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적인 앨리스씨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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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어디까지 왔나,(7p)

누군가 묻는다. 한 번 묻는 질문이 아니다. 글 중간중간에, 어디까지 왔는지, 어디에 왔는지 묻는다. 그것은 단순한 중얼거림이 아니다. 간절함, 혹은 애원.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으면 그렇다. 어딘가로 가야하는지 몰라서,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


이 글의 첫 모습은 어리둥절하게 볼 수밖에 없다.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7p)


앨리시어는 왜 여장을 하고 사거리에 서 있나. 그리고 뒤에 따라오는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마치 누군가를 찾아헤매는 여장 부랑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걸을 때 괴상하게 움직이는 골격. 발을 끌고 악취를 풍기는 여장 남자.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악취를 풍기면서 묵묵히 제 길을 가는 부랑자. 왜 앨리시어는 그런 모습이 되었는지. 그렇게 앨리시어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앨리시어는 고모리에서 왔다. '무덤'이라고 하는 고모리에서,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앨리시어는 그 집에서 기른 개를 기억한다. 개를 잡아먹은 그 집을 기억한다. 개의 시체를 떠올린다. 하지만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것들은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리지 않도록 꽁꽁 숨겨버렸는지도 모른다. 앨리시어의 가장 머나먼 기억. 동생과 함께 맞았던 기억. 어머니가 씨발 년이 되던 순간.


학대는, 마치 답습하는 것만 같다. 어머니도 아버지에게 맞고 자랐다. 벌거벗은 채 추운 바닥에 서 있다고 했다. 그 기억이 있어서, 어머니는 앨리시어와 그 동생을 때린다. 때리고 싶으니까 때린다고, 앨리시어는 말한다. 하지만 폭력은 거기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아버지의 외면이 다시 폭력으로 이어지고 이웃집의 외면이 폭력으로 이어지고 배 다른 남매인 형과 누나의 외면조차 폭력으로 이어진다. 앨리시어와 앨리시어의 동생은 고립되었다. 폭력에 고립되었다.


하루는, 앨리시어의 친구인 고미가 신고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앨리시어는 고미와 함께 구청으로 가서 가정폭력을 신고하려고 한다. 구청에서는 담당부서가 다르다면서 다른 곳으로 안내를 하고 그곳에서도 다시 다른 곳으로 안내해준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씨발 년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듣는다. 앨리시어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그런 게 아니다. 씨발 년은 씨발 년이라고 말해주는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폭력이 얼마나 무시하고 악독한지 말해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것은 앨리시어가 동생에게 해주는 이야기와 같다. 여우와 네꼬의 이야기. 그리고 소년 앨리스의 이야기. 어디로 가지 못한 채 그저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던 것들의 이야기. 앨리시어가 동생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모두 어디로 가지 못했다. 여우도, 네꼬도, 소년 앨리스도.


그렇게 아래로 가라앉았다. 내려가고, 내려간 곳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그것은 대체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을까. 나도 궁금하다. 앨리시어처럼. 대체 그 아래로 가면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앨리시어는 보았을까. 그 깊은 바닥까지 가서야 비로소 무엇이 있는지 보았을까. 앨리시어가 여장을 하고 거리를 떠도는 것은 그 밑바닥에 있다는 의미인 것일까.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 가장 야만적인 것은 누구였을까. 학대를 가한 어머니? 학대를 외면한 아버지와 이웃? 아무것도 조치해주지 않은 정부? 아니면, 어딘가로 도망가지 못하고 학대를 받은 앨리시어 형제? 그래서 그렇게 물었던 것인가.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하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어디까지 왔냐고 물을 수 있을까. 나는 '소년 앨리스'다. 소년 앨리스처럼 커다란 나무 그늘에 앉아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것을 나뭇가지의 끝에서만 보는, 그런 영혼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가만히 앉아 있는 소년 앨리스다. 앨리시어와 마찬가지다. 한쪽 다리를 절면서 악취를 풍기면서 심연 속으로 끝없이 가라앉고 만 존재에 불과하다.


