만 걱정 마라. 그 문을 연다고, 그 페이지를 펼친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일은 없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단단하게 받치는 땅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어째서 아냐고? 환상이란 모르는 것보단 누릴 때 더 좋다는 것을 알거든. 치명적이기도 하지만 그 치명적임을 알기에 현실에 더 안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당신은 맨 처음 문을 열고서 어느 시장에 들어설지도 모른다. 그곳은 열다섯 살 미만이 아닌 사람은 잡을 수 없는 물고기가 헤엄치고 그 물고기의 비늘로만 물건을 구입할 수 있다. 물고기의 비늘은 당신 자신의 기억으로 사야만 한다. 그것이 그곳의 룰이다. 어떤 물건이든 그곳에서는 다 팔지만 자신의 기억을 팔아야 한다. 당신은 머뭇거릴 수도 있다. 물고기의 비늘을 위해 물건을 구입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당신이 가진 소중한 기억을 모두 팔아버릴 지도 모르지. 그런 여인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 남자를 나는 알고 있다. 기억을 모두 팔아서 그곳에 안주해버린 한 여인을. 떠돌아다니는 것이 싫어서 기억을 모두 팔아버렸다지. 처음엔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기억을 팔면서 물고기의 비늘을 구입했는데 어느 순간 기억에서 소중했던 기억마저 모두 팔더니 기억 모두가 사라진 빈 껍데기인 여인이 되고 말았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기억을 모두 팔아버린 사람들만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기억을 모두 팔지 못한 한 남자는, 즉, 당신과 같은 사람은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기억을 모두 팔아서까지 한 곳에 정착하고 싶은가.


그 다음에 볼 세상은, 예술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겐 희소식일지도 모르겠다. 쿠문. 천재가 될 수 있는 힘. 쿠문이 되면 예술에 눈을 뜨고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천재적인 감각으로 온갖 예술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쿠문의 치명적인 단점은 삶이 짧다는 것이다. 천재란 자고로 오래 살지 못하는 법이니까. 무엇보다도 천재의 삶이기에 그런 아름답고 멋지고 환상적인 예술이 탄생되는 건지도 모른다. 당신이 만약 예술을 꿈꾼다면 당신은 짧은 인생이라도 그것을 택할 것인가. 쿠문은 그것을 늘 묻는다. 끊임없이 묻는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 당신의 예술일까? 당신의 노력으로 일군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저 다른 힘에 취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만든 게 아닐까. 그것에 오리지널티가 있을까. 당신이 머뭇거리면 머뭇거릴수록 삶은 빠져나갈 수 없는 진창이 되어가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니 선택하라, 빨리 선택하라.


조금은 여유롭게 가도록 하자. 에바와 아그네스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 두 소녀는 같은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어느 순간 서로의 삶이 정반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델이었던 에바는 교통사고 이후로 다리를 못 쓰게 되면서 몸만 큰 장애인이 되었고 사진가였던 아그네스는 전쟁이 벌어지는 곳에 뛰어갔다가 한 소녀를 만난 후 전쟁 사진을 찍게 되었다. 사람의 관심을 받았던 에바와 사람의 관심에서 멀어지려고 했던 아그네스. 그 두 사람이 함께 만났을 때 서로 갈라졌던 삶은 합쳐졌던가. 거울은 당신의 얼굴을 비추지만 거울 너머에 있는 건 당신이 아닐 수도 있다. 에바와 아그네스는 그걸 말해준 게 아닐까.


