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술 - 작가들의 이유 있는 음주
올리비아 랭 지음, 정미나 옮김 / 현암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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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가와 술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술에 대한 속담을 떠올려 보았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마신다.’ ‘술이 백약중의 으뜸이라고는 하나 만병은 또한 술로부터 일어난다.’ 이 책 속의 작가들은 바로 이 속담과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다. 작가들은 홀로 오랜 시간을 작품을 쓰면서 견뎌야 했으니, 의지할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작가와 술』은 저자인 올리비아 랭이 알코올중독 가정에서 자란 것이 알코올중독 작가에게 관심을 갖게 된 근원적 배경이 되었고, 열일곱 살 때 테네시 윌리엄스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를 읽으면서 작가들이 술과 술의 영향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 하는지 마음이 쏠렸다.(p29)고 말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술을 마시며, 술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헤치고 싶었다. 아니,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작가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와, 이 술이 문학작품의 본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고 싶었기’(p23) 때문이라고 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미국의 소설가 솔 벨로(Saul Bellow)는 “술은 안정제였다. 그것도 생명력을 갉아먹는 안정제였다.”(p25)고 말한다. 여섯 작가들의 가정환경을 보면 ‘프로이트적인 부모, 즉 고압적인 어머니와 나약한 아버지를 가졌거나, 스스로 그런 부모를 가졌다고 여겼고, 모두들 하나같이 자기혐오와 자기 부적절감에 시달렸다’(p27)고 한다.



작가의 작품과 더불어 그 작가들이 작품을 썼던 장소, 묵었던 호텔 등을 찾아가는 과정이 나와 있어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학술 토론회장의 발표와 의견을 밝히는 과정도 그에 못지않은 생생함을 전해 준다. 과거에 ‘스미더스 알코올 치료 및 훈련센터’라는 명칭으로 불렸다는 성 누가-루즈벨트 병원의 9층 중독연구소에서 존 치버와 소설가 트루먼 커포티가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기 위해 들어갔는데, 존 치버만 치료에 결실을 보았다고 한다.



그처럼 지적인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곳에 들어가게 됐을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미노프나 스카치위스키 한 잔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 면 된다. 알코올의 영향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도파민과 세로토닌을 통해 쾌감보상 경로를 활성화 시키는데 이를 심리학 용어로 ‘긍정적 강화’라고 한다. 또 하나는 뇌에는 두 가지 신경전달물질이 존재하는데, 억제성 신경전달물질과 자극성 신경전달물질이다. 억제성 신경전달물질은 중추신경계의 활동을 억누르고 자극성 신경전달물질은 중추신경계의 활동을 자극하는데 이것은 ‘부정적 강화’라고 한다. 이렇게 섭취된 알코올은 뇌의 활동을 진정시키고 둔화시키는 작용을 하는데, 이 같은 진정 효과는 긴장과 불안을 줄여주는 알코올의 탁월한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중독이 진행됨에 따라 대체로 ‘부정적 강화’가 더 큰 역할을 맡게 된다는 데 있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회고록>에서 프라스카티(이탈리아산 화이트와인)를 메조-리트로(mezzo-litro, 0.5리터)를 마시고 나면 “동맥에 새로운 차원의 피가 주입된 듯한 기분이 든다. 한동안 모든 불안과 긴장을 쓸어내 주면서 잠깐이나마 꿈과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새로운 피가 몸속에 수혈된 듯하다”(p51)고 했다. 또 그는 병적일 정도로 수줍음이 많았는데, 그런 그에게 술은 해독제였다고 한다. 이처럼 알코올이 주는 장점이 양을 늘리고, 내성에 따라 점점 늘어나게 되면 그에 따른 폐해가 발생되어 끊고 싶어도 끊지 못하는 악영향을 초래하는 것이다. 중독 연구소의 레부니스 박사와의 인터뷰 중 뇌 스위치(Brain switch)와 이성을 담당하는 영역인 전두엽과 알코올 중독에 대한 이야기도 의미심장하다. 알코올중독자는 금주를 해도 여전히 중독에 취약한 상태로 남게 된다는 말이.