그 고통이, 우리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낯선 존재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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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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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네스뵈의 소설을 읽었다. 드디어 읽었다.


해리 홀레 형사 시리즈라고 해서 국내에서는 <스노우 맨>이 처음 소개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박쥐>가 해리 홀레 시리즈의 처음이라고 했고 난 처음 이야기부터 읽고 싶었다. 국내 번역이 발표된 것과는 순서가 조금 다르지만, 첫 시작으로는 해리 홀레란 형사에 대해 아는 것이 좋겠다고 여겼다.


날개에서 작가가 해리란 인물에 대해 말한 게 인상 깊다.


"해리는 어떤 사람일까. 어떻게든 그를 낯설게 만들고 싶어 고민하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사제'와 '게이'로까지 설정해본 끝에 결코 주류에 속할 수 없는 문제투성이의 형사가 탄생했다. 그 통제 불가능한, 날것의 느낌이 나는 좋았다."


이 구절만 보면, 정말 해리 홀레가 재미있어 보였다. 하지만 첫 장을 넘겼을 때 내가 접한 해리는,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술 한 방울도 대지 않고 예의 바르고, 개념이 있는. 하지만 그가 알코올중독자였고, 그 알코올중독으로 동료 형사를 잃었다고 했을 때, 그 안에 깃든 상처가 보였다. 조금씩 드러나는 해리 홀레의 삶에서 그 삶 사이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서, 무언가 깊고 그윽한 숲을 보았던 것도 같았다. 앤드류가 해리에게 말한, 인간은 깊고 어두운 숲과 같아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박쥐>의 무대는 노르웨이가 아닌, 오스트레일리아다. 그리고 해리가 비행기에서 내려 처음 만난 사람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인 앤드류 켄싱턴이다. 그는 노련한 형사로, 직관도 좋고 통찰력도 좋아서 해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지혜와 선량함을 가진 사람이다. 해리는 앤드류에게 큰 호감을 가지고 그와 함께 행동한다. 그가 오스트레일리아로 온 이유는 노르웨이 여자가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강간을 당하고 절벽에서 던져져 훼손이 심했다. 그리고 노르웨이 경찰은 해리 홀레를 사건 수사 담당자로 보냈다. 금발 머리를 한 여자의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그들은 연쇄살인의 덜미를 찾아내고 용의자를 추려내기 시작한다. 그들은 잉게르가 죽기 전 사귄 남자인 에반스 화이트란 남자를 유력한 용의자로 추렸지만 그에게는 알리바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그녀를 죽였단 말인가. 해리는 잉게르가 일한 곳에서 비르기타라는 매력적인 붉은 머리를 가진 여자를 알게 되었고 호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알코올중독자였다는 이야기. 그녀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해리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비르기타는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고 해리는 그녀를 보면서 이야기를 한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제 이야기를 푸는 그의 모습은, 어딘지 신성하기까지 한다. 그것은 그가 나약함을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자신의 가장 깊숙한 곳을 드러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는 것이었다.


