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과학이 아니다 - 과학이라 불리는 비과학의 함정
마시모 피글리우치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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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과학은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으며 그 콧대 높은 종교조차도 과학이라는 이름을 빌어 자신을 합리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히 과학기술의 부진으로 인해 나라를 빼앗겼던 대한민국으로서는 더더욱 과학이라는 이름이 권위를 가지고 있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 지성의 승리를 의미한다. 과학의 발전을 통해 우리는 과거에는 꿈꾸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반대급부로 과학이라는 이름을 사칭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거에 과학이 많은 것을 설명하지 못했을 때는 몰라도 우주의 탄생을 엿보고 있는 지금에 와서도 점성술이나 관상, 창조론 같은 이야기에 사람들이 혹하는 것은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데서 비롯한 것이다. 게다가 이런 사이비 과학들은 인간의 직관에 비추어볼 때 꽤 그럴듯하게 들리기 때문에 정상적인 과학자들을 곤란케 하고 자신들의 이야기가 마치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양 위장할 수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과학이 무엇인지, 과학과 철학의 경계선은 무엇인지,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사이비 과학의 특징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말미에 사이비 과학을 경계하기 위하여 언제나 헛소리 탐지키를 켜놓으라고 주문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과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과학의 발전사를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다. 뉴턴의 인간성이 더러웠다는(?) 사실과 과학이 어떤 식으로 오류를 수정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더불어 내가 잘 몰랐던 과학에 뿌리를 둔 유사과학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특히 끈이론과 외계지적생명체 탐사가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꽤 충격적이었다.

난 그동안 이 두 분야를 과학의 범주에 든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 두 분야는 거의 과학에 속한다. 과학의 최고봉이라는 물리학과 천문학에 둥지를 틀고 있지만 이 두 분야를 엄밀한 의미에서 과학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이야기다.

일단 끈이론의 경우 수학적으로는 완벽하다고 한다. , 이론상 맹점은 없다는 이야기다. 아마 그 때문에 최종이론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올라있으며 많은 과학자들이 이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물리는 수학이 아니다. 수학이라는 언어를 활용하는 것이지 물리는 기본적으로 우리 실제 세상에 관한 학문이다. 수학적으로 완벽하다 할지라도 수학의 특성상 공리만 세워지면 어떤 논리든 가능하기 때문에 공식이 맞아 떨어진다고 해서 실제로 그 일이 그런 방식으로 일어났다 확신할 수는 없다.

문제는 끈이론을 검증한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진화생물학의 경우 과거의 일이지만 분자생물학의 도움을 받아 이론을 검증할 수 있고 또 많은 화석이 발굴되고 있으며 이론을 토대로 그에 맞는 추측도 꽤 들어맞고 있다. 따라서 이는 비록 연성과학이라 불릴지는 몰라도 분명한 과학이다. 그러나 끈이론의 경우 수학적 해석만 난무할 뿐 이게 확실하다는 검증방법이 없다. 물론 경쟁상대인 평행우주론도 마찬가지다. 거물급 물리학자들이 관찰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입증하려 시도하는 현실은 꽤나 아이러니컬하다. 끈이론, 평행우주론은 현재 우주론의 최첨단에 속해있지만 실은 철학적 탐구에 가까우며 언젠가 사이비과학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불안전한 과학이다. 때문에 저자는 거의 과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외계지적생명체 탐사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수많은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성과는 전무했다. 물론 이 넓은 우주에 지적생명체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마찬가지고 지적생명체가 있으리라는 보장 역시 없다. 이것은 확률문제인데 검증할 방법이 없다고 봐도 된다. 따라서 이 역시 거의 과학에 속한다. 이 분야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야속한 소리겠지만.

앞에서 과학의 발전은 인간 지성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과학이 결코 완벽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과학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는 이유과 사건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실제로 과학자 역시 사람이다 보니 명성이나 돈 때문에 사기를 펼치거나 우생학과 같은 과학의 탈을 쓴 이데올로기적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때문에 과학에 대한 공격 역시 존재한다. 현재 과학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다양하다. 일단 대표적으로 창조과학(창조과학의 경우 스스로 과학이라 칭하고 있기 때문에 과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공격하는 것은 아니다.)이 있으며, 그 외 많은 과학 비판가들이 존재한다.

