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도시 동물들의 권리 투쟁기 사계절 아동교양 문고 9
김향금 지음, 이갑규 그림 / 사계절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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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문명이 발전하고 그 힘이 인간을 제외한 자연의 힘을 넘어서기 시작하면서 자연의 재생능력을 넘어선 파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동물 멸종이다.

동물이 멸종하는 것이야 오랜 지구의 역사를 비추어봤을 뭐 그리 새삼스럽겠냐마는 문제는 이 진행속도가 가면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러다가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이 사라지지는 않을까하는 우려가 우려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현실로 나타나 인간을 위협하지 않을까?

특히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르게 지능이 있어서 그런지 자기와 다르다고 생각되는 존재를 사유화하여 재산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그나마 21세기 들어와서 인간끼리의 차별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동물은 인간의 배려 바깥에 있다.

달빛도시 동물들의 권리 투쟁기에 나오는 나챙겨 시장은 오늘날 인간이 동물에게 보이는 태도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 캐릭터다. 그에게 있어 동물은 그저 재산에 불과하다. 동물이 받는 고통보다는 농부가 입을 손해가 더 소중하며 동물의 권리는 그에게 잠꼬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과연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그의 동물에 대해 무심한 태도는 바로 우리의 거울 아닌가?

이야기에서 나오지만 사람제일주의를 내세운 나챙겨 시장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민주주의가 선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정말 민주주의가 선인가? 히틀러 같은 독재자를 100%에 가까운 지지로 총통으로 만든 사례야 선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제대로 작동되는 민주주의 사회도 과연 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건 인간에게나 아닐까? 오늘날 화장품이나 다른 약품 실험에 동물 사용을 금지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우고 출마한다면, 과연 그 사람이 당선될 확률은 몇%나 될까?

.. 그렇다고 내가 인간과 동물이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애완동물이란 호칭이 차별이라며 반려동물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냉정하게 바라보면 결국 그 동물들의 권리는 그 소유주에게 달려있다. 소유하면서 동등함을 추구할 수 있나?

하지만 이미 인간이 야생동물의 시달림에 벗어났고 전 세계 인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재화를 구축한 상태에서 이제 동물들의 권리에도 눈을 돌릴 차례가 됐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미 동물권에 대해 고민하는 목소리가 늘어나고 있고 좀 더 적극적으로 동물권을 법제화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 이 추세는 점점 더 거세질 것이다.

동물권은 어디까지 보장될 수 있을까? 책에서는 동물들의 자연스러운 습성을 존중해주는 선까지 나아갔지만 현실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가능할까? 가능하려면 우리 인간은 그동안의 습성을 바꿔야만 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온 습성을 고쳐야 동물들의 습성을 존중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인류는 이제 도약의 기로에 서있는 것이다.

하나 더 충격적인 것은 이 도시의 사람들이 동물들의 고통에 대해 잘 몰랐고 또 소시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잘 몰랐다는 것이다. 설마 이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오늘날 분업화된 산업시스템에서 자기가 무슨 일 하는지도 잘 파악 못하는 상황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분업화는 인간의 양심을 마비시킨다. 자신이 하는 일만 가지고는 양심에 거리낌이 남는 사건이 완성되지 않기에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동물과 더불어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진정으로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식물과 달리 동물, 특히 포유류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고통을 으로 여긴다면 동물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게 맞겠는가? 인간은 그동안 같은 인간끼리 만들어낸 평등을 이제는 동물과 나눠야할 때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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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SNS다. 예전에는 트위터에 푹 빠져 지냈으나 지금은 페이스북을 더 즐겨한다.
SNS의 최대 장점은 새로운 관계 맺기다. 페이스북의 경우 내 말, 일상에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러주면서 긍정적인 관계가 구축된다. 또한 자존감을 세워주기도 한다. 물론 이런 관계맺기가 오로지 온라인에서만 이루어지는 폐해가 있긴 하지만 내 생각에 부정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트위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트위터는 정치관련 글이 대다수인데 내 의견이 리트윗 될 때마다 느껴지는 희열이 있다. 헛된 욕망일 수도 있지만 무릇 인간이란 인정받기 원하는 존재 아닌가?
이러한 SNS의 특성을 교실에도 끌고 올 수 있지 않을까? 관계를 맺는 데에는 개인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SNS마다 특성이 다르듯 어떻게 관계를 구축하는가 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역할을 정하며 구조를 구축하는지에 따라 만남과 관계의 모습은 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관계를 마냥 잘 맺게 하는데 집중했다면 지금부터는 관계의 질과 구조를 어떻게 생성해낼 것인지를 고민할 시점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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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꿈들
박기범 지음, 김종숙 그림 / 낮은산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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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말하는 것들이 있다. 매춘, 도둑, 사기 등등. 그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이며 가장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전쟁'이다.