책은, 잉게르라는 노르웨이 여자가 죽은 사건을 추적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이것은 좀 더 깊은 곳까지 들어간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백인이 오기 전부터 살아왔던 애버리진의 이야기. 그들이 간직한 그들만의 신화. 앤드류는 해리에게 말했다. "박쥐는 죽음을 상징"한다고. 그리고 그 죽음은, 박쥐의 검은 날개가 퍼득이듯 해리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해리가 들은 신화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강한 전사 왈라가 사랑하는 여인인 무라를 커다란 뱀인 버버에게 잃은 이야기, 작고 용맹한 검은 뱀 이야기. 이 이야기들이 말하는 바는, 무엇일까. 버버는 포악한 뱀으로 무라를 죽인 존재로 나온다. 검은 뱀은 작고 용맹하여 이구아나의 우두머리를 물리쳤지만 동물들에게 업신여겨서 복수하는 존재로 나온다. 검은 뱀은 "내가 아직 독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없어. 다들 나, 오우유불루이를 구세주이자 수호자로 여기는 동안 내가 때를 봐서 한 놈씩 복수할 거야."(205p)라고 한다. 나는 이 검은 뱀이, 범인을 나타내는 단서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업신여겨서, 복수를 꿈꾸는 검은 뱀. 그리고 범인은 그들 중에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너무나, 놀라운 죽음이 나타나자,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술을 끊었던 해리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그것은 그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비르기타와 싸우고 엉망진창이 되고, 노르웨이로 돌아가지 못한 채 거리를 서성이고. 하지만 술을 마신 해리는 놀라운 속도로 사건을 해결해간다. 마치 술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의 통찰력이 해방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금발 머리를 좋아하는 남자에 주목했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범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해리는 비르기타에게 부탁을 했다. 그것은 결코 부탁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범인이 드러났다. 그는 실로 '검은 뱀'이었다. 그는 금발 여자를 고른 이유가, 자신의 종족을 백인에게 갖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가 여인을 드러내는 조건은, "아이가 없는 금발 여자"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는 독을 품은 것을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여인을 강간할 수 있었고 죽일 수 있었다. 아무도 그를 음흉한 검은 뱀으로 보지 않았다. 포악한 검은 뱀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호감이 가는 사람처럼 보였고 결코 범인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죽음이 해리를 사건을 해결할 수 있도록 인내했다. 해리는 그날, 죽었다. 정신적으로 죽었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죽음이 그를 해결로 이끌었다. 그것은 마치 해리의 앞날엔 그런 죽음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사랑했던 크리스틴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처럼. 해리가 다시 술을 마신 것은 그 죽음을 경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적인 죽음이겠지만 그 죽음으로 인해 그는, 죽은 자들의 원한을 밝혀냈다.


죽음이 해리에게 준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다시 죽음이 해리를 삶으로 데리고 왔다. 죽음 자체가 삶이 될 수도 있는 것일까.

조금 더 읽어야 한다. 해리 홀레 시리즈는 아직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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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바보개와 아가씨
Ciel 그림, 김휘빈 글 / 앨리스노블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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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L이라고 하는 장르는 처음 접했다. 틴즈러브라고 하던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19금 소설을 그렇게 부르는 듯했다.

최근, 리디북스에서 이런 19금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어쨌든 전자책이어도 책으로 나왔으니 나는 읽고 리뷰를 적는다. 그리고 꽤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꽤는 아니고, 정말 만족스러웠다.


