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데란 미래의 문학 11
데이비드 R. 번치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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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큰 소리를 계속 유지하면서. “제길, 그게 무슨 소리요, 여긴 모데란인데!

당장 정신 차리시오! 심장을 고르거나 썩 꺼지시오.

마음에 드는 심장을 선택하거나 자동 보도에 오르란 말이오. 한심한 작자 같으니!”

  -p.583, <마음을 앓는 이와 창고지기> 中


1925년 생인 작가 데이비드 R. 번치의 탄생 100주년을 비로소 국내에 소개된 그의 57편에 달하는 중단편들을 엮어낸 책 <모데란>은, 그래서 기이하지만 대단하고 짧은 이야기들이지만 긴 여운을 어김없이 남기고야 마는 작품들입니다.


마지막에 배치된 그의 마지막 작품이자 시집에서 발췌된 <마음을 앓는 이와 창고지기>에 이르면, 50여편의 이야기들은 모데란이라는 거대한 대지 위에 쓰여진 서사시가 되고 마지막 시는 마침내 이르른 계시록이 됩니다.


  “뼈르 작업할 때는 가장 깊은 내면에서 울리는 듯한 특별하고 특별한 고통이 따랐다. 마치 드릴로 1만 2천 개의 치아에 동시에 구멍을 뚫으며, 모든 드릴이 신경을 건드리는 것만 같았다. 위이이아아아오오오…… 위이이아아아오오오…(후략)”

  -p.78~79, <그날 나비는 독수리만큼 컸다네> 中


100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 보여주는 끝모를 만화경 혹은 지옥도와도 같은 문장들은 오감의 끝까지 자극해내며 드라마트루기 형식을 뛰어넘는, 4D영화를 체험하는 경험을 하게 합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고 피부를 덮은 모든 솜털들이 흔들리는! 과연 SF 매니아들의 컬트적 전설이라 불리우는 이유를 모를 수가 없는 작품들이 오롯이 들어차 있는 선홍빛 진국입니다.


  “그런데도 항상 누군가-어떤 세력이-현실을 구슬려서, 증명되었고 증명될 것들을 추측해야 하는 꿈과 같은 것으로 바꾸려 들지. 가장 명확한 진실에 꽃 한 송이를, 십자가를, 광휘를 두른 별을 올린 다음,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거요. “

  -p.371, <경고> 中


번치의 소설들은, 그저 자극적인 표현으로 치가 떨리고 질리게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숨은 의도로 혹은 대놓고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생각을 강요(!)합니다. 우리가 쌓아올린 역사와 그 폭력의 결과의 흥건한 자국들이, 누구의 죄과인지 어떻게 벌을 받을지 생각해보라고, 아니 벌 받아야 싸다고 대놓고 공격해버립니다. 평화를 가장한 폭력과 전쟁이 만연한, 누가보더라도 거짓인 지금도 세계 도처에 파다한 그 현장들을 예견하듯 고발합니다.


그리고 다시, 성경의 마지막에 위치한 계시록처럼, 번치의 마지막 생각에 도달한 말은 “심장! 심장!! 심장을!!!” 그렇게 외치듯 예언합니다.


#데이비드R번치 #모데란 # 조호근옮김

#현대문학 #폴라북스 #미래의문학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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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얼굴 - 얼굴로 본 인간 진화의 기원
애덤 윌킨스 지음, 김수민 옮김, 김준홍 감수 / 을유문화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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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인간 얼굴의 형성이 인간과 비슷한 영장류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속성인 고도로 발달된 사회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적 상호작용이 진화를 거듭하는 동안 인간과 인간의 친척뻘인 유인원의 얼굴이 되었다는 점은 이들을 다른 모든 고등동물과 분리시킨다.”