피츠제럴드헤밍웨이의 만남은 흥미롭다. 그들은 만나자마자 단박에 서로를 좋아했다고 한다. 피츠제럴드는 헤밍웨이에게 좋은 벗이었고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출판사의 편집자에게 헤밍웨이는 유망한 청년이니 계약을 해보라고 제안을 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심한 불면증에도 시달렸는데, 지옥이라고 표현할 만큼이었다. 이렇게 작가들이 겪은 것은 그대로 작품에 반영된다. 단편소설 <이제 내 몸을 뉘며>는 닉 애덤스가 ‘누에가 뽕나무 잎을 갉아 먹는 소리가 들려’ 잠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106) 피츠제럴드 역시 <잠과 깸>이라는 에세이는 불면의 지옥에 대해 쓴 글이다. 그의 불면증의 원인은 모기 한 마리에게 공격당하면서 시작되었다는데,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다. 맥주는 술로 치지도 않았다는 피츠제럴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말은 진을 안 마시는 대신, 맥주는 하루에 스무 병쯤 마셨다고 한다. 불면증을 막아주는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해서 마실 수밖에 없었다.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밤엔 잠자리에 들기 전부터 걱정에 사로잡히게’ 될 정도였다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도 없다.



밀실공포증이 있으면서도 말할 수 없이 좁은 아파트에서 이사를 안 가는 이유가 창밖으로 보이는 밤에 피는 식물 재스민 덩굴 때문이었다는 윌리엄스의 경우는 뭉클하다. 외로움과 소외감을 한 몸처럼 안고 살아야 했고, 끊임없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하는 압박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후기 희곡 작품에서 어수선한 짜임새가 알코올중독에 따른 뇌 손상 때문일 수 있다고 했고, 윌리엄스 본인이 쓴 노트에서도 자신의 글이 완성도가 떨어지고 ‘겁에 질린 닭처럼 뱅글뱅글 도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뇌의 구조가 변화된 건 아닐까 걱정하는 대목이 나온다.



존 베리먼은 ‘강방적일 정도로 밤샘 공부를 할’ 정도로 학구적 습관을 가졌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T.S엘리엇, 오든의 강의를 듣고, 예이츠와 딜런 토머스를 만났다. 밤늦도록 세익스피어를 공부했다. 동료의 아내와 불륜관계 후 죄책감으로 심각한 수준의 음주를 시작했다. 알코올중독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감금되기도 했고 입. 퇴원을 반복하며 ‘항상 반 시체처럼’(p323) 살았다. 레이먼드 카버도 마찬가지다. 1983년의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음주 인생의 막바지에 치달았을 무렵 저는 통제 불능 상태가 되면서 아주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일정 시간 동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상실 문제였죠.”(p404)



'처음엔 연금술같은 마력을 발휘해 주다가, 중노동을 떠안기고, 마지막엔……타락성과 끔찍한 측면을 부추겨……끝내지 못한 과업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p367~368)이것은 알코올중독이 작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방식이다. 또 ‘알코올중독은 단순히 음주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삶에 얽힌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망쳐놓는다’(p336) 는 것을 인식하여 절제가 필수요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들의 알코올중독의 상태가 상상했던 것보다 심각했다. 물론 음주 상태에서도 그들의 작품은 남았지만. 가족과의 단절, 이혼의 반복, 소동 피우기, 너무 취해서 몸을 못 가누거나 다치는 등 심지어 교수로 있는 대학의 복도에서 대변을 볼 정도의 안타까운 상황도 있었다. 이 책 집필을 위해 미국을 동분서주하며 많은 자료를 수집한 저자의 노고도 엿보인다. 작가들의 일기, 편지 등 작가의 내밀한 부분을 보는 것도 짜릿한 즐거움을 준다. 일전에 읽은 『나쓰메 소세키, 추억』처럼 『작가와 술』은 이 책에 실린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이라는 여섯 작가들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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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시
바바라 오코너 지음, 이은선 옮김 / 놀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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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최고의 가족 소설 이라는 찬사를 받은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바바라 오코너의 8년 만의 신작 소설이다. 본서 출간에 앞서 가제본으로 읽게 되었다. 가족 소설이면서 성장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교도소에 간 쌈닭 아빠, 우울증으로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엄마, 언니 재키, 이 소설의 주인공 찰리가 뿔뿔이 흩어졌다. 자신의 집은 콩가루 집안이라고 하며, ‘아빠’라는 호칭 대신 ‘쌈닭’으로 부른다. 쌈닭의 성질을 물려받았다는 찰리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대로 발산한다. 상황이 이러해서 엄마가 정신을 추스를 때까지 시골 이모의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사회복지사가 전해 준다. 안정적인 가정환경이 필요하다면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이모네 부부와 살아야 한다는 것이, 툭하면 싸움질 하려드는 찰리에겐 내키지 않는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다니게 된 학교에서 하워드라는 빨강머리 남자 아이가 책가방 짝궁이 되었다. 다리에 장애가 있다. 아이들을 촌닭이라 무시하며 어차피 오래 다닐 학교도 아니라고 생각해서 숙제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싸우고 넘어뜨리고 조용한 날 이 없다. 그러는 중 마음 착한 하워드는 찰리에게 ‘욱’ 하고 화가 나려고 할 때는 ‘파인애플’이라는 주문을 외우라고 제안을 한다. 한편 찰리는 4학년 말부터 소원을 빌기 시작했는데, 온갖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소원을 빈다. 정각 11시 11분에 소원을 빈다든지, 무당벌레, 네잎 클로버,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말을 했을 때, 흉내지빠귀 울음소리가 들릴 때 등등...