창조과학의 경우 더 이상 언급할 가치가 없다. 성경의 많은 일들은 초자연적인 개입을 인정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과학은 초자연적인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다. 보통 초자연적인 개입을 부정하면 무신론자라고 여기지만 이러한 부정이 과학은 참이고 성경은 거짓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신을 믿는 과학자들도 많으며 학문 활동에서 초자연적인 개입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면 왜 교회는 건물을 지어달라고 기도를 드릴 것이지 세속적인 방법으로 헌금을 모아 건설회사에 일을 맡기는지 모를 일이다. 일상생활에서도 신의 역사를 믿고 따라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종교인들도 일상생활에서 신의 임재를 고백할지언정 행동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따르고 있다.

사실 창조과학의 목적은 성경이 사실이라고 입증하는데 있다. 그러나 노아의 방주를 어떻게 입증한단 말인가? 더불어 성경에는 공룡에 대한 언급도 없다. 혹자는 베히모스와 리바이어던이 그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해석이며 베히모스라는 이름 자체가 히브리어로 짐승의 복수형이다. , 이를 공룡으로 취급한 근거는 없으며 설령 공룡으로 취급한다 한들 성경에 묘사된 모습 그대로라면 어떻게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더불어 상당수의 공룡들은 초식이 아니라 육식이었다.

칼뱅과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신학자들은 창세기에 대해 현명한 말들을 했다. 그들은 창세기를 과거 사람들이 보이는 데로 적은 것으로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이방인들에게 오해를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창세기의 ‘6을 우리가 생각하는 6일로 여기면 곤란하다고 말하였다.

최근까지 대두되었던(그리고 지금도 고미숙 씨 같은 사람들에게 이어져 내려오는) 과학비판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속해있는 학자들이다. 최근에는 기세가 많이 누그러졌지만 70~80년대에는 굉장했던 모양이다. 이들은 절대적 진리가 없다고 주장하며 지식이란 사회적, 문화적 영향을 받기 때문에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자들이 탐구하는 이 자연세계가 과학적 지식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고도 말한다. , 과학 역시 하나의 담론일 뿐이라는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판단하는가? 포스트모더니즘이 옳다는 주장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이는 마치 상대주의의 문제를 되풀이해 보는 것 같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에 대한 어떤 기준점이나 근거를 마련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의 말만 따라 이들도 아프면 무속신앙에 의지하기 보다는 의사를 찾아갈 것이다. 과학자도 인간이니 만큼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사회, 문화적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이를 가지고 과학이 하나의 담론일 뿐이라는 것은 지나치다. 마치 최근에 고미숙 씨가 과학의 실패를 이야기하며 주역을 그 대안으로 제시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이는 독단적 회의주의일 뿐이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사실이 지동설에 아무런 영향을 기치지 못했다는 말이 납득이 가는가?

자연세계와 인간 인식의 한계를 조화, 중재시키기 위하여 헬렌 롱기로, 로널드 기어리 등이 나름의 해법을 내놓았다. 개인적으로 이 둘의 의견이 나름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구성주의를 극단적으로 교육에 적응하는 것이 꽤나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성주의는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주장처럼 생물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는 합리적 이론이지만 이를 지나치게 확장하여 유아론으로 흐르면 곤란하다.

과학은 근본적으로 완벽하지는 않다. 과학자들은 반발하겠지만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나 과학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라는 사상에 기대고 있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차가 고장 나면 아무리 신심이 두터운 신자라도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정비사를 찾는다. 신이 차를 고쳐줄 가능성이 없다고는 볼 수 없음에도 일반적으로 그렇게 우리는 행동한다.

그러나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과학적으로 실증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가 우주의 탄생을 엿보고 있다 하더라도 아직도 우리는 우주가 얼마나 넓고 그 바깥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귀납적 방법으로 아무리 데이터를 쌓아도 귀납의 특성상 우리는 자연주의를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 때부터 이미 과학은 자연주의를 기반으로 발전하였다. 신을 등장시키면 모든 것을 신이 한 것이라고 설명하면 그만이기에 과학은 발전할 수가 없다. 최근에 대두되는 지적설계론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지금 발견되는 현상이 아닌 다른 현상도 지적설계론은 얼마든지 설명할 수 있다. 무엇이든 설명할 수 있기에 발전할 필요가 없으며 오로지 빈틈을 찾는데 열중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주의는 실증할 수 없다. 이는 철학, 형이상학의 영역이다. 때문에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자연주의를 방법론적 자연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을 이러한 기본 토대를 가지고 탐구하고 발견해나간다. 그리고 그 방법은 옳았다고 하겠다.