<바보개와 아가씨>는 메르헨 판타지다. 아기자기하고 조금은 부드러운, 그런 느낌. 이 소설의 주인공인 루진과 디하는 남녀의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야말로 순수한 아이들이다. 그런 두 아이가 축제날, 서로 몸을 뒤엉키고 단순히 본능에 이끌려 위험한 '불장난'을 하는 관계로 발전한다. 하지만 디하는 곧 고민에 빠졌다. 이런 위험하고 야한 장난을 서로 아무 감정 없이, 그저 쾌감에 이끌려 해도 되는 것일까. 그리고 루진을 어찌 보는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루진의 존재는, 특별하다. 특별하다는 말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정령의 수호자인 루진은, 그 수호자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야성을 키웠다. 그래서 어찌 보면 멍청해 보일 수도 있지만(그래서 제목에 "바보개"가 들어간 것이겠지), 그렇지만 순진하고 낭만적인 그런 늑대정령의 수호자이다. 그는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가리지 않고 좋아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선 철석같이 말을 듣는다. 스무 살이 넘었는데, 애처럼 구는 루진은, 기존의 남자 캐릭터와는 확연히 다르다. 너무 순수하고 때론 멍청하고 또 때론 너무 답답해서.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 나서야 나는 얼마나 위험한 생각에 휩싸여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보통 로맨스라 하면 남자가 리드하고 여자가 이끌려간다는 구도가 많다. 드라마도 그렇고 책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바보개와 아가씨>에서는 아니다. 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디하가 루진을 리드한다. 루진은 얼핏 보면 이끌리듯 하지만, 어느 순간 디하와 나란히 선다. 디하가 둘의 관계에 고민할 때 루진은 완강하게 거부한 것이다. 루진은 디하에게, 언제 어디서든 흔히 볼 수 있는, 결코 필요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남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 관계가 좋다고 말한다. 그게 아니라면 싫다고. 그렇게 두 사람은 어느새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된다. 이 과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직접 보지 않고서는 모르리라. 늘 누가 이끌고 누군 따라가는 그런 관계가 아닌, 너와 내가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같다란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런 관점이 깨어졌다고 해야 하나. 남자와 여자는 각각 역할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관계는 성별로 좌우되는 게 아니었다. 남자라고 해서, 여자라고 해서 그럴 필요는 없다는 의미였다. 이 소설에서 남주와 여주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다. "디하"와 "루진"으로 불려야 하는 관계였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의미했다. 사랑은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게 아닌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는 것이었다. 한 세계와 한 세계가 만나 어우러지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루진은, 디하에게, 단순히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그런 상대가 아닌 루진 한 사람으로서 디하가 봐주길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것은, 그것이 아름답기 위해선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대전제가 필요했다. 너는 여자애니까 이래야 해, 너는 남자니까 이래야 해, 이런 생각이 얼마나 시시하고 재미가 없는지, 이 책을 읽고 확연히 알게 되었다.


작가의 세계관이 너무 자연스레 글에 녹아 있다. 캐릭터들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풋사랑을 그리고 있다. 그래, 디하와 루진은 사랑을 이제 시작한 초보자들이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것에 있어선 확고하다. 어쩌면 이건 사랑하는 사이만이 아닌, 단순한 친우 관계에서도 통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불확실하고 서툰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서툴지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마치 은은한 달빛처럼 반짝인다. 그렇기에 사람의 관계는 단순히 반짝이는 것을 좇는 것이 아닌, 어둠도 좇아야 온전히 서로를 향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이 화려하지 않고 은은하게 빛나는 것도,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있어서 어때야 하는지 확실히 말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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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2016-01-08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글이네요. 저도 한번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요^^

뒤팽 2016-02-03 10:25   좋아요 0 | URL
이북도 있으니 이북으로 읽으셔도 좋을 거 같아요^^ 글이 멋져서 리뷰도 좋게 쓸 수 있었습니다.
 
청춘의 문장들+ - <청춘의 문장들> 10년, 그 시간을 쓰고 말하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금정연 대담 / 마음산책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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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장들 때문에 그 책 전부가 좋아지는 일이 있다. 어떤 문장은 빨리 잊히지만 어떤 문장은 어떤 잔상으로 남아 기억될 때가 있다. 내게 <청춘의 문장들>이 그랬다.


어느 날, 문득 갑자기 그 잔상이 떠오른 게 아닌, 너무 아파서 아파서 견딜 수 없을 때 그 문장이 생각났다. 그때 내게 떠오른 것은 "자폐의 시간"이라는 단어와 단어의 만남이었다. 자폐의 시간을 홀로 견뎌야 한다는 잔상이 느껴졌지만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펼쳤다. 처음 읽을 때에는 느끼지 못한 것을 새로 읽을 때 느꼈다. 아주 사소한 문장이었던 것도 거듭 읽어보니 사소하지 않게 되었다. 문득문득, 이 책을 내가 지금보다 더 어린 날에 알았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것은 책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다. 내가 책을 지금보다 어린 날부터 읽어왔더라면 삶을 대하는 태도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을까. 그건 겪어보지 않고서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한 김연수 작가님의 말대로, 내가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도 어린 날의 나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겠다고 다짐한 지금에서야 겨우 나는 좋은 사람처럼 보이게 되었으니까.