아참, 당신은 문 너머 세상을 가다가 곰돌이가 될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참 이상한 곳이다. 물건들이 사람처럼 막 움직이기도 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도 하면서 어느 순간 당신이 커다란 곰 인형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영혼이 어느 한 곳에 갇혀진다면 그것은 괴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영혼이 어느 한 곳에 붙박힌다는 게 일종의 평안이 될지도 모른다. 더 이상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괴로워하지도 않아도 되니까. 삶은 끝없는 불안과 근심을 헤치고 나아가는 행로다. 그 불안을 넘고 근심을 타고 흘러갈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모든 사람이 그것을 뛰어넘는 건 아니니까. 당신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잘 되길 바라지만 잘 될 수 있다고 믿지만 어느 순간 유리로 된 곰에 갇히게 되는 가엾으면서도 행복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이제 조금 슬픈 이야길 해야겠다. 어느 한 킹코브라의 이야기다. 그녀는 여왕이라 불리면서 킹코브라로서의 삶을 영위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인간에게 잡히더니 인간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오, 얼마나 불행한 삶의 시작인지. 인간의 말을 이해하고 인간의 언어를 읽게 되고 마치 자신이 인간이 된 것처럼 착각하게 된 삶. 하지만 그녀는 현명하다. 그녀 자신이 킹코브라라는 것을 안다. 킹코브라로서의 삶과 인간의 삶. 서로 다른 삶이 자기와 함께 있으니 괴로운 것이다.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삶과 자신이 꿈꾸는 삶이 다르기에 인간은 괴롭게 사는 것이다. 삶에 안주하고 삶 그 자체에 만족한다면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 그렇지만 왜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나.


불멸도 마찬가지도. 오직 자신 혼자 남기 위해 동족을 죽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 오만함이야 인간이 버려야 할 덕목이 아닌가. 제 스스로 손에 피를 묻히는 삶이 불멸이라 할 수 있는가. 어쩌면 그래서 "필멸"이 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반드시 멸망함. 국어사전에는 이렇게 정의되어 있는 단어지. 반드시 멸망한다. 불멸을 꿈꾸면 반드시 멸망한다. 모두 불멸을 꿈꾸었기에 서로를 물어뜯으며 함께 멸망하는 것이다.


이런 게 싫다면 꿈꾸는 것은 어떤가. 그 남자처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모르는 한 남자가 한 여인을 만나면서 도망치듯 훌쩍 여행을 떠난다. 그 여인이 자살을 하지 않았다면 그는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까. 어쨌든 여행을 전전하면서 머문 곳에서 그는 다시 한 여인을 만난다. 서로의 삶에 상처를 주면서도 헤어지지 못했다. 그 여인이 전에 만난 여인처럼 스스로를 해하려고 하자 그는 그녀를 해치지 못하도록 원인을 제거한다. 나무의 힘줄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는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신은 그것을 알겠는가?



나는 당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하나 더 있지만 그것은 당신의 온전한 몫으로 남겨두겠다. 한 방울의 환상이 한 방울의 독이 될지는 당신에게 달렸다. 자, 당신은 이제 선택할 때다. 만약 당신에게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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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배의 노래
김채원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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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나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길어봤자 2~3년이 고작이었다. 까마득하게 어린 나이에는 몰랐다. 사람이 드나들고 떠나는 것은 어린 나에게 알아야 할 게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친구가 있다. 내 소꿉친구라고 할 수 있는, 어릴 때 만났던 친구. 그 친구와는 초등학교 1학년이 지나서 헤어졌다. 어렴풋이 나는 그 마지막이 기억난다. 단촐한 짐을 트럭에 탄 우리 가족이 친구네를 지나칠 때 친구가 손을 흔들었다. 잘 가라고 했는지, 아니면 편지할게, 라고 했는지 그것은 난 모른다. 다만 그 이후 나는 그 친구와 오래도록 편지를 주고받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한 곳에 정착을 하면서 그 편지는 끊겼다. 나에게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생겼다는 것은 그 정착 이후에나 가능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이 어째서 그렇게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던 것인지 어린 나는 몰랐다. 그저 아버지의 말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곳에 정착하고서는 오히려 그것이 더 어색했다. 언제나 어려웠던 것은 낯선 곳에서 있어야 하는 내가 아니라 한 곳에 머물러야 했던 나였다. 친구를 사귀는 것도 그렇게 힘겨웠다. 언제나 내가 먼저 말을 걸기보다 상대방이 먼저 말을 걸어온 것도 떠나야 함과 머물러야 함을 혼동했던 탓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서 친구를 사귄다면, 내가 떠날 때 그 친구는 다시 손을 흔들면서 나를 떠나보내겠지. 그런 두려움이 나를 타인과의 관계를 쌓게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한곳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둘씩 변했다. 말 한 마디 못 붙이던 내가, 먼저 말을 꺼내게 되고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이게 되었으며 친구와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했다. 누군가의 애정을 받아들이고 주는 것은 오로지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자라 나는 대학 일로 집을 떠나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한 곳에 지내던 내가 다시 낯선 곳으로 가야 했을 때 다시 두려움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지 나는 몰랐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서 4년간 대학생활을 해야 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었는지, 다시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상황에서 오는 두려움이었는지. 그러나 어릴 때와 다르게 친구들과 말을 트는 것이 수월했고 단짝이랄 부를 수 있던 동기도 생겼다. 나는 어릴 때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그 어린 시절의 나약한 모습이 튀어나왔다.