  -p.16, ‘서문’ 中


유전학자이자 진화생물학자인 애덤 윌킨스의 2017년 작으로, 2018년에 국내 소개된 본이 새로이 개정되어 나왔습니다. 작가 소개대로, 이 책에서 애덤 윌킨스는 인간 얼굴을 통해 진화를, 혹은 진화를 통해 인간 얼굴을 들여다보고자 했습니다. 서문에 언급된 대로, 인간이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그 관계를 통한 상호작용과 언어 사용에 기인하며 이런 인간의 얼굴은 진화의 산물임을, 얼굴의 발달과정, 유전적 기반, 얼굴의 역사와 두뇌와 연결짓기 등의 방식으로 나아가며, 인류 얼굴의 탐색을 선보입니다.


  “얼굴은 어떻게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궁극적으로 아득히 먼 과거와 인간의 종에 대한 질문, 즉 (창조론자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인류의 진화에 대한 질문이다.”

  -p.26, ‘1장. 인간의 얼굴은 진화의 산물이다’ 中


기독교 문화권, 이런 표현이 여전히 유효한지는 모르겠지만,에서 여전히 갑론을박의 여지가 늘상 도사리고 있는, 창조론 vs. 진화론의 이슈를 이 책의 저자도 자유롭지는 못한 듯, 책의 곳곳에서 진화론 설파자는 기어코 창조론자의 양해(?)를 구하는, 드러내놓고는 아니지만, 제스처를 취해 보입니다. 아는 바와 같이,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모태신앙으로 호흡처럼 창조론자, 이것을 이론이라 칭하는 것도 여전히 어색한, 입니다. 그러기에 이 책을 대하는 내내 마음 한켠에 단검을 품고, 언제라도 이상한(?) 소리를 해대면 덤빌 기세로 책을 읽었습니다.


  “엄격한 사회 구조를 가진 이런 초기 문명들이 아무리 계급적이고 억압적이었다고 해도 초기 문명들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사회적 역할에 의해서만 정의되지 않고 개인마다 나름의 개성을 가진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타인의 얼굴에서 개인차를 깨닫는 능력은 사람을 개별적으로 인식하는 감각의 부산물이자 기여자였을 수 있다.”

  -p.452~453, ‘9장. 얼굴 의식하기와 얼굴의 미래’ 中


진화론에 기인한 인류 얼굴의 변화를 논하며 저자는 말미에 미래의 얼굴을 추측하는 것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저는 어릴 적 어린이 월간지 류에 공상과학 부분의 기사(?)에서 봤던 미래의 인류의 얼굴 그림을 떠올립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 얼굴은, 상대적으로 작아진 팔과 다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더 커져버린 머리, 특히 뇌를 포함하는 머리 상부,로 변화한다는 상상이었습니다. 엄청난 과학발달과 상대적으로 육체적 운동은 줄어들고 뇌의 사용은 더욱 늘어난 미래는 용불용설에 근거한 결과물로 그런 미래 인류의 얼굴로 탄생했다는 논리였던 것 같습니다. 관계와 언어를 딛고 시간에 올라탄 인류는, 그 얼굴들은 그렇게 변해왔고 변하고 있으며 변해갈 것이라 말합니다.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대화는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근본으로 계속 남아 있을 것이고, 얼굴은 인간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데 언제까지나 필수적이고 안정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p.527, ‘이 책을 마치며’ 中


하루에도 수십, 수백의 얼굴들을 무심히 스쳐 지나보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얼굴의 가치, 언어를 넘어서는 그 언어적 얼굴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고 어떻게 남겨질지 질문하게 하는 책, 그런 쉽지만은 않지만 여러모로 묵직한 생각의 제안을 던지는 책이었습니다.