전쟁은 왜 끔찍한가? 인간은 선악을 나누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평화를 전제로 해야 발휘 가능하다. 전쟁이 벌어진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이 아니라 아군인가 적군이가 그 뿐이다. , 누구 편이냐가 문제이지 그것이 옳으냐 그르냐는 문제가 안되는 것이다. 이를 문제삼기에는 '생명'이라는 가장 고귀한 가치가 실시간으로 위협 받는다.

그렇기에 전쟁은 끔찍하다. 그 시간에는 정의가 없으며, 그 장소에는 생명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기가 쉽지 않다.

은하영웅전설에서 양 웬리가 그랬던가? 사람들은 생명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있다면서 전쟁을 벌이고 나중에 생명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없다며 전쟁을 멈춘다고. 그 와중에 이득을 보는 것은 소위 지배자들이라 불리는 최상류층이다.

물론 전쟁이라는 것이 오로지 물질적 욕구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시작은 그럴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처음에는 욕심 때문에 전쟁을 일으킨 자들조차 자신이 겉치장으로 내세운 명분을 신념으로 착각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그 꿈들'이란 책은 미군에 의해 일어난 이라크 전쟁과 그 이후 이야기가 담겨있다. 먼 곳에서 숫자로만 접했던 그 곳의 참혹한 현장과 삶이란 그 어찌 말로 설명이 가능할까.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후 이라크에서 철군을 하려 하지만 치안 문제 때문에 철군을 쉽게 못한다니 이들의 삶이 언제 나아질지 의문이다.

나는 조지 부시가 확신범이라 생각한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모르겠지만 조지 부시는 정말 본인이 성전을 펼친다고 믿었다 본다. 그렇기에 더욱더 위험한 사람이고 그 결과는 앞뒤 잴 것 없는 이라크 전쟁으로 나타났다. 그 몰아낸다는 독재자와 그 집안이 나름의 커넥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부시 만이 아니다. 그 당시 전쟁을 지지하는 미국인들의 수는 과반수를 한참 넘었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석유라는 이익을 쫓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정말 독재에 대한 증오로 자신을 정의라 생각한 미국인들도 꽤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전쟁의 원인을 볼 때 이 둘을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북한과 대치한지 거의 반백년이 넘어가는 상황에서 이미 실제적 이익은 사람들의 뇌리에 사라진지 오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북한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이 있으며 그렇기에 그들은 나쁜 국가라는 수사법이다. '국가'라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공동체가 이데올로기로서 지배하고 있기에 아무런 이익없이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 정권이야 어떤 이익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다수 민중들에게 현 대치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상당수 민중들은 북한에 대한 단호한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

명분이나 이데올로기는 중요하다. 미국, 중국, 유럽 등 강대국들이 아프리카에 대놓고 군을 파견해서 식민지로 지배하지 못하고 자본으로 공략하는 것은 대의명분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명분에 취해버리면 아무런 이익없이 전쟁을 하게 된다. 물욕에 의한 전쟁은 거래라도 가능하지 신념에 의한 전쟁은 많은 사람이 죽고 나서야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며 멈추게 된다.

전쟁이 일단 터지면 그 어떤 인간의 존엄한 가치도 밑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적과 아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차별하게 된다. 전경에서 복무하다 제대한 동생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시위 단체에 대한 적개심이 상당했다. 그런 것이다. 전쟁이란.

전쟁은 안 벌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기위해 필요한 것은 용기와 지혜다. 평화를 위해 용기있게 나서는 것과 슬기롭게 문제를 헤져나가는 것이 둘다 중요하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이 반드시 필요한지 생각해야 한다. 인류 역사상 반드시 필요한 전쟁이란 자유와 혁명을 위한 몇몇 외에는 없었다. 그것은 남북, 이라크 역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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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5-08-27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슬픈 만평이지만
바로 사회를 똑똑히 보여주는 만평이네요.

전쟁터에 나간 군인도
군인을 둔 부모도
우리 모두도
이를 하루 빨리 알아챌 수 있기를 빕니다..
 

사람은 언제나 불안에 시달리는 것 같다. 특히 현대사회처럼 복잡한 사회에서 내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불안하다.

물론 둔감한 사람들은 왜 이런 고민을 하냐고 하겠지만 나는 나로 인해 누군가 피해를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다. 어떻게 보면 중증의 강박관념이라 하겠다.

내가 내 행동의 결과를 모두 알게 된다면 어떨까? 그러니까 전지해지만 어떨까? 그럼 불안해하지 않을까? 글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불안해할지도 모른다. 내 불안은 이성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차를 운전하고 나서부터 언제나 사고가 나지 않을까 불안하다. 물론 평소에는 그렇지 않지만 간혹 부딪히지 않았나 걱정스러울 때가 있다.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별 일 없었을 것이라 확신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감을 느낀다.

