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눕는 것이 극히 나태한행위라고 한다면, 건네받는 것도 또한 극히 소극적인 행위이다. 그 나태하고 소극적인 행위는 반드시 주인공 바로 그 사람에 의해 연기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마음의 경우 고향에 돌아와 아버지를 간병하고 있는 ‘나‘에게 선생으로부터의 편지가 도착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빈사의 아버지의 베갯머리였고, 또한 「풀베개의 화공인 ‘내가 바다를 내려다보는 벼랑 끝의 풀 위에 벌렁 드러누워서 마음속에 떠오르는 시흥에 재촉을 받아 하이쿠와 한시를 사생첩에 기록해 갈 때 노숙자 같은 남자와 나미 씨가 느닷없이 나타나 여자가 남자에게 무언가를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듯한 태도로 건네주는데 나는그 물품의 수여를 무관한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 P61
그렇다고 해도, 이 어느 편이든, 건네받는 것이 드러눕는 것과 한 쌍의운동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아버지의 이불 곁에서 건네받은 선생의 편지는 ‘나‘를 곧바로 행동으로 몰아세우고 있었고, 드러누운 나의 곁에서 이루어지는 수수께끼 같은 물건의 수여도 ‘나‘를 즉시 사고하도록 유도한다. 여기에서 주고받는 것은, 그러니까 소세키적 존재에 있어서는 그 행동과 사고의 방향을 결정하는 부적과 같은것이다. 멈춰 서서 두뇌를 텅 비우는 것으로 운동을 방기한 소세키적‘존재‘는 그 대상의 여하에 상관없이 부적이라 불러 마땅한 것이 명하는 대로의 운동을 조직해 가는 것이다. - P61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게이타로의 낭만취미도 아니고 모리모토의 방랑벽도 아니다. 아침 목욕을 하는 두 사람의조우가, 마음에 나오는 가마쿠라의 바다 속에서의 선생과 ‘나‘의 그것과, 물의 현존이라는 점에 있어서 서로 닮아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작품의 풍토도 작중인물의 성격도 이야기의 전개 방식도 전혀 이질적이지만 첫머리에 물속에서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서사적구조가 양자에 공통되어 있는 것이다. 물이라고 하는 습기에 찬 환경의 소세키적 특질에 대해서는 조만간 다시 논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지금은 우선 이 공통점에만 착목하기로 하자. 이미 마음의 경우가 그랬고, 또한 『풀베개』에도 그것과 닮은 정황이 그려져 있는데, 소세키적 존재의 다수는 젖고 습기 찬 환경 속에서 마주친 인물에게 강력히 매혹되어 그와의 접근을 시도한다고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 P63
1년 전 추억 도착~^^원래는 1년전 8월 2일에 쓴 리뷰입니다.(여기엔 좀 늦게 올렸지요)좋은습관연구소의 책으로 두 번째 우수 리뷰에 선정되어참 기뻤던 기억으로 남은 책입니다.ㅎ비가 계속 오락가락하네요.8월이 이렇게 끝나가네요.좋은 하루 보내세요~플친님들 ~~^_^
그것이 대지에 부여하는, 그래서 이 땅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특성에 의해 규정된다. 내 입장에서는이것은 반짝이는 빛이다‘라고 말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이 빛은 가을 - 이 지방에서 단연 최고의 계절에 보아야 한다.(아니 차라리 ‘들어야 한다고 해야겠다. 그럴 만큼 그 빛은 음악적이니까). 물처럼 흐르며, 반짝이며, 사물 하나하나를 저마다 다르게 비추어주는(남서부는 ‘미세한 날씨‘의 고장이다) 일 년의마지막 아름다운 빛이기에 비통하다. - P17