과학은 방법론적 자연주의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 외의 원인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과학이라고 불리기 위해서는 실증이 가능해야 한다. 다양한 증거가 있어야 하고 이론이 있어야 하며 이를 검증할 수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론이나 점성술, 관상은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점성술과 관상과 같은 경우 이미 반례가 많이 있으며 이 책에서도 그냥 찍는 것과 별 차이 없었다는 사실을 전해준다. 창조론의 경우 신을 등장시키는데 신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범주를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에 검증이 불가능하다. 만약 신의 의도를 알 수 있고 이를 파악할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그 어떤 종교인들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신성모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의 범주를 정확히 설정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일단 일반적으로 과학은 경성과학, 연성과학으로 구분되는데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 역시 명확한 기준이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과학은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고 자신의 오류를 검증하여 고쳐나가는 발전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칼 포퍼는 반증가능성을 제시하고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 이론을 제시했다. 둘 다 과학의 속성을 보여주지만 한계를 지니고 있다. 실상 과학과 비과학의 구별은 다양한 요소에 의존하고 있다. 개별적으로 어떤 것이 과학인지 아닌지 확실하게 구분해줄 리트머스 종이는 없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지름길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과학의 많은 특성을 알고 있으며 이를 통해 무엇이 과학인지 아닌지 논의할 수 있다. 만약 과거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으면서 검증할 수 없는 말을 되풀이 한다면 이는 사이비 과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너무 쉽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권위자나 저명한 인사가 한 말이라도 필터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지어 자신의 생각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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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인문학 - 교양 있는 아이로 키우는 2500년 전통의 고전공부법
리 보틴스 지음, 김영선 옮김 / 유유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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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 논리학, 수사학이라는 모든 공부의 기본을 아이에게 가르칠 것을 요구하는 독특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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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살자 - PM 4:00 여기는 이타카
송호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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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살아온 자신의 삶을 한 번 돌아보자. 그동안 내가 쓰고 버린 물건이 어느 정도 되는가? 아마도 꽤 많을 것이라 예상된다. 이건 글을 읽는 본인이 낭비벽이 있어서가 아니다. 사회 전반적인 구조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고 이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구조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것은 좀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소비를 권장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 자본주의 문명이 ‘소비’를 근본으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막스 베버가 ‘생산’과 ‘자본의 축척’을 중시했던 것과 상반되는 이 주장은 현재 시점에서 보면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된다.


공급이 있다고 해서 꼭 수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인기가 없는 물건이 악성재고로 창고료만 축내는 상황은 꽤 흔하지 않은가? 하지만 수요가 생기면 공급은 어떻게든 이루어진다. 미국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한지 꽤 되었지만 마약사범이 끊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반면 네덜란드의 경우 어떻게 보면 위험한 선택을 했는데 마약중독자들에게 마약을 허가하였다. 물론 정부의 개입 하에 이루어졌고 마약중독자들을 치료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네덜란드가 더 현명한 선택을 했음이 입증되었다. 결국 과거 생활필수품이 모자랐던 초기 자본주의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소비’가 생산을 이끈다는 이야기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CLP0000160c4bf0.bmp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00pixel, 세로 231pixel문제는 이러한 ‘소비’위주의 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크게 침해한다는데 있다. 대량 소비가 가능해지면 기업은 당연히 이득을 위해 그에 맞춰 생산하려고 한다. 대량생산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기계와 분업화다. 기계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분업화는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을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처럼 만들어버린다. 또한 기업가들이 가장 줄이고 싶어하고 줄이기 편한 비용이 바로 인건비다.


