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그늘에서만 살던 번역가가 작가가 되어 세상에 나오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백댄서를 하던 김종민이 앞으로 나와서 코요태가 되고 예능인이 된 것처럼. 그러나 김종민이 다시백댄서를 하는 일은 없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번역가란직업을 사랑하며 원서와 사전과 고군분투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P145

「번역에 살고 죽고』가 출간됐을 때, 생각지 못한 곳에서 많은 메일이 왔다. 인터뷰는 당연한 것이고, 졸업한 이후소식이 끊긴 중, 고등학교 동창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하더니 통번역 대학원이나 대학의 강연 요청도 들어왔다.
요청받는 자체가 가문의 영광이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주제넘게 나섰다가 가문의 수치가 될지도 모른다. - P149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니 더불어 사는 세상이니 하는 말에서 자유로워지자, 지구의무게가 훨씬 가벼워졌다. 나이를 먹어서 뻔뻔해진 것인지해탈한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최소한 사람의 도리를하고 최대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세상을 왕따시키며 살고 있다. 물론 외롭다. 외롭지만, 편하다. 편하지만, 찜찜하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잠자리에 들며 혼자 반문하지만, 다음 날 해가 뜨면 또 찜찜하지만 편한 외로움을 선택하고 있다. 아, 이렇게 고운 독거노인이 돼가는 건가.
- P169

책을 읽고, 책을 번역하는 게 직업이다. 동종 업계의 다른 분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거의 연중무휴였다.
볼일이 있어서 나갔다가 늦게 들어와도 바로 노트북을 펴고 앉았다. 마감에 쫓겨서도 아니고, 생활비를 벌어야지하는 압박감에서도 아니었다. 긴 세월 하다 보니 그냥 그게 직업인 동시에 취미 생활로 굳어졌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말만큼이나 재수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번역할 때가 제일 행복하다. - P176

화사한 봄날에 긴자 역에서 브릭스퀘어광장의 에쉬레까지 걸어가서 스위츠를 사 먹은 기억이얼마나, 얼마나 좋았던지. 정하랑 "우리 살다가 언제 제일행복했더라?" 하는 얘기를 나눌 때면 둘 다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뽑는 것이 그날이다. 어느 날, 야후 재팬에서우연히 본 살인범의 기사가 모녀의 최고로 행복한 날로이어지는 드라마가 되다니. 삶은 그래서 모든 순간이 복선일지도 모른다. - P185

구체적인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분은 "너는 나다니는 직업이 좋다. 기자를 하면 딱 안성맞춤이야"라고 했다.
좋은 미래도 나쁜 미래도 딱히 얘기하는 것도 없고 귀에걸면 귀걸이식의 점사 몇 마디 하고 끝이었다. 이미 ‘나다니는 직업, 기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날 점은 꽝이었다.

그러나 나다니는 걸 싫어하고, 부끄럼도 많이 타고, 전화 기피증이 있는 내게 기자는 시켜줘도 못 할 직업이긴했다. 그곳에 다녀온 몇 달 뒤 나는 번역을 시작하게 됐고,
평생 나다니지 않는 직업을 갖게 됐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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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도 되기 전에 친척집에 맡겨졌던 첫딸은 유치원 때부팀 이지메를 당하는 등, 어릴 때부터 순탄치 못한 생활이이어졌다. 급기야 10대에는 거듭된 자살 미수로 고등학교1학년 때 학교에서 퇴학당한다. 그러다 극단에 들어가서스무 살에 극작가로 데뷔하고, 만 스물여덟 살에 『가족시네마』로 재일 교포로서 두 번째 아쿠타가와상을 받는다. 그리고 그 책은 밀리언셀러가 된다. 바로 유미리다. - P113

우연히 보게 된 바다 건너 사는 작가의 블로그를10년째 듬성듬성 읽고 있다. 지금 상황은 마치 삼진 아웃만 당하다가 9회말 투아웃에 장외 홈런을 날린 한물간 야구 스타의 경기를 본 것 같다.
인생은 정말 어디로 굴러갈지 알 수 없다. 끝날 때까지끝난 게 아닌 것이었다. 유미리 작가의 부활을 진심으로축하한다. 앞으로는 부디 꽃길만 걸으시기를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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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평점 :
절판



김애란 소설가를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 한국 소설을 한동안 읽지 않아서. 늦게나마 김애란 작가의 책을 만난 건 번역 수업 덕분이다. 번역 공부는 거의 국어 공부라 할 정도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좋은 책, 좋은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했다.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올려 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워낙 유명한 작가라서 책 제목 정도는 알고 있었는데 생각한 것보다 꽤 젊은 작가였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 많은 상을 받은 상복도 많은 작가였다. 이 산문집은 작가를 있게 한 이름들, 작가와 함께한 이름들을 주제로 썼다. 1부 나를 부른 이름 2부 너와 부른 이름 3부 우릴 부른 이름들 세 개의 에피소드가 들어있다.