<청춘의 문장들>을 처음 읽고서 쓴 리뷰를 다시 꺼내 읽었다. 그 책을 처음 읽을 무렵은 봄날이라고 생각했는데 리뷰를 적은 날을 보니 한겨울이었다. 1월 26일. 그날, 나는 지구 반대편에 사는 이름 모를 소년을 사랑하리라 다짐했다고 적어두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리뷰를 읽어도 그렇다. 그때 나는 무엇을 느꼈기에 지구 반대편에 사는 소년을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했을까. 아마도,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서 나는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 눈을 뜬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곧 죽을 것처럼 힘껏 사랑을 하자고 마음 먹으면 그 순간 사랑에 빠진다고 믿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것이 청춘이라고 생각한 것이겠지. 쉽게 사랑하고 쉽게 잊히고 쉽게 잊는, 그런 것이야말로 청춘의 특권 같은 것이라고. 하지만 지구 반대편의 소년을 사랑하는 건, 잊고 싶었다기보다 기억하고 싶어서라고 생각한다. 내가 모르는 어떤 세상에서, 웃고 있을지 울고 있을지 모르는 소년의 어떤 것을 기원하는 일. 그것이 나는 기억하는 일이라 믿었던 것도 같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 <청춘의 문장들+>을 읽고서 나는 새삼, 어떤 사소한 것 하나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봄날 흐드러지게 핀 꽃이 아닌, 지는 꽃을 보면 봄을 그리워하는 김연수 작가님처럼,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로 사람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춘의 문장들+>에서는 작가님의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청춘의 문장들>을 처음 썼을 때의 기억과 지금 나이에서의 기억에 대한 것도 많이 나온다. 작가님의 삶이라기보단 마치 <청춘의 문장들>이란 책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책에게도 청춘이 있다면, 맨 처음 나온 <청춘의 문장들>에게 <청춘의 문장들+>은 새로운 것일까. 그렇다면 <청춘의 문장들>은 청춘을 그리워하는 책인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 책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청춘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은 존재하는 것으로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나에겐 그랬다. 처음 읽을 때와 다시 읽을 때의 감정은 바뀌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은 것 같았다.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지는 꽃을 바라보는 것도 아주 쉬운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도, 김연수 작가님과 비슷하다. 꽃이 피는 순간도 물론 사랑하지만 꽃이 지는 순간도 사랑한다. 꽃이 지는 것으로 또 한 번 꽃을 본다고 말하신 작가님의 말씀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느낀 감정이 그와 비슷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문장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어떤 문장을 아무리 지나치려고 해도 지나칠 수 없다. <청춘의 문장들+>은 그런 문장이 유독 많았다. 작가님의 시간과 청춘, 삶과 어떤 그리움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그런가, 가끔은 그 문장을 통째로 기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봄을 그리워하듯, 나는 어떤 문장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둠을 지나야 비로소 빛을 볼 수 있다고 말한 <청춘의 문장들>이 있다면 꽃이 지는 시간을 바라봐야만 봄을 알 수 있다고 말한 <청춘의 문장들+>이 지금 내 안에 담겨 있다.


결국, 청춘이란 봄과 같은 계절일 것이다. 붙잡을 틈도 없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서 그리움만 남게 되는 것.

그래서 <청춘>이란 단어에 봄 춘자가 붙어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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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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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우주 알이 제 몸으로 들어와서야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어느 한 세상에 머물러 있는 채 있는 것은 가엾으니까. 결국 우주 알이 있었기에 남자는 제 패텬을 지울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패턴 그 자체로 남은 거 같았다. 벗어나려고 바동댔지만 제 엄마에게도 벗어나지 못하고 제 아빠에게도 벗어나지 못한 채 삶을 이어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만 무능했던 아빠, 잘난 얼굴로 딴 살림을 차리던 아빠, 아빠의 얼굴을 닮은 여자, 엄마에게 미움받았다고 생각하는 여자. 엄마와 아빠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 했지만 끝내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여자. 결국 그녀는 그녀가 생각하는 패턴으로 남았단 기분이 들었다.