 어느 날 우연히 두 마리 개가 싸우는 것을 보게 된다. 싸움꾼, 떠돌이 신세인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잡아서 키우려고 결심한다. 우여곡절 끝에 갈색과 검정이 섞인 그 개 위시본과 가족이 된다. 그렇게 소용없을 것 같았던 ‘파인애플’ 주문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쌈닭 찰리는 차츰차츰 유순해지고, 감사함도 깨닫고, 잘못을 깨닫고 사과도 하며, 하워드를 진짜 친구로 인식하게 된다. 서먹했던 이모, 이모부와도 친해지고, 따뜻한 사랑을 느낀다. 그러는 와중에 사회복지사가 다녀가고, 언니 재키가 엄마의 상황이 좀 나아졌다는 둥 하면서 롤리로 돌아오라고 하지만, 오히려 찰리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 엄마한테 가겠다고 노래 부르던 찰리. 이모가 사는 마을 콜비에서 살고 싶다고 한다. 하워드의 소원은 찰리와 친구가 되는 것, 찰리가 이 마을에서 사는 것이었다. 찰리는 ‘해체되지 않는 가족’의 소원을 이루었다. 아이가 없던 이모부부는 가족을 이루게 된 기쁨을 샛별을 보면서 소원을 비는 장면으로 결말을 맺는다.


 찰리가 이모네 집으로 간 일, 하워드와 그의 가족들을 알게 된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가난하지만 사랑으로 똘똘 뭉친 하워드의 가족과 친해지면서 처음에 무시했던 마음이 사라진다. 재키의 모든 사람에 대한 친화력 있는 성격이나 행동을 지켜보면서 유연한 마음을 갖고자 노력을 한다. 사랑이 담긴 정성스런 마음이 적개심 덩어리였던 아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녹인 것이다. 소설을 읽는 재미와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찰리가 목을 놓아 우는 장면에서는 같이 울었다. 가족이라는 운명으로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살지만, 모든 가정이 행복하지는 않다. 각 개인의 성격이나 가치관,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진정한 가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떻게든 좋은 가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서로의 협력과 배려, 정성이 필수요소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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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강철의 숲
미야시타 나츠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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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냄새가 났다. 로 첫 문장이 시작된다. 제목에서 양과 강철의 조합이 대체 어울리기나 하는가. 의아했다. 부드러운 양의 털로 펠트를 만들어서 그것을 해머로 완성 한단다. 피아노 속의 해머로 인해 아름다운 선율로 울리는 것이다. 소나무의 일종인 가문비나무는 피아노의 일부가 되고. 여든 여덟 개의 건반에 연결된 강철 현. 아, 그래서 양과 강철의 숲이 되었구나.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어 시간이 남아도는 아이였던 나(도무라)는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손님을 체육관까지 안내하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때 이타도리가 조율한 피아노에서 고향 홋카이도의 숲 냄새를 느낀 나는 조율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때까지 피아노에 손 대 본적이 없던 내가. 그 조율사의 제자가 되고 싶었으나, 그가 소개해 준 학교에 들어가 2년 동안 공부하고 이타도리가 있는 그 악기점에 취직하여 조율사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피아노 조율은 조율 기술 외에도 다른 것이 더 있다는 선배 야나기의 말을 듣고, 클래식이라고는 들어본 적이 없는 나는 모차르트, 베토벤, 소팽의 피아노곡을 듣다가 잠이 들곤 했다. 피아노를 만나고부터 나는 기억 속에서 다양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울어대는 아기의 미간 주름. 있는 힘껏 힘을 준 새빨간 얼굴에 잡힌 주름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한 의지를 품은 생명체 같아서 옆에서 보면 가슴이 뛰었다.’(p26)