정리하자면 분명 소비자는 상대적으로 적은 돈을 가지고 원하는 만큼 소비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진하게 드리우듯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위해 공장의 조립라인에서 일하는 다수 노동자는,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지적과 찰리 채플린의 묘사처럼, 하나의 공장부품이 되어 과거 노예와 별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경제학에서 긍정적으로 바는 싸고 좋은 물건과 서비스를 편하게 얻고자 하는 합리적인 경제 행위가 역설적으로 노동자의 삶과 행복에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각국 정부의 헌법에서 보장되었으나 실질적으로 그 빛은 바랜지 오래되었다. 반면 소비와 물질로 상징되는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은 그 기세를 더해가고 있다. 이미 하나의 우상이 된지 오래되었다. 사람들이 말로는 도덕을 외치지만 돈 앞에 자신을 합리화시키는 것은 흔한 일이다. 본말이 전도된 셈이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 대안들이 논의되고 있다. 제도적, 사회구조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게 이런 논의의 핵심이다.


그러나 제도가 바뀐다고 모든 것이 해결될지 의문이다. 신자유주의1)라 불리는 경쟁시스템이 한국에 이렇게 잘 정착된 것이 제도만의 문제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자본가들이 의도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여하튼 그 의도에 그렇게 쉽게 쓸려간 것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가 그 시스템과 잘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태도가 먼저 바뀌어야 한다. 부동산 폭증만 바라보는 사람들을 데리고 부동산 정책을 아무리 손질한들 뭔 소용인가?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자 시장이 얼어붙고 전세값만 오른 사실을 기억하자. 애초에 문제를 바라보는 철학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저자 송호창[현 무소속 국회의원]2)3) 씨가 직접 다녀오고 책으로 출간까지 한 이타카 이야기는 미국이라는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운 곳에서도 어떤 사람들이 모여 사느냐에 따라 삶이 질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음을 증언한다.


그가 갑작스럽게 오게 된 이 이타카는 현대 소비 사회와 정 반대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몇 십년된 자동차를 몰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정말 충격에 가깝다. 한국에 이런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돈만 된다면 보통 10년이 지나고 나면 차를 바꾸는 게 일반적이다.


이타카 사회는 그 안에 ‘인간의 존엄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졌기 때문이다. 미국이 공공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이타카 사람들의 경우 그 의무를 자연에까지 발휘한다는 점4)에서 특이하다. 게다가 노동자들을 위해 지역 마트를 이용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영역을 확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공동체는 그저 사업적인 비인간적 관계에서 이루어진 사상누각일 뿐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어떠한가? 이타카를 보면 과거 한국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1년에 한 사람이 최소한 50권을 읽는다는 이타카. 오바마 대통령의 말처럼 비극은 더 높은 시민의식을 갖출 때 극복할 수 있다. 우리의 민주시민의식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나는 교사로서 아이들의 시민의식을 길러주는데 일조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더 많은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노르웨이의 스톨텐베르크 총리의 말을 되새겨 보자. 그는 반다문화주의자이자 기독교 근본주의자에 의해 저질러진 테러로 인한 참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 이상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고 더 강한 민주주의와 더 큰 관용의 정신으로 보복하겠다”


또한 담화문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우리는 여전히 충격받은 상태지만 우리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테러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간애입니다. 원주민성이 절대 아닙니다.”


무릇 품격이란 이런 고통과 시련에서 보여 지는 것이다.


1) 우리나라에 도입된 신자유주의는 그 주창자인 하이예크의 생각에서 이미 많이 벗어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쟁찬양, 기업의지 찬양이라고 봐야 옳을 것이다.

2) 개인적으로 싫어한다. 민변 소속으로서 그가 한 일들은 훌륭한 것이지만 한 정당의 공천을 받아 무혈입성으로 국회의원이 되고서 8개월 만에 자기를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 당을 성토하고 탈당한 것은 아주 우스운 일이다. 그런 당 공천을 왜 받았데? 8개월 전 민주당은 뭐가 달랐나? 그는 탈당하기 전까지 자신이 탈당한 일은 없을 것이라 주장했으며 정작 그 주장 후 몇일 만에 탈당하고 나서 자신에게 비난이 빗발치자 안철수와 문재인은 서로 한 식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간 것 뿐 이라는 괴상한 변명을 했다. 안철수는 기존 정당에 부정적인 사람이다. 개인적으로야 문재인과 안철수가 친하게 지낼 수 있을지 몰라도 민주당 소속으로서 문재인과 안철수의 관계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일련의 어이없는 사태에 대해 문재인은 마음이 아프다고 트윗으로 남긴 바 있다. 정상적인 반응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보자. 민주당은 사실 ‘송호창’이 아니더라도 당시 상황에서 국회의원을 당선시킬 수 있었다. 반면 ‘송호창’은 민주당 간판이 없었다면 국회의원이 될 수 없었다. 이걸 개인 의지문제로 격하시키는 것은 문제가 된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금도 열린우리당 분당 때문에 까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자.