*원제 <Making Faces: The Evolutionary Origins of Human Face>


#인간얼굴 #애덤윌킨스 #김수민옮김 #김준홍감수

#을유출판사 #진화론 #과학책 #유전자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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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슨트처럼 미술관 걷기 - 세상에서 가장 쉬운 미술 기초 체력 수업
노아 차니 지음, 이선주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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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날개에 소개된 저자의 사진을 보고 잠시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그러곤 이력을 읽어내려가는데, 우린 이미 구면이었습니다. ‘미술품 도난’, ‘모나리자 이야기’, ‘트로이 목마’ 등을 흡인력 있는 언변과 자료, 제스처로 눈과 귀를 사로잡던 TED의 강의들에서 이미 만난 사이였습니다.


미국 태생으로 여름방학엔 프랑스에서 문화와 예술을 누렸던 유년시절의 노아 차니는 유수의 대학에서 미술사로 석사, 건축사로 박사 학위를 땄고, 아니나 다를까 미술범죄 전문가였네요.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봤던 다큐멘터리 <이것은 강도다: 세계 최대 미술품 도난사건>의 몇 에피소드를 우연히 봤던터라, 그의 독특한 이력과 경력에 급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런던 내셔널갤러리 같은 곳에 강연하러 갈 때, 나를 그곳으로 부른 교수보다 나를그곳으로 데려다준 택시 운전기사가 내 글을 더 잘 알고 있으면 나는 성공했다고 느낀다. 예술을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게 만들어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기꺼이 열린 마음으로 예술을 통해 소통하는 일을 즐기도록 유도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p.14, ‘들어가며’ 中


  “이 책에 인용문이나 참고 문헌이 많이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것이다. 의도적이었다. 미술을 알고 싶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책을 쓰고자 했기 때문에 주로 연구자와 학자들이 이용하는 인용문은 싣지 않고 간결하고 차분하게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p.337, ‘참고문헌’ 中


노아 차이는 이전 강의들에서 보여줬던 그의 태도 그대로 이 책의 출간하게된 이유를 명쾌하게, 책의 처음과 마지막에 드러내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 태도 덕분에 이 책은 여러가지 이야기들, 그러니까 미술역사, 미술사조, 미술기법을 이야기하다가, 어느 순간 특별히 조각에 대한 역사를 들려주더니, 자신의 특기(!)인 물건으로서의 미술작품에 대한 보관과 사건사고들을 흥미진진하게 친절하게 읽어(!)줍니다. 그가 언급했듯, 에릭 캔들 박사의 환원주의적 방법으로, 미술의 경제성과 그 미래적 전망에 이르는 너른 인사이트로 독자를 휘뚜루마뚜루 데리고 다니며 미술의 숲 둘레길을 거닐다, 어느 순간 오름같은 높이에서 조망해볼 수 있게도 해줍니다.


  “무엇에 빠져들어도 좋다. 각자 자신에게 맞는 작품을 찾고, 그렇게 여정을 떠나보자. 셋, 둘, 하나… 자, 이제 시작이다.”

  -p.334


국내나 해외 출장으로 지친 영혼을 달래는 방법으로 개인적으로 그 지역 미술관들의 전시 프로그램들을 미리 챙겨두는 것은, 어느 때부터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나름의 반대급부이자 반항심 같은 것의 발로였던 것 같습니다. 일만 하고 살 순 없다, 혹은 시키는 것만 하지말지어다! 같은 그런 소극적 이기주의자 되기의 한 방편이 되어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느 전시회도 실망해본 적은 감히 없었다 자부합니다. 왜냐하면 전시회에 가지않았으면 아예 주어지지 않았을 기회였으니.


이 책 <도슨트처럼 미술관 걷기>는 저자의 의도만큼이나 저 같은 ‘무턱대고 감상하기’론자에겐 더없이 소중한 뒷배 같은 책이다 싶었습니다. 책제목의 ‘도슨트’보다는 ‘걷기’에 더 방점이 찍혀지는, 발걸음을 가볍고도 즐겁게 해줄 이야기 보따리다 싶습니다. 여러 권의 미술관련 소책자들을 합체(!) 시켜놓은 책으로 여겨질만큼, 언제고 어디를 펴서라도 읽어보면 미술이라는 그야말로 입체적 대상의 다양한 면모를 바라보고 느낄 수 있도록 손을 잡아이끄는, 은퇴하고 미술관에서 도슨트로 봉사하면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시는 어르신 같은 구석이 다분한 그런 책이었습니다. 아마도 은발의 굵은 웨이브의 단정한 미소와 눈웃음 너머로 또랑또랑 작품들을 들려주는 그런 분 말이지요.