"기술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일단은 의사소통이야. 되도록 구체적으로 어떤 소리를 원하는지, 그 이미지를 제대로 확인해야 해.“(p45)


 도무라에게 있어 숲은 신이다. 이타도리가 조율한 피아노에서 숲 냄새를 느끼고 조율사가 되고 싶어 했으며, 피아노를 알고부터는 ‘소리’가 신이 되었다. 고객의 집에서 조율을 하는 과정이 세세하게 그려져 있다. ‘동글동글한’ 소리, 활기찬 소리를 원하는 고객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 한다. 원하는 소리가 나오면 고객은 감동한다. 형체가 없는 ‘소리’에 ‘동글동글’한 형체를 연상하다니... 그 의미를 같이 공감하는 것. 그 과정의 고객과의 교감, 바로 소통인 것이다.


 “아름다운 라가 440헤르츠로 표현된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피아노는 한 대 한 대 다른데 소리는 서로 연결되어서 주파수로 대화를 나눈다는 생각도 들어요.”(p116) 이런 말이 내 안에서 나오다니 하며 스스로 놀란다. 아직 한참 멀었다. 체육관에서 경험한 ‘심장이 떨리는’(p118) 그 소리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그것이 있어서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날은 고객으로부터 클레임을 받고 크게 상심한다. 과연 재능만 가지고 내가 그 숲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러나 재능을 논하기에도 아직 머나 먼 길이다. 경험, 훈련, 노력이나 지혜, 재치, 끈기, 정열로 대신 할 수 없을까를 고민한다. 선배 조율사들의 일 하는 모습을 견학하기도 하면서 자신이 상상하고 도달하려는 숲에 이르기 위해 분발하고 분발한다.


 고객으로 있던, 피아노를 무척 사랑하는 쌍둥이 자매 유니와 가즈네의 이야기 또한 잔잔하고 애틋한 즐거움을 준다. 병으로 인해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자, 조율사가 되고 싶다는 유니의 말에 당황하면서도 감동에 사로잡힌다. 피아노 조율사는 피아니스트, 피아노와 어우러져 조화로운 소리로서 세상에 소통하는 것이다. 피아노에 손 대 본적이 없지만, 특유의 감성과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려는 끈기와 베짱이 자신을 행복하게 한다. 그의 진심어린 태도에 감동을 하고, 주위 사람들을 그 행복의 숲으로 인도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읽어가는 내내 숲 냄새가 났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버섯을 따러 다니곤 했다. 특히 장마 끝에 숲속 땅은 축축하게 물기가 배어 나왔으며 소나무 밑 언저리에는 이름 모를 버섯들이 돋아나 있었다. 싸아하게 느껴지는 서늘함과 소나무 향을 지금도 기억한다. 나의 숲은 무엇일까. 내가 도달해야 할 숲은 어디일까. 내가 아주 좋아해서 그 끈을 놓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숲은 무엇일까. 지친 영혼까지도 치유해주는 책 읽기. 책 읽기를 멈추지 않고 더불어 글쓰기로 나아가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지향점은 ‘밝고 조용하고 맑고 그리운 문체, 조금은 응석을 부리는 것 같으면서도 엄격하고 깊은 것을 담고 있는 문체, 꿈처럼 아름답지만 현실처럼 분명한 문체’(p68) 이건 나의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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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얘기가 웃긴다고? 조심해! 나 까칠한 들고양이 에드가야! - 400일 동안 끄적인 일기
프레데릭 푸이에.수지 주파 지음, 리타 베르만 그림, 민수아 옮김 / 여운(주)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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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깜찍한 고양이가 있다.

자신이 들고양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이름은 에드가, 태어난지 6개월 된 아기 고양이

그런데 ‘아가’라고 부르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인형처럼 대하며 자신을 쓰다듬지도 말라고 한다

인간을 ‘멍청이’라고 부르며 우스꽝스러운 거짓말쟁이로 본다.

자신은 아주 똑똑하고, 잘생기고 게다가 겸손하기까지 하다며...

사냥, 먹기, 낮잠이 취미인 고양이

 

 잘 때 절대 깨우지 말고

기름지고 맛있는 먹이만 잔뜩 달라는 요구사항에

깔깔깔 웃음이 나온다. 어찌 그렇게 사람의 마음과 똑같은지...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편안함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구나!