아주머니는, 스스로 패턴을 만들었단 기분이 들었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자를 쫓아다니면서 남자의 삶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패턴이 된 것 같았다. 남자에게 사람을 죽인 죗값을 상기시키고 남자가 일을 시작하면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패턴. 그것 역시 또한 괴로운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제 동급생을 죽였다. 학교폭력을 당했다는 이유였다. 어느 날 그는 칼을 들고와 동급생을 찔렀다. 그는 감옥에 갔다.


여자는 남자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 두 사람은 모두가 하교한 운동장에 남아서 그가 쓴 소설 이야기를 한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오래오래 기억한다.


아주머니는 아들이 착하고 상냥하다고 믿는다. 아들이 죽음을 오래도록 기억하려고 한다. 남자가 편히 사는 것을 두고보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남자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라고 한다.


무엇이 삶이라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한 남자와 한 여자, 그리고 아들을 잃은 아주머니를 유심히 보았다. 남자에게 여자는 무엇이었고 여자에게 남자는 무엇이었으며 남자에게 아주머니는 무엇이었고 아주머니에게 남자는 무엇이었는가. 여자와 아주머니를 이어주는 것은 남자였다. 우주 알을 품은 남자. 어떤 패턴을 갖고 있었기에 우주 알이 그의 몸속에 들어갔는가.


남자는 글을 썼다. 글을 쓰면서 살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전과 기록이 그의 삶을 방해한다. 아주머니가 그가 무언가 하려고 하면 전화를 해서 그가 편히 지낼 수 없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아들처럼 대하는 모순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들은 마치 지금 처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학교폭력이라는 굴레 아래, 남자는 칼을 들어 동급생을 살해했다. 어쩌면 그것이 패턴을 벗어나기 위한 최초의 행동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곧 새로운 패턴에 잡히고 말았다. '살인자'라는 패턴. 그것이 그의 삶을 혹독하게 했다. 남자는 그래도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 패턴을 벗어나기 위한 몸짓은 사실 그렇게 격렬하지 않은지도 몰랐다. 그저 묵묵히, 제 시간을 살아가는 것. 여자는 남자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다. 여자는 남자의 패턴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남자의 패턴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결국 여자는 남자의 패턴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남자는 여자를 떠났다. 아주머니는 남자의 패턴을 지우기 위해 사는 것처럼 보였다. 제 아들을 죽인 남자가 행복해지는 것을 보지 못해서 새로운 패턴을 남자에게 덧씌우기 위해 발악하는 것처럼 보였다. 괴로움, 분노, 증오, 모든 감정이 패턴이 되었다.

결국 남자는 어떻게 되었는가.

무척 슬픈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남자의 그 덤덤하면서도 패턴을 벗어나기 위해 묵묵히 걸어왔던 행보가 무의미한 것으로 된 것 같았다. 삶이란 자기가 만든 패턴을 벗어나기 위한 발악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타인이 만든 패턴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인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나아가는 인생에서 행복이란 패턴은 극히 드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서로 그것을 찾으려고 나아가지만 그것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한정되는 게 아닐까 하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남자는 여자를 만남으로써 자신의 인생을 빛나게 했다. 여자야말로 남자가 찾던 패턴이었다고 생각했다. 그 한 조각의 패턴이 남자의 인생을 달라지게 했으리라.

어째서 사람은 자신이 만든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주머니는 그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들을 죽인 남자를 용서하고 떠나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그러질 않았다. 변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게 아니라 변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삶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삶을 가련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증오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변하지 않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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