다음 출장지가 벌써부터 기다려집니다. 자, 그럼 어디로 가볼까나~?



#도슨트처럼미술관걷기 #노아차니 #이선주옮김 #현대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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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발의할머니도슨트같은책 #출장지에서만나는미술관

#도서제공 #서평단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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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 마지막 대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 트뤼옹 지음, 이세진 옮김, 배세진 감수 / 복복서가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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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재앙 같은 정치에서 우리는 무얼 가지고 토론해야 하는지조차 모릅니다. 거의 아무 말이나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인정합시다. 우리에게 무슨 지평이 있습니까?”

  -p.95~96


공교롭게도 이 책의 이 부분을 읽는 동안, 격렬하게 양분된 분노한 목소리를 일순간 잠잠케 해버린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에 대한 선고가 있었습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그렇게, 2024년 12월 3일은 또하나의 사고의 전환을 우리에게 안겨준 날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2025년 4월 4일 오전 11시 11분도 그렇고요. 여전히 공고해보이던 시스템도 합의와 상식의 범주도 한사람의 한순간에 내린 하나의 결정에 이렇게나 뒤틀리고 염병같은 해악을 끼치는지를 실시간으로 목도해버렸으니 말입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인류학자, 철학자, 과학기술학자, 정치 생태학자. 이 책의 대담자이자 그의 사망 1년 전 이루어진 인터뷰를 다행히 남겨준 브뤼노 라투르를 수식하는 단어들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저 많은 배움과 지식을 추구하고 이루어낸다는 것의 대단함을 느끼며, 나름의 선입견을 지닌 채 읽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책을 다 읽은 시점에서, 브뤼노 라투르가 이야기하는 바를 돌아보면 사실 몇 퍼센트 정도나 이해했을까 싶습니다. 나름의 독서 원칙에 따라,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막히는 개념이나 명제에 멈춰서지 않으려 하는데, 그 이유는 전체적인 흐름과 맥락을 놓치고 지엽적인 지식에 매몰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같은 것 때문입니다. 특히 이런 논리적 논거로 점철되는 책들에 있어서는 이 원칙을 더욱 철저히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편입니다.


그러기에 브뤼노 라투르와의 첫 만남은 탐색전 정도로 생각하며 마무리했다 싶습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세상과 역사, 과학과 생태 등 다양한 주제들을 대하는, 이 노련한 학자의 태도는 꽤나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여튼, 나는 철학자의 역할이 붕괴학자들과 격변론자들이 흘리는 헤아릴 수 없는 눈물에 한 방울 더 보태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다시금 행동 역량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봐요.”

  -p.161~162


브뤼노 라투르는 사회적 현상이나 철학적 사유에 대해 이름 붙이는 것을 통하여 대상화하고 구체화하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대중에게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 손실없이 전달될 수 있도록 애쓰는 모습이, 감동적이기 까지 했습니다. 현학적인 말로 그저 다른 차원의 지적 유희를 즐기는 듯한 학자들을 떠올리며,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에 두 발을 딛고 서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이야기의 태도와 사랑의 말이야말로, 그와 그의 생각을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것이다 싶었습니다.


  “목표는 전체성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성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사랑은 철학의 말입니다.”

  -p.178


#브뤼노라투르마지막대화 #마지막대화 #HabiterLaTerre 

#브뤼노라투르 #니콜라트뤼옹 #BrunoLatour #NicolasTruong 

#이세진옮김 #배세진감수해제 #복복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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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를 믿다
나스타샤 마르탱 지음, 한국화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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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이 떠난 지 몇 시간이 지났고 나는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고 기다린다.”