 



작가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인정받아서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있는 인문고등연구소(LASH)에 초대받아 머물렀던 화려한(?) 경험까지 담고 있다. , 정말 부럽군, 했다. 한 사람의 작가가 탄생하기까지 추억이 깃든 장소와 에피소드를 엿보는 일은 늘 뭉클한 감동을 주는 것 같다. 작가의 어머니가 20년 넘게 손칼국수를 팔았던 가게 맛나당은 작가에게도 큰 의미를 부여한 곳이었다. 작가로서의 기질을 키우고 꿈을 꾸게 한 곳이 아니었을까. 김애란 작가는 자신의 정서가 거기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수많은 손님을 만나고 거기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그 분위기가 작가의 가슴에 차곡차곡 스며들지 않았을까. 어머니는 그 돈으로 세 딸을 가르치고 생활을 꾸리고 집도 장만했단다. 그곳은 어머니가 경제 주체이자 삶의 주인으로 자의식을 갖고 꾸린 적극적인 공간이었다. ‘맛나당은 작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팔 할의 힘이 되었고 나머지 이 할은 사범대학에 가라는 어머니의 뜻을 거스르고 예술학교에 들어간 것이란다. 주체적인 삶을 사는 어머니를 본받아서 자신이 선택했고, 그것이 인생을 바꾸었다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오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 두 분의 첫 만남과 사랑 이야기도 재미있고 진한 가족애와 행복한 정경이 전해져 왔다. 또 지인과의 우정, 읽은 책을 소개하며 들려주는 소소한 감상 이야기도 좋았다. 나도 전에 읽다 만 적 있던산해경을 접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이 책은 원래 중국의 신화집 또는 역사서, 지리서 고대 동아시아 풍습과 종교를 다룬 책이지만 문학 텍스트로 읽는다면 창작자에게 먹을 만한 플랑크톤이 풍부한 심해라고 알려 주었다. 귀한 보석을 주운 기분이었다. 선후배 작가와의 여행 이야기도 부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글을 쓰는 동료로서 함께 보고 공감했던 시간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하고 충만한 시간일 것이다.

 



글을 쓸수록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쥐게 된 답보다 늘어난 질문이 많다. 세상 많은 고통은 사실 무수한 질문에서 비롯된다는 걸, 그 당연한 사실을, 글 쓰는 주제에 이제야 깨달아간다. 나는 요즘 당연한 것들에 잘 놀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려 한다.’(P124)

 



우리의 삶은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했던가. 한 가지를 풀고 나면 또 한 가지가 우리에게 닥친다. 글 쓰는 삶이나 보통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감사를 말하게 된다. 당연한 것들에 놀라는 삶, 그러려고 하는 마음의 다짐이 있을 때 우리 삶은 한층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러니 만일 제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린 제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네가 있는 공간을, 그리고 네 앞에 있는 사람을 잘 봐두라고. 조금 더 오래 보고, 조금 더 자세히 봐두라고. 그 풍경은 앞으로 다시 못 볼 풍경이고, 곧 사라질 모습이니 눈과 마음에 잘 담아두라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을 만난대도 복원할 수 없는 당대의 공기와 감촉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P133)

 