 

 

 

 

 

 또 얼마나 똑똑한지 모른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척척 꿰고 있다.

정치, 사회제도, 첨단기술과 문명, 사회의 불평등, 소외, 청년 실업 등의 문제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의 태도에도 불만이 많다.

인간들이 자신의 눈에 보기 좋게 하려고 미용사에게 데려가서 꾸며주고,

살이 좀 쪄 보인다 싶으면 다이어트 시킨다며 요란을 떤다고.

 

 명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이름도 없는 달변가 고양이가 생각난다. 한 서생의 집에 들어가 그의 일거수일투족, 가족들의 생활상을 모두 엿보고 엿들으며 사는 고양이. 언젠가는 고양이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야무진 꿈을 품은 채, 불만도 참고 하루하루만 잘 살아내면 된다는 그 고양이가.

 

 그에 비하면 에드가는 까마득한 후배이며 어린 고양이다. 까칠한 것 같으면서도 붙임성 있는 고양이 에드가의 눈과 입을 통해 우리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을 내세워 쓴 우화는 우리에게 웃음을 주기도 하고, 아! 하며 생각해볼 거리도 주어서 좋다. 고양이를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나, 키우는 것보다는 바라보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귀엽고 까칠한 에드가의 메시지로 반복되는 일상의 나른함도 거뜬하게 날릴 수 있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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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월기
나카지마 아쓰시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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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월기>는 당나라의 기담 <인호전人虎傳>의 제재를 모티브로 작품이 된 것이다. 나카지마 아쓰시의 작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며, 일본 교과서에 1951년 처음으로 게재되면서 그 후로 60년이 넘도록 수록된 국민작품이다. 짧은 글 속에 섬뜩한 교훈을 주는 강렬함이 매력이다. 아무리 타고난 수재일지라도 자신이 가진 재능을 갈고 닦는 노력이 없으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 즉 호랑이가 되고 만다는.


 이야기의 대략은 이렇다. 당 현종 때의 이징(李徵)은 박학다식에 출중한 능력을 갖춘 사람으로 젊은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오늘날의 경찰 및 군사 담당 관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에 비해 천한 직위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곧 관직에서 물러난다. 고향에 머물면서 남들과 교제도 모두 끊고 오로지 시작(詩作)에 몰두한다. 시인으로서 길이길이 이름을 남기고자. 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며 생활은 점차 궁핍해지고 초조해진다. 그 무렵부터 얼굴은 험상궂어지고 피골이 상접하여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곤궁함을 견디지 못하고 어느 지방의 관리직을 얻었는데, 항상 불만에 가득 차 있는 상태로 그 일을 원만하게 수행할 수 없었음은 당연하다. 1년 후 어느 날, 결국 발광하여 호랑이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고 망연자실하게 된다.

진사에 급제했던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 원참이 감찰어사직을 수행하러 길을 떠나는 중에 우연히 마주하게 되고 자신의 지난날을 하소연하게 된다.


 예전에는 어째서 호랑이가 되었을까 괴이하게 생각했는데, 요즘은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내가 왜 이전에 인간이었던가 생각을 하게 된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p11)


 인간이었을 때, 나는 애써 남들과의 교제를 피했다. 사람들은 나를 오만하다, 거만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실은 그것이 거의 수치심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중략)나는 시로써 이름을 떨치려고 생각하면서도, 스스로 스승을 찾거나 기꺼이 시우(詩友)와 어울리며 절차탁마를 하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또 나는 속물들 사이에 끼는 것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이 모두가 나의 소심한 자존심과 거만한 수치심 탓이었다.(p16)


 호랑이의 모습을 한 이징은, 굶어죽을 지도 모를 처자보다도 자신의 보잘것없는 시 따위를 먼저 염려한 남자이니 이런 짐승의 몸으로 전락한 것이라며 통곡한다. 우리는 살면서 남과 비교하며 저울질 한다. 저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는데... 나보다 못했던(자신의 생각에) 사람이 어느 날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지난날을 후회하기도 한다. 인생, 생각에 따라 길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 후회 없이 살아야겠다. 하루하루 보낸 날이 모여서 ‘내’가 되는 것이니.