3) 다음은 문화일보 칼럼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송 의원은 이후 민주당을 버린 데 대한 가혹한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박선숙 공동선거대책본부장 등 다른 민주당 출신 인사와 달리 혹독한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현역의원이고 지역구에서 선거를 오래 준비한 사람들을 경쟁 없이 제치고 전략공천을 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안 후보 캠프행 가능성이 제기됐을 때 송 의원 측이 보여준 태도는 그의 잘못된 처신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새정치를 하려는 정치인의 태도는 아니었다.”

4) 동물에게 He, She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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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직도 부자를 꿈꾸는가 - 우리 시대 부모들을 위한 교양 강좌
심상정 엮음 / 양철북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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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부자되세요.”라는 광고 문구가 유행한 적이 있다. 이 광고가 유행하던 당시는 주식, 펀드, 부동산 등의 자산이 급등하던 시기였다. 아마 그래서 이런 말들이 유행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부자가 된 사람들도 있었고.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양극화는 심해지고 사람들의 관계는 삭막해졌다. 부자를 꿈꾸며 빚까지 내가며 부동산에 투자 라고 쓰고 투기라 읽는다 했던 사람들은 지금 빚더미에 올라앉아 허덕이며 정부의 도움만 바라보고 있다. 불과 몇 년이 지났을 뿐인데 모든 것이 너무나도 많이 바뀌었다.

 

내 생각에 부자가 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칼빈의 말처럼 열심히 일한 결과인 ’, 그러니까 청부는 도리어 칭찬받을 일이다. 문제는 부자를 인생의 목표로 삼고 그 외 것들을 모두 부자라는 꿈에 쏟아 붓고 도외시한다는데 있다. 쉽게 말하자면 부자만 될 수 있다면 그 어떠한 일도 한다는 풍습이 문제란 이야기다.

 

부자가 되면 선택의 여부가 더 많아지기는 하지만 꼭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황금만능주의에 빠져든 사람들에게 부는 행복의 척도이자 숭배의 대상이다. 재벌들을 욕하면서도 재벌들의 부를 동경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된다. 여기에 남과 비교하기 좋아하는 국민성이 더해져 상황은 계속 악화일로에 있다.

 

이제는 사람들도 눈치를 챈 것일까? 멈추지 않고 이대로 계속 나간다면 파국이라는 것을 상당수의 사람들도 어렴풋이나마 인정은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대안은 아직 부실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공산주의가 망한 후 자본주의가 그 자리를 빠르게 차지한 것과 달리 이미 많은 문제점을 보인 신자유주의는 무너지기는커녕 그 기세를 더하고 있다. 대다수의 국가들이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보정하거나 임시방편으로 대책을 내놓을 뿐 정책의 전면적인 전환을 꾀하지 못하고 있다. 딱히 신자유주의를 대신할 거대담론이 존재하지 않는 탓이다.

 

이런 현실에서 <그대 아직도 부자를 꿈꾸는가-우리시대 부모들을 위한 교양강좌>와 같은 책은 메마른 사막에 단비처럼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 메마른 한국 사회에 단비와 같은 존재다. 이 책은 시민교양 프로그램에서 강연된 9개의 강좌를 심상정(현 진보정의당 대표) 씨가 엮은 것이다. 이런 강좌가 있었다는 사실은 따져보면 그만큼 사람들이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고 이를 위한 대안을 찾고 있는지를 이야기해준다.

 

이 책은 황금만능주의에 경도된 물신이란 단어로 대변되는 현대 물질문명 사회를 인간이라는 우리가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존재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공동체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각자 분야에 따라 내용이 다르긴 하지만 근본은 위와 같다. 물질에만 집착하는 삶에서 탈피하자는 이야기다.