역시 작가다운 통찰이 들어있는 대목 같다. 이 글은 작가가 창비 50돌 축사를 맡게 되어 쓴 축사의 일부인데 너무나 공감이 가는 문장이라 소개해 본다. 작가가 태어나 처음 가보았던 창비 출판사, 마포 사무실을 떠올리며 감개무량에 젖는다. 다시 올 일 없을 줄 알았기에 대충 보고 말아서 기억도 나지 않는 그곳. 그 순간을 소중하게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아쉬워하며 하는 얘기였다. 몇 달 전부터, 자꾸만 가보고 싶은 곳이 떠올라 가봐야지 벼르고 있던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내가 20대 시절에 다닌 직장이 있던 동네이다. 언제 한번 가보자고 작은 아이에게 말했다. 벌써 30년도 더 지났는데 그곳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 김치찌개가 끝내주던(?) 식당이 있던 골목, 그 뒤편에 수녀원이 있던 동네였다. 지금이라면 휴대폰으로 모든 걸 담을 수 있지만, 그 시절은 온통 아날로그 세상이었다. 그때 함께 했던 친구들, 가게 아줌마들, 그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새삼 그립다. 일찍이 아파트촌으로 뒤바뀐 지 오래여서 그 풍경은 온데간데없겠지. 자세히 보고 기록해 둘걸. 그때는 그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어서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 산문집을 읽은 계기로 김애란 작가와 조금 친숙해진 느낌이다. 에피소드 중에는 작품을 쓰면서 기록해 두었던 창작 노트도 들어있다. 소설 한 편을 완성하고 나면 인물들이 작가에게서 떠난다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소설 속 인물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신애라고 했다. ‘쪼그려 앉은여자 신애. 한동안 잊고 살았다고 했다. 이렇게 다른 작가의 작품 속 인물을 만나면서 영감을 얻기도 하고, 자신의 작품 속에 그려 넣은 인물들은 분신이나 마찬가지로 애착이 많을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속 인물은 누구였더라. 막상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어서였을까. 생각해 본다. 어렸을 때부터 나와 만나고 스쳐 지나간 이름들은 얼마나 될까. 무수한 이름들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앞으로 내 발길 눈길 닿는 곳은 좀 더 세심하게 보고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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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5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7-29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알고 보면 『번역에 살고 죽고』가 나오게 된 것도 꾸준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 책이 2011년에 나왔는데, 실은2006년부터 마음산책에서 산문집을 내고 싶다고 점찍었다. 마음산책 산문집은 접근하기 편하면서 고퀄이고, 책이 예쁘게 나와서다. 그러나 마음산책에서 번역을 한 적도 없고, 아는 편집자도 없었다. 써놓은 원고도 없이 문을두드릴 수도 없었다. 겨우 10년 차 번역가, 원고가 있다고책을 내줄 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단 존재를 알리기 위해 출판사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 짧은 인사 글을 남겼다.  - P98

견본품 들고 일일이 매장 돌아다니며 영업하는분들에 비하면, 번역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편한가. 컴퓨터 앞에서 손가락만 움직이면 되니까. 문전 박대를 당할일도 없고, 무시당해도 보이지 않고, 답장을 주면 감사하고안 줘도 그만이고, 보내는 것은 나의 의지, 거절하는 것은 그들의 의지. 메일 한 통 보내고 너무 많은 기대도 하지 말고, 좌절도 하지 말고, 바위를 뚫는 낙숫물처럼 천천히 조금씩 도전하고 싶은 곳의 벽을 뚫어봅시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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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생각하기 싫은 너무 지긋지긋한 기억의 출판사였는데, 누가 그 출판사랑 일한다고 하면 절대 하지 말라고 말리고 싶을 정도였는데, 그 이후에도 일을 했다는 것이 실화입니다. 일이란 게 감정 문제, 돈 문제를 떠나서 꼭•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때가 있다. 신기하게도 그 후에•작업할 때는 완전히 ‘우리 출판사가 달라졌어요‘ 버전이었다. 결제가 며칠 늦어지니 (전적이 있어서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그 ‘이사님‘이 늦어서 미안하다고 직접 문자까지 보냈다. 예전에 비하면 거의 칼 결제 수준이었다. - P52

꽃은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어야 꽃이 된다면, 오역은누군가가 까발려주어야 오역이 된다. 알고 오역을 하는사람은 없으니 지적받기 전까지는 바른 번역의 탈을 쓰고있다. 오욕의 오역은 번역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두려운것.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어디선가 좀비처럼 뒤어나온다. 생각만 해도 살 떨리네. - P89

앞뒤 설명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것은대체로 전래동화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국자로 뺨을 맞았죠?" "국자가 아니라 주걱입니다." 이런 대화가 나온다면 우리는 놀부마누라에게 주걱으로 얻어맞은 흥부를 떠올리지만, 이 얘기를 모르는 외국 사람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른다. 역주가 반드시 필요하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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