어느 것이 나였는지, 나는 모른다. 그것은 마치, <쪽배의 노래>에서 있던 단편, "등뒤의 세상"과도 같다. 아이를 잃은, 혹은 떠나 보낸 한 여인. 그녀는 가끔 등뒤에서 무언가 자신을 낚아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와 상황이 달랐지만 가끔 그런 것을 느낀다. 나는 이 현실에 그대로 있는데 무언가가 나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는 모른다. 다만 그것은 나와 현실을 분리시켰다. 내가 아닌 것처럼. 그녀도 그런 것을 느꼈던 것일까. 그래서 가끔 그렇게 자기 자신이 사라진다고 느꼈던 것일까.


이 책은 유난히 느리게 읽혔다. 한 줄 한 줄 읽는 것이 버거웠다. 어떤 문장이든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서산 너머에는"이란 단편에서는 두려움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두려움은 잘 녹여야 한다는 그 말이 어딘지 모르게 어떤 힘을 지닌 것 같았다. 그 문장만이 오로지 나를 구원해줄 것처럼 느껴져 그것을 바짝 잡았다. 나도 언제나 두려웠다. 누군가가 떠나가는 것이, 내가 누군가를 떠나가는 것이, 이 삶이, 이 모든 삶이 나에게는 무거워서 두려웠다.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가야만 보이는 세상에서, 나는 내려가기를 주저했다. "서산 너머에는"에서, 미국에 있던 사촌은 테러 이후 많은 것이 변했다. 세계를 급변하게 하는 테러는 비단 사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을까. 많은 사람이 많은 것을 잃었다. 폭발을 일으키며 무너지는 그 철옹성 같은 두 개의 빌딩이 무너지고 사람이 죽고, 불길이 치솟았던 테러 현장에서, 그들은 수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인간의 증오가 얼마나 큰 일을 일으키는지를 목도했다. 수많은 죽음이 그렇게 바스러질 때 느껴지는 두려움, 상실, 어쩌면 그보다 더 깊은 감정. 그리움이라 부르지 못하는 것들. 잃기 전에 찾아야 한다. 두려움을 물리쳐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더 가까이"는 한 여인을 두고 싸운 두 남자를 다룬 이야기다. 젊은 시절, 대학을 다닐 때 그토록 반짝이던 청춘들. 그것을 그리워하는 한 여인.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는 두 남자. 어딘지 희화적이면서도 슬픔을 드러낸 글이었다. 자유, 그것은 무엇일까. 자유로울 것만 같았던 그 젊은 날에도 종례가 느낀 불안이 있다. 불안은 어디에나 있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도, 좀 더 자란 시절에도 어른이 된 후에도, 늙어서도. 그 불안만이 우리 삶을 맴돌면서 숨결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나도 지독히 큰 불안을 느낀다. 어떻게 해야 불안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방'이 튀어나온다. 방, 그 방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한 사람이 소유하는 공간이면서도 소유하지 못하는 공간. 그 사람의 생활이 모두 녹아있는 어느 방. 한 개인이라고 명명해도 될 지극히 사적인 곳.