<이릉>은 한나라의 장수 이릉과 그를 두둔했다가 궁형을 받은 <사기>의 저자 사마천, 그리고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어 고난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19년 만에 돌아온 소무라는 세 인물의 삶을 보여 준다. 흉노족에 패하여 항복한 이릉은 분노로 평생을 살고 사마천은 쉰이 다 된 나이에 그런 치욕을 당했는데도 마음을 다잡아 서사의 편찬을 사명으로 생각하고 다시 붓을 들었다.

 사람마다 삶의 방식은 다르다. 어떤 것이 옳다고, 이것이 정답이니까 그대로 따르라고 할 수도 없다. 삶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다양하다. 이런 삶도 있고 저런 삶도 있다. 우리는 이야기, 즉 문학을 통해서 타인을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의 삶을 비추어 본다. 그리고 나아갈 길을 찾는다. 이것이 바로 문학의 절대적인 힘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제자>는 공자의 수제자인 자로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밤에 “봉황도 나오지 않고 황하는 그림도 내지 않도다.(성왕이 출현한다는 말을 인용한 것임) 나도 끝이런가” 라고 혼잣말로 공자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을 때, 자로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공자가 한탄한 것은 천하의 백성을 위한 것이었지만, 자로가 운 것은 천하를 위함이 아니라 공자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p97)


 여기서 자로는 결심한다. 탁세의 모든 침해로부터 이 사람을 지키는 방패가 될 것을.(p98)공자의 제자 중 자로만큼 스승에게 많이 혼나고 거침없이 반문한 자도 없었다고 한다. 긴 방랑과 고난을 함께 했고 맡은 일에 최후까지 열정을 다하고 산화한 인물이다. 사제간의 정, 그 뜨거움이 마음에 감동으로 일렁였다.


<순사가 있는 풍경>-1923년의 한 스케치


 조선인 순사 조교영의 눈에 비친 풍경이다.

전차 안에서 일본 중학생이 운전수와 순사를 깔보고 무시한다. 일본인 부인과 조선인이 싸운다. 친일 조선인의 연설을 듣고 일본 청년이 욕을 한다. 일본 신사의 정중한 대접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우쭐해하는 조선인 순사가 있다. 강우규 의사의 사이토 총독에 대한 의거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 관동대지진(1923년 9월 1일)의 조선인 학살의 진상을 밝히는 창녀의 목소리. 새로 부임한 일본인 교장이 종순의 덕을 말하는 장면(일본에 있을 때는 독립자존의 정신을 말하던)이 나온다.


 1923년. 겨울은 더럽게 얼어 있었다.

모든 것이 더러웠다. 그리고 더러운 채로 얼어붙었다. 특히 S문(서대문)밖의 골목에서는 더욱 심했다. 중국인의 아편과 마늘 냄새, 조선인의 싸구려 담배와 고추가 섞인 냄새, 으깨진 빈대와 이의 사체 냄새, 길거리에 버려진 돼지 내장과 고양이 가죽 냄새, 그것들이 그 냄새를 보존한 채 길 위에 얼어붙은 것처럼 보였다.(p240)


보통학교의 일본역사 시간, 다소 당혹스런 표정의 교사가 있다.

“이리하여 히데요시는 조선으로 쳐들어갔던 것입니다.”(p242)


마치 딴 나라 이야기인가 하는 아이들의 둔한 반응.

“그리하여 히데요시는 조선으로 쳐들어갔던 것입니다.”(p242)


 마지막 장면은 순사 조교영이 식산은행 옆에서 ‘돌맹이’처럼 자고 있는 지게꾼들을 깨우며 한탄하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너는, 너희는.”

돌연 무언가 알 수 없는 격한 감정이 그의 안에서 끓어올랐다. 그는 한 번 몸을 떨고, 그들의 누더기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고 울기 시작했다.

“너희는, 너희는. 이 반도는... 이 민족은...”(p250)


 정말 더러웠다. 더러워진 채로 얼어버린 겨울 풍경. 지금의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풍경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캄캄한 터널 속에 갇힌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아득함.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들은 어떻게 견뎌냈을까. 일본인 작가의 눈에 비친 비참한 조선의 현실과 일본제국주의의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러한 작품의 성격상 일본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남겨진 그의 작품은 더욱 더 읽어볼 의무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나카지마는 일본에서 제2의 아쿠타가와로 불린다. 우리나라 출판사의 ‘세계문학전집’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의 작품이 뒤늦게라도 문예출판사를 통해 나온 점, 내가 이 작품을 만난 것은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문예출판사 서평단에 당첨되어 제공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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