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모나리자 >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은 좋은 카피를 쓰는 습관

1년 전 추억 도착~^^
원래는 1년전 8월 2일에 쓴 리뷰입니다.(여기엔 좀 늦게 올렸지요)
좋은습관연구소의 책으로 두 번째 우수 리뷰에 선정되어
참 기뻤던 기억으로 남은 책입니다.ㅎ

비가 계속 오락가락하네요.
8월이 이렇게 끝나가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플친님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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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이 대지에 부여하는, 그래서 이 땅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특성에 의해 규정된다. 내 입장에서는이것은 반짝이는 빛이다‘라고 말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이 빛은 가을 - 이 지방에서 단연 최고의 계절에 보아야 한다.
(아니 차라리 ‘들어야 한다고 해야겠다. 그럴 만큼 그 빛은 음악적이니까). 물처럼 흐르며, 반짝이며, 사물 하나하나를 저마다 다르게 비추어주는(남서부는 ‘미세한 날씨‘의 고장이다) 일 년의마지막 아름다운 빛이기에 비통하다.  - P17

너무 사진만 찍으려들지 말 일이다. 판단하려면, 사랑하려면 여기 와서 있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곳곳의, 사철의, 시간의, 빛의 일렁이는 물결무늬 전체를 두루 겪어볼 수 있어야 한다.

(중략)
무슨 말씀! 나는 내 방식대로현실의 이 지역 속에 들어간다. 즉 내 몸을 갖고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 몸은 곧 내 유년 시절이다. 역사가 만들어놓은 그대로의 어린 시절. 이 역사는 내게 시골의, 남프랑스의, 부르주아 계층의 청년기를 부여했다. 내게서 이 세 가지 요소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나에게 부르주아 계층 하면 지방이고, 지방하면 바욘이며, (어린 시절의) 시골 하면 항상 바욘에서 좀더 내륙 쪽으로 들어간 시골, 소풍과 방문과 이야기로 짜인 망이다.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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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세키적 작품‘이란 말의 가장 상징적인 의미부터 극히 즉물적인 표시작용까지를 포함한 ‘드러눕는 것‘을둘러싸고 이러한 자세를 지키는 인간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직접적으로 묻는 생생한 시도이다. 그리고 이 시도에 있어서 소세키 문학은소세키의 ‘사상 따위를 까마득히 넘어서 있다. 약간 속된 윤리적 문명비평가의 신화적 초상으로부터 해방되어, 극히 물질적인 언어의 실천가, 요컨대 작가로서의 나쓰메 소세키가 예리한 모습으로 떠오르게되는 것은 그러한 읽는 방식에 우리가 몸을 던졌을 때일 것이다. 소세키를 읽는다는 것은 말의 바다의 수면에, 언어를 베개 삼아 위를 보고드러누워, 부동의 자세를 지키면서, 그 주변에 소란스럽게 웅성대는말에 귀 기울여 경청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P35

그렇다고 한다면 소세키적 ‘앙와‘의 주제는 그것을 생과 사의 틈새에 자리하게 해 볼 때 비로소 그의미 작용을 전적으로 명시하는 세부라고 하는 게 될 것이다. "별것도아니죠. 매일 조금씩 죽어 보는 것 같은 거죠"라고 구샤미의 낮잠 버릇을 놀리는 메이테이의 말은 그 유명한 도회 취미에도 불구하고 소세키 문학의 핵심에 육박해 있던 것이다.
- P47

분명히 사람은 외계의 어떤 자극을 창작 상의 영감의 근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설령 무의식이라고 해도 스스로 바라는 것이 아닌 한 자신에게 있어서 미지의 무엇인가와 조우하거나 하지는않는다. 소세키적 횡와 자가 잠자는 중에 불러들이는 타자들, 그들처럼 준비되고 조직되는 것에 의해 비로소 사람은 진정한 조우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목소리로서는 울리지 않고,
몸짓으로서는 시선에 닿지 않는 조우의 사전 준비를 지각 가능한 영역에 떠오르게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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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드러눕는 소세키

앙와와 언어의 발생

"공교롭게도 주인은 이 점에 있어 참으로 고양이를 닮은 데가 있고"
게다가 "낮잠이라고 하면 우리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하는 편"이라고 화자인 고양이가 개탄해 마지않았던 구샤미의 낮잠 자는 버릇에서 "의사는 진찰을 한 후에 수술대 위에서 쓰다를 내려오게 했다"
는 앞머리의 한 줄이 전편의 풍토를 결정짓고 있는 절필 『명암』의 요양생활에 이르기까지, 소세키 소설의 대부분은, 으레, 횡와의 자세를 지키는 인물의 주변에 이야기를 구축한다고 하는 일관된 구조에자리하고 있다. 『그 후의 도입부에 그려지는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혹은 문의 시작 부분에 보이는 햇볕 잘 드는 툇마루에서의 낮잠 자는 광경 등등 일일이 꼽아 볼 것도 없이 허다한 소세키적 ‘존재‘들은,
마치 그렇게 하면서 주인공으로서의 확실한 자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가는 곳마다 덜컥 드러누워 버린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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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는 것이다. 본서에서 ‘글쓰기의 영도 라 불리는 그 중립적 글쓰기들에서 쉽게 식별될 수 있는 것은 어떤 부정의 운동 자체이고, 지속가운데서 그 글쓰기를 완성할 수 없는 무력감이다. 마치 한 세기 전부터 계승 없는 어떤 형태를 통해 자신의 외면을 변환시키려고 하는문학이 결국은 문학 없는 작가라는 저 오르페우스적 꿈의 완성을 제안하면서 모든 기호의 부재 속에서만 순수성을 발견하고 있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예컨대 카뮈의 글쓰기, 블랑쇼의 글쓰기 혹은 케롤‘ 의글쓰기 같은 백색의 글쓰기, 아니면 크노가 말하는 글쓰기는 부르주 - P10

아적 의식의 분열을 조금씩 따라가는, 글쓰기에 대한 하나의 고유한정열(Passion)에서 마지막 에피소드이다.
여기서 우리가 원하는 바는 이상과 같은 관계의 윤곽을 그리는 것이다. 그것은 언어체 및 문체와 독립적인 하나의 형태적 현실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형태의 이러한 제3차원 역시 추가적인 비극을 수반하면서 작가를 그가 속한 사회에 결부시키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끝으로 그것은 언어에 대한 어떤 고유한 도덕이 없는 문학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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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8-22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먼가 읽어도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또 그래서 끌리네요 ^^

모나리자 2021-08-22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좀 어려운 내용이라.. ㅎ 천천히 읽어야 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