  -p.13, 첫 문장


이 책은 죽음과 불안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책은 삶과 희망의 이야기입니다. 

인류학자인 저자는 연구 중이던 캄차카 반도에서 곰을 만난다. ‘만난다’라고 표현하지만 보통은 ‘습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그 만남이 어떤 과정으로 시간과 공간, 육신과 영혼을 가로질러 가게 되는지를 따라간, 작가 스스로의 복기이자 검증이고, 변신의 비망록입니다.


  “꿰매고, 씻기고, 자르고, 다시 꿰매고. 나는 시간관념을 잊고, 시간은 계속 흐르고, 우리 둘은 알코올 냄새가 나는 어둑한 대서양에서 높아졌다가 낮아지는 파도에 휩쓸리며 부유한다.”

  -p.18, ‘가을’ 中


이 책은, 가을, 겨울, 봄, 여름, 이렇게 4개의 느슨한 챕터로 되어 있습니다. 곰과의 만남 (혹은 습격) 후에 그 계절들을 통과하면서 동시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집니다. 피와 살의 고통에 시간과 계절이 봉합되며 또 그렇게 관계로 연결됩니다. 인생은 한없이 불확실하고 또한 속절없습니다. 계획은 뒤틀리고, 육신도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변형과 변화, 그리고 변신에 이르릅니다. 마음과 영혼도 당연히 그러하고.


  “살페트리에르 병원. 내 안식처가 돼야 했을, 그러나 결국은 지옥으로 추락시키는 낭떠러지가 된 이 장소의 기억들은 어떻게 다시 짜맞출 수 있을까?”

  -p.59, ‘겨울’ 中


습격이 남긴 작가의 턱 수술 부위는, 러시안 방식으로 고정된 소련의 플레이트는 프랑스 방식으로 서방의 플레이트로 교체하는 수술로 프랑스와 러시아의 ‘의료 냉전 현장’이 되었다가, 파리와 지방병원들 사이의 치졸한 경쟁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만남이 고통과 혼돈과 전쟁에 이르는 과정이 계절을 따라 흘러가는 작가만의 장광설은 인상적이지만,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유사한 상황들을 상정하노라니 어쩌면 언제고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까지 이르면 웃프기만 합니다.


  “나는 우리의 삶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p.145, ‘봄’ 中


예기치 못한 일을 마주하는 것. 다리아가 마주한 어느날 무너져내린 소련, 작가가 마주한 곰의 습격, 그리고 얼마 전 우리 모두가 마주했던 COVID-19. 단 한번, 한순간의 조우가 이끄는 삶의 향배, 그 불확실성의 주체는 무엇일까? 그런 변곡점들과 우여곡절이 만들어내는 생의 예기치 않은 등고선은 어떻게 타인과 공명하고 때론 변주되며 나아갈테지만, 그 당시, 그 상황 속에서 수천 수만 가지의 똬리를 튼 생각들은 그 꼬리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고 또 그럴 기력조차 없기 일수였던 개인적 기억까지 포개집니다. 

그렇다면 그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존재는 무엇일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감동받는다. 이것이 나의 해방이다. 삶이 주는 한 가지 약속. 불확실성.”

  -p.172, ‘봄’ 中



어느새 가을이 이끈 겨울을 지나 겨울이 내어준 봄은 여름에 이릅니다. 그리고 작가의 이야기도 끝이 납니다. 그리고 야수가 만들어 낸, 어쩌면 마주했을지도 모를 다른 우주를 떠올리며 멈춰서거나 뒤돌아갈 수도 있었을 그 순간, 기회를 딛고 작가의 속삭임 같은 굳센 결심은, 그래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격려이고 또한 약속이다 싶습니다.


  “시간이 되었다. 나는 쓰기 시작한다.”

  -p.177, ‘여름’ 中, 책의 마지막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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