"물의 희롱-무와의 입맞춤"은 한 여인의 사랑을 이야기 한다. 편지식으로 시작하다가 갑자기 그 여인이 남긴 노트가 공개되면서 사적인 영역이 드러난다. 한 남자를 사랑하는 한 여인. 이 글에는 유난히 늙어가는 여인의 모습이 많이 비추어졌다. 그 여인들이 바라보는 세상, 테러, 사람들. 어려운 영역도 분명 존재했지만 대체로는 물 흐르듯 흘러갔다. 어느 글이든 읽히는 것은 수월했다. 다만 흘러갈 때마다 무언갈 붙잡고 싶어서 나는 오래 멈춰야만 했다. 한 번 숨을 쉴 때 신중하게 숨을 쉬듯이. 아마 그런 것으로 인해 더 많은 것을 고민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아무것도 고민하지 못했다. 그저 녹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책의 내용을, 바스락거리면서.


"소묘 두 점"은 한 남자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과거로 돌아간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누구의 과거였을까. 이렇듯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이야기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내가 있지도 않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살아있다고 느끼는 착각을 주는 글이었다.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는가"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 담긴 두려움을 담아낸 것 같았다. 어느 글에서나 불안과 두려움이 깔려 있다. 그리고 그 불안과 두려움을 모두 떠안듯, "쪽배의 노래"가 있었다. 집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흐름에도 흘러가지 않기 위해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쪽배가 된 것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집이, 모든 사람이 그럴 수 있기를 소망했다. 여인이 회상하는 어린 시절의 집, 어머니, 그리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오빠. 그 모든 것을 떠안으며 존재했던 집의 모습. 누군가에게 집이 그런 식으로 회상할 수 있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나에게는 그런 집이 없었다. 아버지의 일은 어딘가를 떠돌았지만 어느 곳에 정착하지도 못했다. 잠깐 머무는 집이 아버지 명의가 될 수 있을 리도 없었다. 다시 떠나야 한다는 불안은 설렘을 잠재웠다. 난 언제나 새로 친구를 사귀어야 하는 상황이 지독히도 무서웠다. 무섭고도 끔찍했다. "안녕"이라는 말 한 마디를 꺼내는 것이 왜 그렇게 무서웠나 싶을 정도다. "잘 부탁해"란 말도 나에겐 버거웠다. 언제나 그런 낯선 공간에서 "집"이란 것을 온전히 느끼질 못했다.


대학을 지나고, 아버지가 일을 은퇴하여 온전히 "우리 집"이란 것이 생겼을 때엔 그마저도 두려웠던 것 같다. "쪽배의 노래"에서처럼, 집이란 모든 것을 포근히 품어주는 존재여야 할 텐데 나에겐 그러질 않았다. 나만의 공간이어야 하는 '방'도 나 혼자 쓰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사적으로도 어느 누군가에게 보호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딘가 자꾸 내 안에 결핍이 생겨나 모든 것을 앗아가는 느낌.


그래서 이 책은 나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착각에 빠진 것일까. 이 책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내 자화상처럼 느껴졌다. 내 안에 그리도 많은 내가 있었나 싶으면서도 문장 하나하나에 숨겨진 위안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이 여인들은 내 자화상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자화상이기도 할 테니까. 어쩌면 이 글을 쓰신 김채원 작가님의 자화상일 수도. 아니면, "등뒤의 세상"에서 휘둘리고 있는 뭇 여인들의 자화상일지도.


수많은 얼굴들이 지나간다.

흘러간다.

그중 내 얼굴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이 불안을, 이 두려움을 녹일 수 있을까.


다시 불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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