차라리 옛날 사람들은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도 않겠다. 그때는 그 시대만의 불안이 있었을 것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오롯히 자유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법정스님처럼 무소유를 실천해얄까? 하지만 난 그 스님처럼 살기는 삶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누릴 것은 좀 누리며 살고 싶은데.

지지대가 필요하다. 그 어떤 불안해도 위로해주고 돌아갈 곳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 또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얽매이고 싶진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에게 얽매이고 싶은게 내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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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5-08-26 0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 느긋하게 하루를 열고
차근차근 삶을 지으면서
언제나 노래하는 마음이 된다면
불안이라고 하는 아이는
어느덧 살그마니 사그라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비밀 기지로 놀러 와 두고두고 보고 싶은 그림책 47
구세 사나에 글.그림, 이기웅 옮김 / 길벗어린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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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에 이 책의 제목을 봤을 때는 아이들의 놀이와 모험을 담은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겉표지에 있는 그림도 그랬고 뒷표지의 그림도 그랬다. 그러나 이 책의 진가는 놀이와 모험이라는 아이들의 흔한 이야기에서 생명에 대한 존엄성을 포착한 데 있다.

 

지금이야 천변에서 뛰어노는 문화가 거의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강가에서 노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거기서 가재도 잡고 물놀이도 하고 그랬다고 한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생태 체험장이었던 셈이다. 지금 갑갑한 공간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일본도 지금도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우리나라처럼 강가에서 즐겁게 놀았던 모양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요시다는 오하시라는 형을 만나 오하시가 잡은 거북이와 같이 지낼 비밀기지를 만들고 그곳에서 거북이를 키운다. 이름도 지어주고 빵도 주고 놀이터도 만들어주며 지낸다. 아무 나이가 좀 있는 분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거북이가 사라져버린다. 어디로 간 걸까? 둘은 거북이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포기하려는 찰나 거북이가 비밀기지 근처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자세히 보니 옆에 다른 거북이도 있었다. 아마 친구를 만난 것이리라.

 

이 때 대다수의 아이들은 어떤 식으로 행동할까? 다시 잡으려고 할까? 그냥 포기할까? 아마 대다수 아이들이 다시 잡으려고 할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도 오하시 형에게 빨리 가서 잡자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거북이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오하시는 잡자고 말하는 주인공을 막으며 친구들한테 보내주자고 말한다. 그때 오하시는 울고 있었다. 흰 여백에 살짝 맺힌 눈물은 오하시의 심정을 절절하게 묘사해주고 있다. 정말 싫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는 게 맞을 때 짓는 그런 얼굴이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는 둘이 거북이가 언제든 놀러 올 수 있게 비밀 기지 앞에 다리를 만든다. 아직까진 오지 않았다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거북이는 비밀기지로 가는 다리를 기어 올라간다. 어떤 의미로 봐야할까? 거북이와 요시다, 오하시 사이의 우정의 징표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 물음이다. 오하시는 왜 주인공을 막았을까? 아마 오하시가 거북이를 다시 잡는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인공만 해도 빨리 잡자고 오하시를 부추기지 않았나?

 

왜 그랬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요즘 나오는 이야기를 한 번 둘러보자. 요즘 반려동물이라고 해서 동물과 같이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동물권이라 해서 동물에 대한 권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서울시는 제돌이라는 돌고래를 자연으로 돌려보낸바 있다.

 

이렇게 동물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도 이미 지구의 주인이 된 인간이 다른 동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이미 인간이 멸종시킨 동물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다른 동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관심이 순전히 인간적인 것 아닌가 하는 불편함이 있다. 반려동물과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볼 때 보기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과연 저게 동물 입장에서 좋은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동물은 그네들끼지 사는게 가장 자유롭고 좋은 것 아닐까?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물음에 답해보자. 오하시가 주인공을 막은 이유도 바로 동물의 생명을 존중해서 그런 것 아닐까? 그 거북이는 오하시가 잡은 것이다. 보통 이런 경우 그 주인은 오하시가 된다. 오하시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야기 초반에서 내 거북이라고 주인공에게 소리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하시가 거북이를 풀어준 것은 그게 거북이를 위한 것이라는, 자신이 어떤 한 생명체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을 자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진짜 자연을 존중한다면, 생명의 존엄을 존중한다면 바로 이러한 자세가 필요한 것 아닐까?

 

주인공들은 거북이가 헤엄을 얼마나 잘 치는지 거북이가 친구와 같이 있던 그날 처음 알았다. 그 둘의 이름은 이제 거의 지워지고 없었다. 이 이야기의 핵심주제가 아닌가 싶다. 우리가 생명을 존중한다면 그 생명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 안에는 한 생명체에 대한 존중과 배려, 우정이 들어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생태교재다. 우리가 생명을 대하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존엄한 태도가 이 책에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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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5-08-21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그림책 이야기처럼 한국에서도 냇가에서
아이들이 `우리 기지`를 만들어서
즐겁게 냇바람과 들바람을 쐬면서
하루 내내 신나게 놀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