 

물질에만 집착하다보니 독재를 옹호하는 사람도 생겨나고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타인이 누려야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사람도 생겨난다. 이 모든 것이 황금에 눈이 어두워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이전 세대와 화려한 문명에 빠져 더 소중한 것을 무시한 지금 세대 모두의 잘못이다. 지금이라도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교육이 진행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이다. 공부하지 않는 시민은 정부의 신민으로 전락한다. 이런 강좌가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긍정적이다. 시민들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많고 많은 시민들이 공부를 하는 그런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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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 학교에 비고츠키를 연구하시는 박동섭 교수님께서 오셔서 강의를 해주셨다. 비고츠키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 알 뿐 잘 모르기 때문에 새로운 이론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가 들었다. 반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의 재탕일지도 모른다는 작은 우려도 들었다.

 

학교가 인사업무와 성과급 관련 회의로 분주한 까닭에 강의의 시작은 약간 늦어졌다. 특히 학교 컴퓨터가 자동으로 리부트 되는 말썽을 부리는 바람에 노트북으로 교체하느라 시간이 걸렸다.

 

약간 늦어졌지만 강의는 정상적으로 시작되었다. 교수님은 초반부라 그런지 바로 비고츠키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보다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상식이라 불리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셨다. 생각해보면 이것도 본론인 비고츠키의 사상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강의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박동섭 교수님게서 말씀하신 비고츠키는 데카르트로 대변되는 서구 본질주의의 영향을 받은 주류 심리학에 의문을 품고 반기를 든 학자다. 그는 마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통해 존재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확실히 사회적, 문화적 관습은 우리의 눈에 색안경을 끼우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한다. 우리가 백인과 흑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심리적 이미지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백인 문화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는 나에게 있어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본질주의에 의문을 제기한 주장은 이미 니체나 비트겐슈타인 등을 통해 접한 바 있고 이는 현대 서구철학의 주류 흐름이기도 하다. 비록 깊게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철학과 관련된 책은 제법 읽었던 터라 그다지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양한 사례와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박동섭 교수의 강의는 들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특히 강의의 백미는 닥터 진 영화에서 비고츠키의 사상을 찾는 것이었다. 이 영화의 에피소드 말미에서 주인공이 남긴 메시지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신이 잘난 줄 알았지만 에도시대에 떨어져보니 내가 잘난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연구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고백을 남긴다. 그 고백을 들으면서 박동섭 교수가 발견하고 알리고 싶어하는 비고츠키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우리가 말하는 본질이란 과거의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노력에서 탄생한 것이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본질이란 것은 어쩌면 거대한 대양 위에 떠도는 빙산 한 조각일 뿐이다.

 

박동섭 교수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고 세상을 분리된 것으로 보는 현대 사회에 귀중한 이야기다. 그런데 한편으로 불편함도 느껴졌다. 문화와 관계에 좌지우지 되는 것이 인간이라면 는 무엇일까? 양승현이라는 이름을 지닌 나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나에게 있어 이것은 정체성과 자유의지의 문제다.

 

특별한 근거는 없지만 나는 인간이 환경과 문화의 영향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인생이 너무 덧없지 않은가?

 

그리고 오랜 역사 속에서도 유지되는 가치는 존재한다. 오늘날 인권이라 불리는 이것은 문화의 가치와 수준을 논할 수 있는 근거이자 본질이다.

 

우리는 모든 문화를 인정할 수 없다. 식인 풍습을 아무리 문화상대주의 관점을 고수하더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바람직한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도 가장 근본적인 본질은 존재해야 한다. 본질이 없다면 바람직한 문화를 어떻게 판단할 것이며 인류가 어떻게 진보할 수 있단 말인가?

 

비고츠키에 대해 교육학으로만 접한 사람들은 박동섭 교수의 강의에 상당한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교육학이라는 좁은 영역에서 피상적으로 비고츠키를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비고츠키에 대해 많은 의문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요즘 혁신학교 패러다임에서 비고츠키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기 때문이다. 박동섭 교수와 같은 열정적이면서 탐구적인 학자들이비고츠키의 진면목을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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