너무 사진만 찍으려들지 말 일이다. 판단하려면, 사랑하려면 여기 와서 있어 보아야 한다. 그래서 곳곳의, 사철의, 시간의, 빛의 일렁이는 물결무늬 전체를 두루 겪어볼 수 있어야 한다.(중략)무슨 말씀! 나는 내 방식대로현실의 이 지역 속에 들어간다. 즉 내 몸을 갖고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 몸은 곧 내 유년 시절이다. 역사가 만들어놓은 그대로의 어린 시절. 이 역사는 내게 시골의, 남프랑스의, 부르주아 계층의 청년기를 부여했다. 내게서 이 세 가지 요소는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나에게 부르주아 계층 하면 지방이고, 지방하면 바욘이며, (어린 시절의) 시골 하면 항상 바욘에서 좀더 내륙 쪽으로 들어간 시골, 소풍과 방문과 이야기로 짜인 망이다. - P20
소세키적 작품‘이란 말의 가장 상징적인 의미부터 극히 즉물적인 표시작용까지를 포함한 ‘드러눕는 것‘을둘러싸고 이러한 자세를 지키는 인간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를 직접적으로 묻는 생생한 시도이다. 그리고 이 시도에 있어서 소세키 문학은소세키의 ‘사상 따위를 까마득히 넘어서 있다. 약간 속된 윤리적 문명비평가의 신화적 초상으로부터 해방되어, 극히 물질적인 언어의 실천가, 요컨대 작가로서의 나쓰메 소세키가 예리한 모습으로 떠오르게되는 것은 그러한 읽는 방식에 우리가 몸을 던졌을 때일 것이다. 소세키를 읽는다는 것은 말의 바다의 수면에, 언어를 베개 삼아 위를 보고드러누워, 부동의 자세를 지키면서, 그 주변에 소란스럽게 웅성대는말에 귀 기울여 경청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P35
그렇다고 한다면 소세키적 ‘앙와‘의 주제는 그것을 생과 사의 틈새에 자리하게 해 볼 때 비로소 그의미 작용을 전적으로 명시하는 세부라고 하는 게 될 것이다. "별것도아니죠. 매일 조금씩 죽어 보는 것 같은 거죠"라고 구샤미의 낮잠 버릇을 놀리는 메이테이의 말은 그 유명한 도회 취미에도 불구하고 소세키 문학의 핵심에 육박해 있던 것이다. - P47
분명히 사람은 외계의 어떤 자극을 창작 상의 영감의 근원으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설령 무의식이라고 해도 스스로 바라는 것이 아닌 한 자신에게 있어서 미지의 무엇인가와 조우하거나 하지는않는다. 소세키적 횡와 자가 잠자는 중에 불러들이는 타자들, 그들처럼 준비되고 조직되는 것에 의해 비로소 사람은 진정한 조우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목소리로서는 울리지 않고,몸짓으로서는 시선에 닿지 않는 조우의 사전 준비를 지각 가능한 영역에 떠오르게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 P51
제1장 드러눕는 소세키앙와와 언어의 발생"공교롭게도 주인은 이 점에 있어 참으로 고양이를 닮은 데가 있고"게다가 "낮잠이라고 하면 우리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하는 편"이라고 화자인 고양이가 개탄해 마지않았던 구샤미의 낮잠 자는 버릇에서 "의사는 진찰을 한 후에 수술대 위에서 쓰다를 내려오게 했다"는 앞머리의 한 줄이 전편의 풍토를 결정짓고 있는 절필 『명암』의 요양생활에 이르기까지, 소세키 소설의 대부분은, 으레, 횡와의 자세를 지키는 인물의 주변에 이야기를 구축한다고 하는 일관된 구조에자리하고 있다. 『그 후의 도입부에 그려지는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혹은 문의 시작 부분에 보이는 햇볕 잘 드는 툇마루에서의 낮잠 자는 광경 등등 일일이 꼽아 볼 것도 없이 허다한 소세키적 ‘존재‘들은,마치 그렇게 하면서 주인공으로서의 확실한 자격을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가는 곳마다 덜컥 드러누워 버린다. - P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