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좁은 야채 칸에 꼭 붙어서 뭉그러져 가는 애기 감자 두 알처럼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가끔 발작적으로 그에게 알려주고 싶기도 했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비열하고 졸렬한 방법으로.
(...)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말없이. 고향 마을 지도처럼 익숙한 그 손을 꼭 잡고 잠들었다. 그때는 그런 것이 복수라고 생각했다. - P231

그녀가 아는 한 그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것을 까발려 햇빛 아래 드러내느니, 진회색 방수천으로 덮어 응달을 창고에 넣어두는 것이 낫다고 믿는 사람일 것이다. 창고의 문을 밖에서 잠그곤 열쇠를 꿀꺽 삼켜 버리는 것이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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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진실의 외피를 둘러쓴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
...타인을 겨냥한 악의는 어쩌면 입구를 단단히 동여맨 풍선 같았다.
(...)
입술을 열면 예기치 못한 말들이 딸려나올까봐서 혀를 동그랗게 오므렸다.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말들을 작은 어금니로 오독오독 깨물었다. - P163

예술가로 타고난 영혼이라면 마땅히 그럴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친구는 없어도 괜찮다고 아이는 결심하고 있었다. 그 마음은 방패이자 과녁, 빌헬름 텔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 한 알처럼 딱딱했다. - P164

다희는 언제나처럼 단정적이고 단호한 투로 말했다. 내용이 무엇이든, 그 아이의 말을 듣고 있는 순간에는 그 의견이 세상에서 가장 타당한 것처럼 느껴진다. 스스로가 하는 말이 옳다고 굳게 믿고 있는 자만이 내뿜는 특유의 자신감 때문일 것이다.  - P175

어느 보슬비 내리던 봄날, (...) 그때야말로 솔직히 털어놓기에 알맞은 순간이었노라고 이제야 그는 생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아득하게 멀어져 간다. 그것이 거짓말의 속성이었다. - P178

다희의 말을 듣고 있으면 이 세상이 아주 쉽고 단순한 질서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흰 스케치북 위에 4B연필로 반듯하게 내리그은 몇 개의 선들과, 그 사이사이에 듬성듬성 찍힌 소박한 작은 점들. 그리고 웬일인지 그 점들과 선들을 미치도록 수긍하고픈 심정이 된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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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열세개의 창이 달린 집

목 끝까지 블라우스 단추를 꽉 채우고 도수 높지 않은 날렵한 뿔테안경을 걸친 품이, 열정적인 커리어우먼의 분위기를 풍기고 싶어 안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P128

첫인상과 달리(...) 그는 반성했다.  공연한 선입견 때문에 오판했다. 오직 객관적 사실만을 믿어야 했다. 의지할 대상은 팩트뿐이었다. 주관적 감정을 개입시켜 한 인간을 판단하면 자칫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위험하다는 걸 잘 알면서도 좀처럼 고치지 못하는 습성이었다. - P130

언제든 제 발로 떠날 수 있는 곳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그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빼도 박도 못하고 한 곳에 꼼짝없이 붙들려 있다는 절망감만큼 끔찍한 건 또 없을 거였다. - P134

타인의 입을 통해 확인할 때, 현실의 고통은 더 가혹하게 일깨워지는 법이었다. - P137

여자는 얄따란 티슈를 한 장 뽑아 눈언저리를 지그시 눌렀다. 울음 속으로 도망가지 않겠다는 듯이 단호한 동작이었다. - P148

그늘진 골짜기에서 자라난 2월의 꽃나무처럼 우울한 인상이 도드라졌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본인의 의지는 아닐 것이다. 소년이랄 수도 없고, 아직 청년이라 부르기도 모호한 나이.
(...)
소년은 종종 위험하다. 참는 게 더 나은 한 순간을 참지 못한다.
(...)
묻는 말에만 대답했으며, 말수가 적고 느렸다. 가장 나쁜 유형의 참고인이었다.
(...)
엉뚱한 소리를 마구 늘어 놓는 축보다 한결 골치 아팠다.
(...)
명문대 의대생이라는 학벌, 허여멀끔한 외모, 돈 많은 아버지까지 두루 갖추었으니 또래 여자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꽤 많을 터였다. 세상은 공평한 곳이 아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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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말야

엄마가 말하고는 했지.
"네가 추우면 나도 추워"
맞아.
아니.
"네가 추우면 나는 더 추워."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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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게 갈린 얼음처럼 식탁 위에는 서걱거리는 침묵이 감돌았다]10


밍이 갑자기 중국어를 사용했다. 다른 사람 없이 둘만 있을 때,
그들은 항상 한국어로 대화했다. 스무 살 때부터 그래왔다. 그건 둘 사이에 내재된 레지스탕스의 윤리강령 같은 것이었다. 어떤 외부,어떤 타인으로부터도 분리된 둘만의 감옥, 하나의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맹목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암시. 그러나 밍의 중국어는 가차없는 현실을 상기시켰다.  - P48

뭘 먹다 왔는지 입가가 조금 번들거렸다. 오 분 정도 화장실에 다녀온 연인을 대하는 것처럼 그가 씩 웃었다. - P49

사랑하는 사람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에 몰두해 있는 모습은 아득한 공포로 다가왔다. 주인공의 죽음이 묘사된 맨 뒷장을 조바심치며 미리 들춰본 느낌. 옥영의 막연한 예감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껴가는 법이 없었다. - P52

병명을 듣자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그의 고통이 적어도 엄살은 아니었음이 증명된 셈이었다. 그는 실체 없는 불안에는 도저히 설득당할 수 없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 P61

유지는 오래도록 궁금했다. 왜 그는 사라지고 말 것을 선물했을까. 없어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순간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리지만, 짧고 서툰 첫번째 연애편지가 기억의 서랍 맨 아래칸에 영원히 남아 있는 것처럼.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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